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는 벌써 해가 지는 중이었다.

벌써 바닥을 드러내는 병이 못마땅했는지 그는 냉장고에서 새로운 병을 꺼내들었다.


약간은 알싸한 향기가 도는 액체가 목구멍을 뜨겁게 넘어가는 소리만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

그 침묵을 깨는 소리에 여기에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짧은 한숨과 함께 김독자는 다시 식탁에 앉았다.

아무리 마셔도 울렁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그는 몹시나 불만이었다.


아니, 오히려 마실수록 더 답답했다.

흐려지는 정신과 함께 그 기분 나쁜 울렁임은 심해졌고 결국 김독자는 몸을 식탁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알아버렸구나.'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 김독자가 느낀 심정은 그 한 줄뿐이었다.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그녀의 이별선언이 드디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그 말을 듣고 이해하기도 전에,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문장이 그의 귀에 꽂혔다.



"내가 내 감정을 잠시 착각했나 봐, 미안."



"그냥 우리 예전처럼 지내자."




"그래..."



이유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수영이 자신에 대한 감정을 알아버린 것이 그 이유라는걸.


언젠가는 자신을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듯 그녀의 감정은 '착각'에 가까웠으니까.



자신은 한수영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반대가 성립하는지는 김독자도 한수영도 알지 못했다.


한수영은 멸망 이전의 김독자를 구원했고, 김독자는 멸망 이후의 한수영을 지켰다.

둘의 사이가 단순한 작가와 독자의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관계 때문에 한수영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김독자라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인지, 아니면 그저 작가가 자신의 유일한 독자에게 느끼는 애착일 뿐인지.



그래서 한수영은 그의 고백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이 끌어올린 그 손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에.



물론 김독자도 한수영이 그 둘을 헷갈려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김독자가 느끼기에도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행위는 '사랑'보다는 '애정'에 가까웠다.


스스로의 마음을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했던 건 순전히 그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이 상태에서 한수영이 자신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놓치기가 싫었다.

생애 처음으로 내 모든 것을 다해 온전히 사랑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 있을까.

자신을 향한 마음을 그녀가 헷갈려 한다면, 자신이 확실하게 만들어주면 될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김독자는 믿었다.

오랜 시간이 담긴 진심은 결국에 통하기 마련이라고.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자신과 함께, 그렇게 둘의 위태로운 연애는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독자는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과는 무언가 다르다는걸.


언젠가부터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김독자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수영을 향한 자신의 마음과, 자신을 향한 한수영의 그것은 무언가 미묘하게 달랐다.


게다가 김독자가 한수영을 사랑하는 만큼 한수영이 김독자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김독자의 생각으로는.


그래서 더 불안해했다.

그녀의 사랑을 더 갈구했고, 그녀에게 부담만을 더했다.

집착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그가 차마 놓을 수 없었던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더해지는 집착 속에서 그녀는 조금씩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둘이 싸우는 날은 잦아졌고 김독자는 점점 더 그녀의 사랑에만 매달렸다.


그럴수록 한수영은 부담스러워했고, 김독자는 웃음을 잃어갔다.

한수영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그의 능글맞은 웃음을, 그녀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별이었다.

김독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 말에 잠시 헷갈렸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서로 안될 사랑에 매달려 힘겨워 하기보다는 깔끔하게 갈라서자고.

그게 너와 나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한수영은 그렇게 믿었다.




그런 한수영의 생각을 김독자가 모를 리 없었다.

그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했을까.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는 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 당장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지라도, 진실되지 않은 마음으로 이어나간 사랑이야말로 언젠가 더 큰 상처가 될 뿐이니까.



그런 그녀를 보며, 김독자는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을 그녀가 보지 못하기를 원했다.

혹시나 동정심에, 또 안아주게 될까 봐.

그렇게 너의 마음을 또 속이게 될까 봐.



지금이 그녀를 보내줄 때라는 걸 그는 직감했다.

지금 그녀를 붙잡는 것이나, 설득하는 것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다짐했던 거잖아.'


언젠가 이별이 오면,

웃으며 널 보내주겠다고.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너를, 그때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겠다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김독자는 지금 그녀를 보내줘야 했다.

그렇게 그녀와 헤어져 김독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그녀를 기억 속에서 쉽게 놓아줄 수 없는 걸까.


더 이상 술따위에 기대 이 감정을 잊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김독자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뒤졌다.

곳곳에 남아있는 건 자신과 그녀였다.


마치 오늘 아침의 일은 모두 거짓이라는 듯이, 둘은 연인같이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냥 어제처럼, 다른 수많은 여느 날들처럼,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나를 봐줄 수는 없을까.



바보같이도, 헤어지고 나서야 김독자는 지금껏 자신이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이제는 괜찮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한 번 더 묻고 싶었다.


내 곁에 있어줄 수 있겠냐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는 그녀일지라도, 김독자는 이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한 사람의 마음을 쉽게 얻으려고 했을까.


왜 그렇게 매달리기만 했을까.



제대로 사랑을 준 적도 없으면서, 내 것이 더 모자란다고, 떼쓰기만 했을까.







진실은 언제나 아픈 법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자신이 한수영을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였다.


사진 속에서 자신의 머리를 끌어당긴 채로 활짝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김독자는 조용히 읊조렸다.

그녀에게 더 이상의 미련은 가지지 않을 것처럼.



"그동안 사귀어줬다는 거에 고마워해야지..."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일이 없었던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한수영도 기억할 것이고, 김독자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의 서툴렀던 첫 연애를.

사랑했기에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은 김독자의 가슴속에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혹시나 언젠가 그녀가 지금의 김독자를 다시 그리워하는 날이 온다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그와 그녀의 사이는 어색한 친구 사이로 남아있을 것이다.

마치 그들의 관계가 친구와 연인 사이에 놓여있었던 처음처럼.


두 번째는 처음보다 더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김독자는 그것을 상상했다.


머리에는 열감이 돌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김독자는 그대로 엎어져 잠들었다.

다시 한번 자신의 꿈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의 핸드폰이 울리는 건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 김독자

- 내가 잘못 생각햇ㅅ어


- 부재중 전화 (1)


- 제발 전화 좀 받아봐......








해가 졌지만 빛까지 모두 사라지지는 않은 초저녁, 그친 줄 알았던 바람이 다시 서늘하게 불고 있었다. 












3600자

후회물 써보고 싶었는데 뭔가 망한듯

이왕 이렇게 된거 쓰고 있던 독수 시리즈물을 위한 제물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아무튼 잘 봤다면 개추랑 댓글 부탁 +)제목 추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