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네 화신이냐?]

[네.]

[네 화신치고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데.]

흑염룡의 박한 평가에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저 가녀린 소녀가 '비스트 로드'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말도 안 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한명오에게 훗날 엄마가 된다고 스포일러 하는 격이랄까. 아무튼 신빙성이 부족했다.

물론 원작을 스포일러 하면 되리라. 다만 그렇게 되면 친한 성좌들에게 너희들이 사실 소설 속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필터링이 되거나, 그 후폭풍으로 막대한 개연성 폭풍이 몰려올 터. 무엇보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성좌들을 이전처럼 대할 면목도 없어 진작에 포기한 작전이었다.

고로, 나는 농담삼아 이렇게 답했다.

[얼굴이 제 취향이라서요.]

[ . . . ]

그러자 갑자기 흑염룡이 조용해졌다. 

왜? 지극히 아스모데우스다운 발언 아니었나?

예상 못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당황할 무렵, 소파에서 분을 삭히고 돌아온 샐리맨더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나와 흑염룡을 번갈아 보던 샐리맨더가 흑염룡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대장. 혹시 차 - ]

샐리맨더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 흑염룡이 샐리맨더의 입을 틀어막더니 흑운 바깥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벙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상황을 관전하던 청룡에게 물었다.

[왜 저러는 걸까요?]

[음, 아무래도 너 때문인 것 같다만.]

[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가만히 있던 처지에서 억울할 따름이었다. 아무튼 내가 가만히 있자 청룡이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모르는 건가?]

[뭘요?]

[ . . . 아니다. 괜한 말을 했군.]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 . . '

작작해라.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킬킬거립니다.]

몇천 년 동안 수다를 떨다 보니 친구 비스무리한 관계가 된 스킬에게 한차례 핀잔을 주고,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청룡의 성격상 저렇게 끝난 문장은 다시 입 밖으로 나올 확률이 전무했으니까. 당장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과연 이어지는 청룡의 말엔 맥락이 없었다.

[혹시 여자아이를 좋아하나?]

처맞고 싶은 맥락은 있을지도. 아까부터 왜 저러는 것일까? 스테이크가 잘못됐나? 하지만 나는 멀쩡한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클로를 집어 들자 청룡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실언했다.]

[그럼 맞아야죠.]

곧게 뻗어 나간 클로가 청룡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퍼런 눈동자가 5초간 초점을 잃었다가 다시 원상 복귀 되었다. 그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침음을 흘렸다.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멋진 자세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가 왜 흑운의 성좌인지를 알 수 있었다.

[으음. 어째 더 강해진 것 같군.]

[천 년간 놀고먹지는 않았으니까요.]

[과연.]

납득한 청룡이 이번엔 내 화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대 맞은 덕분에 말투가 다소 예의 바랐다.

[그나저나 화면을 3개나 띄웠군. 두 개는 배후 계약 후보였고. 하나는 뭔가?]

나는 세 번째 화면을 물그러미 바라봤다. 시체밭으로 변한 지하철 객실에서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화면이 절묘하게 가려져 등짝만 보이는 상태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기 위해 후원창을 입력하며 말했다.

[주인공.]


*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화신 유중혁에게 1000코인을 후원합니다.]

격노와 정욕의 마신. 그 수식언을 듣는 순간 유중혁은 2회차의 참변을 떠올렸다.

동료가 죽었고,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다.

마왕은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그가 죽는 순간까지 그를 조롱했다.

-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군요.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한차례 이를 간 유중혁이 검을 움켜잡았다.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게 유중혁의 처지에서는 자신을 살해한 대상을 몇 분 뒤 재회한 것이다. 복수심이 끓어 오르는 것도 당연했다.

유중혁은 숨을 고르며 머리를 식혔다. 지금은 시나리오 초반. 초월자의 격도 갖추지 못한 자신은 아직 아스모데우스를 이길 수 없었다.

' . . . 복수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유중혁의 목표는 시나리오의 끝을 보는 것. 꿈꾸는 이상은 허황되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현실적인 면이 강했다. 살의를 잠재운 유중혁이 허공을 바라봤다. 그가 증오하는 별이 그곳에 있었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화신 '유중혁'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유중혁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꺼져라."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눈물을 훔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경악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유중혁이 답지 않게 당황했다.
눈물이란 단어가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존재도 드문 탓이다.

". . . ?"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장난이라고 말합니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화신 '유중혁'이 뜻밖에 순진하다고 말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반전매력을 좋아합니다.]

[2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 . . "

'역시 죽일 놈이다.'

미친 마왕을 상대할 수록 피곤해지는 것은 자신이라 유중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하철 한 켠에 쓰러진 최한규를 눈에 담았다. 그는 훗날 '폭살괴마'로 거듭나는 악인이라 시나리오 시작과 동시에 죽였다.

주먹으로 안면을 뭉갰지.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코트에 피가 튀기는 장면이 끊어진 필름처럼 희미하게 재생될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3707칸의 생존자는 유중혁 한 명이었다.

'전부 죽었나 . . .'

1회차에서 유중혁은 테러범 최한규만 살해했다. 2회차에서 테러범 최한규와 탑승객 일부를 살해했다. 그리고 이번 3회차에서 3707칸 탑승객 전원을 살해했다.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즉, 3번의 회귀를 거친 유중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폐해진 정신은 동정과 죄책감을 감추고, 시나리오 클리어라는 목표만을 내세웠다. 살기 위해 시나리오에 도전한다는 것이 어느새 시나리오의 끝을 보기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변질된 상황. 유중혁은 이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료의 부르짖음이, 아기와 함께 죽은 이설화의 눈물이, 눈을 감으면 메아리처럼 귓가를 스쳤으니까.

- 살아, 대장.
- 살아요.

허나 그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유중혁은 결국 죽었고,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불행한 최후의 반복은 유중혁을 냉혹하게 만들었다.

". . .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유중혁은 피 묻은 검을 한차례 털고 걸음을 옮겼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혼잣말을 궁금해합니다.]

"알 필요 없다."

배짱좋게 흑염룡을 무시한 유중혁이 객실을 연결하는 통로 저편을 바라봤다. 기억대로라면 저 칸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김남운과 이현성 뿐이었다.


분명 그래야 했는데 . . .

'누구냐 넌.'

웬 오징어 같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 유중혁이었다.


*

김독자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뿌연 연기 탓에 희미한 인영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놈이었다. 3000편이 넘는 이야기동안 증오하고, 좋아하고, 함께 했던 주인공.

유중혁이 저 옆에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만나고는 싶었지만 어째 그 대가가 자기 목숨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탓이었다.

'3번의 회귀를 거친 유중혁은 더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김독자는 빠르게 생존자들의 면면을 훑었다.

용캐 살아남은 한명오 부장과 채집망을 받은 유상아. 채집망의 주인이었던 이길영과 훗날 강철검제로 불릴 이현성. 그리고 독자인 자신.

1대 5 상황으로 수적우위에 있었지만, 그 한 명이 패왕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탈출하는 수밖에 . . .'

마침 이현성이 김독자의 의견을 구하는 참이었다.

"독자 씨. 뭔가 의견이 있습니까?"

김독자가 답했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 . . . "

당연히 반발이 뒤따랐다. 특히 한명오 부장의 반발이 심했는데 어룡한테 겁을 잔뜩 먹은 모양이다.

"나, 나가다니. 지금 제정신이야?"

"독자 씨, 저도 그건 좀  . . ."

"저도 자대로 가보긴 해야 합니다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할 것 같습니다."

- 쿠웅!

그때 육중한 충격음이 귀를 찔렀다. 이 성질 급한 주인공 같으니라고. 그새를 못 참고 문을 부수기 시작한 모양이다. 덕분에 한시가 급해졌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아니면 저희는 다음 시나리오가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죽게 될 겁니다."

고지식한 이현성이 상식적인 질문을 던졌다.

"도,독자 씨. 저 철문 너머에 있는 게 꼭 적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물론 김독자의 한마디에 침몰했다.

"사람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생존자일 텐데 . . . 그래도 만나 볼래요?"

" . . . "

일행들은 군말 없이 멀쩡한 출입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곳에서 철문을 걷아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콰앙! 콰앙!

'부디 멀쩡한 문이 있어야 할 텐데 . . . '


*


[쟤내들 만나겠는데?]

샐리맨더를 어딘가에 버리고 온 흑염룡이 재밌는 상황에 썩소를 지었다. 확실히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김독자 일행은 탈출구를 찾지 못해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고, 두 칸을 이은 계폐문은 유중혁의 발차기에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때때로 들려오는 일행들의 한탄도 흑염룡의 손을 들어 주었다.

- 이쪽은 고장 났어요!

- 젠장, 이쪽도 안 돌아가!

- 쾅쾅!!

한탄과 충격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니 한편의 공포 영화가 재현됐다. 살인자 유중혁이 생존자 5명을 쫓는 . . . 잠시만. 이거 어디서 봤는데.

- 쾅쾅쾅!!

왠지 갈고리를 들고 있을 것 같은 유중혁의 발차기가 거세지자 김독자 일행의 안색도 점차 창백해졌다. 결과를 아는 나도 심장이 쫄깃할 정도인데 쟤네들은 오죽할까. 아마 목숨이 절벽에 매달린 심정일 터다. 실제로 저중 한 명은 타의로 절벽에 메달리게 된다. 고생해라 독자야.

['동녘의 수호자'가 보기엔 어떤가요?]

[흐음. 모호하군. 저쪽 문 한 개가 열려 있기는 한데, 저놈들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근데 넌 왜 여유롭냐?]

[저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흑염룡이 되물었다.

[저 한명오라는 놈. 네가 눈독 들이는 화신이잖아. 저대로 두면 죽겠는데?]

[뭐, 독자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독자?]

[김독자요. 못생긴 남자 있잖아요.]

흑염룡이 표정을 찌푸렸다.

[왜 쟤는 독자라고 불러.]

[어감이 좋잖아요. 안 그래요 '동녘의 수호자'?]

갑자기 튀긴 불똥에 잠시 당황한 동녘의 수호자가 침음을 흘렸다.

[으음. '책을 읽는다'라. 확실히 특이한 이름이긴 하군.]

'읽을 독'이 아닌 '홀로 독'이긴 하지만 김독자는 독자(讀者)이자 독자(獨子)인 존재이니 딱히 정정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이 용가리는 왜 계속 뚱해 있는 걸까?

[당신도 '염룡'이라 불러줄까요?]

[. . . ! 크흠, 뭐. 그러던가 말든가.]

어라? 이게 정답이네?

어리둥절하면서도 반응이 재밌는 탓에 나는 일부러 짖꿎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직 소원권을 사용 안 했군요.]

[. . . 어.]

뭔가 불안함을 감지했는지 흑염룡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여 흑염룡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조건을 걸었다.

[여기다 쓰죠.]

[야.]

[저와 내기에서 이기면 불러드릴게요.]

흑염룡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빛나니까 '백염룡'도 잘 어울리겠다는 잡생각이 들었다.

[크악! 치사하게 이러기야?!]

[치사함은 마왕의 덕목이라고요~.]

아가레스식 화법까지 알뜰살뜰하게 써먹은 뒤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흑염룡이 옆에서 왁왁 대긴 했지만 내 알바는 아니었다. 결국 제 풀에 꺾인 흑염룡이 바닥에 철퍼덕 누웠다.

[하아 . . . 이게 어딜 봐서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냐. '내기의 마신'이면 모를까.]

[안 그래도 관리국에 문의 해봤는데 수식언 변경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짜증 나서 행패를 좀 부렸더니 영구 출입 금지를 당해 버렸고요.]

가만히 청취하던 청룡이 답했다.

[격노의 마신은 맞는 것 같군.]

흑염룡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되먹은 깡이냐고 . . . ]

[성마대전에서 그 난리를 친 성좌한테 들을 말은 아니네요.]

우리가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동안, 화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아지를 묻어 주고 복귀한 신유승이었다. 저렇게 귀여운 얘가 범람의 재앙이 돼 버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41회차 유중혁은 쌍놈이 맞다.

[고생했네요.]

-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당신에게 고생했다고 말합니다.

-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신유승이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계약을 맺은 이후 나와 신유승은 서로의 존재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존재맹세'와 다르게 상당히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 감사합니다. 저,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시나리오 창을 확인해 보기를 추천합니다.

신유승이 머리맡의 푸른 창을 확인하며 말했다.

- 어 . . . 아직 준비 중이라고 떠요.

- '동녘의 수호자'가 아직 첫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아서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제 화신에게 친절하게 구시네요?]

[뺐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라. 어린아이가 고생하는 게 눈에 밟힐 뿐이야.]

[알겠어요.]

나는 간접메시지를 연이어 보냈다. 코인이 계속 사라졌지만 푼돈이라 상관없었다.

-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일단 가까운 역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곧 바깥에 독연기가 범람할 것이라 경고합니다.

파스슷.

두 번째 메시지를 전송했을 때, 미약한 스파크가 튀었다. 독연기에 대해 발설한 것이 개연성을 위반한 탓이었다. 거참 빡빡하게 구네.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의 말에 동의합니다.]

-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들어가기 전에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챙기라고 충고합니다.

그래도 생존물품을 구비하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 개연성에 구애 받지 않았다. 나는 근처 편의점으로 뿔뿔 뛰어가는 신유승을 보며 김독자네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화면만 3개라서 금세 정신이 사나워졌다. 이것들을 빨리 합류시키든지 해야지. 그러니까 독자야. 그냥 객실에서 기다려주면 안 될까? 나 눈 아파.

- 흐아아! 됐다! 정말 됐어요!

현성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