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reader/83518742
그림은 처음으로 그려봤음.(글 마지막에 넣었음)
그림쟁이들의 고충을 알게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행복했던 재회를 탓하랴, 불안정하게 복구된 시스템 탓에 여러가지 혼란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11월의 중반부에 들어선 어느 날이었다. 가을이라면 가을이고, 겨울이라면 겨울인 그런 계절. 종막을 연출하는 듯 가뿐히 떨어지는 낙엽이 쓸쓸함을 자아낸다.
기분좋은 쓸쓸함이다.
"수영아."
"한수영?"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모두가 학교나 일터에 가고 백수인 나와 작가인 한수영만 집에 남은 시간이다. 눈을 슥슥 비비며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바로 옆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향한다.
방문에는 인기 소설 작가답게 여러가지 팬레터와 귀여운 생김새의 고양이 엑세서리가 달려있다.
목재 문에서 나는 은연한 자스민 향을 만끽하고, 문을 두 번 두드린다,
똑똑.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아직 자고있구나. 어제 종일 출판사와 계약을 한다고 돌아다녔으니 피곤했겠지. 그렇다고 아침을 굶길 순 없다. 가뜩이나 말랐는데, 혼자 있으면 밥도 잘 안 챙겨먹으니 걱정될 수밖에.
"우음..김독자..."
문을 여니, 향긋한 레몬 냄새와 함께 이불을 코까지 올리고 잠꼬대를 하고 있는 한수영이 보인다. 커튼을 확 젖히자, 큰 창으로 들어오는 늦가을의 보드레한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확 돌린다.
"야, 이제 일어나."
일어나기 싫다는 듯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리는 그녀.
"한수영~."
이불을 조심스럽게 걷어올리고, 가벼운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한수영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모자가 달린 아기자기한 곰돌이 잠옷을 입고선 아직 비몽사몽한지 몸을 축 내려뜨리고 있었다.
"미소녀 작가님. 어서 일어나시죠."
존칭을 불러주자 그녀는 기분이 좋은듯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한수영, 정말 귀엽다니까.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작게 입술을 맞추자, 기특하다는 듯 내 볼을 꼬집었다. 정작 자기가 쑥스러워서 볼이 잔뜩 빨개진 주제에.
"나 업어줘.."
한수영이 잠긴 목소리로 내게 요구했다. 자기 발로 움직일 생각은 없는 듯 하다. 그러고보니 사귀기 전에도 한 번 업혀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사귀냐고 놀리니까 다리 다친 연기를 잘도 하더라.
작은 체구의 한수영을 가볍게 들쳐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귓가에서 다시 잠들었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내려놓으려는 찰나, 그녀가 내 귀에 호 바람을 불며 장난을 쳤다. 달달한 레몬 냄새가 코에 확 들어오니 온 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흐읏.."
약한 신음을 흘리자, 한수영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대며 웃었다.
"너 뭐하는-"
"변태...느끼고 있네."
난 그녀의 장난에 약이 올라 내 등에서 내려오려는 한수영을 들쳐매고 달려가 그대로 소파에 내던졌다. 물론 살포시 내려놓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콰당 엉덩방아를 찧은 한수영은 분하다는 듯 허리를 매만지며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야아! 그렇다고 무식하게 던지면 어떡하냐!"
"많이 아팠어…?"
한 번 삐지면 피곤해질 것 같아 재빨리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을 부풀리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뒤에서 살포시 안아주었다.
"미안해 수영아."
"돼,됐어. 이번엔 봐줄테니 앞으로 조심해라."
한수영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렇게 좀만 애정 표현을 하면 부끄러워한다니까. 겉으론 부끄럽다고 매도하면서도 은근히 좋아한다. 하여튼, 참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다.
한수영이 화장실에서 씻고 있는 동안 아까 준비해두었던 아침을 꺼내기 위해 주방으로 갔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있는 샌드위치를 꺼내고, 그녀가 좋아하는 레몬차를 탔다. 온도는 정확히 50도로, 설탕은 두 스푼 반.
든든하게 하루를 시작하려면 밥이 있어야겠지..남아있는 밥과 계란을 이용해 간단히 계란볶음밥을 만들었다. 추가적으로 양파를 캐러멜라이징 시켜 밥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단 것을 좋아하니까.
"오늘은 독자가 요리사?"
씻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로 다가온 한수영이 내 어깨를 귀엽게 툭 쳤다.
"기특하네 김독자. 누나 아침도 챙겨주고."
한수영이 레몬차를 홀짝거리며 옅게 웃었다. 참 예쁘다. 샌드위치를 한 입 가득 베어문 채 우물거리는 그녀를 보고있자니 나도 꽤나 복받은 놈이 아닌가 싶다.
"수영아, 오늘은 집에서 있는거야?"
"응. 요즘 고생했더니 몸도 좀 피곤하고.."
아무래도 조만간 한번 요양을 시켜줘야겠다. 저번처럼 캠핑하면서 힘빼지 말고, 노곤하게 온천욕은 어떨지.. 그건 그렇고 오늘은 내가 계획한 것이 있다.
"야, 설거지는 내가 할게. 그릇 이리 줘."
밥을 다 먹은 한수영이 고무장갑을 주섬주섬 끼며 말했다.
"...네가 웬일이냐?"
내가 의외라는 듯 말하자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참나! 나를 뭘로보고."
이거 그릇만 안 깨면 다행일텐데 말이지. 그녀에게 설거지를 하게 두고, 나도 슬슬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이지혜 이자식은 지가 먹은것도 안치우고..어? 너 어디 가?"
한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게 총총거리며 다가왔다.
"모처럼 쉬는날인데..그냥 나랑 같이 있으면 안돼?"
데이트를 하자 제안하려 했지만, 어딘가 서운해보이는 한수영의 표정을 본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글쎄..오랜만에 친구나 만나볼까 해서."
"너 친구 없는거 아니었어?"
"흐음, 친구야 만들면 되는거니까."
한수영이 뾰루퉁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삐친 듯한 표정이 꽤나 귀여워서 장난을 계속하였다.
"갑자기 나가려니 좀 귀찮기도 하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지길래 화를 내려는 줄 알았는데, 내 옷깃을 덥썩 붙잡고 말했다.
ㅡ...오늘은 그냥 나랑 놀자. 응?
그러더니 무게를 실어 나를 꼬옥 얼싸안는다.
ㅡ독자야아~...
...이거 참. 애교부리는 건가? 좀 더 듣고싶은 말은 있지만, 그건 이따가 하기로 하고.
이정도 했는데도 내가 거절한다면 아마 한수영은 단단히 삐질 것이다.
"그래. 그럼 너도 빨리 옷 입어. 우리 요즘 데이트 안했잖아."
사귀기 시작하고 보름이 지났지만, 일이 바쁘다고 혹은 일행들의 눈치를 본다는 이유로 데이트를 거의 하지 못했다. 데이트 제안을 받자 한수영의 안색이 환해졌다.
"알겠어! 준비하고 올테니까 좀만 기다려!"
한수영은 설레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후드티? 이건 너무 평범한데.'
평소처럼 보라색 후드티를 입으려다 생각을 바꿨다. 그래도 나도 여잔데, 이런 날엔 좀 차려입어도 되는거 아닌지..
'원피스? 이건 확실히 거추장스럽고.'
언젠가 유상아에게 선물받았던, 나풀거리는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다. 입으면 예쁘긴 하겠지만은 본인한테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 초청 강연 때 한번만 입고선 장에 처박아둔 옷이었다.
'역시 무난한게 최고지.'
결국 결정한 것은 흰색 블라우스에 청바지. 소위 말하는 '꾸안꾸' 룩이다.
'김독자가 보면 뭐라 하려나?'
자신을 보고 어물거릴 김독자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났다. 평소엔 잘 하지도 않는 화장을 얕게나마 하고, 휘파람을 불며 방을 나섰다.
"한수영...이쁘네."
또 후드티만 입을 줄 알았는데, 제법 예쁘게 꾸미고 왔네. 칭찬을 원하는 듯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수영에게 태연자약하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예뻐 수영아."
"앞머리 고데기 했다고..! 건들지 마."
또 얼굴이 붉어져서 괜스레 톡톡거린다.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 날 어떻게 해보겠다고 천연덕스리 다가오지만 내 반응에 되려 얼굴이 달아올라 어물쩍거리는 것은 본인이다.
뭐, 그런 그녀의 모습도 사랑스럽다.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이끄는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다사로운 볕이 감싸는 우리 집을 빠져나갔다.
"어디갈건데?"
내 손을 붙들고 신난 기척을 숨기지 못하는 한수영을 보자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건 생각해봐야겠지?"
"뭐야 그게..데이트 코스도 생각 안해놨냐?"
"저번처럼 영화관? 아니면..."
"됐다. 이 누님이 알아서 할테니 넌 그냥 따라오기나 하셔."
한수영의 손에 붙잡힌 채 십여분을 걷다 보니 큰길가가 나왔다. 내가 없었던 이십 몇년간 비약적으로 발전된 기술에 의해 서울은 환상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홀로그램 패널을 허공에 띄운 인공지능이 드문드문 돌아다니고 있었고, 높디높은 마천루 사이사이를 연결한 진공 튜브 안에서 극초음속 기차가 가공할 속력을 내며 파노라마를 만들어냈다.
입을 벌리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수영이 손을 놓더니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
"다왔어 들어가자."
"볼링장?"
볼링장은 어릴때 엄마가 종종 데려오던 곳이었다. 안 쳐본지는 엄청 오래됐지만, 그래도 예전엔 한 볼링 했었는데.
"내가 정희원한테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요새는 데이트 할때 볼링치고 있다더라."
"아..."
처음 온 볼링장이 신기한지 나를 붙잡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한수영. 뭐가 뭔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 그녀를 데리고 가 맞는 신발을 신기고, 손에 감기는 볼링공을 골라주고, 복숭아 아이스티를 하나 시켜주었다.
"우리 내기하자!"
아이스티를 쪽쪽 빨고있는 한수영이 신나하며 말했다.
"음..수영아, 너 볼링 처음 쳐보는거 아니야?"
"뭐 어때? 재미로 하는건데. 그리고 너도 처음일거아니야, 그치?"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익숙한 무게감이 손을 감쌌다. 오랜만에 하려니 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폼을 잡아보자, 꼴깝을 떤다느니 머리에 헤드샷이나 하지 말라느니 거리며 재잘거리는 한수영의 목소리에 괜한 오기가 생겼다.
"그래. 진사람이 소원들어주기, 콜?"
"그러던가. 지고 울지나 마셔?"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1번과 3번 핀의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하나. 덤리스 유형으로 중지와 약지를 끼워넣는다.
둘. 정확히 5.5도의 입사각으로 18번의 회전을 주기 위한 크랭커 자세를 취한다.
셋.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어드레스-다운스윙-릴리즈의 과정을 거친다.
손가락을 부드럽게 떠난 공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갔다. 와르르 소리와 동시에 씩 웃으며 뒤를 돌아보자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
"아니..너 한번도 안쳐봤다며!"
한수영이 황당해하며 내게 따지고 있다.
티비에는 각각 153/180/205 와 30/55/51의 숫자가 빨간색과 파란색의 대조적 색을 띄며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운동신경이 좀 좋은가봐?"
"거짓말 하지 말라고..난 이 게임 인정 못해!"
씩씩대는 한수영에게 다가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였다.
"수영아, 소원 들어줘야지?"
"씨이...뭔데."
조금 누그러진 듯 한 표정의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주보고 있는 눈에서 미묘한 떨림과 긴장이 느껴졌다.
"난 네가 참 좋아."
"...갑자기?"
"어떤 모습의 너라도 참 매력적이지."
"고맙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녀석의 입이 씰룩거리는 것이 보였다.
"시니컬한 네 성격도, 학생을 가르치는 똑똑한 머리도, 글을 쓰는 작은 손도, 그리고 살짝 보이는 송곳니도..."
"아 그래서 소원이 뭔데! 답답하게 굴지말고-"
한수영의 입술을 손으로 만지며 말하자 식겁한 그녀가 손을 뿌리쳤다.
"그런데 난 다른 모습도 궁금하거든. 특히 애교를 부린다거나..."
ㅡ....뭐?
"이거 소원권 치곤 너무 혜자 아니야?"
ㅡ .....
"희원씨도 가끔씩 하던데."
ㅡ오...오빠.
귀를 간지럽히는 그녀의 말에 두둥실 날아갈 것만 같다.
"왜 수영아?"
웃음을 참으며 귀가 통째로 빨갛게 된 그녀에게 되물었다.
ㅡ그... 사랑해 자기야아..
한수영이 까치발을 들더니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맞대었다.
지금은 저렇게 부끄러워하더라도, 나중엔 그녀가 되려 날 당황하게 만들겠지. 한수영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녀가 너무나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작은 체구가 내 품 안에 포옥 들어왔다.
내 품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한수영이 쏘아붙였다.
"야! 이제 니가 누나라고 불러! 난 해달라는거 다 해줬다?"
"네에, 누님. 사랑합니다~"
"미소녀 작가님도!!"
"예이, 미소녀작가님. 이제 얼굴을 드시죠."
뾰루퉁한 표정의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치이..치사한 김독자. 진짜 죽는줄 알았다고.."
"그럼 그냥 하지 말지, 나도 놀랐다 야."
"그래도..내가 안해주면 너 또 토라질거잖아. 우리 남친, 은근히 깐깐하단 말이지."
한수영이 히죽거리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이번에는 내 얼굴이 약간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은연중에 느껴졌다.
.
우리는 간만의 운동에 배가 고파 바로 밥을 먹기로 했다. 한수영이 잡아 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니 도착한 곳은 그녀가 자주 가는 수제햄버거 가게였다.
좀 더 비싼 음식을 사주고 싶었는데. 누가 어린애 입맛 아니랄까봐,자긴 고급 스테이크보다 햄버그 패티가 맛있단다.
점심을 먹은 후엔 근처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켜놓고는 수다를 떨었다.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그녀는 카푸치노로.
한참 얘기를 나누다 문득 밖을 보니 해가 조금 길어져 있었다.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선 카페를 빠져나와, 거리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신기술로 집약된 다양한 즐길거리를 나에게 체험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신나게 데이트를 즐기다 보니 하늘이 퇴색되며 태양이 스카이라인 틈새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수영아, 오늘 네 덕에 참 재미있었다."
"그거 클리셰 아니야?"
"클리셰라니?"
"남주가 그런 대사 치고나서 모종의 이유로 여주랑 헤어지는 그런 클리셰 말이야."
농담처럼 웃으며 한 말이지만, 그녀의 두 눈망울에는 어쩐지 심원의 슬픔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한수영, 이젠 정말 안떠날게. 진짜야."
"그러시겠지. 또 혼자 어디 가면 확 죽여버릴거니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내 발을 쿡 밟는 한수영. 내 발과 한걸음, 한걸음 작은 발을 맞춰 걷는 그녀를 잠시 멈춰세우고, 그녀의 머리에 볼을 맞대며 뒤에서 끌어안았다.
"항상 고맙고 또 미안해 수영아. 많이 기다렸지..?"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말을 또 내뱉었지만, 수십번 반복해도 부족한 말이다. 그녀를 품기엔 너무 보잘것없는 나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내 마음속 짐이 덜어지기라도 할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멍청아."
"...미안."
한수영이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질린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잘들어 김독자. 네가 굳이 구태여 그런 말을 지껄인다고 사람들한테 위안이 될 수 있다 생각하면 오산이야. 넌 그냥 어깨나 좀 피고살으라고. 네가 우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물이고 감사한 일이니까."
간만에 진지해진 그녀가 진심으로 한 말에 마음 한켠이 뭉클해졌다.
어쩌면 한갓진 비감은 기만이 아닐까. 나는 구원의 마왕도, 빛과 어둠의 감시자도, 왕이 없는 세계의 왕도, 가장 오래된 꿈도 아니다.
난 그냥 김독자일 뿐이다. 김독자 컴퍼니의 대표이사이자, 이수경의 아들이자, 오직 하나뿐인 작가 한수영의 남자친구일 뿐이다.
"응. 약속할게 수영아. 이젠 죄책감은 갖지 않겠다고. 그냥 너랑 맛있는 거나 먹고, 영화도 보고, 사랑하면서 오래오래 살겠다고."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귀가 빨개지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전독시 쓸 때부터 알았지만 오글거리는 대사는 유중혁 뺨 치게 잘한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감동 받은 듯 초련의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묵묵히, 내 그림자에 짝을 이루어 나란히 걷는 그녀가 옆에 있다.
"김독자."
몇분이나 지났을까. 침묵을 깨고 그녀가 나직이 나를 불렀다.
"응?"
잠시 말이 없었다.
"독자야."
"왜 수영아?"
뭔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는 한수영. 얼마 후 그녀가 다시 날 불렀다.
"김독자?"
"듣고있어."
그녀에게 계속, 따뜻하게 답을 해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하고싶어하는 거 같은데...
ㅡ히히..독자야..
한수영이 내 품에 쏘옥 파고들더니 고개를 확 들어 날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눈꼬리. 애정이 가득 담긴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췄다.
ㅡ좋아해.
"나도 수영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한수영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어느새 얼굴이 닿을 듯 가까히 왔다. 입술에서 풍기는 진한 레몬향에 정신이 아득해져 몸을 뒤로 젖히기 전에, 내 볼에 그녀의 입술이 닿았다.
잠시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한수영이 볼에 홍조를 띄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속절 없는 끌림에, 원색적인 불가항력에 사로잡힌 나의 모든 감각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시선을 서로에게 고정한 채,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입술과 입술을 마주쳤다.
.
"개같은 커플.."
야심차게 대학 선배에게 고백했다 보기좋게 차인 이지혜는 대낮부터 술을 퍼마셨다.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왔건만, 자신을 반기는 것은 꽁냥대는 정희원과 이현성, 므흣하게 이설화와 통화를 하는 유중혁 뿐.
"남자 좆까..인생은 혼자라고 안그래?"
"으윽, 언니 술냄새나.."
이지혜의 푸념에 애꿎은 아이들만 고통받을 뿐이었다.
"감히 나를..해상제독 이지혜를 찬다고? 그래. 네놈은 얼마나 좋은 년 만나는지 두고 보자."
이지혜는 밥을 먹으라는 유중혁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향하는 곳은 한수영의 방. 이전에 이성 문제를 겪었을때 상담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딴놈은 그냥 잊어버려. 생긴건 기생오래비같은게 할 줄 아는건 꼬리치는거 밖에 없어보이잖아.
물론 상담이라고 포장한 귀띔의 실체는 살벌한 뒷담화였지만. 한수영 또한 연애경험이 전무하기에 공감대가 잘 맞았고, 그녀의 번민을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니이이이- 내가 있찌?"
꼬인 혀로 아양을 떨며 문을 열어재낀 이지혜.
하지만 여느때처럼 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있어야 할 한수영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형이랑 데이트라도 갔나보지 뭐."
쌤통이라는 모양새로 미소를 날리는 이길영을 보며, 이지혜는 그제서야 한수영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싯팔, 그 오징어아저씨가 뭐가 좋다고 그러는거야.."
한수영의 침대에 픽 엎드려 동태눈깔을 한 이지혜의 두 팔을, 이길영과 신유승이 하나씩 붙잡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 식탁에는 이지혜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솔로천국 커플지옥] 따위의 설화가 새겨질 듯 하다.
*
"푸하!"
1분간 내 입을 격렬하게 탐하던 선홍색 살덩이가 천천히 뒤로 빠져나갔다.
한참동안 서로에게 눈을 맞추고 있다가, 잠시 후 고백했다.
"수영아, 사랑해."
"...나도."
"뭐야..미소녀 작가님이 왜이렇게 반응이 미적지근하실까?"
"킥, 좀스런자식..."
배시시 웃는 한수영이 내 팔을 끌어안았다. 한수영의 몸이 내 몸에 찰싹 달라붙었고, 어스레한 어둠 속 새하얀 피부가 다홍색 빛으로 물들었다.
"나도 사랑해 김독자..아니 독자 오빠.."
"...."
"기분 좋으니깐 특별히 해주는거야!!"
창피해하는 한수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고, 난 그런 한수영이 귀여워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내 인생의 동반자님, 당신의 소설을 평생 읽어주겠어요."
"누가 보면 결혼이라도 한 줄 알겠네요."
능청스럽게 오그라드는 말을 받아치는 한수영.
꼭 붙어 집으로 걸어가는 우리의 머리 위에 갑자기 빗방울이 투둑 투둑 떨어졌다.
"으악. 역시 20년이 지나도 기상청은 믿을 게 못된다니까."
"치사하게 먼저가기냐 한수영!"
우리는 서로의 손을 꽉 붙잡고 집까지 달려갔다.
비는 점점 더 거세게 내렸고, 중간 중간 물웅덩이를 밟아 홀딱 젖게 된 우리는 어렴풋한 말소리가 들려오는 집에 입성했다.
"완전히 물에 젖은 생쥐꼴이군."
현관 앞에 나온 유중혁이 못마땅해보이는 눈초리로 우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가 발동합니다.]
-김독자, 이제 손은 놓지그러냐..
'빌어먹을 커플'을 처연스럽게 내뱉고 있는 이지혜의 따가운 시선에 성급히 손을 뗐다.
"독자씨! 어딜 갔다오는거에요?"
"데이트 좀 하고 왔습니다."
일행들이 문 앞에 어설프게 서있는 우리를 흘긋거렸다. 앞에 뻘쭘하게 서서, 오한에 몸을 떠는 한수영의 등을 푸근하게 감쌌다.
"항시 느끼는거지만, 이렇게 둘이 치근대는거 볼때마다 은근 괴리감드네요..수영아, 독자씨가 그렇게 좋디?"
정희원이 비아냥거리자 내 팔을 꼬옥 붙잡고 있던 한수영이 화끈 달아올랐다.
"뭐..뭐 인마! 넌 이현성이나 잘 챙겨."
그녀가 물을 뚝뚝 흘리며 제 방으로 올라간다. 물에 젖은 청바지와 블라우스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한수영을 나도 모르게 멍하게 쳐다보았다.
"아저씨, 뭘 그렇게 봐? 수영언니가 그렇게 좋아?"
어딘가 격양되어보이는 이지혜가 나에게 툴툴거렸다.
"글쎄..아무튼 나도 씻고 올테니 니가 먹은건 니가 치워. 아까 수영이가 뭐라 하더라."
"아 몰라! 나 어지러..."
어린녀석이 벌써부터 술주정이냐. 바닥에 대자로 뻗어누워 앙탈을 부리는 이지혜에게 혀를 끌끌 찬 뒤 나도 내 방으로 올라갔다.
*
"빌어먹을…"
웹소설 작가는 중얼거렸다. 일행들의 의심을 가득 받으며 가까스로 밥을 먹고 들어와 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잡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가령 오늘의 일이라던가, 저번달 캠핑이라던가, 김독자라든가 하는 것들.
"내가 미쳤지 진짜."
고작 하루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뒤늦은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분명 글을 쓰고 있는데, 화면 속에서는 자신에게 환하게 웃어주던 김독자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시발…오빠는 무슨.. 오징어같은게."
김독자만 보면 바보가 되는 것 같다. 김독자가 조금만 스킨십을 해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말이 헛나온다.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감정이 그녀를 이끈다. 의문의 부력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유발한다.
'자꾸만 보고싶네..젠장.'
결국 글 쓰는 것을 멈추고 침대에 누워 김독자 생각을 한다. 근거없이 빨개진 볼에 연신 손부채질을 한다.
한수영은 김독자가 너무 좋다.
*
밤이 깊어지고, 일행들이 하나 둘 잠자리에 들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부슬비가 여전히 서울의 밤을 적시고 있다. 평화로운 빗소리에 박자를 맞춰, 불이 켜져있는 그녀의 방 문에 경쾌하게 노크했다.
"들어와."
12시가 넘었지만 여전히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 한수영. 며칠 전 내가 선물로 주었던 그 노트북이다. 사실상 날 고백하게끔 촉발시킨 방아쇠 역할을 한 물건이니, 저걸 성유물로 지정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직도 쓰고 있는거야?"
"전독시 외전 내야하거든. 독자들이 하도 부추겨서말이야."
"로맨스 소설은 언제 써줄건데?"
한수영이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뒤로 가서 살며시 백허그를 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두근대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조금만 기다려. 3000편이고 30000편이고 써줄테니까."
언젠가 나에게 했던 기약없던 그 약속을, 내 등에서 따뜻한 온기를 나눠주고 있는 그녀가 증명하고 있다. 어쩌면 3만 편으로도 부족할 지 모른다.「스타 스트림」이 존재하는 한, 이 운명의 굴레는 끝없는 실타레를 엮어 우리를 영원히 이어줄 테니.
"우리 영화 볼래? 심야 로맨스, 내 로망이야."
"어쭈? 성좌 '구원의 마왕'답지 않은 말이네."
"청불로."
"...그럴까?"
빗소리만이 허공을 적적하게 떠도는 야밤. 한 손에는 과자를, 한 손에는 레몬사탕을 든 한수영이 나와 함께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약간 썰렁한 공기에 떨고있는 그녀에게 일인용 담요를 덮어주었다.
"너도 같이 덮어."
하나의 담요 안에서, 우리는 껴안듯 꽉 붙어서 흘러나오는 영화를 관람했다.
19금 씬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나에게 머리를 묻기도 하고, 달달한 장면에선 입꼬리를 올리며, 그렇게 귀여운 내 애인은 얼마 안가 잠에 빠져들었다.
나도 서서히 졸음이 밀려왔다.
ㅡ아저씨, 새벽에 뭐하는 짓거리야..
어룽거리는 시야 속, 눈물을 훔치며 우리를 쳐다보는 이지혜를 봤던 것 같기도 하다. 상관없다. 저 불쌍한 녀석도 언젠가는 사랑의 묘약을 마시게 되겠지.
나를 꼭 끌어안은 채 어깨에 기대 잠든 그녀를 보니 신비스런 고양감에 휩쓸렸다. 비밀을 아는 설렘. 영원한 것을 공유하는 우리의 연정.
살짝 뜬 눈으로 내게 기댄 한수영이 지긋한 시선을 보낸다. 반쯤은 도취된 듯, 반쯤은 유혹하는 듯.
새벽에 서로에게 기대 영화를 보는, 그런 우리의 삶의 편린들이 설화를 이루고, 그것들은 이 우주를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어디에서 시작된 지도 모르는 우리의 필연적인 운명.
누군가가 억지로 짜맞춘 장난이 아닌, 우리가 존재하게 되는, 사랑하게 되는 그런 운명 말이다.
어째서 한수영이 멸살법을 써서 나를 살리게 된건지. 그 주체가 왜 하필 우리였는지. 그 시작은 어디었는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무의미하고 무책임하고 무용한, 그래서 너무나 아름다운.
무엇이 우리를 이어주었든 간에, 서로 사랑하고, 보듬어주고, 비밀을 공유하면, 그것으로 된거다.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바짝 밀착한 채,
귓가에서 레몬향을 풍기는 한수영이 매혹적으로 속삭인다.
"사랑해 김독자."
그러고는 얼굴을 붉히며 나지막하게 웅얼거린다.
"오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김독자컴퍼니]의 경악스런 시선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