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시나리오.

'전지적 독자 시점'의 모든 비극의 시작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김독자는 휴대폰을 꽉쥐며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나는 이미 오래전에 사태를 파악하고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시나리오가 시작될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이미 그들이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공간이 비틀어지며 도깨비가 나타났다. 


온몸이 하얀 털로 뒤덮여있고 두 개의 작은 뿔이 나있는 괴생명체.


하지만 저게 비형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별로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했다.


비형은 내가 전독시를 읽으면서도 호감이 가는 캐릭터였고, 후반부에서는 그 호감도가 폭발했다.


자기를 희생하고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너희들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싶었다.' 라고 말하던 비형은 정말 안쓰러웠지.


아무튼, 계속해서 비형이 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한국어 패치가 덜된듯 이상한 외계어로 들렸다.


"왠지 스페인어 같은데, 제가 말을 걸어볼까요?"


유상아가 순진무구하게 그리 말하고, 김독자가 그것을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하긴, 아무리 멍청한 내가 들어도 저건 절대 스페인어 따위가 아니다. 

애초에 저것을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 아, 아, 잘 들리십니까?]


그 후의 전개는 전독시와 100% 일치했다.


한국어 패치가 끝난 비형이 '시나리오'에 대해서 설명했고, 항의하던 사람들이 터져나갔으며 한명오가 돈을 꺼내 거래를 요청하고 그것을 비형이 묵살했다.


물론 나는 비형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렸다. 이미 몇 번이고 직접 눈으로 보았던 설명을 다시 듣는 것은 교장 선생님의 훈화만큼이나 지루했다.


혹시 몰라 휴대폰을 켜 전독시를 찾아보았지만,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아예 소설 자체가 사라져있었다.


심지어는 불법으로 텍본을 공유하는 사이트에서도 전독시에 관련된 모든 글이 사라져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주행 8회차의 힘으로 이미 완벽하게 거의 모든 문장이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큰 문제는 이것이다. 나 말고도 전독시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 되는가. 


만약, 나를 포함해 전독시를 읽은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 시나리오를 깬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이 세계의 비극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나 혼자 다른 세계로 떨어진 것이라면..... 


상념에 잠긴 나를 깨운 것은 비형의 목소리였다.


[뭐, 그래요. 제가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여러분이 직접 돈을 벌어보는게 빠르겠죠?]


.....시작된다.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1  가치 증명>


분류 : 메인

난이도 : F

클리어 조건 : 하나 이상의 생명체를 죽이시오.

제한시간 : 30분

보상 : 300코인

실패시 : 사망


+


몸체가 투명해진 비형이 다음 칸으로 사라지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여러분. 부디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여 주세요.]


소설로만 봤던 문장들이 지금 내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본편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오직 나와 김독자만이 침착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특성창이 개방되었을텐데... 제발 나에게는 '제4의 벽' 같은 것이 없기를. 그런 중요한 스킬은 내게 안어울린다고.


다행히도, 나의 우려와 달리 특성창이 아주 손쉽게 눈 앞에 팝업 되었다.


 <특성창>


이름 : 한가람

나이 : 27세

배후성 : 없음(현재 세 개의 성좌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용 특성 : 왜곡자 (???)

전용 스킬 : [시나리오 왜곡 Lv.1], [현실 왜곡 Lv.1], [기억력 Lv.3]

종합 능력치 : [체력Lv.2], [근력Lv.1], [민첩Lv.4], [마력Lv.5]

종합 평가 : ■, ■?    ■.



왜곡자라고? 이게 무슨 특성이지? 


안타깝게도 전독시에는 특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담겨있지 않아서 나중에 김독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전용 스킬 이름이 심상치가 않은데 종합평가에 저건 뭐야?


게다가, 무려 세 명의 성좌가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단 것에 놀랐다. 나 여기서 한거 아무것도 없는데?


"자자, 여러분! 다들 진정하시고. 침착하게 심호흡부터 하세요."


생각에 빠져있던 나에게 아주 친근한 대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니 강철검제 아니, 지금은 육군 중위인 이현성이 있었다.

정말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진정들 되셨습니까? 다들 하던 행동 멈춰 주시고, 잠시만 저한테 주목해 주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역시, 모든게 소설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김독자 또한 이현성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는 나보다 더 감격하고 있겠지. 10년 동안 텍스트로만 접한 인물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김독자를 기다려줄 시간이 없었다.

이곳에서 낭비할 시간은 없다. 


서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톡톡 친다.


"누구... 아, 아까 그 여성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김독자 씨 맞죠?"


김독자는 잠시 내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조금 경계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이 상황에서 침착한게 이상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정말 잘생겼다. 전독시에서는 매우 못생긴 것처럼 묘사되더니 현실에서는 미남 그 자체였다.


산뜻하면서도 예민한 인상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과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의 남자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라도 멈췄으면...


"흠, 흠!"


아, 맞다.

그의 얼굴에 빠져서 오랫동안 불러놓고 가만히 있던 나를 김독자가 헛기침을 하며 재촉했다.


"안녕하십니까. 일단 제 이름은 한가람입니다."


오른손을 내밀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미 알고 계시지만... 김독자입니다."


그도 내 의도를 파악하고 손을 맞잡았다.

당분간은 손 씼지 말아야지.


"이런 상황에서도 꽤 침착하시군요."


"하하, 그건 독자 씨도 마찬가지잖습니까."


김독자가 그건 그렇군요. 라고 중얼거리며 손을 풀었다.


"그래서 저를 부른 이유는 뭐죠? 대충 파악하셨겠지만 지금은 1분 1초가 중요한 상황이고 저기 군인분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으니 되도록 빨리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당신, 지금 이 사태에 대해서 알고있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그의 눈빛이 나에게 강하게 경계심을 내뿜었다. 표정관리 못하는 김독자도 신선하네.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서운합니다."


"하하, 그렇게 보였나요? 하지만 정말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제가 이 사태의 흑막이라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발뺌하지 마세요. 제 특성은 '예언자'입니다. 이미 미래시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왔어요."


안 그래도 창백한 그의 얼굴이 더욱 싸늘하게 굳었다. 

그래 믿기지 않겠지. 이 세계에서 예언자는 오직 안나 크로프트 뿐이니까.

아마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또다른 변수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예언자라뇨. 이건 게임이 아닙니다.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군요."


"제가 거짓말 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하긴, 지금은 '신성한 삼문답'도 '거짓 간파'도 없으니까요."


계속해서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부르는 나를 보며 그가 매우 동요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당황하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매우 귀엽게 보였다. 최애캐가 당황해 하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흥분되는가!


그리고, 앞으로도 쭉 이 얼굴을 마주보려면 그와 신뢰를 쌓고 동료가 되어야한다.


"일단 신뢰가 필요하겠군요. 추후 당신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당신에게 전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를 신뢰할거라면서요."


김독자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나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