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강한 화신 한 명이 사망할 것.
클리어 조건을 들은 41회차 신유승이 생각에 잠겼다. 유중혁은 아직 성장 중이며, 예언자인 김독자도 특출난 무재가 없다. 그렇다면 최강의 화신이 될 수 있는 후보군은 그녀가 생각했을 때 두 명이었다.
개연성의 제약이 풀리기 시작한 니르바나.
그리고 41회차 신유승 본인.
전자면 언제나 그래왔듯 함께 싸우면 된다. 이보다 어려운 시나리오도 해쳐나온 자신이다. 예언자까지 있으니 어떻게든 이기겠지.
'하지만 만약 후자가 정답이라면?'
자신이 최강의 화신이라면, 저들은 41회차 신유승을 죽이기 위해 함께 싸워야 할 것이다.
그 광경을 상상하니 신유승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러자 정희원이 걱정어린 어조로 말했다.
"어디 아프니? 안색이 너무 창백한데."
열 있는 건 아니겠지? 표정을 굳히며 손바닥을 갖다 대는 그녀는 정말 상냥한 사람이었다.
너무나 상냥해서, 41회차 신유승은 더욱 불안했다. 어쩌면 그녀와 온기를 나누는 것도 이번 시나리오가 마지막인 것은 아닐까.
"언니, 만약 내가 - '
41회차 신유승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고백하려 하던 그때, 유중혁이 진천패도를 납검하며 김독자를 불렀다.
"김독자."
"왜? "
"클리어 방법을 내놓아라."
김독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자판기냐? 누르면 정답이 툭툭 튀어나오게?"
물론 이해는 갔다. 김독자는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유중혁의 속내를 파악한 지 오래였으니까.
- 결국, 내가 모르는 시나리오가 나타났다. 아무래도 . . .
그 뒤에 무엇이 올 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근래 잠잠하다 싶더니만, 망할 개복치께서 회귀우울증 쿨타임이 돈 모양이다. 거기다 41회차의 신유승의 사념까지 들려오니 김독자로선 환장할 지경이었다.
- 내가 죽는다면 저들은 나를 기억해 줄까?
수족관을 차린 적도 없는데, 왜 자꾸 주변에 개복치들이 모이는 것일까. 하필이면 아군에서 무력으로 탑을 달리는 두 명이 저 상태니, 어쩌면 강한 힘에는 유리멘탈이 뒤따르는지도 모르겠다.
푸념을 마친 김독자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41회차 신유승과 유중혁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얘들아.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 . . 갑자기?"
"잔말 말고 이 상황을 타파할 계책이나 생각해라."
젠장할. 유중혁이 두 명이다.
" . . . 도깨비는 이미 힌트를 줬어."
아까부터 시나리오를 분석하던 모범사원 유상아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혹시, 아까 도깨비가 '가장 강한 화신은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라 말한 게 . . . '
"맞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도깨비가 준 힌트는 생각보다 명확하다. 즉, '본인이 가장 잘 안다'는 것도 말 그대로일 확률이 높다. 가령, 1등에겐 메시지 창으로 순위를 직접 공지하는 것처럼 . . .
유상아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따로 보이는 거 있어요?"
정희원이 고개를 저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부인했다. 김독자가 알만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니르바나일 확률이 높겠습니다."
"음, 그게 가장 신빙성 있겠네요."
잠깐이지만 사투를 벌여 본 정희원이 동의했다.
"그는 정말로 강했어요."
"어쩌면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유상아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니르바나의 체형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강인해졌다고 한다. 리카온이 진술하길, 속도 역시 확연히 빨라져 최근엔 '바람의 길'로도 대응하기 힘들었다고.
그 폭발적인 성장을 가능토록 하는 성흔은 김독자가 알기론 하나뿐이었다. 유중혁이 눈썹을 찌푸렸다.
"계승인가?"
"그래."
아마 니르바나는 이전 회차의 스킬을 계승하는 것이 틀림없다. 41회차 신유승과 한번 격전을 치렀을 때 결국 후퇴했다고 했으니, 그때를 교훈삼아 능력치를 올린 게 틀림없다.
정희원이 질문했다.
"계승이 뭐예요?"
"녀석의 성흔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제물로 이전 생의 능력을 말 그대로 계승할 수 있죠."
"그거 완전 사기잖아요."
사기라 . . . 이야기를 지불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김독자로선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원작의 내용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김독자가 얼버무리며 말했다.
"아무튼, 본래 '계승'을 사용한 성장에도 제약이 있습니다. 가령 민첩 스킬을 육성한다면, 상대적으로 근접 스킬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죠. 너무 남발하면 초반 시나리오에서 허용된 강함의 상한선에 저촉되기도 하고요."
41회차 신유승이 그 예다. 그녀가 본 실력을 발휘하면 유중혁을 비롯한 일행들 전부를 쌈싸먹고도 남으나, 그렇게 되면 시나리오를 더 진행할 수 없다.
- 지나친 사이다는 진부함을 유발한다.
따라서 도깨비들은 사전에 수많은 제약을 걸어놓는다. 이야기의 틀 자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근데 우리가 전체적인 상한선을 올려 버렸습니다."
개연성은 저울과도 같아서, 한쪽이 너무 강하다면 다시 수평을 이루기 위해 다른 한쪽에 유리한 무대를 제공한다. 좋게 말하면 조율이고, 나쁘게 말하면 파워 인플레다.
안타깝게도 니르바나는 그것의 수혜자였다.
그리고 이 사태를 초래한 원흉은 . .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눈치를 봅니다.]
딱히 원망할 생각은 없던 김독자가 웃음을 삼켰다. 아니, 원망하긴 커녕 지금까지 그녀가 살린 동료들과 아낌없이 뿌린 코인을 생각하면 절이라도 해야 할 판국이었다.
유상아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저희가 강해진 게 오히려 니르바나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이어졌다는 거네요."
정희원이 한탄했다.
"나 참, 무슨 열혈스포츠물 찍는 것도 아니고 . . . "
"어쩔 수 없습니다. 성좌들이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니까요."
대략적인 상황 파악은 끝났으니, 이제 유중혁의 말대로 대책을 강구할 시간이었다.
"저희에겐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41회차 신유승의 테이밍 스킬이 봉인된 이상, 몰려드는 괴수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한나절. 3급 이상의 괴수종이 나오기 시작하면 지금으로선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러니 그 전에 승부를 봐야 합니다."
"하지만 . . .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까요? 니르바나 입장에선 서울 시내 화신들의 절반이 사망할 때까지 숨어 있으면 이기는 건데."
유상아의 질문에 김독자가 고뇌했다. 본래 그의 계획은 유중혁을 미끼로 끌어내 끝장을 보는 것이지만, 니르바나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모르는 현시점에서 그것은 도박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 . .
"중혁아."
"뭐지?"
"눈 딱감고 그 정신 나간 부탁 좀 들어 주면 -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지각색의 반응이 돌아왔다.
"아저씨, 미쳤어?"
"독자씨?"
"죽고 싶나?"
역시나 안 되는군. 뭐, 이미 41회차 신유승과 격전을 벌인 시점부터 화친은 글러 먹은 지 오래다. 니르바나의 성격대로라면 유중혁을 포함한 모두를 '현재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겠지.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그럼 오늘이 끝나기 전까지 놈을 치겠습니다. 단, 인원은 저와 유중혁, 여기 있는 유승이. 이 셋으로 제한하죠."
""네?!""
호명되지 않은 정희원과 유상아의 눈이 동그레졌다.
그리고 정희원이 불만을 드러냈다.
"나는 왜 안 되는데요?"
유중혁이 신랄하게 답했다.
"지금 네 실력으로 니르바나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 . . 니르바나보다 느린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독자 씨도 - "
"녀석에겐 숨겨둔 한 수가 있다."
피스랜드에서, 김독자는 키리오스의 전인화를 재현했다. 번개처럼 순식간에 야마타노 오로치의 머리를 가르는 모습이 유중혁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스킬을 훔치는 스킬은 아직 유효하겠지?"
정비가 끝난 '책갈피'를 보며 김독자가 씨익 웃었다.
"당연하지."
이번엔 41회차 신유승을 바라보며 유중혁이 물었다.
"문제 없나?"
"문제없어, 대장."
유중혁의 시선이 정희원에게 닿았다. 한동안 눈싸움이 이어졌으나 결국 정희원은 인정했다. 그들의 전장에 함께하기엔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분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침묵하는 정희원을 흘겨보곤 유중혁이 선언했다.
"1시간 뒤에 출발한다. 유상아, 녀석은 어디에 있지?"
"강북에 있어요. 하지만 교도들의 경계가 삼엄해서 접근하기 까다로울 거예요."
최대한 구원교의 전파를 막아볼려 노력했지만, 난세가 그렇듯 그들의 교리는 지친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마치 바퀴벌레처럼 세력을 확장했다.
유상아나 서울의 왕들의 경고도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겐 그저 시나리오의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박해로 느껴질 뿐이었으니 . . .
"교도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라도 왕들의 협조를 구해 인원을 차출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서울을 지킬 병력이 부족해집니다. 그리고 놈의 본거지에 직접 처들어갈 것도 아니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에 유중혁이 김독자를 바라봤다. 당한 게 많아 눈빛에 불신이 가득했다.
"또 무슨 속셈이지?"
김독자는 태연자삭하게 말했다.
"이따 갈 때 알려줄게."
사기꾼 같은 미소는 영 신빙성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얼마 못 가 깨지고 만다.
진동이 연달아 울려 스마트폰을 확인한 유상아가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채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급보예요! 현성 씨랑 길영이, 지혜가 니르바나한테 - !"
*
강북의 어느 사철. 금빛 불상의 앞에서 스파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 츠츠츳!
"큭."
그 중심에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화신이 있었다.
환생자 니르바나.
그는 지금 막 '백팔번뇌'를 계승한 참이었다. 계승을 마친 니르바나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본래 계승 자체가 성좌들에게 설화를 공헌하는 대가를 치르는 만큼, 개연성이 허용된 정도와는 무관하게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소득이 있었다.'
널널한 제약 덕에 다른 스킬도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자기 제안을 거절한 무례한 화신과의 정면 승부에서도 농락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방심하진 않는다.'
그녀가 혼자 오리라는 장담은 없으니까. 계탄스럽지만 니르바나 본인의 신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중생들이 이 땅에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개 중 유중혁에게 달라붙은 축생들을 떠올리면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니르바나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제 신념을 낭송했다.
"과거에 사로잡히지도,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앞에 주어진 것은 현재 뿐이다."
평정심을 되찾은 니르바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중문을 열었다. 대기하던 교도가 그에게 수건을 건넸다.
그것으로 열을 식히며, 니르바나가 하명했다.
"새로운 소식은 없나?"
"아무래도 저쪽에서 저희 교도들을 색출해낸 모양입니다. 유중혁 님의 도착 소식을 전한 뒤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알겠다. 이만 물러나거라."
다시 혼자가 된 니르바나가 바깥공기를 만끽했다. 속세 한복판에 떨어진 신세지만, 인공적인 건물 숲 사이에서도 살아남은 자연이 느껴졌다.
번민과 오염이 본질을 어지럽혀도,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니르바나 자신의 역할은 원초적인 욕망을 일깨워 빛바랜 순수를 자각시키는 것.
그리고 니르바나는 오늘도 자신의 책무를 다 했다. 멀리서 충왕종과 강철, 함선이 날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상감염으로 구제한 중생들이었다.
과거에 집착하는 크로노스의 생존자만 아니었어도 넷을 구원했겠지만, 그렇다고 니르바나는 신유승을 놓친 것을 안타깝게 여기진 않았다.
후회는 과거에 미련이 남은 자들이 하는 짓이었으니까.
대신 니르바나는 그가 그토록 고대한 만남을 상기하며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유중혁."
자신을 구원한 존재이자, 동시에 유일한 이해자가 될 수 있는 회귀자.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니르바나는 무슨 짓이든 할 작정이었다.
괴수들이 일으킨 소란보다 더 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증폭된 목소리. 거기서 느껴지는 익숙한 음색에 니르바나는 순간 자신이 환청이라도 듣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듣고 있나, 니르바나.>
" . . . 유중혁?"
<너를 만나는 것은 이걸로 3번째군.>
틀림없다. 분명 유중혁이다. 음성변조도, 속임수도 아니다. 영혼을 걸고 확신할 수 있었다.
"헌데 무슨 이유로 . . . "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에 니르바나는 도저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현재에 관심이 생겼다. 오늘 오후 2시. 광화문 광장에서 너를 기다리도록 하지.>
" . . . "
<그럼 . . . 나와 하나가 될 기회를 주겠다.>
" . . . !"
순간 니르바나의 머릿속에 번갯불이 튀었다. 수많은 사고들이 얽히고 헝클어진다. 그가 경계하는 번뇌였으나, 불가항력이었다.
함정. 진심. 속임수. 왜곡. 이해자. 동반자. 하나 . . . .
잡념 속에서 니르바나는 두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스킬을 '계승'하면서도 그 두 이야기만큼은 바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첫 번째 기억은 그가 유중혁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때 니르바나는 아나콘다였다.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그렇게 무력하게 다음 생을 기약하는 패배자.
그런 자신에게 유중혁은 처음으로 손을 내민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받아본 온정이며, 구원이었다.
두 번째 기억은 그가 거대한 시간의 바퀴에 종속된 순간이었다. 새로운 세계선에서 니르바나는 유중혁을 만났고, 그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찾은 이해자이며, 동료였다.
'또한 탈출구였다.'
'환생'을 능가하는 성흔, 회귀. 어쩌면 영원히 되풀이 될 윤회에서 해탈하는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직감한 뒤로, 니르바나는 유중혁과 하나가 되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래, 결국 니르바나의 욕망은 해방,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니르바나는 유중혁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하하 . . . 하하하!!!"
니르바나가 광소를 터뜨렸다.
"좋다! 함정이라도 상관없다! 너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 두렵겠느냐! 유중혁!!"
참으로 구원교주다운 대답이었다.
*
- ". . . 이걸로 됐나?"
- "충분해."
[저, 저 또라이 새끼.]
관리국의 어느 집무실.
중급 도깨비로 승진한 비형은 태연하게 일을 벌리는 김독자를 떠올리곤 머리를 잡으며 혀를 찼다.
혼잣말이랍시고 뱉은 문장이 누군가의 귀로 들어간 것은 그때였다.
[나 말인가?]
소리 없이 등장한 상사, 상급 도깨비 바람의 등장에 비형이 까무러쳤다.
[아닙니다!]
[농담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게나.]
비형의 옆에 선 바람이 창틀에 비친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아무튼, 어러모로 대단한 화신이군.]
그들의 눈에는 김독자의 머리맡에서 깜박이는 메시지 창이 뚜렷하게 보였다.
- [당신은 현재 서울시 최강의 화신입니다.]
환생자 니르바나도, 회귀자 유중혁도, 41회차 신유승도 개개인의 무력만 놓고 본다면 최강의 이름이 아깝지 않은 화신들이다.
하지만 시나리오에서 강함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쌓아온 설화다. 적어도 이번 회차에서 쌓은 설화로는 김독자를 능가하는 화신은 없었다.
바람이 뒷짐을 쥔 채, 김독자의 이목구비를 뜯어 봤다. 딱히 특출나진 않았다. 그냥 가장 못생긴 왕이란 칭호가 어울리는 사내였다.
[신기한 일이군. 뒷배경도 없는 화신이 10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도 전에 성좌의 말석을 노리고 있어. 자네가 담당하는 채널엔 유독 재능있는 화신들이 많은 것 같아.]
[칭찬 감사합니다.]
[축하하네. 이제 거품 채널이라 까일 일도 없겠군.]
[ . . . ]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에 비형이 움찔했다.
거품채널.
그것은 아스모데우스의 힘으로 평청자 수에 비해 큰 채널규모를 가지게 된, 과거 비형 채널을 향한 멸칭이었다.
다만, 바람은 당시에도 비형의 채널을 딱히 문제 삼진 않았으니, 굳이 멸칭을 언급한 것엔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가령, 비형을 곤란하게 만든 장본인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라던가.
[마왕은 요새 잠잠한가?]
[잘 모르겠습니다.]
[편하게 말하게. 누구나 빽은 있으니까.]
바람은 무슨 아침 식단을 말하듯 자신이 어떤 성운에 줄을 댔는지 이야기했다. '나도 이야기했는데 네가 안 하고 배기겠니?'라는 압박이 은근히 실려 있었다.
하지만 비형은 입을 간수했다. 받아먹은 돈도 돈이거니와 그녀에게 입은 은혜가 상당한 탓이다. 자기 출세만 생각하고 성좌와 화신을 무시하다가 좌천당한 바울과 달리, 비형은 의리 있는 도깨비였다.
[. . . 그분께선 자기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결국 바람은 비형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진 '상급 도깨비' 바람으로서 공적인 질문이었고, 지금부턴 바람 개인의 사담이었다.
[괜한 걸 물었군. 잊어 버리게. 요새 상부에서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느슨해진 분위기에 긴장을 낮춘 비형이 질문했다.
[관리국에서도 마왕님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나 보군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기나긴 스타스트림의 역사에서 굴직굴직한 사건들이 수없이 터졌지만, 그녀가 개척한 이야기는 궤를 달리하니까.]
최초의 마왕 성운.
최초의 마계 통일.
두 가지 업적만으로도 아스모데우스의 인지도는 웬만한 신화급 성좌들에 버금갔다.
그래서 붙여진 이명이 바로 전대미문(前代未聞).
관리국의 도깨비들이 아스모데우스를 부르는, 경외와 두려움이 반씩 섞인 이명이었다.
바람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틀을 부순다는 점에서 김독자는 마왕을 닮았군.]
3등신으로 성장한 비형이 새로 생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김독자와 아스모데우스는 닮은 면이 많았다. 꼭 서로가 서로를 따라 하기라도 한 것처럼.
[저도 가끔 비슷한 생각이 듭니다.]
[스타스트림에도 새로운 바람이 부는 건가 . . . 하지만 과연 기존의 별들이 그것을 용납할지는 모르겠어.]
오랫동안 이야기 꾼 노릇을 해온 바람은 가장 밝은 순간에 떨어져 버린 것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당장 김독자가 있는 저 반도에서도, 이름난 한 무장이 성운의 시기를 받아 시나리오에서 퇴출당하지 않았던가.
별이 밝은 만큼 그들이 품은 그림자도 짙었다. 바람은 이 점을 지적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비형.]
[네?]
[저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음 . . . ]
비형은 침음을 흘리며 화면을 바라봤다. 중립의 왕 전일도가 생성한 필드에서 유중혁과 41회차의 신유승, 김독자가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 "나와 하나가 되어라!"
- "싫다!"
이윽고 화면이 전환되더니, 불길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정희원과 이현성의 모습이 비쳐졌다.
-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다 뒤엎을 겁니다! 당신들의 추악하고 음습한 악행도! 부조리도! 모조리!"
- " . . . 이번엔 내가 구해 줄 게요, 현성씨."
머지않은 곳에서 미래의 비스트 로드들이 충돌했다.
- "떼리지 마요 . . . 나는 . . . 잘못한 거 없어 . . . "
- "정신 차려 이길영!"
포탄과 황금빛 선이 하늘을 수놓았다.
- "나만 아니었으면 . . . 나만 아니었으면!"
- "지혜야!"
사방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성좌들이 열광하고 코인이 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비형은 기뻐할 수 없었다. 저들의 불행을 팔아 제 잇속을 채우는 게 . . .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자기 무대에서 성장한 화신들이 고통받는 모습이. 어쩌면 자신은 그들이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자신은 그들이 웃는 모습을 원하는 것일까.
비형은 제가 느낀 감정이 퍽 낯설었다. 뭐라 정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써가든 . . .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명료한 이유도, 논리정연한 전개도 없는 다짐을, 바람은 꽤 오랫동안 곱씹었다.
그러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좋은 마음가짐이군. 자네에게 이야기의 가호가 함께하길 빌지.]
그리고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침묵이 주는 여운에 눈을 감았다가, 다시 화면을 본 비형은 니르바나의 손에 복부가 꿰뚫린 김독자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김독자!"
- "뒷일은 . . . 맡긴다, 유중혁 . . . "
. . .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꿀까. 시나리오를 위해 희생으로 위장한 자살을 감행하는 화신을 보니 순탄하게 살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스트림계약을 맺어 더 이상 돌이킬 방법이 없으니, 비형이 할 수 있는 것은 신세 한탄 뿐이었다.
[내 팔자야. . . ]
요새 창작이 늘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