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나는 오늘도 벽에 선 하나를 더 그었다.
오늘로 27일째다. 은밀한 모략가가, 유중혁들이 나를 이 숲에 가둔지 27일이나 됐다.
이 숲 안에서는 규칙만 잘 지킨다면 뭘 하든 아무도 테클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나가면 유중혁들이 빤히 쳐다보는지라 바깥에는 잘 안 나간다.

나는 배려인지 아니면 강요인지 준 시계를 보았다. 째깍거리며 움직이던 침들이 8시 정각을 가르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십벌씩이나 되지만 다 똑같은 옷들로 가득한 옷장을 열었다.

딱 맞는 청바지에 하얀 셔츠라는 똑같은 옷들 사이에서 느낌이라도 내보려 옷을 정하는 척 했지만 이내 내가 미쳤나 싶은 생각에 그만 두고 대충 하나를 꺼내 갈아입었다.

깨끗하다못해 각이 진 옷을 보자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위에 하얀 이공간코트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유중혁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중혁들이 내게 통보한 본인들의 왕이 정한 규칙이라는데 안 지켰다가는 뭔 꼴을 볼지 모른다. 그렇기에 심호흡을 크게 하고 그만큼 크게 목소리를 냈다.

"잘 잤어?!"

그러자 유중혁들은 답이 없었다. 하지만 몇몇은 고개라도 끄덕여줘 덜 멋쩍었다. 그 감각을 곱씹으며  입구처럼 보이는 곳을 지나자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성으로 바뀌었다. 성 문을 두드리자 성 문이 그오오같은 낮고 근엄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성문을 지나 넓은 통로를 지나 매일 오는 식당같은 곳에 도착했다.

"앉지."

길지도 않은, 한국 식탁과 비슷한 식탁이 어울리지 않게 큰 방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빈 자리가 있었고 그 반대편엔.

"응, 먹자."

유중혁이 있었다. 관자놀이부터 뺨을 타고 내려오는 깊은 흉터를 가졌고, 3회차의 유중혁보다 다르게 조금 얼굴 살이 없고, 눈빛이 어두웠지만 확실히 잘생긴 유중혁이였다. 이쪽이 좀 더 잘생긴 것 같기도 하다.

"뭐 필요한건 있나?"

모략가가 능숙하게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어 씹었다. 나도 그를 따라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자 설화가 몸에 흡수됐다. 27일이나 먹다보니 몸에 적응이라도 된건지 그닥 거부감은 없었다. 쓸모없는 이계의 신격들을 죽여 만든거라 그런 것 일 수도 있다.
나는 준비된 와인같지 않게 단 와인을 마시고 입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여기서 내보내주는거."

그러자 모략가도 입 주변을 냅킨으로 닦으며 답했다.

"안 될걸 알면서 바라는건 변하질 않는군."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 말이 그가 하는 최선의 농담임을 알기에 웃어넘겼다. 그러자 모략가도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다른건 없나?"

나는 다시 잔에 와인을 따르고 와인을 잔 안에서 살살 굴리며 말했다.

"···책이나 읽고 싶네."

그러자 모략가가 턱을 괴며 물었다.

"무슨 책을 원하지?"

입에 와인을 살살 넣고 입안에서 굴리며 맛을 즐겼다. 무척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설화가 아니라서 좋았다. 그리고 그 황홀함 사이로 그의 질문이 비집고 들어왔다.

"응?"
"무슨 장르를 원하지?"

나는 설마 구해다줄 수 있을리가 하는 생각에 대충 말했다.

"로맨스가 보고싶어. 수위 왕창 높은거."

와인 두세잔에 취했는지 막말이 나왔다. 그만 마셔야지 하면서도 계속 와인을 삼켰다.

"수위 높은 로맨스라··· 이건 어떻지?"

그가 공중에서 책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내 남자친구의 이중생활'.
이런걸 왜 가지고 있는걸까 싶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반전매력이라고 할만한 일이기에 피식 튀어나오는 즐거운 웃음은 참지 못했다. 모략가가 와인을 한잔 더 마시고는 말했다.

"취향이 그쪽일줄은 몰랐군."
"어···그, 내 취향은 그쪽이 아닌데."
"부정할 필요는 없다. 누구든 수위 높은게 끌리는건 동물의 욕구니까."

서로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것 같긴 하지만 오해도 쌓인 것 같다.



뭔가 맘에 안 들게 써졌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