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

가벼운 도시락을 준비하고 없는 옷장에 그나마 괜찮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도착한 구원공원 분수대 앞에서 한수영을 기다렸다.


오전 11시 50분. 약속시간 10분전. 

첫 데이트라 긴장했는지 조금 일찍 나오고 말았다.


공원에는 사람이 있었지만 붐빌 정도는 아니었다.

날씨가 좋아서 사람이 많으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나는 분수대 근처 벤치에 앉아 한수영을 기다렸다.

큰 분수대 옆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작은 분수대도 같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부모님이랑 같이 화목하게 노는 초등학생 저학년 뻘 될 아이들을 보며 나는 감상에 잠겼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날 떠난체 친척들에게 눈치를 먹고 살아야했던 시기.

그때가 중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그 전에는 성격이 좋았었는데, 점점 소심해지고 그에 따라 괴롭히기 시작한 일진들이 늘어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활자 속 빈틈에 몸을 숨긴것이.

젠장 관두자 슬프기만 할 이야기일 뿐이니까.


"김독자 맞지?"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한수영이 서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한수영도 긴장한 것 같았다.

제 딴에는 아닌 척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학교에서 보던 교복 차림이 아닌 한수영을 보니 눈에 더 깊이 남았다.

흰색 니트에 긴 치마를 입은 한수영.

본판이 되니 사복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점심 먹었어? 아니면 도시락 먹자. 나 배고프거든."


한수영은 밝게 웃었다. 밝은 빛을 받으면 그만큼 그림자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

가족이 없는 사람이 다른 가정의 행복을 보는 것처럼.

저번에 느꼈던 위화감때문에 걱정과 달리 한수영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장난스러우며 고양이 같은 외모를 가진 예쁜 사람.


내가 정의한 한수영이었다.


***


내가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 우리는 도시락을 꺼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 한수영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런 한수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보니까 메모나 사진 많이 찍던데 습관이야?"


드래그 하던 한수영의 손이 일순간 멈칫했다. 


"어 기록하는게 습관이라. 글 썼었거든."

"정말? 장르가 뭔데?"

"판타지."

"나 판타지 장르를 가장 좋아하는데 시간 나면 읽게 해줄래?"

"그래 한 10년뒤?"


농담을 주고 받으며 먹으니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맛있네. 날씨도 좋고."

"그러게."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나와 한수영은 거의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에 푸른 하늘.


마치 엔딩 이후 찾아온 평화로운 세계같은 느낌이랄까.

엔딩하니 마치 우리의 이야기가 하나의 소설처럼 느껴졌다.

시작부터 이상했던 우리의 관계. 결코 서로 좋아하지 않던 관계인데.

나는 휴일을 같이 보낼 사람이 생긴 것이 순수하게 기뻤다.


나는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이 행복이 오래가기를 빌었다. 바보같이.


스르르 한수영은 돗자리에 누워 눈을 감아 햇빛을 받아들였다.

곧 나도 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긴 침묵이 유지되었으나 거북한 침묵이 아니었다.


"기분 좋네. 엄청."

"그러게. 수영아."


한수영은 나의 부름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밥도 먹었고 날씨도 나른하다 보니 잠에 든 모양이었다.


음료수라도 사다 놓을까.


근처 자판기로 가 시원한 음료를 뽑은 뒤 다시 돗자리로 가자 그새 한수영은 일어나있었다.


"수영아 일어났어?"


이번엔 분명히 일어났음에도 한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더 다가가서 한수영을 불렀다.


"한수영?"


그제서야 뒤를 돌아본 한수영은 싸늘하게 물었다. 


"너 누구야?"


***


"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장난기 많은 한수영이었으니까 이번에도 역시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거짓말을 할때 나타나는 한수영 특유의 눈빛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은 진실이었다.


"내가 왜 여기있는거야..."


급히 짐을 챙긴 한수영은 어딘가로 뛰어갔다. 마치 자신은 왜 여기있는지를 모르겠다는 표정.

나는 그런 한수영의 변화에 당황하여 한수영을 쫓아가지 못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뒤에는 한수영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


구원공원 입구 주변에 있는 큰 동상.

힘겹게 달린 한수영은 스마트폰을 켜 전화앱으로 들어갔다.


드르륵하며 드래그 하던 한수영은 이내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은 길지 않았고 스마트폰 너머에 목소리가 들렸다.


"수영아 무슨일이야?"

"야 유상아.... 나 지금 뭐가 뭔지를 모르겠어. 눈뜨니까 모르는 남자애가 곁에 있고.."


한수영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유상아는 다급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진정하고 상황을 말해봐. 지금 어디인거 같아?"

"지금 여기가 그...구원공원인거 같거든...? 큰 동상 앞에 있어."

"내가 지금 갈테니까. 거기에 있어. 빨리 메모부터 확인해. 알겠지 수영아?"


뚝 끊겨진 전화. 유상아의 말대로 한수영은 스마트폰 메모 앱을 켜 메모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잠에 들면 하루치의 기억을 잊어버린다.]

[사고로 인해 기억 장애가 원인. 매일 스마트폰 메모 앱을 읽을 것.]


최상단에 중요라고 쓰여진 메모였다.


혼란에 빠진 한수영의 머릿속에 오늘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자신을 부르던 따뜻한 목소리, 내가 먹었던 음식, 같이 있던 사람이 가진 향기. 무엇하나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대체 씨발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주변을 둘러보니 한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떴을때 자신과 같이 있던 그 남자애였다.

키는 조금 더 컸고 마른 체형에 피부는 하얀 사람.


그 남자애는 섣불리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한수영은 그런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남자애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하고 슬퍼보이기도 한 표정을.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남자애는 근처 벤치를 가리켰고 한수영은 그에 응했다.


***


나는 한수영을 쫓아가다 울리는 스마트폰에 잠시 멈춰 액정을 확인했다.

유상아에게서 온 전화였다.


탁.


"상아야 내가 지금 바빠서 좀만 있다..."

"알아. 지금 수영이 찾고 있지?"

"상아 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일단 나 구원공원으로 가고 있어. 지금 수영이, 입구 옆 큰 동상에 있을 거야."


다행히 내가 서있는 곳에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거야. 상아야 넌 알고있어?"


물음에 대한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 탓이었다.


나는 일단 동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달려서 약 2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기에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멀었으면 가다가 탈진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동상 주변에 도착하자 안절부절한 한수영이 보였다.

이윽고 한수영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알던 한수영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위태로워 보이는 한수영이 있었다.


그런 한수영이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아서 슬프고. 그런 병을 가지고 있는 한수영이 안타까운데.

나는 가까스로 한수영을 보며 이야기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


나와 한수영은 벤치에 앉았다.

한수영은 메모 앱을 켜 그 안에 있는 메모를 읽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메모를 읽은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내 남자친구...란거지?"

"맞아."

"지금은 데이트 중인데 내가 실수로 자버려서 이렇게 되버린거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 씨발. 진짜 거지같네. 미안해 이런 일에 휩싸이게 되버렸네."


한수영은 이 상황에 대해 사과했고 나는 그 사과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한수영의 증상은 이랬다.


선행성 기억 장애. 자고 나면 뇌는 하루치의 기억을 정리하는데 한수영은 이것을 담당하는 기관이 손상되어 잠에 들면 그날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한수영에게 느껴졌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무언가를 계속 읽던 이유도,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긴 이유도.


모두 잊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유사 연애를 시작할때 제시하던 조건도 이 기억장애와 연관이 있었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이 증상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유상아, 선생님들, 그리고 부모님 뿐.


기억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위험에 처할 것이 물보듯 뻔했다.


담임을 포함한 교사들은 한수영의 상태를 알고 있기에 수업시간에 질문에 대답을 요구하지도, 수행평가도 시험도 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매일 기억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일단 고등학교는 졸업하자.

그리고 그 뒤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한수영은 이야기를 끝내고 고개를 숙였다.

비록 가짜라고 해도 남자친구로써, 이런 한수영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불현듯 방법이 떠올랐다.


"수영아. 그럼 넌 메모해 두지 않으면 내일의 넌 기억하지 못하는거지?"

"그치. 자고 일어나면 리셋되니까."

"그럼 안쓰면 되잖아."

"...뭐?"

"오늘 나에게 기억장애를 들킨 일을 메모에 안쓰면 되는거야."

"....하지만 넌 괜찮겠어? 나한테만 좋은 일이잖아."

"아니야. 나는...."


나는 일어나 무릎을 꿇어 한수영과 눈이 마주쳤다.


"이게 재밌을거 같거든."


나는 싱긋 웃었다.

거짓으로 시작한 관계인데 진실을 거짓으로 덮어도 상관이 있을까.

거짓 연애를 시작했을 때 한수영이 했던 말을 내가 말하고 있었다.


타다닷!


다급해진 발소리에 옆을 보자 머리가 헝클어진체 숨을 헐떡거리는 유상아가 있었다.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자, 나는 조금 어색한 연기톤으로 말했다.


"아니 잠이 덜 깬 수영이가 어디론가 가길래 깜짝 놀랐어."


한수영이 기억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늘어 날 수록 불안감은 커져갈 것이기에 나는 거짓말을 했다.


"마,맞아 수영이가 좀 몽유병 같은게 있어서 말이지."

"좀 피곤해보이긴 하더라, 상아야 내가 오늘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될 거 같거든? 그래서 수영이 좀 챙겨줄래?"

"알겠어 독자야 내가 수영이 챙길게. 집에 얼른 가봐."

"고마워 미안해 이런 부탁하게 해서 학교에서 보자."


나는 다급히 역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나의 모습을 한수영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


그날 밤. 한수영의 집.

데이터는 유한하기에 하루를 정리하는 건 언제나 일기장을 이용해 왔다.

사고가 생긴 뒤 생긴 습관이랄까.


오늘 일을 빠짐없이 적은 한수영은 이내 한 문장에서 멈칫했다.


[오늘 나는 내 남자친구 김독자에게 기억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한수영은 고민했다. 지금까지 지켰던 규칙을 어기는 것이 맞는 선택일까.

하지만 오늘 김독자에게 들은 말은 과거 자신이 거짓 고백을 받아줬을 때 했던 말이었다.


거짓 연애.

진실만을 써야하는 기록에 질려 작은 일탈삼아 했던 일.

그 관계가 어느새 자신의 마음 속에 이렇게 자리를 잡을지 누가 예상했을까.


잠에서 일어나 기록을 읽으며 학교 생활을 하고 방과후에 김독자와 대화하며 하교하는 생활.

매일 초면이 되지만, 그와 말할때 울림이 좋았다. 목소리도 좋았고, 어색하게 자신을 불러줄때면 절로 행복해졌다.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랬을 것이다. 오늘의 한수영이 그랬으니까.


한수영은 매일 매일 김독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결심한 한수영은 페이지를 부욱 찢고 다시 오늘의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거리는 연필 마찰음이 들려왔고 이내 마지막 문장을 쓸 차례가 되자 한수영은 잠시 고민하다 빈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매일 이 사랑이 사라진다고 해도, 다시 너를 좋아할거야.]


언젠가 이 일기장에 거짓만이 적힌다고 해도 이 문장만큼은 진실일 것이다.


작가 후기 : 나도 글 잘 쓰고 싶다. 오글거린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