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 ■■ ■■'이 활성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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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612 행성계의 무료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급정거한 지하철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겼다. 탑승객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이한 현상을 멍하니 바라봤다. 꿈이라 하기엔 선명했고, 현실이라 하기엔 상식에 어긋나는 현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갔다.


". . . 뭔데, 저건?"

"어디 영화 촬영 하나?"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남성은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익숙한 소설의 서두가 자꾸만 떠오른 까닭이다.


- 요정이라고 부르기엔 괴이하고, 천사라고 부르기엔 사악하며, 악마라고 칭하기에는 천진한 외형.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된다. 소설이 현실이 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뇌이던 김독자의 곁에서 유상아가 속삭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했는지 항상 당차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 . . 도깨비?"


유상아의 목소리가 소설의 서두와 겹쳐졌다.


- 그래서 그 녀석은 도깨비라고 불리었다.


멸살법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의 시작이 제 눈앞에 있었다.


이건 . . . 꿈이 아니다.



*



'8612'


그 숫자를 듣자마자 나는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미친.]


소파에 누워 있던 흑염룡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참고로 나는 흑운에 놀러 온 상태. '동녘의 수호자'가 요리한 설화를 맛보며 한가롭게 채널을 돌려보는 중에 갑자기 구독 알림이 떴고. 확인해 보니 비형의 채널이었다.


타이밍 미쳤네 . . .


영문을 모르는 흑염룡은 정신이 살짝 나간 나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야, 괜찮냐?]


[. . . 네. 잠깐 흥분한 모양이네요.]


에덴의 대천사처럼 상스러운 욕설을 한 나 때문에 흑염룡은 꽤 놀란 모양이다. 나는 실소를 흘리며 검지손가락의 흑염룡의 이마를 살짝 밀었다.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은근히 겁이 많다.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순순히 밀려난 그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싱겁기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됐고 . . . 뭐 때문에 그런 거냐? 너 방송도 잘 안보잖아.]


나는 내가 보던 채널을 흑염룡과 공유했다. 채널 발신지를 본 흑염룡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나는 그 시선이 하얀 머리 소년에게 머무른 사실을 깨닫고 혀를 내둘렀다.


이떻게 찰떡같이 자기 같은 놈을 찾아낼까.


저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크큭. 저놈 마음에 드는군.]


[그래요? 저는 저 남자가 마음에 드는데.]


흑염룡의 시선이 내가 지시한 패널로 옮겨졌다. 여직원과 담소를 나누는 사내의 외모는 매우 자유분방했다. 얼굴을 밀대로 편 느낌이랄까. 넙치가 떠오르는 외모였다.


그가 바로 훗날 '가장 못생긴 왕'으로 불리는 '김독자' 되시겠다. 


흑염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못생긴 놈이?]


[외모가 다가 아니죠. 인간은 무엇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요.]


[네가 쟤 마음을 어떻게 아는데?]


답지 않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상대는 '순수'한 중2병이니까.


수백 년에 걸쳐 약팔기 신공이 극에 달한 내 혓바닥이 미꾸라지처럼 움직였다.


[저는 관심법을 펼칠 수 있답니다.]


[관심법?]


[인간에 마음속에 깃든 마구니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죠.]


나는 오른쪽 눈을 가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몰래 스킬을 운용했다.


[스킬, '변신'을 발동합니다.]


오른쪽 눈으로 보는 세상이 노랗게 물들었다. 손을 떼자 흑염룡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왜냐고? 그야 . . . 오드아이는 중2병의 로망이거든.


[그건?!]


나는 손거울로 변신이 잘 됐는지 확인했다. 시계까지 그려 넣고 싶었는데, 그런 세밀한 조작까지 하기엔 레벨이 후달렸다. 그래도 영롱한 황금빛 눈동자는 꽤 만족스러웠다.


[후훗. 이게 바로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이랍니다. 히든 시나리오에서 얻었죠.]


후드까지 벗은 흑염룡이 초점 나간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다 정신이 들었는지 괜히 헛기침하며 고개를 홱돌렸다. 붉게 달아오른 귓불은 숨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크흠, 꽤 멋있는 능력이군. 내 붕대 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괜스레 장난기가 돌아 슬금슬금 흑염룡에게로 다가갔다. 흑염룡은 뒤를 돈채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상태. 무방비 상태의 등을 손가락으로 콕 찌를 찰나, 퍼엉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나와 흑염룡이 동시에 패널에 집중했다. 내 지원을 받아 토실토실해진 비형이 일장 연설을 펼치고 있었다. 비형의 문장이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누군가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 이건 영화 촬영이 아닙니다.


퍼퍼벅!


- 꿈도 아니고.


퍼버벅!


- 소설도 아니며.


퍼버벅!


- 당신들이 알던 '현실'도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거 살살 좀 하지 . . .


피범벅된 객실에 속이 살짝 울렁거렸다. 


이상한 노릇이다. 성좌나 마왕은 잘만 죽이고 다녔는데. 인간의 육편은 본능적인 혐오감이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한때 내가 인간이었음을 가르키는 얼룩에 불과했다.


흐릿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을 . . .


나는 흑염룡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쩔 땐 생각 없는 뜬소리가 정신 건강에 이로운 법이다.


[쯧, 재미없는 도깨비 같으니라고. 나였으면 반절은 죽여놨을 텐데.]


. . . 정정한다. 오히려 정신병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새삼스럽게 흑염룡의 과거를 떠올렸다. 너무 강하게 태어난 나머지 힘으로 모든 시나리오를 깨부순 미친놈이 바로 저 녀석이다.


따라서 그가 웬만한 사이다에 만족 하지 못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부터가 사이다 그 자체인데, 웬만큼 자극적이지 않는 이상 보는 재미가 없을 터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니 나는 어느새 흑염룡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힘은 참으로 놀라웠다.


[먹으면서 봐라.]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뒤를 흘깃 쳐다본 흑염룡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핀잔을 주었다. 


[왜케 늦어?]


거무튀튀한 구름 속에서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많이 시달린 모양인지 눈밑에 다크서클이 진했다. 나는 언제부터 우리의 전속 요리사가 된 청룡을 보며 살갑게 대했다.


['동녘의 수호자', 항상 고마워요.]


이에 멈칫한 동녘의 수호자의 안색이 미미하게 밝아졌다. 


[고맙다.]


그리고 흑염룡을 쏘아봤다.


[망할 대장이 너의 십 분의 일이라도 닮았다면 좋았을 텐데.]


정작 흑염룡은 아무렇지도 않게 '동녘의 수호자'가 건넨 쿠키를 집어먹고 있었다. '동녘의 수호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은 어떻게 된 거지?]


아, 변신을 아직 안 푼 모양이다.


내가 막 설명을 하려던 찰나, 나와 흑염룡을 연달아 쳐다본 수호자가 갑자기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뱉는 말이 또 가관이었다.


[끝내 물들어버린 건가 . . . ]


적막한 한마디에 실린 비감에 나는 해명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청룡은 지금까지 잘 버텼다는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자리를 피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흑운의 간부가 공언한 중2병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흑염룡이 사라진 청룡을 향해 중얼거렸다.


[어이없네.]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염룡아?


[애초에 동류라고.]


. . . 염룡아?


흑염룡이 나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내심 기대하는 표정에 어이를 상실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러게요 . . . ]


흑염룡이 씨익 웃었다. 그래, 니가 좋으면 됐지.


근데 티 좀 작작 내주렴. 입꼬리가 눈에 닿겠다.


다시 패널을 바라보자 벌써 첫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 중이었다. 패널 가운데 매인 화면을 기점으로, 오른쪽 창에 후원 메시지를 보내는 창이 얼렸다. 입력창에 후원금액을 적고 버튼을 누르면 해당 화신에게 전송하는 식이었다.


문득 소싯적에 봤던 인방이 떠올랐다.


갑질 후원, 자극적인 콘텐츠, 더러운 댓글 창.


스타 스트림도 별다를 바 없었다. 시청자가 성좌라는 점만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니까"라고 생각하며 패널 속 이야기에 집중했다.


- 퍽! 퍽!


살벌한 타격음이 들렸다. 


[. . .]


흑염룡이 눈여겨 본 김남운이 할머니를 폭행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내 시야에 흑염룡이 비춰지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만약 이 구간에서 흑염룡이 웃고 있다면, 내 안에 무언가가 뒤틀릴 것만 같았다.


[. . .]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흑염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탄성을 흘리지도. 신음을 뱉지도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화면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뭐하는 짓이야?!


안경을 쓴 중년, 한명오가 김남운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원작을 알고 있어도 신기할 따름이다.

저자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악인인데.

눈앞의 불의를 참지 못해 달려든다는 점에서 인간의 양면성이 느껴졌다.

실로 오랜만에 느낀 인간성이랄까.


- 뭐야, 아저씨. 죽고 싶어?

- 뭐?

-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 뭔 개소리야? 이 막돼 먹은 새끼가!!

- 저거, 안 보여?


김남운이 가르킨 화면. 패널 속 패널은 다른 칸에서 벌어지는 살육이 중계중이었다.


- 누군가는 죽어야만 해.

- 무슨 . . .

- 우린, 죽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이후 김남운의 일장 연설이 펼쳐졌다.

살기 위해 동족을 죽이는 것은 개새끼들이나 하는 짓이다.

허나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법칙이 필요하다.


한명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타당한 논리였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저 지하철에 있어도 김남운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누구나 살고 싶은 법이니까.

하지만 . . .


- 퍼억!


[웃고 있네요.]


[뭐?]


[당신이 눈여겨 본 소년. 약자를 폭행하면서 웃고 있다고요.]


그래도 즐기는 것은 선을 넘었다.


흑염룡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급변한 세계에서 약자가 도태되는 건 뻔한 이야기지. 빨리 적응하는 놈이 강자가 되는 것이고.]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아득한 세월이 엿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도 성좌였다.

그러니 설득도 성좌의 관점에서 진행해야만 했다.


[근데 물리지 않나요?]


[뭐?]


[당신이 말했잖아요. 뻔한 이야기라고.]


흑염룡이 잠시 생각하다가 붕대 낀 손으로 이마를 잡으며 웃었다.


[. . . 크큭, 그건 그래. 이 몸을 즐겁게 할 이야기는 스타스트림에 없다시피 하니까.]


화제가 쉽게 바뀌었다.

흑염룡이 바보라서 다행이다. 

나는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말을 이어 나갔다.


[흐음, 제 생각은 다를데.]


[어?]


[이 채널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를 볼 수 있다고요.]


흑염룡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내 화면을 훔쳐봤다.


[설마 아까 그 못생긴 놈이?]


[마음이 중요하다니까요.]


나는 아직 변신이 풀리지 않는 눈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정 못 믿겠다면 내기라도 하던가요.]


흑염룡이 몸을 들썩였다. 꽤 솔깃한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조된 진언이 들려왔다. 


[뭘 걸 건데?]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소원권을 걸죠. 단 말도 안 되는 항목은 당연히 제외. 서기장의 서류 조작하기, 아가레스의 궐련에 고춧가루 타기 같은 거 시키면 절교할거예요.]


절교라는 단어에 움찔한 흑염룡이 뒷말을 덧붙였다.


[어째 예시가 묘하게 구체적이다?]


[기분 탓이예요.]


흑염룡의 의문을 한마디로 압축한 뒤, 나는 아공간에서 맹약서를 꺼냈다. 도깨비 상점에서 구입한 매물인데. 설마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서명하세요.]


내가 건넨 깃펜을 잡은 흑염룡이 문득 고민에 빠졌다. 물어보니까 . . .


[진명 쓸까?]


라길래 단칼에 거절했다.


[수식언으로.]


50자짜리 진명을 어느 세월에 다 쓸려고.

나도 수식언을 적었다.

서약좌의 동의를 받은 맹약서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기더니 이내 사라졌다. '존재의 맹세'보단 가볍지만, 꺼림칙한 구속감이 느껴졌다.


나와 흑염룡의 눈길은 동시에 패널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 . .


- 다들 멈추세요! 그 할머니를 죽여 봤자 당신들은 살 수 없으니까!


소설 속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