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한지 어엿 일주일.

나는 많은 돈이 있었지만, 돈을 물 쓰듯 쓰는 사람은 아니기에 하루하루 검소하게 살아갔다.



-독자 씨, 책 추천해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상아 씨.



유상아는 고맙게도 날 챙겨주었고,



-와...... 돈많은 백수ㄷㄷㄷ



정희원은.......부러워 한건지 놀린건지 모르겠다.

출근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맘껏 즐기며, 눈을 감았다.



*



"역시 힘드네......"



언젠가부터 습관이 된 혼잣말이 또 입에서 흘러나온다.

난 백수처럼 노는것도 싫었기 때문에 도서관의 사서로 취직했다. 생각보다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책 읽을 시간이 많아 즐겁기도 했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였을 때,



"아! 엄마, 죄송해요. 제발, 제발 때리지 말아주세요!"



옆집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어린시절이 떠오른다.



「아빠,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어디서 어린놈의 새끼가 말대꾸야! 쳐맞을래?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닥 유쾌하진 않은 기억.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옆집 문을 두들겼다.



"저기요! 옆집입니다."



문을 두들기자 정신이 돌아온다.

어떤 핑계를 대야 하지?



"왜요."



문을 열고 사내가 나온다. 마치 내 과거의 누군가와 닮은 사내였다.



「그는 키가 항상 컸다. 항상 너무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과 너무나도 비슷한 사내.



「항상 얼굴이 붉었던 사람. 늘 취한 채였고, 그래서 좀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



"무슨 일인데요?"



「그와 시선이 마주치면, 세상은 악몽으로 바뀌었다.」



"왜 불러놓고 말이 없어? 학생, 어디 아파?"



「어린아이에겐 커보일 키는 그와 비슷했고, 도드라진 혈관은 오히려 그를 앙상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혹시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시는 거라면, 하지 말아주세요."



문틈으로 보이는 아이.

앙상한 몸에, 상처투성이인 갈색머리 아이.

마치 벌레처럼 웅크린 채 눈에 생기가 없는 아이.



"뭐, 어쩌려고!"

"아이를 때리는건 엄연한 아동 폭력입니다."

"저새끼가 먼저 잘못한거라고!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어른한테 눈을 부라려!"

"학생이 끼어들 일 아니에요. 자꾸 이러면 신고할 거에요."



아이의 엄마까지 끼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밀려온 나는 경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야, 너 잘못한거야, 어?"

"학생, 우린 그런 사람 아니라고!"

"너, 내가 무고죄로 꼭 넣을거야, 꼭!"



소리치는 두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을 뒤로 한 채, 방에 들어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이길영이요."



벌벌 떨고 있는 아이. 나는 이길영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살고 싶니?"



이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길영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 행동은 같잖은 동정일 수도, 위선일 수도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럼, 같이 가자."



내 유년시절을 이 아이에게까지 겪게하고 싶지 않았다.



"난 섬세하지도 않고, 너같은 어린애들을 돌보는 법도 몰라. 가진건 돈밖에 없거든. 그렇다고 돈쓰는걸 좋아하지도 않고."



날 빤히 바라보는 이길영.



"그래도 괜찮다면, 내가 널 돌봐줄게."



그렇게 상처받은, 곤충을 좋아하는 소년은, 소설을 좋아하는 상처받은 사내에게 구원받았다.



*



길영이의 부모는 아동학대 혐의로 처벌받았으며, 뉴스에도 나오게 되어 큰 비난을 받고 있었다. 나는 부모가 친권상실선고를 받은 길영이를 위해 기꺼히 후견인이 되어주었고, 길영이도 이에 따랐다.



"독자 씨, 결혼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애는 있네요?"



항상 그렇듯 정희원은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내 기분은 상하게 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농담이였다.



"독자 씨......"



유상아는 아예 감동받은듯 한 얼굴이였다.



"형, 이 아줌마들 누구에요?"

"아, 이쪽은 정희원 씨, 이쪽은 유상아 씨야."



그렇게 통성명을 마친 후로, 길영이는 나와 지내며, 종종 놀러오는 유상아와 정희원의 예쁨도 받으며 과거의 상처는 잊고 활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지금의 기억이 좋다고 해도, 그리고 시간이 지난다 하더라도 길영이가 받은 상처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길영이는 앞으로도 종종 이 일이 기억나 괴로워 할 것이고, 11살의 이길영은 여전히 그 시간 속에 박제되어 그 비극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이 아이를 돌보아주고, 상처가 덧나지 않게, 곪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약간의 위안이 될 지 모른다. 아니, 약간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마치, 17세의 김독자에게 '멸살법'이 그랬듯이.



지금의 이 기억은, 11세의 이길영이 잠깐이나마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가 이길영의 후견인이 된 지 어느덧 2달이 지났다.



*



"형."

"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언제나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내 왼쪽 다리에 달라붙은 길영이가 날 부른다.

길영이와 함께 산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젠 길영이가 내게 부탁할 때 어떤 식으로 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면, 뭐 갖고싶은거라도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평소랑은 다른 진지한 표정의 이길영.



"내 친구 유승이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데...."



상상도 못했던 말. 나는 부모에게 좋은 기억은 없다. 그러나 부모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참담할 기분일지는 예상이 갔다.



"그래서 나한테 장례식 와주면 좋겠다고 했어. 친척도 없어서 아무도 안온다고 해서....."

"언제?"

"이번주 토요일. 난 형이랑 가고 싶어."

"알았어. 주말에 시간 비워놓을게."



*



토요일 아침. 우리는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옷을 입었다. 길영이에겐 미리 사두었던 검은 티셔츠를 입혔고, 난 항상 입던 하얀 코트대신 검은색 양복을 입었다.

장례식장에 가보니, 분명 일가친척들이 서 있을 자리에, 길영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홀로 앉아있었다. 장례식장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어 을씨년스러웠다.

여자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봤다. 도톰한 볼살에 서양적인 눈매가 특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이국적인 귀여움이 물씬 풍겼을 듯한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고, 영롱한 붉은 기가 감도는 눈동자는 상처받은 짐승처럼 죽어있었다.



"유승아....?"

"아....길영이 왔구나."



이름이 유승이인가보군.



"옆에는....?"

"아, 독자 형이야."

"아,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의젓한 것이 마음이 아팠다.



"어쩌다 이렇게 되신거니?"

"제 탓이에요."



어린애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말이 입에서 나왔다.

나는 길영이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 했다.



"제가 엄마 아빠를......죽인거에요."

"무슨 일인지 말해주겠니? 나는 이야기를 하는건 잘 못하지만 잘 들어줄 수는 있거든."

"밤에 부엌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확인하려고 주방불을 켰는데, 갑자기 불꽃이 튀더니 불이 났어요."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혼자만 살아남은 아이가 느낄 죄책감.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부엌에서 불이 나서, 엄마아빠를 깨워서 나가는데, 갑자기 펑 하고 소리가 나더니 엄마가 나 대신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를 맞았어요."



이렇게 어린 아이가 감당할 수 없을듯한 기억.



"아빠는 절 안고 밖으로 뛰어가다가 그만 불 속에 넘어지셨어요. 그런데, 저는......"



죄책감에 몸을 떨며 흐느끼는 신유승.



"엄마도, 아빠도 다쳤는데....저는 저 혼자 살려고 제 방에서 잠들어있던 강아지도 버리고....."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과거의 어느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살 가치가 없어. 내 존재가 잘못된거야.」



아이의 눈동자는 마치 큰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갔던, 아니 죽지 못했던, 17세 시절의 나의 눈동자와 닮아있었다.



"유승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물에 빠진 인간은, 단지 깃털 하나의 무게 때문에 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반대로, 깃털 하나의 무게만 덜어줘도 떠오를 수 있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이 아이에겐 깃털만큼의 무게도 덜어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덜어준 죄책감이 이 아이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게 하기를,

그렇게 비는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였어. 정말로,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내게 '멸살법'이 그랬던 것 처럼, 이 아이에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한참동안 멍하니 날 바라보던 아이의 눈에는, 그동안 흐르지 못했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흑...아저씨, 정말 제 잘못 아니죠...? 제가 살 가치가 있겠죠....?"



나는 아이의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



"그럼. 네 잘못 아니야. 넌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살아나갈 가치가 있는거야."



의젓해야한다는 말에 갇혀있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모두 쏟아낸 뒤 붉어진 눈가로 날 보면서,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저씨."

"....왜?"

"아저씨는 '신'인가요?"

".....아니.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저씨 앞에 있으면, 모든게 이해받고 위로받는것 같아요. 마치 '신'앞에 있듯이......"



내가 신이라면, 정말 무능한 신이겠지.

나는 내 품에 안겨있는 신유승을 꼭 안아주었다.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유승아, 혹시 지낼 곳 없으면, 우리 집에 와도 돼."



나는 항상 주머니에 넣고다니는 메모장을 꺼내 집 주소를 써 주었다.



".....감사합니다."



저 아이도 이제는, 마음 편히 쉴 공간이 생겼기를.



그렇게 상처입은 짐승은, 한 사내에게 구원받았다.



*



유승이가 나와 길영이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도 벌써 2주일 째.

날이 갈수록 길영이와 유승이의 집착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야, 형한테서 떨어져!"

"뭐래, 내가 먼저 있었거든?"



평일이고 주말이고 내 옆자리를 두고 싸우니 진이 빠지는 것 같다.



"예들아, 그만 자자."

"네, 아저씨."

"알았어요, 형."



잘 때 마저 가운데에 날 끼고 둘이서 내게 붙어서 잔다.

이젠 익숙해진 나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였다.



"야, 형 니쪽으로 당기지 마!"

"뭐래, 니쪽이 훨신 가깝거든?"



유승이와 길영이의 말싸움을 자장가삼아 눈을 감았다.

잠이 들락 말락했던 그 때,



"야, 너"



이길영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게 말할 때 형한테서 떨어져."



그러자 내 옆에 찰싹 붙은 신유승이 말했다.



"싫은데?"

"어디서 똥개 같은 게......"

"나한테 말 걸지 마, 벌레 새끼야."



이길영이 주춤했다. 내 어깨에 닿은 이길영의 머리가 분한듯 떨렸다. 간신히 침착함을 회복한 이길영은 반격했다.



"형은 너 같은 애 싫어해."

"아저씨가 누굴 좋아하는진 나도 알아."

".......형이 누굴 좋아하는지 안다고? 누군데?"

"어떤 언니야."



이길영이 피식 웃었다.



"언니? 뭘 잘 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독자형은 유중혁이라는 사람을 좋아해."

"아저씨가 그사람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아?"

"난 형이랑 오래 살아서 잘 알아. 잘때 종종 중얼거리는걸."



뭔가 끔찍한 대화가 시작되려는 찰나, 나는 간신히 일어났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신유승과 이길영은 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자세로 누워 쿨쿨 잠에 빠져 있었다.

.......잘못 들었나? 그냥 꿈이였나?

그것보다도 내가 잠꼬대를 그렇게 했다고?



조금씩 뒤척이는 이길영과 신유승. 역시 꿈이었나보다.

나는 길영이와 유승이의 머리카락을 넘겨준 뒤,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어디선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벌레. 그러고 보니 너 아까 아저씨한테 안겼지?"

"......"

"애기냐? 아저씨는 어른스러운 사람을 좋아하거든?"



역시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크흠."



내가 헛기침을 하자 다시 주변이 잠잠해지고 이내 아이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모품이 되어 사라지던 밤들은, 그렇게 의미를 되찾았다. 피곤하지만 행복한 일상이었다.



*



오랜만에 집에 아이들이 없는 날이다. 카페에서 상아 씨에게 추천받은 책을 다 읽고, 밀린 '전독시'까지 전부 읽고 난 후에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미 밤이 늦어 길은 한적하고 어두웠다. 오늘따라 별이 밝았다. 그 별들이 내게 뭐라 말하는 것 같아, 항상 아래로 향해있던 고개를 치켜들고 걸었다.



"아, 뭐야..."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한 여자와 부딫혔다.



"죄송합니다...."



일단 사과를 했다.

그런데....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



"아, 뭐야......"



글이 잘 떠오르지 않으면 항상 그랬듯 나는 골목에서 담배를 피고 난 뒤,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러나 나오자 마자,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낯선 남자에게 부딫혔다.

근데......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그리운 감정이 드는걸까.

어, 왜 내 눈에서 눈물이....?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왜 난 이 사람을 보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을까.



"저기, 혹시 저랑 만나신 적 있으세요?"



그의 얼굴이 황당하다는듯 구겨진다.



"아뇨...?"



당연히 만난 적 없다는 듯한 말투에 왠지 쪽팔리기도 해서 자리를 피했다.



*



토요일. 역시 또래라 그런지 아이들은 서로 싸우면서도 금새 친해져서 같이 놀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쇼파에 누워 잠시 쉬려고 하는데,



-띵동



어?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저기, 옆집인데요, 이사와서 떡좀 돌리려고요.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일단 문을 열어주었다.



"아, 잘 부탁드립니다! 옆집에 이사왔......"

"어? 저번에 골목길에서 울던....."



우연찮게도 옆집에 이사온 사람은 골목에서 부딫혔던 그 사람이였다.



"아, 잘 부탁드립니다!"



쾅!



떡이 담긴 접시를 내게 떠밀더니 얼굴이 빨개져선 현관문을 쾅 닫아버렸다. 방에서 놀다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아이들도 이 광경을 보았다.



"아저씨가 저 여자를 알고 있다라....긴장해야겠다."



왠지 모르겠지만 유승이는 이를 갈고 있었고,



"형이 저렇게 인기가 많다니, 대단해!"



이길영은 갑자기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어색해서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었다.



*




옆집에 그 사람이 이사온 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나, 엘리베이터에서나 계속 마주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계속 만나다 보니 안부를 묻거나 아이들과 대화하는 등 친해질 수 있었다. 옆집이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사온 지 한달, 아이들이 자고 있는 깊은 밤에 누군가가 계속 우리집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눌렀다.



"헤에....이거 왜 안열리지....?"



혹시나 도어락이 잠길까 서둘러 문을 열어보니 옆집여자가 우리집 도어락을 누르고 있었다.



"아, 열렸다아...."

"저기, 여긴 옆집인...."

"어, 니가 왜 여기이써...? 몰라 귀차나아아.... 술머글래애..."

"아니, 충분히 취하신거 같은데...."



큰일이다. 지금  유승이와 길영이도 자고있는데, 옆집 여자가 우리집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니.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다.



"아 몰라아..... 나랑 같이 술마시자..."

"저기요, 여기서.."

"한수영."

"....네?"

"내 이름 저기요가 아니라 한수영이라고오....."



갑자기 자기 이름을 말하더니, 픽 쓰러지듯 골아떨어졌다.



"한수영 씨? 한수영 씨!"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질 않아 어쩔 수 없이 식탁에 앉혀놓았다.



한시간 뒤, 한수영이 잠에서 깨었다.



"어, 여기 어디지?"

"정신이 들어요?"

"왜 당신이 여기에.....설마?"



피곤한 오해를 할 것 같아 미리 선수를 쳤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게 아니고, 술에 잔뜩 취해서 저희집 문을 두들기고 계셨어요."

"그렇구만.... 그럼 들어온 김에 술이나 같이 마셔줘요. 오늘만...."



이 여자가 이렇게 술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생긴건 멀쩡하게 생겨선. 이상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발......"



너무 간절해보여서, 어쩔 수 없이 맞장구쳐주기로 했다.



"하, 알겠어요."



*



"그래서 뭔 일인지나 말해봐요. 난 이야기 듣는건 자신 있으니깐."

"어, 난 이야기 쓰는거 자신 있는데!"



한수영은 연거푸 술울 마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나는 술을 많이 먹진 않았고, 대신 이야기만 들어주었다.



한수영의 말에 따르면 친구가 추천해준 소개팅에 갔는데 상대방은 자신이 웹소설을 쓴다는걸 듣고는 무시했다고 했다.

......웹소설 작가일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어쨌근 참교육을 하고 나왔다는데, 왜 자신은 여태껏 좋은 남자를 만난 적이 없냐는 푸념으로 이어졌다.



"야, 나 말 깐다?"



잠시 돌아왔던 정신은 다시 가출했는지 술에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했다.

갑자기 말을 놓는다는 소리를 하고있다.



"그래....그럼 나도 말 놓는다."



그 이후로도 한참을 떠들던 한수영은 곧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다.

그러다가도 종종 '전돕시 연쟈해야뎓늓ㅇㄱㄴ'라는 식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한수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흑발 단머리에 하얀 피부.

얼굴이 작고 눈꼬리가 올라간 고양이 상 얼굴.

그리고 왼쪽 눈엔 눈물점이 찍혀있었다.



나는 한수영을 깨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한수영이 눈을 떴다.



*



[■■■ ■■■ ■■■■■■]

[■■ ■동이 시작됩니다.]

[육체의 통제권을 이양받습니다.]



미약한 개연성 후폭풍과 함께 익숙한, 그러나 다시는 들을 일 없을 줄 알았던 시스템 메세지가 들려왔다.

......뭐지?

왜 난 살아있는거지?

분명 난 '멸살법'을 완결내고 소멸했을 텐데....

그리고 이미 유료화가 시작되어야 했을텐데....

왜 내 앞에는 김독자가 있을까.



난 고개를 들어 김독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흰 피부에 산뜻하면서도 예민한 인상.

내가 그토록 보고싶었던 얼굴.

10년간 '멸살법'을 연재한 단 하나의 이유.

놀란 표정을 보니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너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새꺄.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팔을 뻗었다.

팔을 뻗어 김독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 갑자기 왜....."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전부 잊어버릴거야."



내 손에서 따끔거리는 스파크가 일어난 뒤, 점차 시선이 낮아지며 결국은 식탁위에 머리를 대고 잠에 든 김독자.

나는 그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만나서 좋았다, 내 하나뿐인 독자여."



그러자 옆에서 중절모를 쓴 사내가 나타났다.



"신이시여...."

"뭐야, 보고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내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듯한 표정의 도깨비 왕.



"정말 진심이십니까?"

"그래. 이녀석도 한번쯤은 행복해도 되잖아."



항상 불행했던 이 녀석은 마침내 시나리오가 아닌곳에서 행복을 찾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보고싶어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개연성 후폭풍에 온 몸이 찢어진다 하더라도 이 녀석만은 행복했음 좋겠어. 그러나 이 녀석의 행복에 난 끼어들 자리가 없는거야. 끼어들어서도 안되고."



시나리오가 없는 곳에서, 이녀석은 내가 아닌 또다른 나와 함께 행복을 찾을것이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완벽할 것이다.


"이제 이 이야기는 작가의 손을 떠날 때가 된거야."

".....그렇습니까."

"너도 그렇잖아? 유료화를 하지 않다니...뭐, 덕분에 그동안 모인 개연성으로 잠시나마 나올 수 있었지만...."



아직 시나리오가 시작되지 않은, 아니 <시나리오가 없는 세계>.



".....이 도깨비 왕은 당신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개연성 후폭풍을 남기며 사라지는 도깨비 왕.

나는 잠시 김독자를 바라보다 김독자를 침대에 뉘여주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보고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어."



시나리오를 진행하면서, 입에 붙어버린 혼잣말.

김독자의 머리를 넘겨 준 나는 다시 식탁에 앉았다.



"한동안 움직일 개연성을 모두 써버렸네."



나는 마지막으로 내 몸을 움직여 김독자가 누워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사랑한다, 내 유일한 독자여."



시야가 점점 낮아진다. 이 몸의 통제권을 점점 잃어간다.



[자율 활동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자율 활동 예정 시간은 미정입니다.]

[육신의 통제권을 회수합니다.]



다시 들려오는 시스템 메세지와 약간의 개연성 후폭풍과 함께, 내 의식은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



"아, 일어났어?"



눈을 떠보니 난 식탁에 엎드려 자고 있었고, 옆집 남자는 콩나물 국을 끓이고 있었다.



"어? 제가 왜 여기에...."

"어제 술 잔뜩 먹고 와서 나랑 떠들었잖아. 말 놓기로 한것도 기억 안나냐?"

"정말요? 아, 기억난다."



이름이...김독자였나?

조각난 기억을 맞추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한건지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보는 남자에게 소개팅 망친 얘기는 왜 한건지 모르겠다.

김독자가 콩나물국을 들고 식탁으로 와 상을 차린다.



"이거나 먹고 집 가서 쉬어."

"고맙다."



아직 반말이 입에 익숙치는 않았지만, 내가 먼저 꺼낸 의견이었기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동시에 수저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