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쾅!!
옆 칸에서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솟구쳤을 때, 김독자는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붙자 비실비실한 몸뚱어리에 실린 기세도 꽤 날카로워졌다. 그 기세를 살려 김독자는 김남운과 충돌했다.
김남운이 침음을 흘리며 문 쪽으로 튕겨 나갔다.
- 퍼억!
"큭!"
주동자인 김남운이 자리에서 벗어나자 노파를 폭행하던 사람들이 당황했다. 자신들이 가하는 폭력을 은연중에 김남운을 통해 정당화하고 있던 것이다. 김독자는 곧바로 다음 행동에 나섰다.
'첫 번째 시나리오를 완수하려면 무언가를 죽여야만 한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꼭 사람이 될 필요는 없지.'
곤충채집망을 든 아이가 보인 것은 그때였다.
'찾았다!'
김독자가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낯선 감촉에 놀란 아이가 몸을 움츠리자 늘어진 옷깃 아래로 푸른 멍 자국이 드러났다. 김독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아이의 채집망을 가져갔다.
아이의 손에는 제 몫의 메뚜기 한 마리가 고스란히 남겨졌다.
"이거, 가지고 있어."
". . . "
그리고 마치 구원은 한번뿐이라는 듯, 아이의 시선을 외면한 김독자가 생존자들을 향해 일갈했다.
"다들 멈추세요! 그 할머니를 죽여 봤자 당신들은 살 수 없으니까!"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강렬한 악의에 식은땀이 나면서도 김독자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동시에 체감했다.
어째서인지 지금 막 탄생한 세계가 소설 속 한폐이지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저 할머니가 죽으면 도깨비가 말한 최초의 살해 행위가 인정되니까 잠깐 시각은 벌 수 있겠죠. 하지만 그다음은요?"
김독자는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마냥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여러분들은 각자 한 사람의 몫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 다음엔 누굴 죽일겁니까?"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이 등장했다.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은 김남운이 광기 어린 미소로 대응했다.
"하. . .다음엔 너 같은 겁쟁이를 죽이면 되지!"
갈 곳 잃은 시선들이 김독자와 김남운을 왕복하다가 김남운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김남운의 해답은 잔인하지만 명쾌했다. 김독자가 제기한 의문은 타당했으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로 인한 군중심리가 이런 결과를 이끌었다.
김독자는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는 전개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을 은연중에 즐기는 김독자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런 도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뭐?"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은 '사람을 죽여라'가 아니니까요."
김독자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갈색 메뚜기가 잡혀 있었다. 탑승객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김독자가 제기한 의문에 정답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곤충이다!"
"저거 한 마리면!"
광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결단은 빨랐다. 죽음의 문턱에 선 탑승객들은 지옥불에 고통받는 죄수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생긴 거대한 인파가 김독자를 덥쳤다. 이상하게도 김독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콰직!
['최초의 살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100코인을 획득합니다.]
메뚜기를 뭉개뜨린 김독자가 채집망을 힘껏 던졌다.
- 휘잉!
"저 미친!"
"헉!"
- 탓!
채집망의 뚜껑이 덜컥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메뚜기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했다. 탑승객들은 그런 메뚜기를 잡기 위해 바닥을 굴렀다.
메뚜기를 뺐기 위해 발길질을 하고, 가진 가방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정작 기절한 서로의 숨통을 끊는 사람은 없었다. 김독자의 달콤한 위선에 속은 탓이다.
- 퍼억!
- 쾅!
"내놔, 이 새끼야!"
"내거야!!"
채집망에 남은 메뚜기는 세 마리에 불과했다. 반면 탑승객은 어림잡아 서른명은 훌쩍 넘으니, 난투극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결과적으로 수라장으로 돌변한 지하철이었다. 사태를 관망하던 김남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그냥 곤충을 내줘도 됐잖아?"
"채집망에 남은 곤충은 세마리뿐이었어."
". . 응?"
김남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눈앞의 남자는 마냥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망'의 여지를 주었다는 점에서 자신보다 악질적인 면이 있었다.
김남운이 사납게 웃었다. 어쩌면 남자는 자신과 동류일지도 모른다.
"그냥 저 장면이 보고 싶었던 건 아니고?"
". . ."
김독자는 김남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거니와 눈앞에 떠오른 등장인물 창에 시선을 뺐긴 참이다.
다만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김남운은 김독자가 자신의 위선을 인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무덤덤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김독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등장인물 '김남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집니다.]
"나와 팀을 짜자."
"미안하지만 난 혼자가 좋아서."
"그래?"
끝내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김남운은 게의치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자신 같은 놈이랑 팀을 짜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는 짓이었으니까. 물론 호의를 거절한 것은 괘씸했지만, 지금은 죽기 직전의 사냥감을 마저 공략하는 게 급했다.
김독자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 김남운은 잰걸음으로 노파에게 다가 갔다.
그때, 이변이 벌어졌다.
- 탁.
김독자가 김남운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 . . "
김남운은 김독자한테 붙잡힌 팔을 흔들며 정색했다.
"이제 와서 영웅 흉내라도 내볼려고? 이중인격이야?"
시건방진,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목소리가 김독자의 신경을 자극했다.
3000편이 넘는 이야기를 함께하는 동안 김남운은 어린 김독자에게 반면교사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 김독자는 반면교사 삼을 인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 자식 때문에 내가 멸살법을 읽는 내내 얼마나 속이 터졌었는지.'
반면, 김독자의 이중잣대에 불쾌함을 느낀 김남운은 힘으로 붙잡힌 팔을 회수하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김독자를 노려봤다.
"이거, 알고 보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잖아."
그 너머로 조금씩 줄어드는 타이머가 보였다.
". . . 비키라고."
- 부웅!
"했잖아!!"
싸움이 시작됐다.
*
김남운의 주먹에서 검은 스파크가 일자 흑염룡이 반색했다. 아까는 날라리 같은 외모와 행실이 마음에 들었다면, 지금은 김남운이란 인물 자체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김남운은 시나리오 극초반에 스킬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말도 안 되는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확실히 탐나는 화신이었다. 성격이 개차반이라 문제지 . . .
- 퍼억!
김남운의 두 번째 주먹이 김독자를 타격하자 흑염룡이 주먹을 움켜줬다.
[좋아! 그거지!]
그리고 씨익 웃었다. 한 치의 꾸밈없이 해맑은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내기에서 이기고 싶은 걸까.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나는 흑염룡을 측은한 눈빛으로 흘겨봤다. 정작 이를 다른 의미로 이해한 흑염룡은 내 눈치가 보였는지 후드티를 뒤집어썼다.
[크큭. 크크크.]
후드티 속에서 낮게 깔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연신 김치국을 들이키는 흑염룡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살면서 '웃참'을 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는데, 하필 오늘이 그날인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위해 웃음을 참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
- 푸슉!
김남운의 나이프가 김독자의 어깨를 베어냈을 때, 소리 없는 전쟁도 절정에 이르었다. 그리고 절정이란 앞으로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뜻이었다.
화면 속에서 넙치가 결연한 표정으로 메뚜기를 움켜잡았다. 사기꾼답게 몰래 꽁쳐 논 모양 이다.
- 청일 고교 2학년 김남운. 곤충의 알은 '생물'일까?
- 뭐? 갑자기 뭔 개소리야?
[야, 저거 설마?]
흑염룡은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표정을 싹 굳혔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 정답은.
콰직!
- '그렇다'야.
성좌는 화신의 지갑 사정은 볼 수 없다. 다만, 조금 전 김독자의 발언 덕분에 우리는 그가 터뜨린 곤충이 수많은 알을 배고 있음을 눈치챘다.
'가치 증명' 시나리오에서 목숨은 곧 화폐.
가장 많은 '생물'을 학살한 김독자는 지하철 최고 갑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부자는 언제나 갑의 위치였다. 현실에서도, 시나리오에서도.
티잉!
체력 레벨을 한계치까지 올렸는지 김독자에게 쇄도한 군용 나이프가 맥없이 튕겨 나갔다. 흑염룡이 신경질적으로 쿠키를 씹었다. 나는 불난 데 부채질 하는 마음가짐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엇을 시켜볼까~요?]
[. . .]
염룡이의 표정이 제 수식언답게 칙칙해졌다. 여기서 더 건드리면 토라질 게 분명했다.
순수한 용가리는 뜻밖에 감성적이라 한번 삐지면 뒤끝이 상당히 오래 간다. 물론 예전처럼 시간이 남아날 때는 십 년이고 백 년이고 기다려 줄 수 있었지만, 본편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그럼 곤란했다.
따라서 나는 놀리던 것을 멈추고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 하아 . . . 씨발!
김남운이 광인처럼 나이프를 휘두르다가 제풀에 지쳐 바닥에 널브러졌다. 줄어드는 타이머가 죽음이 그의 곁에 왔음을 알렸다. 겁에 질린 김남운이 무릎을 꿇은 채로 발악하기 시작했다.
- 살려 줘, 살려달라고! 사람 목숨은 전부 소중하잖아!
물론 이제 와서 생명의 소중함이니 지껄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 네가 말했잖아.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법칙이 필요하다고.
자기 말을 그대로 되돌려받은 김남운이 10초밖에 남지 않은 타이머를 흘겨봤다. 죽음을 눈앞에 둔 소년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을까?
[스킬,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의 부름에 답합니다.]
[화신 '김남운'이 느끼는 감정은 분노와 절망입니다.]
결국 김남운도 죽음을 부정하는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 시간이 경과했습니다.
퍼엉!
매정한 문구와 함께 김남운의 머리가 폭발했다. 분수처럼 쏟아진 피가 하얀 머리카락을 붉게 물들였다. 비슷한 현상이 지하철 곳곳에서 일어났다.
퍼엉!
퍼벅!
피바다가 된 지하철에서 생존자는 5명뿐이었다. 아쉬운 눈빛으로 김남운을 흘겨본 흑염룡이 입을 열었다.
[내기는 내 패배군.]
[이걸로 정확히 100번째 승리네요.]
흑염룡이 침음을 흘렸다.
[큭. . . 너 진짜 예언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 아니냐?]
[사람 보는 눈이 좋을 뿐이랍니다.]
흑염룡은 살아남은 김독자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긴 한데 . . . ]
그러다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더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내기에서 이기면 전부 알려드리죠.]
[. . . 됐어. 어차피 질게 뻔한데. 빨리 소원이나 말해 봐.]
그때, 어둠 속에서 불덩이가 튀어 오르더니 소파에 안착했다. 타들어 가는 솜 위에서 불길이 잦아들자 도마뱀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흑염룡. 또 졌다.]
[허! 설마 이 몸이 저 장난 같은 내기에 진심이었겠냐?]
[응. 완전. 무조건. 의심의 여지 없이.]
[ . . . ]
오자마자 묵직한 팩트를 꽂은 '불을 삼킨 도마뱀', 샐리멘더가 쿠키를 보며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나는 쿠키를 집어 그 조그마한 입속에 넣어 주었다.
[아스모. 고맙다.]
[그 말투는 컨셉인가요? 예전에 듣던 목소리가 아닌데.]
[음성 변조 아이템. 도깨비 보따리에서 구매. 불량품. 오류 생겼어.]
쿠키를 꿀꺽 삼킨 셀리멘더가 잠시 망설이더니 내게 손짓 했다. 남들 모르게 할 말이 있다는 신호였다. 자그마한 도마뱀을 손바닥에 얹어 귀에 가져다 대자 도마뱀이 육성으로 속삭였다.
"거짓말이야. 그냥 심심해서 그랬어."
그리고 씨익 웃더니 펑 소리와 함께 폴리모프했다. 댕기 머리에 활활 타오르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자아이가 악동처럼 웃었다.
[크크크. 깜빡 속았지?!]
[와. 정말 몰랐어요.]
[반응 구려 . . . ]
기계적인 반응에 질색한 셀리멘더가 소파에 몸을 던졌다. 검은색 소파에 흑염룡, 셀리멘더, 내가 순서대로 앉은 상태. 눈살을 찌푸리는 흑염룡을 가볍게 무시한 셀리멘더가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아, 타는 냄새 . . .
[불 좀 꺼줄래요?]
[머리 쓰다듬어 주면 꺼줄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텐션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는 수 없이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물론 맨손으로 쓰다듬으면 화상을 입기에 '핏빛 손아귀'를 두른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을 쓰다듬다 보니 불꽃이 가라앉았다. 셀리멘더의 적안도 산만하게 움직이다가 이내 정지했다. 우리가 보는 채널에 관심을 가진 모양이다.
[배후성 하려고?]
흑염룡이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나는 보류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녀석이 나타났는데 허무하게 죽어 버렸어.]
[아스모는?]
[저도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이랍니다.]
내 대답에 흑염룡이 질문했다.
[아까 그놈으로 하면 되잖아.]
[제 권속으로 삼기엔 너무 주도적이예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는 사양입니다.]
게다가 어차피 김독자는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거니까.
[그런가 . . . ]
갑자기 조용해진 흑염룡을 대신해 셀리멘더가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이다'라는 건 그 김독자란 인간 말고도 후보가 더 있다는 뜻이야?]
[맞아요. 다만 . . . ]
[왜?]
[하나는 너무 쓰레기고, 다른 하나는 저보다 나은 성좌가 있어서요.]
두 번째로 띄운 창에 강아지를 목졸라 죽인 소녀의 모습이 비쳐졌다. 메인화면은 숨을 헐떡이며 넥타이를 여미는 중년을 포커싱했다.
[누구를 골라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