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승과 니르바나의 격전이 길게 이어졌다.두 화신의 속도가 막상막하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신유승이 조금 더 빨랐으나, 나르바나의 정신계 스킬이 그녀에게 상성이었기 때문에 쉽게 결착이 나지 않았다. 

양측 모두 뚜렷한 돌파구가 없는 시점에서, 정희원이 난입했다. 

"유승이한테서 떨어져!"

지옥염화를 두른 검이 니르바나를 향해 쇄도했다. 

공격 경로가 겹친 탓에 신유승의 움직임에 잠시 제동이 걸렸다. 니르바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침 잘 왔구나, 아해야. 네가 있다면 설득이 쉽겠지."
"뭐?"
"잠깐 - !"

찰나의 순간, 니르바나의 손끝이 정희원의 이마에 닿았다. 

['사상감염 Lv.9'를 발동합니다.]

해탈을 상징하는 연꽃무늬가 정희원의 이마에 떠올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 제자리에서 힘없이 떨어진 검을 흘겨보며 니르바나가 소리쳤다. 

"현재를 살아라!"

그러나 니르바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정희원'이 '사상감염'에 저항합니다!]

"싫 . . . 어."
"이 무슨 . . . !?"

'지옥염화'는 아직 타오르고 있었다. 심판의 불씨가 그녀의 눈동자에도 옮겨붙었다.  

원작과 다르게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는 정희원은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 

[백팔번뇌]면 모를까, [사상감염]은 정희원을 멈춰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 카카칵!

" . . . !"

떨어진 검 끝이 바닥을 긁으며 다시 위로 솟구쳤다.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검로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

심판의 불꽃이 허공에 폐곡선을 그렸다. 니르바나는 어깨를 틀어 간신히 정희원의 역공을 피했다. 다만, 니르바나의 적은 한 명이 아니었다. 

"날 잊은 건 아니지?"

허물어지는 정희원의 신형 뒤로, 신유승이 솟구쳤다. 그녀가 내지른 정권이 니르바나의 흉부를 가격했다.

- 콰앙!

"커억!"

뒤로 튕겨 나간 니르바나가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신유승이 다시 몰아칠 기미가 보이자, 니르바나는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너희들은 현재를 거스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 !"

신유승은 천수관음의 반발력으로 도주하는 니르바나를 추적할까 생각했으나, 이내 단념했다. 

방금도 정희원이 시선을 분산시킨 틈을 타 불의의 일격을 먹인 것이지, 그녀와 니르바나의 정신계열 스킬은 최악의 상성이었다. 

자신이 당하기라도 한다면, 다른 일행들이 겪을 난관은 불 보듯 뻔한 일. 사소한 방심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는 지난 세계선에서 이미 뼈저리게 느꼈다.

하여, 신유승은 리스크를 짊어지는 대신 자리에 주저앉은 정희원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견딜만 해. 너는 괜찮니?"
"문제없어."
"하아, 다행이네."

정희원이 머리를 좌우로 털곤 일어날 즈음, 유상아가 합류했다. 다급히 달려온 탓에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두 사람 다 괜찮아요?"
"유승이 덕에 살았어요."
". . . 상대가 많이 강했나 보네요."

고개를 끄덕인 정희원이 신유승에게 물었다.

"그 남자, 아니 여잔가. 아무튼, 저 인간 정체가 뭐야?"
"니르바나 뫼비우스, 환생자야."
"환생자?"

신유승이 자신이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수많은 환생을 거듭해 생을 연명해온 존재. 저 사람도 대장처럼 이전 회차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유상아가 중얼거렸다.

"그런 사람이 왜 유승이를 . . ."
"나 말고 당신들도 노릴 거야."
"왜?"

신유승의 말에 정희원이 되물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시나리오는 이전처럼 누군가를 죽이거나 하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유승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니르바나는 대장과 하나, 그러니까 동료가 되고 싶어 하거든."
"그럼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거 아니야?"
"문제는 그 녀석이 대장의 '유일무이'한 동료가 되고 싶어 한다는거지. 곁에 있는 우리는 그에겐 걸림돌에 불과해."
". . . 그거 큰일이네."

재앙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더니, 산 넘어 산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상대의 무력이 대처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만, 후술할 니르바나의 능력 때문에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녀석은 세뇌 스킬을 가지고 있어."
"아까 내가 당한 뻔한 거?"
"응. 언 . . . 니는 견뎌 냈지만, 나와 대장은 그런 쪽에 약하거든."

산전수전 다 겪은 만큼, 트라우마도 많다. 최상급 정신 방벽스킬도 없는 지금, 니르바나의 백팔번뇌에 걸린다면 두 사람은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더불어 구원교의 세력이 점차 커질 것을 고려하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유상아가 걱정하는 어조로 말했다.

"독자 씨 쪽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겠죠?"
"포탈을 통과한 뒤로 연락이 두절됐으니, 아마도요"
"그렇다면 우리 힘으로만 맞서 싸워야겠네요 . . . 일단 다른 왕들과 논의해 봐요. 우리끼리라도 힘을 합쳐야죠."
"하아,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인 것 같네요."

걱정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기에 세 사람은 현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광화문 본부로 향하는 정희원과 유상아를, 신유승이 잠시 붙잡았다. 아까부터 걸리던 게 있었다.

"그 . . . 언니들."
"응?"
"내 이름 부를 때 앞에 '41'이라도 붙여. 어린 나랑 구분 안 되잖아."

정희원과 유상아가 눈길을 슬쩍 교환하더니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유상아가 답했다.

"그치만 유승이는 유승이인걸."

따사로운 미소에 신유승이 얼탄 것도 잠시, 그녀는 제 어깨에 무언가 얹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깨동무를 한 정희원이 입술을 달싹였다.

"가자, 유승아. 이 언니가 맛있는 거 해 줄게."
"희원씨, 요리 잘해요?"
"남들 하는 만큼은 해요."

[성좌, '동녘의 수호자'가 계란 후라이 태워 먹는 거 다 봤다고 말합니다.]

"조용히 해요. 그리고 그거 실수라니깐?"

그렇게 세 여자는 나란히 서서 걸었다. 신유승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맺혔다. 


*


아몬의 성채, 오로성. 이젠 게티아의 본거지가 된 연회장에 나를 포함한 마왕들이 집결했다. 

- 츠츠츳!

따가운 시선이 한 몸에 꽃혔으나, 얼마 전 은밀한 모략가를 만나고 온 길이라서 그런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다들 신수가 훤하군요.]

상석에 위치한 아가레스가 내 인사말을 받았다. 

[그러는 너는 다 죽어 가는 얼굴이구나.]

[최근에 심력을 쏟아야 할 일들이 많아 좀 피곤히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더 매진해야겠죠.]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쳤다. 

[흥. 그 '할 수 있는 일'에 성운의 개연성을 허비하는 것도 포함된 모양이군.]

어째 시선이 살벌하다 싶더니, 상의도 없이 성운의 개연성을 운용해 지구 시나리오에 강림한 것에 단단히 심통이 난 모양이다. 

이해는 간다. 저들에게 범람의 재앙은 일개 시나리오의 부속품에 불과하니까. 다만, 한 가지 정정할 것이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군요. 나는 거대설화를 운용하지 않았습니다.]

[뭐?]

[그대 말대로 성운의 개연성은 지상의 시나리오에 쓰기엔 너무 아까운 재원이죠. 그래서 기절할 때까지 안 쓰고 버텼습니다.]

다만, 내가 의식을 잃은 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개연성 후폭풍을 막기 위해 거대 설화를 작동시켰을 수도 있고, 아니면 '벽을 넘은 자'가 멋대로 술수를 부렸을 수도 있다.

어찌 됐건, 내가 성운을 움직인 것은 확실하다. 마왕들이 자기 성운에서 벌어진 설화의 폭류를 착각할 일은 없으니까.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것이 진실이었다. 

뜻밖의 존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은 것은 그때였다. 

[있으면 좀 써라, 미친년.]

이마를 짚은 아몬이 진실을 밝혔다.

[내가 방관했다면 너는 죽었을 것이다.]

[설마 아몬 당신이 . . . ]

아몬이 당황한 바르바토스를 응시했다. 

[불만 있나, 바르바토스?]

[ . . . 없소.]

최근 승격전에서 패배한 바르바토스의 예기가 꺾였다. 나도 아몬처럼 당당하게 말할 걸 그랬나. 어차피 순위도 내가 더 높은데. 

그나저나 아몬이 나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준 것은 의외였다. 보답으로 신메뉴나 챙겨줘야지 생각할 즈음, 나와 아몬을 번갈아 쳐다본 모략스가 중얼거렸다. 

[개연성을 물로 보는군. 하마터면 이계의 신격이 강림할 뻔했어.] 

[결과적으론 아무 일도 없었으니 잘 끝난 거 아닐까요?]

[. . . 말을 말자. 그나저나, 그 되다만 재앙이 이용가치가 있긴 하나?]

누가 마왕 아니랄까봐, 벌써 이용해먹을 생각뿐이었다. 나는 꿈도 꾸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저야 모르죠. 그 아이는 장기말이 아니니까.]

[. . . 그럼 왜 구한 거냐?]

[음, 단순한 변덕? 나라고 항상 음흉한 계략이나 꾸미는 건 아니라고요. 하루 종일 그러고 다니면 내 마왕생이 너무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네 년의 사고방식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고개를 저은 모략스가 좌석에 도로 착석했다. 장내가 진정되자 이번엔 아가레스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당분간 네 앞길이 순탄해지긴 어려울 것 같군.]

[무슨 그런 악담을 . . . 혹시, 오늘 모인 이유와 관련있나요?]

고개를 끄덕인 아가레스가 궐련을 물었다. 사안이 꽤 심각한 모양이다. 다른 마왕들도 진중한 표정으로 아가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인의 관심 속에서, 아가레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패널이 열렸다.

초등학교 교실의 칠판처럼 잡다한 글씨로 가득찬 패널의 상단에는 대화의 주제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게티아의 다음 목표>

인정한다. 확실히 지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맞다. 아가레스가 손잡이에 해골이 달린 지시봉으로 패널을 가리켰다. 

[이것은 마왕들의 여론을 조사한 자료다. 보다시피 의견들이 제각각이지. 물론 다수가 지지하는 항목도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 ]

[<거대설화 '승'의 확보>와 <성마대전의 승리> 군요. 자료는 직접 만든 겁니까?]

[그렇다.]

[혹시 32번째 마계에서 회계 업무를 해볼 생각은 . . . ]

[안 한다.]

저런. 안타깝게도 그리고리의 업무량이 줄어든 세계선은 스타스트림에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자료에 언급된 소수의 의견도 한번 읽어 봤다. 

[소성운 말살 . . . 이건 누구 아이디어 입니까?]

[나다.]

당당하게 손을 든 벨레드였다. 같은 마왕으로서 이런 표현은 좀 그렇다만, 어지간히 미친 것 같았다. 

[하아, 건강만 해요.]

나중에 성운과의 격전에서 활약을 기대해보자. 그 뒤로 다른 글도 훑어 봤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소성운 말살. 요 다섯 글자가 너무 강렬한 탓이랴. 

아무튼 주류의 의견을 정리하면 크게 두 갈래였다. 이대로 적당한 거대 설화 시나리오 발생까지 대기하거나, 성마대전을 완전히 매듭짓거나.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곤란했다. 현재의 <에덴>을 다스리는 것은 메타트롤이 아닌, 메타트론. 그는 나와 함께 김독자 일행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척질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성마대전은 될 수 있다면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염없는 기다림 뿐인데 . . . 이것도 딱히 마음에 와닿진 않아 난처할 따름이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던 동안, 한쪽에선 말다툼이 한창이었다. 호전적인 벨레드와 전투라면 학을 떼는 부에르 사이에 설전이 벌어진 것이다. 

[너무 급진적일세. 그렇게 해서 '결'을 보겠나?]

[어이가 없군. 반대로 묻지. 정녕 설화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세계의 끝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천사 놈들이 말하는 희생이 뒤따르겠지. 다만 쓸데없는 학살은 지양해야 해.]

[놈들에게 공포를 각인시켜야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 왜 그 사실을 간과하지?]

중간에 자리한 안드라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 둘 다 저보다 20위는 높은 마왕들이라 대들 수도 없고, 여러모로 죽을 맛일 게 분명했다.  

물론 나도, 다른 놈들도 두 마왕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싸움 구경이 가장 재밌는 법이다. 다만, 벨레드의 뒤이은 말에 다툼의 양상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쯧, 늙은이들이란.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군.]

부에르, 바르바토스, 아몬, 아가레스가 동시에 움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가레스를 쳐다봤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목근육을 풀어 주는 척 시늉을 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네가 가장 빨랐다, 아스모데우스.]

아, 이걸 걸리네. 

나는 시치미를 떼곤 휫파람을 불었다. 그나저나 빨랐다는 건 나 말고도 아가레스를 쳐다본 놈들이 있단 소리다. 나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안드라스, 모략스와 눈이 마주쳤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다고. 딱 봐도 저놈들이었다. 이중에선 젊은 편에 속하는 마왕들이기도 했다. 우리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괜히 늙다리들 심기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그렇게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아가레스가 짓꿏은 미소를 띤 채 중얼거렸다.

[늙으면 죽어야지.]

[아니 내 말은 . . . ]

[농담이니 웃어도 된다. 농담이라 생각하면 웃어라.]

말이 농담이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벨레드가 자리에 도로 착석했다. 신입의 혈기는 갸륵하나 상대는 3만 년 동안 <스타스트림>이란 블랙 기업에서 혹사당한 사축. 감히 신입 따위가 넘볼 위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중고 신입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자리에 앉은 벨레드가 소신 발언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소?]

대담한 발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마치 중세 시대 재판장에서 발을 쿵 구르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를 재창한 갈릴레이를 직관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단 소리다. 칼퇴를 밥 먹듯이 한 김독자가 저것보단 사회생활을 더 잘하지 않을까. 아가레스도 말문이 막혔는지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 새끼가?' 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다는 느낌은 기분 탓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가레스가 벨레드의 발언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 . . . 아무튼 모두 일리가 있다. 전력은 최대한 보존할 필요가 있어.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는 것은 미련한 짓일 테지. 지금 이 순간에도 성운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모르니까.]

일목묘연한 정리였다. 

다만, 정리는 추상적인 문제를 가독성 있게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답이 될 순 없었다.

원하는 답을 찾아내는 것은 그것을 읽는 사람의 몫이니까.

아가레스가 한 발짝 물러난 사이, 우리는 각자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의견을 공유하고 그것의 타당성을 가렸다. 

[이것이 마왕다운 선택이다.]

[마왕 답다는 게 뭐지?]

[파멸할 가능성을 무릅쓰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

[그러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향후 마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자리인 만큼, 모두 매사 신중을 기울였다. 나는 담론에 참여하지 않고 아가레스와 마찬가지로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들의 열의와 집념을 일점에 쏟아부어야 기존 스타스트림의 질서에 틈을 만들 수 있겠지.

이를 위해선 적절한 무대를 준비하는 게 우선이었다. 설화를 쌓거나, 아니면 성좌들을 죽일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원작의 지식을 반영해 이곳저곳을 떠올려봤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정답을 찾으려드니 오히려 정답에서 멀어지는 듯한 답답함이 엄습했다. 담배가 땡긴다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아공간 코트를 뒤지자 얼마 전 양산형 제작자에게 받은 담배가 손에 잡혔다. 하나를 꺼내 입에 물자, 벌써 세 개째를 피우고 있는 궐련 애호가의 관심을 끌었다.

[맛있나?]

[그럭저럭.]

아가레스의 말에 답하며 불꽃을 피웠다. 희뿌연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머릿속의 잡념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 연기. 그것을 바라보며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끝말잇기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문장에 맥락은 없었다. 

나는 정보의 바다에 빠졌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죽을 뻔한 일들.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던 순간들.

그중 가장 최근에 있던 에피소드를 꼽자면 단연 '하나의 마계'를 이룩한 순간이었다.

환희에 젖은 채 울먹이는 소녀. 소녀의 손엔 책 한 권이 잡혀 있었다. 나는 책의 제목을 읽었다.

'레메게톤의 서.'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으로 획득한 히든 아이템. 그것의 책장을 넘기면 사악한 마왕을 소환하는 주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즉, 레메게톤의 서는 마왕 강림의 개연성 그 자체였다.

원작에서 포세이돈이 아들 테세우스의 화신체를 통해 하위 시나리오에 현현했듯, 마왕들 역시 레메게톤의 서를 매개로 무대에 난입할 수 있다.

그리고 난입이란, 본래 허락되지 않은 장소에 발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마왕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

수많은 빛들이 다채롭게 어우러진 성좌들의 우주.

그 한복판에서, 조만간 휘황찬란한 연회가 열린다.

'별자리의 연회'와 '레메게톤의 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한 가지 신박한 계획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조만간 열릴 별자리의 연회 때 다 같이 쳐들어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