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 스토리 중 하나인 설원의 음유시인을 리메이크한 작품이올시다.
하지만 뭔가 몇 가지 더 설정을 추가했고, 마땅한 단어가 안 떠올라서 몇개는
로스트아크의 단어를 가져왔음 ㅋㅋ 요즘 로아가 재밌더라구 쨌든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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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의 음유시인
어린 시절, 사람들에게 눈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대게는 불쾌한 기색으로 무시했고, 몇몇은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사시사철 눈이 오는 이곳 ‘슈사이어’에는 눈보라, 추위, 기아만큼 흔해빠진 것이 없었다. 그것은 전쟁만큼 가혹했고, 전쟁과 함께라면 더욱 그러했다.
아르카디아 대륙에 전쟁이 발발했고, 그 시작은 이곳 슈사이어였다.
대륙의 최전방이자, 최고의 방어선인 슈사이어가 뚫린다면 세계가 큰 위험에 빠질 것이기에, 슈사이어의 모든 군인들과 용병들이 최전방에 모여들었다.
슈사이어 사람들은 눈을 천벌이라고 믿었다. 일리 없는 말은 아니다.
이 시대의 인간들은 정말이지 비참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작은 바람에서 비롯한 억지... 같은 것이지만,
아마도 눈은......
“사랑이지.”
“예? 사랑...이요?”
“예쁘잖아. 하얗고.”
“.......”
“왜? 맘에 안 들어?”
“그야.....”
저벅저벅
눈을 밟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장님, 병력 배치가 끝났습니다.”
“그래? 자, 이만 가볼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검을 들었다.
“전투 개시해.”
*
“이 근방은 모두 정리 됐습니다.”
“수고했어.”
나와 내 병사들은 슈사이어의 최전방에서 적들을 막고 있었다.
전투를 치르고 탑에서 휴식을 취하는 도중 내 최측근에게 물었다.
“근데, 저기 저 산 위에 있는 성은 뭐야?”
“‘베히모스’라고 하는 슈사이어의 마지막 성벽입니다. 저기가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합니다. 성벽 꼭대기에 봉화가 있다고 하더군요.”
“봉화?”
“네. 종말이 다가오거나, 이곳이 뚫렸을 때, 위험을 알리라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에스더’들의 작품이죠.”
“흠, 종말이라면 바로 지금인데. 그 에스더라는 놈들은 뭐하는 거야?”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시대였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부수고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겨울이 오는데, 민가는 다 타버렸고 저 많은 주민들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무사하지 않은 건 매한가지인걸.”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왕을 위해 싸웠다. 조금 순진했던 시절에는 그의 적이 모두 사라지면 전쟁도 끝날 거라 믿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도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 저기요.”
갈색 털 옷을 뒤집어쓴 두 아이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니 꼬마야?”
“하프..... 500코인이요....”
“멋진 하프로구나. 자, 여기 500코인.”
“감사합니다....”
“꼬마야. 이름이 뭐니?”
“신유승이에요.”
“이길영이요.”
“조심히 가렴. 유승아, 길영아.”
아이들은 허리를 숙이며 내게 인사를 하고, 난민들 속으로 사라졌다.
“음악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또 몰랐군요.”
“몰랐어? 원래 내 꿈은 음유시인이었어.”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옆 나라에 침공이 있다고 하는데, 그리로 갈까요?”
“됐어. 어차피 이곳이 뚫리면 다 망하는데.”
“그럼 계속 이곳을 지키실 겁니까?”
“아니, 은퇴하련다. 용병단 너 가져라.”
“또 이러시는군요. 물론 전 상관없습니다만.”
“잘 있어라. 굶지 말고.”
“예? 대장! 어디 가십니까? 대장!”
*
3년 후.......
“경치 한 번 끝내주네.”
크아아앙!
“음?”
“진정해. 난 너를 데려가려고 온 거라니까?”
쿠에에에엑!!
“에이씨....”
♩♬♪♬♩♪♬
“어? 얌전해졌잖아?”
“근처에 어린 새끼가 있는 거야. 평소엔 온순한 녀석이지만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는 흉포해지거든.”
“뭐야.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근데 누구야 당신?”
“나? 지나가던 음유시인이라고 해두지.”
“예명은.... 뭐로 하지?”
“예명 같은 거 물어본 적 없거든? 훌쩍....”
‘음? 설마 저런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여기까지 온 건가?’
“에....에....엣취!!!!”
팅!
“이크, 현이 끊어졌네.”
크와아앙!!!
퍽!!
께겡!!
“이런, 나도 모르게 하프로 후려쳐버렸네. 정희원이 또 잔소리하겠네.”
“아...아아!!! 사흘 만에 겨우 찾은 녀석인데!!! 물어내 자식아!!!!”
“당돌한 아가씨네. 너 입술이 파랗잖아. 따라와. 따듯한 차라도 대접해줄게.”
“하지만....”
“대신에 다른 녀석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줄게. 이대로 있다간 감기로 그치지 않을걸.”
“흠... 좋아. 약속한 거다?”
귀엽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깊은 설산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 어떤 사연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혼란한 세상이니까,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지.
“사냥을 해오랬더니.... 이 설산에서 아가씨를 헌팅해 오셨군요. 놀.랍.습.니.다.”
“저쪽 협곡에서 발견했어. 일단 불 좀 쬐게 해줘.”
“알겠습니다. 근데, 또 하프 줄이 끊어졌습니까?”
“돌발 상황이었지. 불가항력이었어. 하프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휴.....”
“그럴 때 쓰라고 검이 있는 겁니다! 하프는 연주를 할 때 쓰는 거고요.”
“그래그래. 잘 알지. 근데 무겁잖아.”
“.....은퇴하시고 손질도 전혀 안 하시는 것 같던데, 검이 아깝지 않으십니까?”
“괜히 명검 ‘세이버’라 불리겠어? 괜찮아. 그리고 앞으로 쓸 일이 있겠어?”
“아까 전에 쓸 일이 있던 것 아닙니까?”
“아 이현성. 정희원 좀 말려봐. 맨날 잔소리라니까.”
“잔소리가 아니라 충고라고요!!”
“뭐가 이리 소란스러워요. 대장 왔어요?”
“아, 유상아. 별일 없었지?”
“별일은 없었죠. 그나저나 또 하프를 해 먹으셨군요. 제가 고쳐드리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
♩♬♪♬♩♪♬
“휴, 잘 먹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대장도 좀 더 드시지요. 적당히 체중을 유지하지 않으면 추위를 못 버팁니다.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아시잖습니까. 저러고 계실 때는 잔소리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대장? 이라면.... 군인들이야?”
“아뇨. 저희는 용병이에요. 지금은 은퇴해서 이곳저곳 떠돌고 있어요.”
“화려했던 시절이었지.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었는데.”
“대장의 검과 방패인 희원 씨와, 현성 씨, 그리고 마법을 다루는 저와, 그리고 저희를 이끌어 주시는 김독자 대장님과 떠돌고 있어요.”
“그럼 너희 넷이서 다니는 거야?”
“일행이라면 더 있었는데..... 다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 품이 그리웠던 것이지요.”
“그러는 아가씨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
“나? ‘종말’이 얼마 안 남아서 방주에 데려갈 동물들을 찾고 있었어.”
“종말....말입니까?”
아가씨의 눈치를 보며 정희원과 이현성은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 차림으로 여기까지 온 걸 보십시오.”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지.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딱하기도 해라....”
“다 들리거든?”
“흠흠..”
“됐어. 믿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종말을 피할 방법은 없으니까.”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이대로라면 살아남을 자가 없을 테니까.”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신 겁니까?”
“독희가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더라고.”
팅!
하프를 연주하던 내가 정희원의 말에 연주를 멈췄다.
“독희? 그 여자가 움직였나?”
“독에 감염돼, 변종을 일으킨 사람들이 생겨나더군요. 아마 그 여자의 짓일 겁니다.”
독희 이설화는 아르카디아 대륙에 제일가는 의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악한 마법에 물들어 독희가 되었고, 많은 이들을 죽이고, 독을 이용해 자신의 병사들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3년 전, 전쟁을 일으켰던 주범 중 한 명이었다.
“결국 그 여자가 움직였군요.....”
“신경 쓰지 마.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3년 전, 우리는 슈사이어의 최전방에서 전쟁을 치러왔다. 하지만 오래된 전쟁에 우리는 은퇴를 하여 이곳저곳 떠돌고 있었다. 견고했던 슈사이어의 방어선이 독희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긴 하지만.... 다시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민가에 들려 식량을 구입해둬야겠습니다.”
“그래. 가까운 곳에 패왕의 성이 있었지.”
나는 몸을 일으켜 잽싸게 움직였다.
“자, 잠깐!! 그러면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건데? 방주에 데려갈 동물을 잡게 도와준다고 했잖아?”
‘아차차....’
“그거라면 걱정 마.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럼 다녀올게.”
“예? 갑자기요...? 어쩌시려구요?”
“가시곰 새끼 한 마리 잡아서 안겨주지 뭐.”
“다 들린다니까?”
“크흠....”
“가시곰 서식지 부근에서 패왕의 성이 보일 겁니다. 혹시 모르니 살펴둬요.”
“그래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마.”
*
크에에엥....
가시곰 새끼가 그녀의 품속에서 낑낑대고 있었다.
“추운가 봐. 자꾸 품으로 파고들어.”
“널 어미로 아는 거야. 어쨌든 약속은 지킨 거다.”
“그치만 이 녀석은 너무 작은데...”
‘흠... 조금만 더 가면 성이 보일 텐데.’
슈왁――!!!!!
캉―――!!!!!!!!!!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녀에게 향했고, 나는 재빨리 움직여 그녀를 꼭 끌어안고 화살을 막아냈다. 그녀를 보니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그녀의 얼굴이 왜인지 모르게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괘, 괜찮아. 고, 고마워. 근데 무슨 일이야?”
나는 귀를 기울이며 주변에 집중했다.
“.....공격이다. 여기 가만히 있어.”
츠팟!!
“어? 대장! 어디 가? 야!!!! 쟤 평범한 인간 맞아? 무슨 움직임이.....”
설산 위로 올라가 보니, 불타고 있는 패왕의 성을 찾을 수 있었다.
“패왕의 성이.... 불탄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패왕.
그는 모든 슈사이어 기사들의 귀감이자 우상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세워진 그의 성은 철벽의 요새일 뿐 아니라, 매서운 추위에도 굴하지 않는 기사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 패왕의 성이... 불타고 있었다.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셨습니까 대장.”
“표정이 왜 그래요? 뭐 이상한 거라도 보셨어요?”
“셋 다 채비를 갖춰. 패왕의 성이 불타고 있다.”
*
“어~이~!!!!! 어어이~!!!!! 거기 아무도 없어?!!!!”
“이상하군요. 평소대로라면 기사들이 달려 나와서 호통을 쳤을 텐데.”
“공격당한 게 분명한데... 성을 공격한 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차가운 눈바람이 휘날리며 패왕의 성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어쩐지 으스스합니다.”
“뭐야, 현성 씨 무서워요?”
“아, 아닙니다!”
“푸하하, 장난이에요 장난.”
“둘 다 조용히 좀 해봐요. 뭔가 이상해요.”
“너희들, 안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그만둬.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을걸.”
“어...그럴지도 모르지만, 무릇 음유시인이라는 자는 항상 노랫거리를 찾아야 하는 법이거든. 그래야 데뷔할 수 있는 거야.”
“데뷔요?”
“살아있어야 노래를 하던 춤을 추던 하지!!!!!!! 흥! 몰라 마음대로 해.”
“그럼 아가씨는....”
“됐어. 나 혼자 갈 거야. 인간들은 정말 바보들이라니까.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야.”
그녀는 그렇게 뒤로 돌아섰다.
“아가씨는 제가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현성이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나와 정희원, 유상아는, 성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잠시만요 대장.”
“응?”
“검을 준비하시죠. 느낌이 안 좋습니다. 이번엔 정말로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저도 이번에는 동의해요.”
“....그래.”
파츠츳!
허공에 스파크가 튀며 검이 내 부름에 응했다.
“가자.”
*
노랫거리를 찾아서.... 라는 변명으로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긴 용병 생활 속에서 벼려진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패왕의 성에서 세계의 멸망을 초래할 무언가 거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콰앙―!!!!
“독에 변질된 피부.... 대장 그 ‘여자’의 짓입니다.”
“독희가 이곳을 습격한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설마 성 안의 기사들이 모두 당한 건 아니겠지?”
콰드득!
그때 무슨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 근처야. 유상아, 탐지 마법으로 근처에 생존자를 찾아줘. 정희원, 유상아를 지켜줘.”
“예.”
“알겠습니다.”
나는 비명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이봐, 괜찮아? 정신 좀 차려봐.”
“으, 으윽... 가, 가까이 오지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패, 패왕이..... 사악한 독희가.....”
“패왕? 그 자도 당한 건가?”
“어, 엄마.... 집에..... 가고 싶.....”
털썩
그 말을 끝으로 기사는 숨이 멎었다.
“고향에서는 평안하길....”
나는 기사를 편하게 눕혀주고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어땠습니까?”
“낙오된 기사였어. 상처가 깊더군. 이미 틀렸어.”
“어머... 그곳에선 행복하시길....”
“이제 어쩔 겁니까?”
“돌아가자. 이곳에서 누가 살아남는다는 건 불가능해. 장송곡이나 부르러 온 건 아니라고.”
“저, 대장... 사실은 말입니다.”
“응? 뭔데?”
“내성에 생존자가 탐지되었어요.”
“저 안에?”
“돌아가는 게 맞겠습니다만....”
“아냐, 금방 살펴보고 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몸조심하십쇼 대장.”
*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던 패왕의 성은 폐허가 되었다.
성 곳곳에는 새빨간 불꽃이 흉포하게 날뛰었고, 분수대에서는 눈 녹은 물 대신 펄펄 끓는 용암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의미 없이 스러져 간 자들....
그들은 어떤 저주와 원망으로 눈을 감았을지....
나는 패왕의 알현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 남녀의 이야기가 들렸다.
“어떠셨나요? 복수의 시간이?”
“....너무 쉽군. 이젠 멸망만 남은 건가?”
‘멸....망?’
나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대화하는 두 남녀가 이 세계를 멸망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을.
도망치라고 본능이 외치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두 발은 성 내부를 향해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나아가고 있었다.
“복수는 끝났으니, 이제 일을 해주셔야죠.”
“계획은?”
“내 모든 군단장들이 동시에 마지막 방어선인 베히모스로 진격할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들은 저항할 생각도 못 한 채, 순식간에 쓰러지겠죠.”
“전쟁이 아니군.”
“말살이죠. 당신이 당신의 적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방어선..? 베히모스로 진격? 말살?!’
“음...? 불청객이군. 밖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설마 여기까지 들어올 줄이야....”
“.....젠장.”
나는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머나~ 사담을 엿듣다니, 영 나쁜 취미를 갖고 계시네요?”
“...낯이 익은 얼굴인데.”
“패왕. 그대와는 같은 전장에서 싸운 적이 있지. 오래전 일이다.”
“그런가... 또 한 명, 나를 아는 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군.”
‘어째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네. 어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어머, 그냥 가시면 곤란하죠~”
“이설화... 도대체 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는 짓이지?”
“어머 날 알아요? 이유라.... 그냥 재밌으니까요?”
“단단히 미쳤군.”
“손을 거둬라. 내 손님이다.”
카앙―!!!
패왕의 검과 내 검이 맞부딪히며 새파란 검격이 일어났다.
“독특한 검술.... 특이한 검... 그래, 그대가 기억난다. 최전방에서 몇 번이고 적을 격퇴시켰던 최고의 용병단의 단장이었지. 예명이.... 세비아라고 했던가?”
“크윽...!”
콰앙―!!!!!
“녹슬었군. 검도. 인간도.”
“허억, 허억.... 하아....”
주의 깊게 검을 휘두르며 나는 필사적으로 답을 찾았다.
대체 이 자에게는, 그리고 이 나라에는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빠져나갈 길은? 주의를 돌릴 수 있는 방법은? 독희의 군세는 어느 정도?
돌파할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생각하던 중 패왕은 나직이 읊었다.
“나는 슈사이어의 모든 나라를 쓸어버렸다.”
“뭐....라고?”
“이제야 집중하는 건가. 그래 슈사이어의 모든 인간들을 지워버리라고 명했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너무도 쉬웠지. 허탈할 정도로 말이야. 슈사이어가 무너지면 자연스레 아르카디아 대륙이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네놈... 제정신이 아니군.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것이지? 네놈은 모든 기사들의 귀감이자 최전방에서 싸운 영웅이었잖아!”
“그들은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 충직한 기사들과 신하들. 그리고 내 여동생까지.... 말 그대로 내 모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무자비한 짓을...!”
“후후.... 왕국과 권력을 빼앗긴 왕에게 자비를 묻는 것인가?”
“그래서 짐승만도 못 한 놈이 되겠다고? 가련하구나. 패왕!”
채앵―!! 콰아앙―!!!!!!!
“크윽... 이런 일을 벌이고도...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참회할 생각은 없다. 그거야말로 위선이지. 그런데 용병이여... 그대도 과부와 고아를 만드는 데 소질이 있던 걸로 아는데.... 그대야말로.... 천국에 갈 생각은 아니겠지?”
“.....부끄러운 과거다. 네놈에게 듣고 싶지 않다. 닥쳐라.”
“...끝까지 그 ‘힘’은 쓰지 않는군. 과거에 대한 속죄인가? 멍청하군.”
“슬슬 시간이 아까워지는군요. 어서 처리하시죠. 패왕.”
“....기억해 두겠다. 용병. 진짜 이름은?”
“남기고 싶은 이름은 아니야. 끝내라.”
“.....그럼 잘 가라.”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몇 번이고 각오했던 일이었다.
조금 편한 지옥에 갔으면 좋겠군.
슈팟―!
그때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것 봐. 내가 말했지? 죽는다니까.”
“흑염마황 한수영? 인간계에는 관여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 녀석한테 받아낼 게 있어서 말이야. 데려가겠어.”
슈팟―!
그녀가 나를 어딘가로 소환했다.
“으윽.....”
“괜찮아 대장?”
“네 말이 사실이었네.... 종말이니 뭐니 하는 거....”
“이제야 믿겠어? 멍청이. 독희도 초월자의 힘을 가진 꼭두각시라고. 지금의 나와 동급의 존재란 말이야.”
“그녀는 대체 왜 그렇게 된 것이지?”
“대륙이 생기면서 에스더들이 소멸했어. 그리고 그들의 파편 중 하나가 이설화에게 들어가게 된 거고. 난 세계를 관망하는 관찰자로서 이곳에 내려온 거고.”
“그녀는 뭘 할 생각인 거지?”
“그녀가 원하는 건 세상의 혼돈. 아마, 아르카디아 대륙 내 모든 지성체의 말살 혹은 그 이상이겠지.”
“세상의 혼돈...? 고상하군...”
털썩
“어? 이봐 대장! 정신 차려! 야!!!”
*
꿈을 꾸었다.
나는 끝없는 설원을 걷고 있었다. 전장에 남겨진 자들... 내가 만든 죄악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가련한 자여.. 그대가 만든 참상을 보라. 너는 무엇을 위해 싸웠지? 결국 죽고 죽이기를 반복할 뿐인데.’
‘너는 무엇을 위해 싸웠지? 결국... 종말로 귀결될 것을....’
나는 말했다.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패왕은 조소를 머금었다.
‘용병이여.... 설마... 천국에 갈 생각은 아니겠지?’
콰직!!
“씨발! 수레가 부셔졌잖아?”
“고운 말 좀 써요 희원 씨.”
“허억! 허억!”
“대장. 정신이 좀 듭니까?”
“여긴... 어디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깨셨습니까? 저희는 지금 피난 행렬에 합류하러 가는 중입니다.”
“피난 행렬? 모두 죽은 것이 아니었나?”
“아시겠지만, 독희와 패왕의 군대가 슈사이어 전체를 휩쓸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살아남는 자는 있는 법이죠.”
“한수영은! 그녀는 어디 있지?”
“나 여기 있어. 내 정체를 알고도 걱정이야?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다행이다... 아직 있었구나.”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당황하는 모습은 꽤 재밌었다.
“뭐, 뭐하는 거야! 이거 안 놔?!”
“아가씨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셨습니다.”
“...그랬지.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흥. 착각하지 마. 약속한 걸 받아내려는 것뿐이니까. 이 녀석은 무효야. 너무 작아서 방주에는 못 데려간다구.”
“.....그래.”
나는 망연자실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그 광경이 재현되고 있었다.
3년 전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전쟁의 화마에 삼켜졌거나, 추위와 기근에 죽어갔거나, 아니면 그때처럼 난민이 되어 추운 눈보라 속을 떠돌고 있겠지. 수백, 수천의 다른 꼬마들과 함께...
“서두르시오! 후방에 적군들이 진격 중이오. 죽고 싶지 않으면 달리시오!”
“정말 대륙을 멸망시킬 작전인가 봅니다.”
“이대로는 난민들이 희생되겠습니다.”
“....지금 남은 방어선이 어디지?”
“현재 슈사이어의 모든 방어선은 무너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베히모스 성벽입니다. 그곳이 뚫리면 아르카디아 대륙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시간을 끌지. 정희원, 이현성, 유상아,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아줘.”
슈팟―!!!
“대, 대장! 아직 몸이 성치 않을 텐데....”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너희 대장 말이야.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왜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거야?”
“역시 아가씨는 눈치채셨군요.”
“제가 말씀드리죠. 독자 씨는....”
*
독자 씨는 절대신이라 불리는 라하르트의 가디언이었어요.
라하르트의 절대적인 기사이자,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수호신이기도 했죠.
그러나 최초의 전쟁이었던 바르칸 전쟁 이후, 라하르트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신은 가디언이자 수호신인 독자 씨에게 ‘세비아’라는 검을 주며 소멸했어요.
신의 파편이 독자 씨에게 들어갔고, 그렇게 독자 씨는 영겁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태어나게 된 거에요. 그렇게 우리는 용병단에서 만났고, 독자 씨를 따르기로 결정했죠.
“그렇구나. 어쩐지 조금 다른 느낌의 힘이라 했더니 절대신의 파편이었구나.”
하지만 독자 씨는 세계의 질서를 관리하고 수호하는 가디언으로써 세비아라는 명검을 들고 용병으로 활동했죠. 우리에게는 적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과부로 만들거나 고아로 만들게 되었어요.
기억이 온전치 않았던 독자 씨는 어느 날 세비아의 설화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깨달았고, 큰 회의감에 빠져 용병을 그만두게 됐죠.
“그때가 길영이랑 유승이라는 꼬마들에게 하프를 구입하고 은퇴했던 날이야.”
“대장님이 음유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죠.”
“그놈의 음유시인은 얼어 죽을 음유시인.”
“왜 난 괜찮은데? 설원의 음유시인. 딱 이잖아.”
“....아가씨 우리 대장 좋아하는 건 아니지?”
“뭐, 뭐라는 거야!! 내가 그 허여멀건 놈을 왜 좋아해!!!”
“아니면 아닌 거지. 얼굴은 왜 그렇게 새빨개졌대?”
“아씨! 닥쳐! 유상아! 하던 얘기 계속해봐.”
그렇게 독자 씨는 용병을 그만두게 됐고, 세비아라는 검은 더 이상 들지 않겠다며 창고에 처박아 두셨죠.
“하지만 괜히 세비아가 아니야. 신이 만들고, 가디언의 힘이 깃든 세비아는 손질을 안 하고, 아무리 적을 베어도 그 칼날은 절대 상하는 일 없이 날카로운 명검 중에 명검이지.”
“세비아에는 강대한 힘이 깃들어 있죠. 하지만 독자 씨는 그 검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더 이상 들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가씨를 만나게 된 겁니다.”
한수영은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카앙! 카앙!
정신이 들었을 때는 다시는 사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검을 들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전장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제발!!!!’
콰앙―!!!
“.....구하지 못했군.”
“대장! 괜찮으십니까? 설마 이 많은 병사들을 다...?”
“.....시간이 없다.”
“.......”
“알려야 해. 슈사이어 뿐만이 아니야. 이곳이 뚫리면 그들은 전 세계로 진격할 거야. 이대로라면 저항해볼 생각도 못 한 채 몰살될 거야.”
“하지만 누구에게 알리겠다는 거야? 알린다면, 저들을 막을 자가 있어?”
“막을 거야. 아마도. 저들의 수장이 모두 죽는다면 군대들은 오합지졸이 되지.”
“대장! 설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자.”
“하지만.....”
“걱정하지 마. 안 죽을게.”
“이현성, 정희원, 신호탄을 쏴.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아봐.”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갈 곳이라면 하나밖에 없잖아. 최후의 방어선인 ‘베히모스’로 간다.”
*
한수영이 말하길, 독희 이설화에게 들어간 파편은 질병의 파편이라고 한다.
독을 이용해, 주변 대기를 오염시키고, 자신의 병사들로 만드는 끔찍한 힘이다.
자신은 세계를 관망하는 관찰자라고 한다.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종말이 다가올 때, 방주를 이용해, 질서를 다시 이어가게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생명의 초월자라고 불린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라하르트는 어째서 내게 이런 힘을 준 것이고, 수호신으로 임명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든지, 눈앞의 것이 아니면 볼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난 눈앞의 일에 매달리기로 했다. 우리는 베히모스로 간다.
그곳에서 패왕과 독희를 막는다.
*
“이렇게 많은 자들이 함께할 줄이야.”
“슈사이어 각지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대장과 함께 이 세계를 지키겠답니다.”
“좋아.”
나는 성벽 위로 올라가 이곳에 하나로 모인 병사들을 바라봤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하고 크게 말했다.
“쉽지 않을 싸움이 될 거다. 누구는 살 것이고, 누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는 세계를 지킨 영웅들이고,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슈사이어를 위하여!”
“대장 병력 배치는 끝났습니다.”
“그래. 베히모스라는 명칭답게 이 성벽, 매우 단단하고 높아. 봉화 작동시키는데 얼마나 걸리겠어?”
“음.... 최소 반나절은 걸릴 것 같아요.”
“대장, 마력이 모이기 시작하면, 적들도 낌새를 눈치채고 바로 진격해 올 겁니다.”
“그래. 몰려오겠지. 어마어마하게.”
“준비하는 동안 전 이곳을 떠날 수 없으니, 싸움은 대장과 현성 씨, 희원 씨, 셋이서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괜찮아. 이 성벽, 수비하는 쪽이 더 유리해. 어떻게든 막아낼게.”
“네. 전 탑 내부를 살펴볼게요.”
“그나저나 한수영은?”
“아가씨는 방주로 보낼 동물들을 찾겠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군.”
“전 아가씨가 생명의 초월자라니 믿기질 않습니다. 초월자라면 성숙한 여신의 모습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생명의 초월자가 그렇게 귀여운 아가씨였다니.”
“아가씨를 좋아하시는 겁니까?”
“음.... 글쎄...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나도 잘 모르겠네. 그나저나 추울 텐데...”
“이젠 초월자 걱정까지 하시는 겁니까.”
“방주를 만드느라 힘을 다 써서 지금은 인간이나 다를 바 없잖아. 나도 지금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고. 맞아, 이곳 상황은 어때?”
“공성전에는 조금 유리하겠지만 쉽지 않겠습니다. 식량도 무기도 부족하지만, 제일 문제는 인원 부족입니다.”
“소모전이 길어질수록 말라 죽는 건 우리 쪽이 되겠군....”
“예. 하지만 성벽이 쉽게 뚫리지는 않을 겁니다. 워낙 견고하고 높은 벽이라.”
“그래. 최대한 막아보자. 폭약은 아직 남은 거 있지?”
“예, 폭약은 넉넉하게 있습니다.”
“다리를 폭파시키면 잠깐 시간을 끌 수 있겠어.”
“말 그대로 잠깐일 겁니다. 협곡의 간격이 크지 않아서 큰 의미는 없습니다.”
“저, 대장님.... 이대로라면 일주일도 못 버팁니다. 차라리 후퇴해서....”
그때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내려오고 있었다.
‘눈송이?’
“난 눈을 좋아해.”
“예? 또 그 소리입니까?”
“앞으로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아.”
*
며칠 후
패왕과 독희의 정찰대와 공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역시 쉽지는 않네. 다만 저들의 본대가 좀 늦게 온다면 해볼 만 할 지도...”
‘유상아를 믿어봐야지.’
“앗, 대장님. 밤새 전투를 치르셔서 피곤하실 텐데,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괜찮아. 상황은?”
“각 관문에서 적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지금은 기세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다행이네. 지금 가장 많이 몰려드는 쪽이 어디야?”
“동쪽입니다. 그리고 내일쯤이면 적들의 본대가 도착할 것 같습니다.”
“내일이라.... 시간이 많지는 않네. 알겠어.”
나는 동쪽 관문으로 향했다. 현재 몰려드는 기세는 많이 떨어졌지만, 다른 관문에 비해 동쪽 관문에는 아직 많이 몰려들고 있었다.
스릉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 검과, 가디언의 힘과 함께 적들을 무참히 쓸어나갔다.
“쿨럭..! 쿨럭...!”
“유상아. 현재 상황은 어때?”
“거의 다 됐습니다. 내일 자정 무렵엔 작동할 거예요.”
“괜찮아? 많이 수척해진 것 같은데.”
“정신을 오래 집중했더니 조금 피곤한 것뿐이에요. 대장 걱정이나 해요.”
“....그래. 내일이 걱정이지. 내일이 최후의 결전이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각오는 되어 있으니까.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대장과 함께 싸우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기적 아니겠어요?”
“하하.... 어떻게든 막아낼게. 그동안 고마웠어 유상아.”
“.....저도요 독자 씨.”
아마 유상아는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돌아왔군 이현성, 정희원. 전황은?”
“...병사 여섯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 편히 쉬기를.....”
“적의 본대는 내일 새벽에 도착할 겁니다.”
“그래... 내일이 최후의 결전이 될 거야. 푹 쉬어. 참, 한수영은 못 봤어?”
“아가씨는 돌아오는 길에 만났습니다. 몬스터를 많이 포획해서 좋아하더군요.”
“그래... 나도 이만 쉬러 가볼게.”
“저기, 대장님.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눈은 사랑’이라는 거 무슨 의미였습니까?”
“응? 아아... 그의 기사인 가디언으로 활동하며 한창 정신없이 싸울 때 이야긴데.... 어느 날 깨달았거든.”
“무엇을 말입니까?”
“나라는 녀석은 결국 세상을 재와 불씨로 메우고 있을 뿐이라는 걸. 전투가 끝나고 폐허가 된 마을을 내려다보며 죄악감에 몸서리치고 있었지. 그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내가 만든 과오들, 잿더미가 된 마을을 하얗게 덮어 주더라고.”
“대장....”
“조금 우습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 하얀 눈은 마치.....”
“사랑인 겁니까.”
“그래. 그리고 문득 어머니가 떠오르더라, 수호신의 기억을 잃고 나를 키워주셨던 따듯한 어머니를.”
“.....”
“어때? 이번 대답은 맘에 들었어?”
“...그야 뭐......”
“하하하, 그럼 둘 다 얼른 쉬러 가. 이현성은 그만 울고.”
“네, 넵!”
*
♩♬♪♬♩♪♬
마지막으로 울어본 것이 대체 언제였던가. 얼어붙은 볼 위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센 바람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뜨거움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이 대장.”
“....왔어?”
“어? 울고 있었어? 눈이 빨간데.”
“아, 아니. 눈이 들어가서 그럴 뿐이야.”
“....내일이 마지막 전투라며? 버틸 수 있겠어? 어마어마하게 몰려오던데.”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인간은 수백 년을 살아왔는걸. 하루야 뭐, 간단하지.”
“....대장.”
“그보다 네 일은 어때? 마무리되어가?”
“이제 한 마리 남았어. 힘도 얼마 안 남았네. 어쨌건 이 지긋지긋한 추위도 이제 끝!!”
“다행이네...”
“......실은 자리를 남겨뒀어.”
“응?”
“그러니까.... 방주에 한자리 남겨놨다고.”
“.......미안.”
“.....인간들은 정말 바보들이야.”
“그러게 말이야.”
“바보. 멍청이. 얼간이. 흥!!”
“하하....”
“후회..... 안 하겠어?”
“후회라.... 하겠지? 이런 귀여운 아가씨를 두고 가야 한다니 말이야.”
“뭐, 뭐라는 거야!!!!”
차갑게 불어오는 눈보라 속에서 그녀의 양 볼에는 은은하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크크큭.”
“뭘 웃어!”
“귀여워서.”
“그거 뿐?”
“예뻐.”
“흠, 뭐. 나쁘지 않네. 그럼 이제.....”
“응, 작별이네. 고마웠어.”
“진짜 멍청이.......”
정말이지 후회감이 들었다. 눈앞에 이런 아름다운 아가씨를 두고 간다는 게.
지금만큼은 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와 내가 조금 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조금 평범했었을까.
“.......죽지 마.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꼭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응?”
나는 그녀의 팔을 끌어당기며 내 품속으로 안았다. 내 몸에 쏙 들어오는 작은 체형 너머로 은은한 레몬향이 올라왔다.
“뭐, 뭐해....”
“....지금 아니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뭐? 무슨...!”
그녀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얗게 내리는 눈보라 속에서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맞닿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내 몸 전신을 감싸는 것 같았다.
“....좋아해.”
“뭐?”
“좋아해. 지금 아니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그녀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익고 있었다.
“이 하프를 부탁해. 아무나 괜찮으니까 밖의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줄래?”
“....뭐야, 음유시인의 꿈은 이제 접은 거야?”
“좋은 곡을 완성했으니까. 이만하면 성공적이지.”
“그럼 들려줘봐.”
“어? 그, 글쎄... 하지만...”
“이 녀석도 조르잖아. 어서.”
“하하. 알겠어. 그럼 딱 한 번 만이다.”
♩♬♪♬♩♪♬
멜로디는 춤추는 눈보라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져 갔다.
어쩌면... 그녀와는 이것이 마지막이리라. 나도 모르게 첫만남을 떠올리곤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
“어때?”
“....최고의 연주였어.”
“하하, 이거 좀 쑥스럽...!”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시 입을 맞췄다.
“최고의 선물이네.”
“....죽지 마.. 꼭이야.”
“노력해볼게.”
“...안녕. 김독자.”
그렇게 그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
다음 날이 밝았고 이른 새벽,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새카만 군대가 침공했다.
“어마어마하네. 그동안 용케도 저 병력을 묶어두고 있었네.”
“유격전이 저희 전문이지 않습니까.”
“....수영이는 무사히 떠났지?”
“예. 어젯밤 방주와 함께 무사히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그래....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대장.”
“왜?”
“아가씨는... 그녀는 결국 인간을 버린 겁니까?”
“초월자라고 해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니까. 나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녀는 다른 임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
“적들이 몰려옵니다!!!”
“후... 후퇴! 후퇴하라!!!”
“으아악!!!”
패왕과 독희의 군대가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대장! 이대로라면 곧 다리가 돌파됩니다!”
“다리의 발파는?”
“신호는 이미 보냈습니다만... 아무래도 발파조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럴 수가...”
“....유상아를 만나야겠어.”
우우웅
“쿨럭! 쿨럭!”
“유상아? 괜찮은 거야? 피가.... 이렇게 될 때까지...”
“가, 가까이 오지 마요. 영창에 방해돼요.”
“아니, 영창을 멈춰 유상아. 작전은 실패야. 서쪽 관문이 돌파당했고, 발파도 실패야. 병사들을 물리고 산맥을 넘어서 후퇴해야 해.”
“아뇨... 대장,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쿨럭!!!”
“유상아!”
“떠나기 전, 아가씨가 다녀갔습니다.”
“....한수영이?”
“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생명의 초월자로서, 나 흑염마황 한수영이 말하노라, 관찰자의 이름으로 그대를 용서한다. 그러니.... 이제 자책은 그만둬, 대장.”」
“.......”
“그녀는 남은 힘을 모두 제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앞으로 한 시간이면... 영창이 끝납니다.”
“한 시간..... 아니야 하지만....”
“아가씨는,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군요.”
“대장, 내가 뭐랬어요? 아가씨 대장 좋아한다니까요?”
“이현성... 정희원....”
“발파조가 당했다 해도 화약은 아직 남아있을 겁니다. 저희가 직접 가겠습니다.”
“안 돼! 그건 자살행위야!”
“대장, 우리 모두 각오했던 일 아닙니까. 그리고 어차피 이곳이 뚫리면 모두 죽는 건 똑같습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온 겁니다. 희원 씨, 제가 돌파하겠습니다.”
“좋아! 이현성! 가자! 검과 방패가 나가신다!”
“이현성? 정희원!!!!!”
“후우... 대장.. 쿨럭! 싸우세요. 더 이상 어떤 후회도 남기지 말아요. 대장은 신의 파편으로서, 이 세계의 영웅이에요.”
“젠장....!”
“가요 독자 씨. 당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요.”
“....부탁해, 유상아. 앞으로 한 시간, 내가 어떻게든 막아낼게.”
*
“패왕? 어딜 보고 있는 거죠?”
“계략도, 전투도, 모두 저쪽이 위였던 모양이군.”
콰아아앙!!!!!
땅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들렸다.
“다리를 폭파하려는 게... 아니었어....?”
“용병 세비아라고 했던가.... 정말이지, 최고의 대장이군......”
콰아아아아―
산에서 터진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눈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군대를 물리세요 패왕!”
“그래서야 손 놓고 당하는 꼴이지. 전원 돌격해라!!!!”
“패왕! 내 군대를 전멸 시킬 작정이야?”
“눈사태다!!!!!”
거대한 눈사태가 적과 아군 할 것 없이, 전장을 쓸어버렸다.
“쿨럭...! 쿨럭...!”
“대장님!!”
“현재 적의 잔당은?”
“적들의 군세는 모두 눈에 휩쓸렸지만, 군단장들이 남아 있습니다!”
“봉화는? 얼마나 남았지?!”
“이제 30분 남짓입니다!”
“가라! 어떻게든 버텨내!!”
“예!!”
슬슬 한계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검을 놓지 못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너무 큰 빛을 져서일까... 검자루를 쥔 손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아...하아....”
키에에에엑!!!
“어떻게... 내 모든 군단장들을.....”
“하아...하아... 이제 남은 건.... 너희 둘 뿐인가?”
“.....정말 대단하군.....”
“덤벼라 패왕....”
카아아앙―!!!
그의 검과 내 검이 다시 부딪혔다.
“허나, 아직 녹슬어 있군.”
“....개소리 하지 마.”
파츠츠츳!!!!
새파란 전격과 함께 내 검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시는 쓰고 싶지 않았다. 내 힘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갔었으니까.
“부름에 응해라 ‘세이버’.”
콰아아아―!
[최초의 검, ‘세이버’가 당신의 부름에 응합니다.]
내 검이 변하면서 내 모습도 변하고 있었다. 온몸에 갑옷이 씌어졌으며,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이것이 최초의 가디언이었던 수호신의 힘이었다.
“무슨.....!”
“전력을 다해라 패왕. 네놈들은 이곳에서 죽는다.”
“정말이지 당신은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요!”
“세상은.... 멸망하지 않아.”
콰아아아아아!!!!!!
내 힘이 폭발하며 적들의 군대 절반을 쓸어버렸고, 독희의 한쪽 팔을 잘랐으며, 패왕의 검을 부러뜨렸다.
이제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끝이 왔음을 깨달았다.
“하아...하아....... 적의 잔당이 남았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검을 쥐어....”
“....이제 그만해도 좋다. 봉화도 작동했다. 나의 패배로다. 그대의 승리다.”
“하아... 하아....”
“....이제 이름을 물어도 되겠는가? 진짜 이름은?”
“....김...독자.”
“수고했다. 김독자....”
이렇게 나의 일생은 끝이 났다.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일 없이, 나의 이름은 눈보라로 흩날려 사라진다.
영웅들이여, 뒤는 그대들에게 맡긴다. 부디...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기를....
죽음을 각오하며 필사적으로 막았던 최후의 방어선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
몇 넌 후
키에에엑
“나 왔어. 대장. 오랜만이지? 어때? 이 녀석도 그 사이에 이렇게 자랐어.”
네가 목숨 걸고 지켜낸 봉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어.
해상전신 이지혜, 또 다른 초월자 장하영, 그리고.... 너가 하프를 구매했던 아이들도 특별한 힘을 얻어 이 세계를 지켜냈어. 너가 마지막까지 지켜준 덕분에 적들은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고, 패왕은 너에게 경의를 표하며 생을 마감했어.
독희가 계속 발악을 했지만, 결국 그녀도 죽고 말았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은 있었지만.... 우리는 결국 오래된 전쟁에서 승리했어. 아, 내가 지금 ‘우리는’이라고 했나? 으으... 그래! 나도 도왔어!!”
너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어. 원래는 인간계에 간섭하지 않는 게 규칙이었지만, 처음으로 규칙을 어기고 너희를 도왔어. 그 때문에 많은 힘을 소모해서 나도 소멸하고 이제는 영혼만 남아버렸다니까?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인데... 이현성과 정희원은 설산에 파묻혀 있었어. 하지만 그 두 녀석들은 환하게 웃으며 서로 마주보고 있었어. 유상아도... 탑 내부에서 살짝 미소를 짓고 있더라. 셋 다... 너희들 말로는 고향에 돌아간 거지.”
“고생했어 너도.”
그녀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죽지 말라고 했잖아! 너한테 아직.... 좋아한다고 말 못 해줬는데....!”
그녀의 따듯한 눈물이 나에게 떨어졌다.
그때 꼭 쥐고 있던 내 검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무, 무슨.....!”
환한 빛이 그녀를 감싸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계를 관리하는 신으로서, 이제 이 검을 너에게 맡기마.」
“이... 목소리는 라하르트...?”
「그저 오래된 수호신에 대한 나의 변덕이라고 생각해주게.」
[최초의 검, ‘세비아’가 당신에게 귀속됩니다.]
[‘세비아’가 검의 기사를 찾습니다.]
검이 새파란 빛을 내더니, 그녀 앞에 누군가가 소환되고 있었다.
김독자였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경을 표했다.
“가디언 ‘세비아’. 왕을 뵙습니다.”
“김독자!!!”
그녀는 그에게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도 천천히 그녀를 안았다.
“오랜만이야 한수영. 못 본 사이에 많이 수척해졌네?”
“멍청이! 얼간이! 바보! 흥!!”
“하하, 그래그래.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나의 신?”
“...나도 좋아해.”
“응?”
“그때 대답 못 해줬잖아! 나도 너 좋아한다고!!!!”
“수영아...”
“앞으로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지키자. 너는 영웅이야 김독자.”
그녀와 내 입술이 포개졌다.
그저 지나가는 용병이었다. 특별한 과거를 지닌 신이었다. 그리고 나의 그녀와 함께, 이 세계를 지킬 것이다.
이것은 지나가는 설원의 음유시인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