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의를 보입니다.]


열렬한 환대를 받으면서 우리는 홀 중앙으로 진입했다. 성좌들 틈새에 끼지 못해 난감해하던 김독자와는 다르게 수월한 입성이었다.

 

미식협은 스타 스트림에서도 내로라하는 성좌들이 모인 대연회. 중세 시대로 치면 백작 이상 정도 되는 귀족들의 사교회다.


잘난 놈들이 가득한 곳인 만큼 특권 의식도 팽배하니, 인간이나 성좌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 . .  


아무튼, 신참에 불과한 내가 그들이 이룬 커뮤니티를 막힘없이 뚫고 간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의 공이 크다고 생각했다. 검은 까마귀가 붙은 상판대기를 보면 함부로 말을 걸 엄두조차 나지 않았으니.


반면, 엄격은 나와 상반되는 답변을 내놓았다.  


[성좌들이 너를 경계하는군.] 


[저를요?] 


엄격의 말에 주변을 둘러봤다. 호기심 가득한 성좌들의 눈빛이 전신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다. 개중엔 나보다 강하고 유명한 성좌들도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 눈치군.] 


엄격이 내 의문을 눈치챘다. 나는 탁자에 놓인 와인을 시음하며 답했다. 


[당연하죠. 고작 저따위를 신경 쓸 정도로 미식협은 자비롭지 않으니까요.] 


[평가가 박하군.] 


[객관적으로 보는 거죠.] 


엄격은 뜻 모를 미소를 짓더니 나를 연회의 한복판으로 안내했다. 엄격이 지나가는 곳마다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마냥 길이 열렸다. 새삼스럽지만, 여기가 엄격의 사유지임을 떠올리니 이해는 갔다.  

 

예나 지금이나, 혹은 차원을 넘어서도 건물주는 갑이니까.  

 

아무튼 우리가 살아 있는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동안, 후미에서는 '격노와 정욕의 마신'에 대한 말말말들이 들끓었다.  

 

[저자가 소문의 마왕 - ] 

[생각보다 정상적인 - ] 

[우리 집 마누라 보다 청순한 - ] 

 

미식협 전체로 따지면 소수의 발언이었으나, 종전 후 32번째 마계에 틀어박혀온 내게 있어 그들은 충분히 다수였다.  

 

그게 싫다는 것은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타인에 의해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이야기 함으로서 나는 오롯이 존재할 수 있다.  

 

. . . 다만 일면석도 없는 성좌의 마누라 보다 청순한 마왕으로 정의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게 나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라고.  


내가 뒤를 돌아보자 잡담이 뚝 끊겼다. 그것과는 별개로 회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침묵과 소란이 공존하는 기괴한 공간 속에서, 나는 방금 전까지 뚫린 입으로 지껄이던 성좌를 지목했다.  


그는 금색 왕관을 쓰고 있었다.  


[할 말 더 남았나요?] 


지목당한 성좌의 안면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봄바람을 맞은 눈처럼 녹아내렸다. 처음엔 당황했으나, 신참임을 인지하고 뻔뻔해진 낌새였다.  


[크흠! 없소만.] 


[그럼 입 다물어요.] 


성좌가 격을 발휘했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닌지 기세가 자못 무거웠다.


[이 무례한! 그대는 예의가 없는가?!] 


말하는 뽄새를 보니 [베다] 측 성좌인가? 온몸을 치장한 금공예품을 보니 [올림포스] 소속일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내 알바는 아니다.  


[싸우게요? 저야 좋지만. . .제 뒤에 계신 분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네요.] 


고개를 살짝 돌리자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팔짱을 낀 채 상황을 관전 중이었다. 성좌가 흠칫 놀랐다. 그는 나와 엄격을 번갈아 보다가 이번엔 엄격에게 질문했다.  


말투가 갑자기 정중해져서 어이가 없었다.  


[헤아릴 수 없는 엄격. 그대의 손님이오?] 


[그렇다. 불만 있나?] 


- 츠츠츳!  


엄격이 한쪽 눈썹을 치세우며 격을 끌어올리자 장내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왕관을 쓴 성좌가 침음을 삼켰다. 마왕의 격은 자기 수식언에 걸맞게 엄중하고 패도적이었다.   


[. . . 불만 없소.] 


그는 나를 한번째려보더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시비를 건 놈이 도망치니까 구경꾼도 눈 돌 곳이 사라졌다. 연이은 부재(不在)에 흥미를 잃은 듯, 성좌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흥미롭군.] 


[뭐가요?] 


[방금 그놈은 베다의 성좌였다.] 


맞췄네. 역시 관상은 과학이다. 


[수식언은 잘 기억 안 나지만, 베다에서 한 가닥 하는 놈이지.] 


맞다. 느껴지는 격으로만 판단하면 그는 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성운까지 등에 업었으니 엄격과 좋은 승부를 할 수도 있을 듯 싶었다. 하지만 그는 한발 물러섰다. 


[그럼 자리를 피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엄격이 답했다.  


[기껏 찾은 연회다. 스스로가 음식이 되고 싶지 않다면 자중하겠지.] 


나는 방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나와 엄격, 베다 측 성좌를 둘러싼 관중들. 


가지각색의 외형을 자랑하는 화신체에서 유일한 공통점이라 함은, 그 현양한 얼굴들에 떠오른 짖꿎은 미소였다. 그 순간, 나는 뜻밖의 소란조차 저들에게는 음식(이야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성좌 놈들을 애증하는 이유지. 고상한 외형을 벗기면, 실상은 우리와 다를 바 없어.] 

 

그 우리에서 나는 빼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다시 들어갔다. 미친놈의 말은 흘려 듣는 것이 상책이지만, 엄격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성좌와 마왕은 설화를 축적해 격을 올린 자들. 끝은 다를지라도 그들의 시작은 자그마한 활자였다.  

 

- 탁.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스치운다. 다시 생각해도 그것은 키보드 자판 소리를 쏙 빼닮았다. 불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엄격의 미식학개론이 이어졌다.  

 

[나는 그들의 위선을 좋아한다. 수천수만 년 동안 쌓아 올린 설화엔 시련과 고뇌, 열의와 절망이 함축되어 있지.] 

 

[그 모든 것을 먹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미식의 세계로 이끌었다.] 

 

곰곰히 생각보니까 미식협이 헤아릴 수 없는 엄격에게 무조건적으로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 . . 

 

[그럼 미식협은 오히려 당신에게 족쇄겠군요.] 

 

엄격이 추구하는 미식은 제약없는 탐욕의 현현. 


미식협이 제공하는 미식이란 유명한 이야기를 먹고 즐기는 것. 


양측을 서로 비교해 보니 미식협은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을 담기엔 너무 작은 그릇이었다. 

 

아마 엄격은 여기서 사흘 밤낮을 지세워도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스스로를 억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의 수식언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족쇄라 . . . 신선한 접근이군.] 

 

엄격이 뒷짐을 진 채 벽을 바라봤다. 장내를 산책하듯 거닐다 보니 어느새 연회장 끄트머리에 도달한 모양. 하나밖에 없는 창문에 암흑 지대의 정경이 새겨졌다.


나는 그 위로 떠오른 별을 하나씩 헤아렸다.

 

도합 서른다섯 개.


하늘에 비친 별들은 무수히 많지만, 딱딱한 창틀이 내 시아를 제한한 탓에 단지 그것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선 마왕을 쳐다봤다.  


눈앞에 있음에도 헤아릴 수 없는 별이 그곳에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느끼는 감정은 자괴감 입니다.] 


[. . .]

 

그래서일까. 그가 갑작스럽게 현타에 빠진 이유도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엄격과 헤어져 성좌들이 득실득실한 곳으로 직진했다. 기왕 여기까지 온김에 본전은 뽑아야겠다는 심보였다.


기름값과 드레스 구매 비용까지 합치면 도합 일만 코인.  


나는 식충이 아니므로 일만 코인짜리 인맥을 확보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문제는 . . .   


[다들 최고의 설화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당연히 망치 먹는 드래곤이지. 모험담 중 가히 으뜸이다.] 


[새벽의 아이들도 무시할 수 없죠. 전 마지막 이별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니까요. 어쩜 그렇게 섬세한 묘사가 가능한지.] 


[어허! 다들 뭘 모르시군 그래. 감히 운명을 마시는 새를 두고 최고를 논하는 겐가?] 


[혹시 불투명 드래곤은 - ] 


[[[꺼져라!!]]] 

 

저 틈바구니속에 들어갈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겉으론 아스모데우스처럼 도도하게 굴어도 실상은 방구석 히키코모리와 다름없는 나다. 실제로 지난 1년 동안은 아에 32번째 마계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고. 

 

시비를 걸면 받아줄 재량은 있지만, 먼저 다가서는 것은 어려웠다. 


. . . 지금 생각해 보니 흑염룡이 정말 큰 용기를 냈구나. 분명 밥 먹자는 말 한마디도 이것만큼 어려웠을 터다.  

 

결국, 나는 기준치를 낮추기로 결심했다. 그래 오천코인. 그 정도면 손익이 맞았다.  


그렇다면 오천코인 짜리 인맥은 어떻게 맺을까? 


쉽게 생각하자. 새로운 인연이 만 코인 짜리니까, 안면은 텃지만 아직 서먹한 성좌들이 그 반값에 해당하겠지. 나는 주변을 배회하다가 익숙한 신형을 발견해 손을 흔들었다.  

  

[바위의 마신! 살아 있었군요?] 


[꺼져라 미친년.] 

 

나는 가운뎃손가락으로 화답하며 모락스의 인근을 훑었다. 어디 마왕 정모회라도 열렸는지 익숙한 면면이 한가득이었다. 불화의 조성자는 스테이크를 자르다가 허리를 삐끗하고, 뱀지옥의 군주가 긴 혓바닥을 씹었다.  

 

['뱀지옥의 군주'가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지가 잘못 씹었으면서 왜 나한테 지랄일까."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간신히 억눌렀다.  

 

[여기가 미식협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런. 못 참겠다. 나는 그만 천사처럼 나쁜 말을 하고 말았다. 

 

[봐주니까 기어오르네요. 뱀 새끼라서 그런가?]  


[. . . !] 

 

내게 모욕을 당한 뱀지옥의 군주의 얼굴이 앵두빛이 되었다. 아니다. 야생 뱀은 산딸기를 좋아하니까 딸기처럼 물들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군.  


결론은 뱀지옥의 군주가 꼭지가 돌아갔다는 소리다. 우습게도, 포크를 우그러뜨린 주먹은 식탁보 위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 막상 뱉고 보니 두렵나요? 안드로말리우스?] 

 

뱀지옥의 군주의 진명. 안드로말리우스를 외치자 그의 화신체가 경련했다. 

 

- 츠츠츳! 

 

[70위에 오르니 제가 만만해 보이나요?] 

  

말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70위 마왕이 15위 마왕을 도발하다니.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일까. 자신이 김독자인 줄 아는 모양이다. 

 

[주제를 아세요. 인정하기 싫다면 연회가 끝나고 승격전을 치르자고요. 바쁜 몸이지만 특별히 응해드리죠.] 

 

[. . .] 

 

벙어리가 된 뱀지옥의 군주를 버리고, 이번엔 불화의 조성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눈빛이 차분한 게 뭔가 느낌이 좋았다.  

 

[불화의 조성자. 제가 준 활은 잘 사용하고 있나요?] 

 

[. . . 어.] 

 

떨떠름하게 답하는 불화의 조성자에게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그럼 값을 치러야겠군요.] 

 

불화의 조성자의 눈이 혼탁해졌다. 상황을 못 따라가는 눈치였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그가 내게 보은해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불화의 조성자. 누가 그 활을 줬죠?] 

 

[분명 내 몫이라고 - ] 

 

[누가 줬죠?] 

 

[. . . 네가 줬지.] 

 

[그 활이 무엇인지도 아나요?] 

 

[에덴의 성유물.] 

 

[제가 도깨비 보따리에서 검색해 보니까 에덴의 성유물은 거래되지도 않더군요. 즉 당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빚을 제게 진 셈입니다.] 

 

불화의 조성자의 눈이 황망해졌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모락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렸군.] 

 

[아, 그리고 빚이 한 개 더 있군요.] 

 

나는 내 등을 가리켰다. 무려 흑염룡의 생명을 구한 등짝이자, 안드레스의 공격에 홀라당 타버릴 뻔한 부위였다. 

 

[당신의 공격에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어요. 이 또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죠. 아무래도 마땅한 보상이 필요할 듯 싶은데 . . .] 

 

혹시 몸으로 갚을 의향 있나요? 

 

내 마지막 발언에 불화의 조성자의 넋이 가출했다. 

.

.

.

안드레스와 나는 마왕 무리로부터 벗어나 시끌벅쩍한 연회의 중심지로 발을 디뎠다. 작게 불씨를 뱉은 마왕이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했다.


[몸으로 갚으라는 게 이런걸 말하는 거였나?]


나는 스테이크 조각을 한입에 넣으며 답했다. 흑염룡과 함께 먹은 것과는 색다른 맛이 있었다.


[혼자면 외로우니까요.]


질긴 육즙이 혓바닥을 농락하다가 어두컴컴한 목구멍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고기를 이루는 이야기도 짧은 단말마를 뱉곤 위장으로 떨어져 내 자양분이 되었다.


미식은 즐거웠으나, 그 기쁨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합법적으로 마약을 복용한 느낌이랄까. 먹어도 먹어도 채울 수 없는 기아가 뱃속에 자리한 모양.


미식이 낳은 쾌감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성마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로 유독 그러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 당시 내 옆자리는 소리와 온기가 존재했었다.


- 그거 맛 없지 않음?


외진 황야에서 설화팩을 뜯어먹을 때는 라파엘과 함께 였고.


- 너희 집에 이런 거 없지?


시나리오가 끝난 무대에서 즐긴 만찬은 흑염룡과 함께 였다.


이렇게 보니 내가 흑염룡한테 생각 없이 던진 문장은 꽤 중요한 것이었다.


- 어디서 먹는지 보다 누구랑 먹는지가 중요하죠.


정말 그 말대로였다. 나는 이젠 아득해진 전생. 사무와 고성이 가득한 사무실에서 남몰래 꿈꾸던 소망을 떠올렸다.


"함께 밥 먹자"는 말이 혀뿌리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내려가는 삭막한 분위기에 가슴이 답답해진 것도 잠시.


이명처럼 메아리는 치는 성좌들의 진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은 미식협.

사축들의 집합소가 아닌, 이야기를 향유하는 공간.

그때 뱉지 못한 문장을, 지금은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었다.


[어울려주시겠나요?]


[. . .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안드레스가 내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마음속의 무언가 해소되는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 츠츠츳!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즐거운 미식가'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 . 갑자기?


안드레스도 당황했는지 오랜지 주스가 그의 입술 틈새로 흘러내렸다. 침과 뒤섞인 샛노란 액체가 컵으로 낙하하는 장면은 내 입맛을 살짝 감퇴시켰다.


그가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도 모르겠군요.]


[네가 모르면 누가 안다고 . . .]


말끝을 흐린 안드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마왕이 보기에도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한편, 나는 현 상황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원작의 김독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 내 손에 쥐어진 돌멩이가 즐거운 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물론 그 정도로 뜬금포는 아닌 게, '즐거운 미식가'는 전생에서의 내 보잘것없는 소망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안드레스한테는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라 나는 계속 모르쇠 컨셉을 이어 나갔다.


그나저나 새로 얻은 설화의 기능이 궁금했다. 나는 안드레스 도처에 놓인 조각 케이크를 혀로 살살 녹이며 설화를 운용했다.


[설화, '즐거운 미식가'가 이야기에 반응합니다.]


한차례 간접 메시지가 뜨고.


[. . .]


당황스럽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헛것을 본 건가?"라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무렵, 내 도담한 가슴에서 온기가 솟구쳤다. 그것은 열의 형상을 빌린 누군가의 이야기였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큼 정신 나간 짓은 없을 겁니다.헌데 당신을 위해서라면 저는 더 미친 짓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짤막한 대사가 끝나자 전보다 포만감이 차올랐다. 정확한 효과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뜻밖의 소득에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자 안드레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웃을 줄도 아는군.]


[이상한가요?]


[신기해서 그렇다. 전에 소름 끼치던 흉소보단 백 배 낫지.]


흉소라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 아스모데우스의 미소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평소 표정을 빗댄 단어일까.


뭐가 됐든 안드레스가 뚫린 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편하게 대하니까 제가 정말 편해 보이나요?]


나는 주먹을 움켜쥔 채 그를 겨냥했다. 안드레스의 안면을 3번 가격한 바로 그 주먹이다.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는 듯 마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보고 어쩌라고. 사과라도 해야 하나?]


[애초에 사과할 짓도 하지 말았어야죠.]


[ . . . ]


가불기에 걸린 안드레스의 안색이 살짝 질렸다.

전생에 회사에서는 내가 갈굼받는 처지였는데.

어쩌다 보니 형세가 역전되었다.


그럼 내가 그 꼰대 부장 역할인 것인가?

싫어하는 인간을 닮고 싶지는 않아 나는 촌극을 그만두었다.


[후후. 농담이예요.]


[. . . 농담하지 마. 진짜랑 구분이 안 된다.]


한숨을 뱉은 안드레스가 냉수를 원샷했다.

화염을 다루는 마왕이 물을 마시는 장면에서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아까 엄격한테도 비슷한 말을 들었죠.]


[엄격? 설마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을 말하는 건가?]


[네.]


[그 자식이 초대했나 보군.]


[맞아요.]


[그럼 그놈이 책임을 져야지. 왜 내가 이 고생을 하냔 말이다.]


안드레스의 머리에서 붉은 스파크가 따다닥 튀겼다.

그러자 마치 풍선에 비빈 것처럼 머리카락이 삐죽 솟아올랐다.


나는 히죽 웃으며 팔꿈치로 안드레스의 팔을 찔렀다.


[마계 최고의 미소녀와 함께인데, 오히려 넙죽 절을 해야 할 판이죠.]


[양심 뒤졌나? 수천 년은 곪은 년이.]


라임봐라.


원본이 들었다면 아마 입을 찢어 버렸지 않을까?


나는 안드레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맥락없이 답했다.


[마음 만큼은 영원한 17살이랍니다.]


[ . . . ]


그리고 금가루 토핑이 올려진 사치스러운 푸딩을 삼켰다. 새콤달콤한 맛의 잔상이 혀끝을 오랫동안 맴돌았다.


잠시 어벙해진 안드레스도 이내 같은 곳에 놓인 푸딩을 집어 먹었다. 우리는 말없이 푸딩을 씹다가 다음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뭔가 친해진 느낌이다.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웃었다.


[스킬 '매혹'을 사용 중입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



연회장 이곳저곳에 비치된 패널에는 가지각색의 시나리오가 재생 중이었다. 용암 속에 잠기는 황금반지, 기절한 소년의 모습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요새 가장 인기 있는 설화다.]


안드레스의 말대로 그 패널 아래는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인파. 아니 이 경우에는 은하수라 해야 하나?무수히 많은 별들이 화면에 코를 박을 듯 이야기에 몰입해 있었다.


[제목이 뭔가요?]


[팔찌의 마황. 사악한 마황에 맞서 절대 팔찌를 없애기 위해 운명의 산으로 향하는 모험담이다. 개인적으로는 불호지만, 양질의 설화임은 부정할 수 없지.]


전독시에서 언급된 1세대 설화가 최신 유행이라니.

원작이 시작되려면 아직도 한참 남은 모양이었다.


솔직히 지난 1년도 꽤 지루했는데. 이러다간 다른 성좌들 처럼 이야기에 미쳐 버릴 지도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안드레스의 말에 맞장구쳤다.


[마찬가지로 그다지 끌리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전체적인 구성은 좋으나 자극적인 소스가 부족해요. 그나저나 미식협에서 제공하는 설화는 이쪽이 전부인가요?]


안드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이곳에 참여하는 성좌는 저마다 입맛이 다르지. 하여 왕도적인 전개도, 파격적인 전개도, 시청좌가 적은 이야기도 전부 구비한 상태다. 비록 별점은 낮지만.]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테이블이 가득 찬 연회석을 가로지르자 소외된 활자들이 미약한 빛을 드러냈다.


그것들을 찬찬히 훑어 보다가 무심코 탄성을 흘렸다.


[어?]


안드레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찾던 설화라도 있나?]


[그건 아니지만 . . . 낯익은 이야기를 발견해서요.]


나는 손을 뻗어 한 화면을 어루만졌다.


면과 선의 조합으로 입체를 흉내 내는 영상에서, 한 남자가 불타는 검을 든 채 드래곤과 대치 중이었다.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은 탓에 조금 고전하는가 싶더니, 사내는 되려 검기를 날려 브레스와 드래곤을 반으로 갈랐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영상의 제목을 확인했다.


- 이계 귀환의 전설.


안드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목부터 망작의 냄새가 난다.]


신랄한 비판에 반발심이 들었다.

전독시의 초창기 독자로서 나작소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서 였다.


[평가가 박하군요. 저는 꽤 재밌어 보이는데.]


[그래도 미식협의 일원으로서 격이 있지 . . . 이딴 양산형 설화를 먹을 바엔 고리타분한 0세대 설화가 차라리 낫겠군.]


[뭐가 마음에 안 드나요?]


안드레스가 고지식한 평론가처럼 턱을 매만졌다.


[일단 내용이 너무 뻔하다. 성류 방송 채널을 몇 번 돌리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주인공 놈의 성격이 특이하긴 하지만 별다른 매력은 못 느끼겠군.]


한마디로 양산형이라는 소리였다. 안드레스가 패널에 손을 갔다 대 별점을 매겼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평점이 올라갔다.


본래 점수가 1점대라 안드레스가 매긴 2점이 플러스 요인이 된 것이다. 안드레스도 어처구니 없었는지 실소를 흘렸다.


낯선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런. 이미 손님들이 와 계셨군.]


중절모를 쓴 노인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왔다.  


[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저 설화의 출품자라네.]


우리가 별다른 반응을 않차 노인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참 좋은 이야기인데. 이곳 성좌들은 질색을 하더군. 이번엔 별점 테러까지 당했다네. 망할 놈들 같으니라고.]


노인이 응시한 세계에서 드래곤을 무찌른 용사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노인의 안면에도 인자한 웃음이 번졌다.


[언젠가 다른 성좌들도 이 이야기의 진가를 알아보는 날이 오겠지. 나는 그날을 고대하고 있네.]


안드레스가 코웃음 쳤다. 퉁명스러운 어조에서 망작 영화를 리뷰하는 유튜버가 떠올랐다. 


그대로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헛된 꿈을 꾸는군. 앞으로 몇백년이 지나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 . . 이놈이?!]


- 츠츠츳!


분개한 노인이 격을 내보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안 볼 거면 썩 꺼져라!]


안드레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물었다.


[넌 어떻게 할 거냐?]


나는 안드레스의 어깨를 툭 밀치며 말했다.


[먼저 가 봐요. 저는 이분께 볼일이 있어서.]


[그럼 여기가 갈림길이군. 이걸로 빚은 다 갚은 건가?]


[그런 셈 치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안드레스와 작별하고,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막 분기를 가라앉힌 노인이 멋쩍은 듯 헛기침하는 시늉했다.


[크흠. 그나저나 자네는 처음 보네만. 혹시 수식언을 알려줄 수 있겠나?]


나는 가볍게 묵례를 하며 답했다.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예요. 그쪽은 '양산형 제작자'죠? 만나서 반가워요.]


내 수식언을 들은 양산형 제작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주름진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가늠 하듯 살피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화들짝 놀랐다.


변화무쌍한 표정 변화를 내가 감상하고 있을 즈음,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렇군 . . . 그래. 자네가 그 '마계의 이단아'군.]


아까 뒤에서 수군거리는 성좌 놈들도 그렇고. 양산형 제작자도 나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우습게도, 정작 나 자신이 소문에 대해 몰지각했다.


것보다 마계의 이단아라니. 부끄러운 별명은 사양인데 . . .


[저를 아나요?]


[모를 수가 없지. 성마 대전을 흥미 진진하게 만든 장본인이니. 같은 편 뒤통수를 갈기는 전략은 매우 인상 깊었네.]


양산형 제작자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자네 덕분에 짭짤한 수입도 얻었지.]


[수입이라 하면 . . . ]


[성마 대전 동안 입고 다닌 아공간 코트. 그거 내가 만든 것일세. 원주인보다 활용을 더 잘하더구만. 전리품을 쓸어 담는 모습이 메인 화면에 잡힌 덕에 광고 효과를 톡톡히 누렸네.]


예상하지 못한 일에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설마 내가 모델이 되어 있을 줄이야.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챙긴다고. 자본주의에게 된통 속은 느낌이라 속이 살짝 쓰렸다. 그나마 양산형 제작자의 호감을 산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지.


눈앞을 아른 거리는 코인의 산을 치우며, 애써 신물을 삼키고 있을 즈음. 양산형 제작자는 내게 또 한 번 놀랄 만한 언행을 선보였다.


[순수익의 10%는 자네에게 양도하지.]


[정말인가요?]


[자고로 돈은 순환해야 하는 법이지. 우물은 고이면 썩는 법이야. 시장 경제가 본래 그런 것일새.]


- 띠링.


잔고를 확인하자 5만 코인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는 양산형 제작자가 45만 코인을 독식했다는 소리.


순 양아치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아공간 코트 덕을 많이 보기도 했고.

코인이 궁한 처지는 아니라서 대충 넘겼다.


[그나저나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무슨 용건인지 궁금하군.]


나는 '이계 귀환의 전설'의 별점을 입력하며 입술을 뗐다.


[사실 이미 끝났어요.]


[음?]


['양산형 제작자'와 대화하는 것. 그게 바로 제 용건이었답니다.]


입력을 마치자 별점이 2점대를 돌파했다. 

투표한 성좌가 적어서 그런가. 

평가 하나하나에 평균이 요동치는 듯 싶다. 

내 말을 곱씹던 양산형 제작자가 입술을 씰룩였다.


[. . . 허허. 이거, 한 방 먹었구만.]


표정을 보니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나한테 용건이 있는 놈은 백이면 백. 개인의 물욕을 챙기는 치들이었지. 섭섭하게도, 이 '양산형 제작자'가 목적인 상대는 드물었네.]


문득 양산형 제작자의 진명이 궁금해졌다. 원작에서도 그의 진명은 다루지 않았기에 막연한 추측만이 산재했다.


누군가는 그가 자동차 생산라인의 창립자인 헨리 포드라 주장했고, 자본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의인화했다고 말한다.


헌데 내가 직접 본 '양산형 제작자'는 . . . 그냥 새끈

한 노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훗날 '꾸준좌'라는 별명을 달고 살, 이 세계선의 그 누구보다 많은 코인을 가진 할아범. 단지 그뿐인 성좌를 향해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그 상대가 되면 어떨까요?]


[나야 환영이지. 자네한테도 나쁠 건 없을 거야. 일신의 무력은 없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많은 코인을 가지고 있어. 보아하니 자네는 돈걱정할 부류는 아는 듯 싶지만. 세상일을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 내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올지도 모르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은 올 것이나,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김독자가 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양산형 제작자'의 말대로 미래에 예측불가능한 변수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나는 흔쾌히 양산형 제작자의 손을 잡았다.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죠.]


[동감일세.]


그 후로 나와 양산형 제작자는 담소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한낮의 밀회를 깔았으니 이제 쉽게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연회장을 종횡후진 누비다가 '헤아릴 수 없는 엄격'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내가 사용하는 화신체가 중학생 정도의 신장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진체의 키는 160은 찍는데. 어째서 화신체는 이렇게 쪼끄만지. 주인인 나조차 오리무중이다.


"키 크는 스킬은 없나." 마냥 생각하고 있을 무렵, 엄격이 입을 열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알아서 잘 싸돌아다니더군.]


[새대가리 누군가가 안내만 제대로 해줬다면 더 좋았겠고요.]


엄격이 조소했다.


[내게 보모 노릇을 해 달라는 건가?]


[비약이 심하군요.]


나도 덩달아 웃었다. 서로 악의를 품은지라 제 3자가 보기엔 살벌한 대치였다. 정작 나도 엄격도 딱히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엄격의 곁에 놓인 설화로 입가심을 하고, 연회장의 한 구역을 차지한 무대를 바라봤다. 시나리오 소개가 한창이었다. 가식 어린 칭송의 향언이라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엄격. 요새 보는 시나리오 있나요?]


[한 두 개 있었는데 하차했다.]


[왜요?]


[점점 산으로 가더군. 적당히 죽어야 재밌는데. 담당 도깨비가 랜덤 아이템 박스를 풀어논 뒤로 화신들이 너무 강해졌다. 듣자 하니 도깨비 놈은 결국 징계를 먹은 모양이야.]


나는 흠칫 놀랐다.


랜덤 아이템 박스를 만든 도깨비는 분명 . . .


[. . . 혹시 그 도깨비가 운영하는 채널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