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가게?]

[안타깝게도요. 명계의 여왕님께서 절 찾으시네요.]

[쳇. 그 할망구는 왜 너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냐?]

그러게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흑염룡을 물리며 나는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봤자 아공간 코트와 클로가 전부였지만. 둘다 아끼는 아이템이라 신경이 쓰였다.

청룡이 코트를 건네며 말했다.

[설마 명왕하고 싸운 건 아니겠지?]

[하! 제가 미쳤다고 그러겠나요? 저도 제 분수는 잘 알고 있답니다.]

현재 내 수준은 잘 쳐줘야 염룡이와 비등비등한 상태. 비슷한 격에 절대선 계열인 우리엘과 싸우면 시간끌기 밖에 못한다. 신화급 성좌인 하데스에게 깝치면 아마 뼈도 못추리겠지.

[뭐, 네가 그렇다면 괜한 걱정이겠군.]

청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서자 샐리맨더가 쪼르르 달려나와 품에 쏙 안겼다. 올망졸망한 눈빛에 정신이 나갔다가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속지 말자. 이 꼬맹이의 본질은 피부가 매끈한 도룡농이다.

[그럼 언제 올거야, 아스모?]

그래도 귀엽긴 귀여웠다.

[흠. 여왕님이 얼마나 붙잡을지도 모르고 마계도 한번 들려야 하니까 . . .  아마 '용이 되지 못한 자'가 여의주를 얻을 때쯤 다시 오지 않을까요?]

[너무 늦어!]

샐리맨더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용이 되지 못한 자', 이무기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치는 모양이다. 이무기를 아끼는 청룡도 심각한 어조로 덧붙였다.

[한 백년은 걸리겠군.]

[그 정도인가요?]

청룡이 머리를 싸맸다.

[뚝심은 있지만 선천적으로 뇌가 맑은 놈이라 . . .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거지꼴이 된 채로 돌아올 수도 있어.]

신랄한 평가를 내린 청룡이 도포에 걸린 공간확장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평소 그가 애지중지하는 여의주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짙은 한숨이 용의 숨결처럼 쏟아졌다.

[네 말대로 그냥 줄 걸 그랬나. . .]

[그 녀석도 성좌니까 자기 앞가름은 알아서 하겠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런가. . . ]

머리에 사슴뿔 달린 아저씨를 달래며 내 배에 딱 달라붙은 도룡농을 떼어냈다. 축 늘어진 몸뚱아리에 슬슬 얘가 도룡농인지 강아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정 심심하면 '한낮의 밀회'로 연락해요. 시간 날때 찾아오죠.]

[흐흐, 약속했다?!]

샐리맨더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언제 흐느꼈냐는 듯 실내를 방방 뛰어다녔다. 빠른 테세전환을 보니 방금 전 흘린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었던 모양이다. 이 발칙한 도룡농 같으니라고. 나날이 발전하는 연기 실력만큼 강해지면 샐리맨더는 이미 청룡을 이기고도 남았을 거다.

[그럼, 다음에 또 놀러와!]

물론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명계>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다.

- 초대를 승낙하죠.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의 출입을 허락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출입을 허락합니다.]

[성운 <명계>가 당신을 소환하는 포탈을 개방합니다.]

츠츠츳!

<명계>가 지불한 개연성이 시공간을 뒤틀었다. 곧바로 사람 한명이 드나들만한 포탈이 생겨 나를 집어 삼켰다. 칠흙같은 흑운의 밤이 사라지고 말라붙은 명계의 대지가 눈에 담겼다.

[이곳은 언제봐도 새롭군요.]

시나리오의 무덤이라 부름직한 죽은자들의 땅에서 무언가 스르르 미끄러지며 다가왔다. 낯익은 한기에 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그들을 반겼다. 

[오랜만이에요, 심판관 여러분.]

해골을 뒤집어 쓴 심판관들이 흉측한 대낫을 거두었다. 그리고 대낫보다 몇배는 흉측한 역안을 빛내며 다가왔다. 잇몸까지 드러난 구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격노와 정욕의 마신'인가?]

[보다시피요.]

[어떻게 왔지?]

[여왕님의 초대를 받아 이 아늑한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내 겸양에 한 심판관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내가 처음 명계를 방문했을 때 나를 맞이한 성좌였다.

[킬킬. 혓바닥은 여전히 매끄럽군.]

[여왕님의 말상대가 되려면 응당 그래야죠. 그나저나 안 비켜주시나요? 그대들이 충성하는 여왕님께서 기다리고 계실텐데?]

[쳇. 길을 비켜라. 여왕님의 손님이시다.]

우두머리 심판관이 혀를 차며 길을 비켰다. 후계자도 아니면서 여왕의 총애를 받는 내가 못마땅한 듯 보였다. "간만에 서열정리 좀 할까?"라는 생각이 치밀었으나 너무 소란을 피우다간 이 땅의 주인에게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다. 

하여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외탑의 연회장으로 입성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하얀 식탁보가 홀로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그 식탁보의 끝에, 명계의 여왕이 있었다.

[어서와요, '격노와 정욕의 마신'.]

차이나 드레스 가터벨트를 입은 채로 말이다. 여왕님의 탁월한 안목에 나는 간신히 환호성을 삼키며 인사를 건넸다.

[초대해주셔서 고맙군요.]

고개를 숙인 덕에 페르세포네는 내 변태같은 미소를 보지 못한 듯 싶었다. 그녀가 식탁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와서 들어요. 음식이 식겠군요.]

나는 의자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큰일날 뻔했네. 식겁한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자 페르세포네가 의뭉스럽다는 듯 내게 질문했다.

[왜 먹지 않죠?]

뻔뻔한 철면피에 헛웃음이 밀려왔다. 천년이 지나도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 여왕이다.

[그야, 음식에 독이 있으니까요.]



[독?]



[먹으면 평생 이곳에 머물러야 하니 독이라 불러도 상관없겠죠. 안 그런가요?]

페르세포네는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스틱스 강에 맹세코 <명계>는 그대를 붙잡지 않을 거에요.]

나는 그제서야 첫입을 뗄 수 있었다. 크림에 딸기가 얹어진 조각 케이크가 입속에서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설화, '즐거운 미식가'가 미소 짓습니다.]

[흐응 . . . ]

머릿속에 쏟아지는 설화를 음미하며 비음을 흘리자 페르세포네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내가 첫번째 음식을 마무리 할때까지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참 복스럽게 먹네요.]

나는 두번째 음식, '죽은 봉황의 눈물'을 삼키며 답했다.

[맛있으니까요.]

[설화, '즐거운 미식가'가 당신의 말에 동의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는 없어도 같은 이야기는 없는 것처럼.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무지를 사랑하는 자로써 새로운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는 내게 미식이나 마찬가지고. 거기에 함께 먹을 친구가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당연히 페르세포네와의 만찬도 기꺼울 수 밖에. 까닥하면 명계에 갇힐 수도 있지만, 수백년을 무사히 출입하면서 그런 위기감 따위 소멸한 지 오래였다.

[흐음, '맛있으니까 먹는다'라 . . . ]

세번째 설화를 맛보던 중 페르세포네와 눈이 마주쳤다.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듯한 시선이 꺼림직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도 페르세포네의 의중은 궁금해서 그녀의 도담한 가슴으로 눈을 흘기며 질문했다. 하데스가 힘썼는지 수백년 전보다 높이가 상승해 있었다.

[당연한 말 아닌가요?]

잡념이 질문과 뒤섞여 "가슴이 커진 게 당연하다"는 문구가 순간 떠올랐다. 아마 하데스가 알았다면 나를 반죽여놓지 않았을까? 오싹한 상상에 다시 페르세포네의 안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당연함'은 언제가 상실되기 마련이죠. 저의 미식만 하더라도 소리없이 스러져가는 설화를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발버둥에 불과하니까.]

페르세포네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기분 탓인지, 그녀가 나를 보는 눈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대는 저와 달라요. 미식이란 행위 자체가 그대의 기쁨이죠. 어쩌면 미식협의 취지에 걸맞는 자는 그대 뿐일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묘하게 쓸쓸해보이는 여왕의 모습이 달갑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 . . 그나저나 저를 왜 부른 건가요?]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페르세포네의 발치에 깔린 어둠이 일렁거렸다. 명계의 어둠이라 함은 단 한명의 성좌를 의미했다. 수줍은 많은 명왕께 먼저 인사를 드릴지 고민할 무렵, 낭군에게 귓말을 전해 들은 페르세포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초반 시나리오에 개입을 했더군요.]

정확히는 내 스킬이 개입했지만. 두 화신의 이야기를 읽어낸 주체는 내가 맞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사실을 인정했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거죠.]

[. . . 그렇게 까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퍽이나.

속말을 삼키며 유리잔에 남은 칵테일을 홀짝였다. 알코올을 섭취한 전두엽이 지금 이 자리가 열리게 된 까닭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전독시로 가득 찬 애독자의 머리인 만큼 뽑아내는 가설도 전부 전독시에 기반한 것들이었다. 나는 3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을 선정했다.

['잔머리 Lv.10'을 발동합니다.]

1. 김독자는 '가장 어두운 밤의 후예'다.
2. 명계 부부는 김독자를 시나리오 초반부터 주시했다.
3. 나는 (비록 실수 이지만) 김독자를 건들였다.

그렇다면 페르세포네가 꺼낼 말은 정해져 있었다. 분명 명계의 후계에게 간섭한 이유를 묻거나 경고를 줄 심산이었다. 나는 거대 성운의 횡포에 눈물을 삼키면서도 내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움직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음?]

- 띠링!

내가 띄운 화면이 한 소녀의 뒤통수를 비쳤다. 생필품을 비닐봉투에 바리바리 싸든 신유승이 종로 3가역에 진입하는 중이었다.

[저 아이는?]

[제 화신이랍니다.]

똑똑한 여왕님이라면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화신을 골랐고 김독자를 신경 쓸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흐음.]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와 몇차례 말을 주고받더니 턱을 괸채 능글맞게 웃었다. 꺼림직한 미소였다. 과연 잇따른 발언도 다소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내가 헛숨을 들이켰을 때,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군요.]

뭐가요?

[그때는 쟤가 졌지만 이번엔 다를거에요, 마계의 이단아여.]

페르세포네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영문 모를 말을 주워담자 문득 한가지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전. 마계를 처음 방문했을 때 이와 비슷한 대화가 이어졌다. 주제는 분명 . . .

[그대에게 '신성한 삼문답'을 요구하죠. 받아들일 건가요?]

삼문답 교환. 그것은 개연성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한 성좌들의 거래 방식이자 천년전 여왕님께서 나를 떠보시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천년의 시간은 하나의 설화가 탄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미소를 짓습니다.]

츠츠츳!

충만한 개연성에 힘입어 천년 전 명계가 오늘의 명계를 덮어쓰기 시작했다.

- 모든 설화는, 그 설화에 관계된 장소나 인물이 충돌할 때 [무대화]를 발동한다.

[설화, '불패의 협잡꾼'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간만에 펼쳐진 나를 위한 무대. 취지는 다소 불손했으나 피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정말로 떳떳하니까.

[수락하죠.]

나는 오해의 대가로 명계에게 뜯어낼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 호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