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체의 자아가 잠들었습니다.]
[자율 활동이 시작됩니다.]
[육체의 통제권을 이양받습니다.]
25살의 한수영의 자아가 잠들고, 1863회차의 한수영의 자아가 깨어났다. 한수영은 12년 동안 늘 그래 왔듯,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플랫폼에 접속해 댓글을 확인하기 위해 오늘 업로드 된 멸살법의 연재분을 클릭한 다음, 스크롤을 쭉 아래로 내리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달린 장문의 김독자의 댓글이 있었다.
[오늘도 재미있었습니다 작가님. 특히 중혁이가 포세이돈을 쓰러트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그 장면 직접적으로 나온 거만 10번은 넘을 텐데, 그게 그렇게도 재미있을까.”
김독자의 댓글을 읽은 한수영은 피식 웃으며 자판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 장면이 10번은 넘게 나왔을 텐데, 아직도 재미있으세요?]
한수영이 김독자의 댓글에 답글을 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새로운 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에 페이지를 새로고침 하니 한수영의 답글 아래로 다시 장문의 댓글이 달렸다.
[물론이죠 작가님! 그 장면뿐만 아니라 중혁이가 유성참을 쓰는 장면, 중혁이의 특제 소스를 이용한 요리를 맛본 일행들 넋이 나가는 장면...}
한수영은 스크롤을 천천히 내려 김독자의 댓글을 한글자 한글자 천천히 읽었다. 깨어있는 동안의 모든 시간을 멸살법을 쓰는데 쏟아붇는, 취미도 친구도 없는 한수영에게는 김독자가 다는 댓글을 읽고 거기에 답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고, 유일한 위로였다. 20여 분간의 대화가 이어지고, 내일 연재될 멸살법을 쓰기 위해 김독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던 한수영의 눈에 김독자가 단 마지막 댓글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작가님, 중혁이는 생일이 언젠가요? 중혁이가 생일 축하를 받는 모습이 한 번도 안 나와서요.]
“유중혁 생일? 언제더라…”
한수영은 일어나 선반 사이에 숨겨둔, 유중혁의 삶과 김독자에게서 받은 정보를 정리한 공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아 여기 있네, 8월 3일.”
[설정집에 8월 3일이라고 정해뒀네요.]
한수영이 전달받은 유중혁의 삶에 유중혁의 생일이란 날짜만 있을 뿐, 생일을 챙기거나 축하받은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것만을 신경 쓰던 유중혁이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고, 그렇기에, 12년의 연재 동안 멸살법에 유중혁의 생일이 나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문득 한수영은 김독자라는 사람을 알게 된 후 처음으로 김독자의 생일이 궁금해졌다.
“생일이라...그러고보니 이 녀석은 생일이 언제일려나?”
[독자님은 생일이 언제신가요?]
한수영이 답글을 달았지만, 아까와 달리 김독자의 댓글은 바로 달리지 않자 한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그로부터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한수영이 기다리던 새 댓글이 등록되었다는 알림이 도착했다. 알림을 눌러 댓글을 확인한 한수영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 오늘이 생일입니다 작가님. 부모님께서 두 분 다 고향에 계시고 친구들도 다들 바빠서 이번 생일은 제대로 축하를 못 받았지만요.]
“거짓말하고 있네…”
한수영은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버린 부모에게 생일을 축하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고, 가끔 그렇듯 쓸모없는 선물만을 던져두고 갔다. 그렇기 때문에 한수영은 생일에 대한 추억이 없었고, 생일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김독자에겐 일상이 파괴되기 전,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받은 기억이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가 감옥에 갇힌 김독자에게, 친척들한테 학대만 당했을 김독자에게, ‘지하살인자의 수기’가 출판된 뒤 학교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을 김독자에게, 생일을 축하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일을 언급하는 일이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좋아하는 작가에게 이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변명을 생각하느라 댓글을 쉬이 달지 못했을 것이다.
“ㅂㅅ아...김독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고 들었으니까 생일 같은 거 제대로 못 챙겼을 거, 쉽게 예상할 수 있었잖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의 행동을 자책한 한수영은 한글자 한글자 천천히, 그리고 정성을 담아 타자를 쳤다.
[정말요?? 생일 축하드려요 독자님. 12년 만에 독자님의 생일을 안 사람이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축하드려요.]
이번에도 한수영의 댓글에 대한 답글은 곧바로 달리지 않았지만,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1분 정도가 지나고 답글이 달렸다는 알림이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좋아하는 작품의 작가님한테 직접 생일축하도 받고, 저 엄청 성공했네요.]
목소리로 전달된 축하도 아니었고 선물도 없는 한 줄의 글이 다인 축하였지만, 김독자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음이 모니터를 통해 한수영에게 전달됐고 모니터 너머에서 미소 짓고 있을 김독자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한수영은 김독자의 댓글을 보며, 이런 사소한 것에 기뻐하는 김독자의 모습 때문에, 그리고 김독자에게 이 이상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눈가를 닦은 한수영은 다시 댓글 하나를 달았다.
[내년 생일에도 축하해 드릴게요 독자님.]
[정말요? 나이를 먹는 게 기다려진 적은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네요.]
한수영은 김독자의 댓글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은 축하가, 자신의 작은 약속이 그에게 생일에 대해 조금이나마 좋은 기억을 안겨주길 바랬다. 하지만 다음 해 김독자의 생일이 되기 전, 멸살법의 연재가 끝나고 1863회차의 한수영의 자아가 소멸하며,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못했다.
*
원고 전달 작전이 시작되고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날도 한수영은 김독자가 있는 병실에서 전지적 독자 시점의 3부의 마지막 화 초고를 쓰고 있었다.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한 한수영의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게 떠있었고 눈은 빨갛게 충혈되고 볼살은 움푹 들어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다는 듯 빠른 속도로 원고를 써내려갔다. 그러던 중, 빠르게 움직이며 자판을 두드리던 한수영의 손가락이 어느 순간 서서히 느려졌다.
‘오늘은 2월 15일. 스마트폰의 날짜는 그랬다. 이곳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표기는 그저 ‘오류’일 뿐일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우연히 매겨진 날짜. 그럼에도 만약, 어떤 기적이 일어나 저 날짜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한수영의 손가락은 멈추기 직전, 하나의 문장을 완성시켰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었다.’
한수영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1시 30분이라는 시간 아래에 있는 오늘의 날짜에, 2월 14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시계를 한참동안 보던 한수영은 노트북을 덮고 의자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입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한수영은 무언가를 찾든 고개를 좌우로 계속 돌리며 집과 편의점을 제외한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 깜깜해진 거리를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던 그녀의 눈에 어떤 골목에 있는, 아직 불이 켜져 있는 빵집이 들어왔고,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 앞에서 가쁜 숨을 고른 다음 들어간 그녀를, 계산대에 앉아 있던 노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왠지 오늘은 늦게까지 열어두고 싶은 기분이더니만, 손님이 오려고 그랬나 보구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케이크 하나만 살 수 있을까요?”
“케이크는 다 나가고 이것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겠소 아가씨?”
노인이 손가락으로 진열장에 남아있는, 크기가 작고 딸기 외에 별다른 장식도 없는 생크림 케이크를 가리켰다.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이 시간에 다른 빵집을 찾기도 힘들고, 케이크면 되니까요.”
“알았소. 초는 몇 개나 넣어 드리면 될까?”
“큰 거랑 작은 거 3개씩 주세요.”
한수영은 말에 노인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가씨가 그 정도로 나이를 먹은 거 같지는 않고, 남자친구 줄려고 그런가?”
“아니요 그냥 친구…줄려고요.”
한수영이 말을 흐리자 노인이 대충 알겠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열장에서 케이크를 꺼내 상자에 넣고, 상자에 초와 폭죽을 붙여 그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케이크를 건네받은 한수영이 계산을 한 후 빵집에서 나왔다. 병원에서 나올 때와 달리 케이크가 깨질까 천천히 걸으며 병원으로 갔다. 김독자가 있던 병실에 들어가자 막 날짜가 2월 15일로 바뀌었다. 한수영은 침대에 설치된 테이블을 펼친 다음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초를 꺼내 하나씩 하나씩 케이크에 꽂았다. 그리고 손가락에 작은 흑염을 피워 초에 가까이 대자 초가 불타며 불빛을 내었고, 깜깜한 병실을 6개의 작은 촛불이 밝혔다. 타오르는 촛불을 보며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생일 축하합니다~멍청한 김독자의, 생일 축하합니다~와아아아아.”
한수영이 박수를 쳤지만 김독자는 미동도 없었다. 촛불의 불빛을 받아 주황색으로 물들은 김독자의 얼굴을 한수영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못 부니까, 내가 대신 분다?”
한수영이 고개를 돌려 작게 후하며 불자 반절의 촛불이 꺼졌다. 그녀가 다시 한번 숨을 들이 마시었다가 내뱉자 남은 촛불이 모두 꺼지며 불빛을 잃은 병실은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생일이었으면 생일이었다고 말하지 그랬냐. 생일에 개고생하는게 서러워서 울었다고 솔직히 말했으면 축하한다는 말이라도 해줬을 텐데, 괜히 사람 무안해지게.”
환생자의 섬에서 수식언 뺐기 시나리오가 끝나고 김독자가 울던 날, 그가 수식언 때문에 운걸로 착각했던 적 있는 한수영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남들 생일은 다 챙겼으면서 정작 지 생일은 언제라고 말해주지도 않고.”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김독자는 매년 일행들의 생일이면 도깨비 상점에서 케이크를 사고 쓸만한 아이템을 선물로 구해와 생일을 축하했다. 유상아의, 이현성의, 이지혜의, 정희원의 이길영의, 신유승의, 이설화의, 장하영의 생일을 챙겼고 심지어 공필두와 한명오의 생일도 챙겼다. 유중혁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생일빵을 때리려다 실컷 얻어맞기도 했었고, 한수영이 자신의 생일을 4월 1일이일이 밝혔을 때 모두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야유하던 와중에도 유일하게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정작 김독자는 한번도, 자신의 생일을 밝힌 적이 없었다.
“우리 버리고 도망간 곳에선, 생일 축하 잘 받고 있냐? 그래야 할 거다. 안 그러면 나 진짜 화낼 거니까.”
한수영이 그렇게 말했지만, 뿔뿔이 흩어져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태어난 김독자의 파편들 모두가 생일이 2월 15일일지도, 행복한 삶을 보낼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파편들 중에는 2월 15일이 생일이 아닌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고, 원래의 김독자처럼 축하받지 못한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그러길 소원하며, 자신의 두 손으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김독자의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내가 기억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그랬으면 여기선 이렇게 축하도 못 받았을 텐데.”
1863회차의 기억을 되찾은 한수영은 김독자의 생일이 언제인지 기억해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을 해봐야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김독자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만 더욱 크게 한다는 게 제일 큰 이유였지만, 자신만이 아는 김독자와의 추억이 있다는 것에 대한 작은 만족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한수영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기억이 재생되었다.
[내년 생일에도 축하해 드릴게요 독자님.]
[정말요? 나이를 먹는게 기다려진 적은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네요.]
오래전 약속했던, 김독자가 생일을 조금이나마 기대할 수 있게 하려고 했던 약속, 그러나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기억해낸 한수영은 꼭 잡고 있던 김독자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갖다 대었다.
“내가, 내가 미안해…생일 축하해준다고 약속해 놓고, 너 실컷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그래 놓고 그 약속 지키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해…”
김독자의 손등 위로, 한수영의 눈물이 한방울 한방울 떨어졌다.
“너 돌아오면 이것보다 훨씬 더 크게 축하해줄게…내가 직접 미역국도 끓여주고 케이크도 만들어서 축하해주고 선물도 한 아름 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 김독자…”
둘만이 있는 병실에서 한수영의 울음소리가 서럽게 울려 퍼졌다.
*
불이 꺼지고 창문에 커튼이 쳐있어 빛 한점 없는 방의 침대에 김독자가 누워있었다. 그때 문고리가 돌아가며 방의 문이 살짝 열렸고, 문틈으로 작은 인영 하나가 들어와 김독자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아쁘아 일어나, 엄마가 밥 머그래.”
“으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김독자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천천히 뜨자 올망졸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럴 땐 아빠 진지 잡수세요-라고 해야지 서아야.”
“아라써. 엄마가 진…진…진지 머그래!”
김독자가 피식 웃으며 서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래 우리 딸, 아빠랑 진지 먹으러 가자.”
침대에서 일어난 김독자가 서아를 번쩍 들어 자신의 어깨에 앉혔고, 머리 위에서 꺄르르 웃는 서아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김독자도 미소 지었다. 목마를 태우고 침실에서 나오자 부엌에서부터 나는 맛있는 냄새가 김독자의 코를 찔렀다. 김독자가 부엌으로 향하자 의자에 앉아 있는 비유가 있던 비유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생일 축하해 아빠.”
“그래 고맙다. 우리 큰딸.”
“히히.”
싱글벙글 웃던 비유는 김독자가 어깨에서 서아를 내려 의자에 앉히자 서아를 째려봤다.
“너 아빠 힘드니까 목마 태워달라고 조르지 말라고 내가 말했지?”
“서아 혼내지 마 비유야, 내가 태워준 거야…”
“아빠도 그러지 마. 쟤도 이제 혼자 걸을 수 있는데 걷는 법을 배워야지, 자꾸 그러면 애 버릇 나빠져.”
“언니 말 무시해 아빠. 부로워서 조래.”
“뭐, 뭐?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게 왜 부럽냐??”
“피이, 전에 언니도 아빠가 목마 태어주는거 내가 다밨는데.”
“이게 진짜….!
비유와 서아가 서로를 째려보고 있을 때, 두 개의 주먹이 번개처럼 자매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빡! 빠악!
“악!”
“아야!”
“아침부터 밥상에서 싸움질할래?”
앞치마를 두른 한수영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두 자매를 노려봤다.
“아니 서아가…”
“언니가 먼저…”
“어허!”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던 비유와 서아는 한수영의 호랑이처럼 매서운 눈빛에 몸을 움츠렸다. 두 자매를 조용하게 한 한수영은 몸을 돌려 천사같이 상냥한 표정으로 김독자를 바라봤다.
“잘 잤어 김독자?”
“나야 잘 잤지, 수영이 넌 어젯밤 늦게까지 마감했는데 안 피곤해? 오늘 아침은 그냥 내가 해도 된다니까.”
“나도 성좌인데 이 정돈 괜찮아. 그리고 생일인 사람이 어디서 일을 하려고. 이제 국만 푸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한수영은 선반에서 국그릇 4개를 꺼낸 다음 국자로 국을 한 그릇씩 퍼 쟁반에 놓았다. 쟁반을 든 한수영이 식탁으로 가 각자의 자리 앞에 국그릇을 하나씩 놓았다. 김독자가 소고기가 잔뜩 들어간 먹음직스러운 노란색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니 고소함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자자, 다들 조금씩 비켜봐.”
그때 한수영이 냉장고에서 꺼낸 케이크를 들고 와 식탁의 가운데 빈자리에 놓았다. 연한 갈색 빛 초콜릿 크림에 얇은 초콜릿이 잔뜩 뿌려진 먹음직스러운 초콜릿 케이크 위에 김독자와 한수영, 비유와 서아의 모습을 한 쿠키가 하나씩 꽂혀 있었다.
“실력이 갈수록 느는데 수영아? 옛날에 케이크 시트 구우다 불냈다는 게 더 이상 믿겨지지 않을 정도야.”
“언제 일을 말하고 있어. 그때부터 시작해서 5년 넘게 페르세포네한테 갈궈지면서 교육받고 있는데, 이제 이정돈 기본이지.”
한수영이 그렇게 말하며 케이크에 초를 하나씩 꽂았다. 한수영의 손에 든 초를 본 김독자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한수영의 손에는 큰 초 4개가 쥐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저기 수영아 나 아직 삼십대인데…”
“삼십대 후반이면 마흔도 얼마 안남았는데, 초 꽂기 귀찮으니까 그냥 넘어가. 그리고 너 예전에 내 축하받으려고 나이 빨리 먹고 싶다며?”
“너야말로 언제적 이야기를…”
“나도 빨리 나이 머글래!”
김독자의 속을 모르는 서아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 초를 다 꽂은 한수영이 흑염으로 초에 불을 붙이고 부엌의 불을 끈 다음 앞치마를 풀고 자리에 앉았다.
“자 하나 둘 셋!”
한수영의 구호에 맞춰 세 모녀가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생신) 축하합니다~생일(생신) 축하합니다~사랑하는 남편(아빠)의~생일 축하합니다~와아아아!”×3
셋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촛불을 끄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는 김독자를 세 모녀가 말렸다.
“잠깐 김독자 소원 빌고 꺼야지!”
“맞아 아빠!”
“소언 빌어 소언!”
“아차, 깜빡할 뻔했네. 우리 수영이 작품 잘 써지고 쓰는 것마다 대박 나고, 우리 비유 일 적당히 하게 해주고, 우리 서아 건강하게 잘 크게 해주세요.”
소원을 빈 김독자가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후하며 내뱉자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매년 같은 소원만 빌고, 빌 소원이 그렇게 없어? 다른 소원도 좀 빌어봐.”
“그렇게 말해도, 나한테는 이것밖에 소원이 없는걸.”
“어련하시겠어.”
그다음으로는 선물 증정식이 시작되었다. 서아가 주머니에서 색종이로 만들어진 팔찌를 김독자에게 주었다.
“바다(받아) 아빠! 내가 어리니집에서 만드러써!”
“이렇게 예쁜 걸 혼자서 만들었어? 우리 서아 대단하네!”
김독자가 손목에 팔찌를 끼며 감탄했다. 그 다음으로 비유가 허공에서 안경집을 하나 꺼내 김독자에게 주었다. 김독자가 안경집을 열자 검은색 테두리에 둥근 안경알을 가진 안경이 있었다.
“아빠 소설 읽을 때 쓰라고 구해왔어. 우두머리급 수정 귀수산 등껍질에서 채취한 수정으로 만든 거니까 효과는 확실할 거야.”
“고마워 비유야. 안 그래도 요즘 눈이 뻑뻑한 거 같아서 안경을 하나 맞출까 고민 중이었는데.”
김독자가 안경집에서 안경을 꺼내 쓴 다음 고개를 돌려 두 딸을 바라봤다.
“어때 괜찮아?”
“잘 어울리네 아빠.”
“머시따!”
두 딸의 칭찬에 김독자가 환하게 웃으며 안경을 벗고 다시 안경집에 넣었다. 그때 자기방에 갔던 한수영이 포장지가 씌워진 꾸러미를 하나 들고 와 김독자에게 건냈다.
“자 받아, 내 선물.”
“이게 뭐야 수영아?”
“열어봐, 아마 내 선물이 가장 마음에 들걸?”
자신만만한 한수영의 얼굴을 본 김독자가 테이프를 떼어내고 포장지를 벗겨냈다. 그러자 고풍스러운 청색 하드보드지 표지에 금색 실로 자수된, ‘전지적 독자 시점 외전’이라는 제목이 김독자의 눈에 들어왔다. 눈이 휘둥그레 떠진 김독자가 한수영을 바라봤다.
“수, 수영아 이거…”
“그래, 네가 옛날부터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전독시 외전이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거니까, 물에 빠뜨리거나 찢거나 태우거나 하면 가만 안 둔다?”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영구 보존처리 해놓고 내 지문 안 묻게 볼 때마다 장갑 끼고 봐도 모자란대.”
“그런 꼴사나운 짓은 하지 말고 이 오타쿠야.”
한수영이 핀잔을 주자 김독자는 머쓱해하며 외전을 다시 포장지에 싸 아공간에 넣었다. 세 사람의 축하를 받고 기분이 몹시 좋아진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밥 먹고 놀이공원 갈까?”
놀이공원이란 말에 비유와 서아가 눈을 빛냈다.
“조아! 조아!”
“나도 찬성.”
“오늘 주말이라 사람 많을 텐데, 안 힘들겠어? 그냥 집에서 쉬지.”
두 자매와 달리 한수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김독자를 바라봤다.
“우리 가족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나한테 가장 좋은 휴식이야. 그리고 밖에서 점심이랑 저녁 먹고 들어오면 식사 준비나 설거지할 필요도 없고 좋잖아.”
김독자가 싱긋 웃으며 오른손으로 한수영의 왼쪽 빰을 문질렀다.
“칫, 알았어.”
“자자, 이야긴 그만 하고 어서 밥 먹자 이러다 밥 식겠다.”
“맛있게 먹어 김독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머껬슴니다!”
네 사람이 일제히 숟가락을 들어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대화 소리에 묻히고, 함께 식사하는 네 사람의 얼굴에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김독자의 평화롭고 행복한 생일의 시작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