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arca.live/b/reader/87703152?category=%EC%B0%BD%EC%9E%91&p=1


 Episode 2. 배후 선택


 

 지하철이 동호대교 위에서 멈췄다.

 

 그때까지 딱딱한 철제 의자에 누워 체력을 보충하고 있던 나는 지하철이 멈춤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제 곧 다음 시나리오가 시작될 터이니 더 이상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뭐야? 왜 이 칸은 한 명 빼고 다 죽은 거죠?]

 

 허공에서 팟, 하고 나타난 도깨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하철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예상보다 너무 적게 살아남아 당황한 듯했다.

 

 [다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 명은 살아남았네요.]

 

 ……아니었나보다. 그저 내가 살아남은 게 예상외였을 뿐이었다.

 

 도깨비의 머위에는 별을 형상화한 듯한 반짝이는 불빛이 있었다. 아마 저것들이 현재 채널에 접속 중인 성좌들의 숫자를 나타내는 걸 거다.

 반짝이는 별은 총 스물세 개였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전독시에서는 저것보다 적었다. 다른 칸 녀석들이 신나게 날뛴 덕분에 성좌들의 이목이 더 끌린 모양이었다.

 

 [오오, 스물세 분이나 제 채널에 계시다니. 이번 녀석들이 밥값 톡톡히 한 것 같네요.]

 

 밥값이라니 어이가 없다 못해 가출해버릴 것 같았다. 난 저 녀석들에게 받아먹은 것도 없는데 밥값을 하라니, 원…….

 하지만 ‘전독시’의 세계관을 생각하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지금껏 지구는 다른 행성에 비하면 평화롭기는 했다.

 

 비극으로 점철된 세계에서는 그저 평화롭다는 것은 시기를 받고, 죄가 될 수 있었다.

 

 허공에서 도깨비가 손가락으로 패널 같은 걸 조작하더니 곧 생존자 명단이 떠올랐다.

 

 [불광행 3434 열차 3907칸 생존자 : 강지원]

 

 그곳에 떠오르는 이름은 오직 내 이름뿐이었다.

 

 [자자, 이제 고난도 이겨냈겠다, 보상이 있어야겠죠? 이번 보상은 무려 ‘성좌’님들의 후원! 응, 뭐야? 반응이 왜 이렇게 시시해요? 무려 ‘성·좌’님들의 후원이라고요? 아, 인간은 그게 뭔지 모르려나?]

 

 후원이 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단지 내게는 그다지 큰 보상도 아니라서 그럴 뿐.

 

 내가 계속해서 ‘뭐, 어쩌라고?’라는 뚱한 표정으로 있자 도깨비가 무안해졌는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뭔지 모르는 것 같으니까 일단 해 봐야죠. 원래 뭐든지 부딪히면서 배우는 법이니까요.]

 

 그 말과 함께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 앞에 반투명한 푸른 창이 떠올랐다. 이제 여기서 나를 후원하길 원하는 ‘성좌’들의 목록이 뜰―

 

 <배후(背後) 선택>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당신을 ‘후원’하기 원하는 성좌가 없습니다.

 

 목록이 뜨기는 떴다. 근데 안 뜨는 거랑 차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기대를 했다. 전독시의 주인공은 무려 처음부터 네 명의 거물급 성좌들이 그를 후원하기를 원했으니까.

 아무리 나라도 한둘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존재조차 하지 않을 줄이야.

 

 그래도 이 정도 무위를 보였으면 최소한 잡雜성좌 하나 정도는 들러붙을 줄 알았는데.

 

 근데 생각해보니까 ‘심연의 흑염룡’인가, ‘흑염의 심연룡’인가 하는 녀석 정도는 있을 법한 데 없었다.

 전독시의 세 주연한테 한 번씩 들이댄 경력이 있는 걸 보면 그리 비싸게 구는 편도 아니고 심지어 사람도 꽤 잔혹하게 죽여서 악 계열 성좌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와서 보니 김칫국일 뿐이었지만.

 

 예상을 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속이 쓰리긴 했다. 초반에 후원하기 원하는 성좌 수는 곧 이 세계에서의 그 사람의 가치를 말한다.

 그리고 성좌들이 평가한 내 가치는 겨우 이거였다.

 

 어차피 선택하지 않을 거였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못했다.

 

 [자, 그럼 선택을……. 응, 뭐야? 하하핫! 웃기는 일이네요. 옆칸에 그놈들은 겨우 벌레 잡고 성좌님들한테 간택 받았는데 이 녀석은 단 한 분에게도 선택받지 못했네요. 하하핫!]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목록을 보고 비웃습니다.]

 

 도깨비 녀석은 뭐가 그리도 웃긴지 한참을 웃다가 10분만 기다리라 전한 뒤 사라졌다. 물론 기다리라 한다고 그냥 기다려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았다가는 이 열차에서 가장 위험한 녀석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곧장 달려가 가장 가까운 문 앞에 섰다. 아마 이 근처에 수동 개폐 장치가 있을 거다.

 나는 문 주위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개폐 장치를 찾았다.

 

 개폐 장치 찾기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다섯 번의 세계를 연달아서 무림과 중세 판타지에서 지내다 보니 지하철을 타본 건 너무 오랜만이어서였다.

 

 한참을 뒤진 끝에 나는 출입문 위 비상손잡이함 안에서 개폐 장치를 찾을 수 있었다.

 개폐 장치를 끝까지 돌린 뒤 출입문을 기세 좋게 양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기세와는 달리 출입문은 한 손 한 뼘 정도 열린 뒤 무언가에 턱, 하고 걸린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

 

 자세히 살펴보니 출입문이 중간에서 찌그러져 있었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다른 출입구들을 살펴봤다. 출입구들은 하나 같이 찌그러져서 열릴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망했나?”

 

 이러면 계획이 으그러진다. 내 계획의 단초는 재빠른 탈출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계획의 초석부터 망하고 있었다.

 당황함에 사고가 정지할 것 같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버렸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나는 빠르게 지하철 문을 훑은 뒤 그나마 멀쩡한 문 앞에 서서 아까와 똑같이 열어봤다. 이번 문은 어린아이 하나가 지나갈 정도까지는 열렸다.

 내 체격은 평균보다 왜소하기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몸을 집어넣어 봤지만 이내 포기했다. 아무리 왜소하다 해도 성인인지라 어린아이가 지나다닐 법한 크기에는 못 들어갔다.

 

 나는 탈출할 수 있을 만한 온갖 방법을 생각했다.

 창문을 깨고 탈출할까? 아니, 그러면 초반부터 다치고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 코인을 사용할까? 하지만 언제 어디서 코인이 필요할지 모르는 초반에서 코인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초반 코인은 마력에 투자해야 한다.

 ……근력 강화 계열 스킬이라도 사용할까? 그렇지만 초반부터 너무 많은 스킬을 사용하면 개연성 적합 심사에 회부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때였다.

 

 [두 번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탈출>

 

 분류 : 서브

 난이도 : E

 클리어 조건 : 끊어진 다리를 건너 옥수역으로 진입하시오.

 제한시간 : 20분

 보상 : 200코인

 실패 시 : ???

 

 +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는지 두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

 진짜로 큰일 났다.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쯧, 초장부터 다치고 시작하기는 싫었는데…….

 

 나는 아까 개폐 장치를 찾으면서 발견한 비상용 망치를 들어 올렸다. 노리는 것은 유리창. 망치를 머리 위까지 올린 다음 가속도를 담아 유리창을 강타했다.

 

 ―챙!

 

 유리는 특유의 기분 나쁜 굉음을 울렸다. 유리창이 내가 가격한 부분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결코 완전히 깨지지는 않았다.

 

 ……이거 코팅된 유리였나. 이러면 예상보다 더 다칠 가능성이 높았다.

 

 ―챙! 챙! 챙!

 

 몇 번 더 유리창을 내리쳐봤지만, 내 열악한 근력 레벨로는 짧은 시간 내에 코팅된 유리를 완전히 깨트릴 수 없었다.

 시간을 조금 더 투자한다면 깨트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났기에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죽은 사람들의 겉옷을 모았다. 회사원의 재킷부터 학생의 마이, 아줌마의 바람막이까지.

 두꺼운 옷이 있으면 좋겠지만, 눈 씻고 찾아봐도 두꺼운 옷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모은 옷들을 내 몸에 둘렀다. 죽은 사람들의 피가 눌어붙은 옷은 찝찝했지만, 조금이라도 덜 다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었다.

 

 “후~.”

 

 심호흡을 크게 내쉬고 금이 간 유리창을 응시했다.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센 뒤 유리창을 향해 달렸다.

 팔을 앞으로 모아 얼굴을 방어했다.

 

 ―쨍그랑!

 

 이번에는 기분 나쁜 소리 대신 청명한 소리가 울리며 내 몸이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아이 씨, 아파라.”

 

 바닥을 구른 나는 곧바로 둘러싼 겉옷들을 벗었다. 겉옷으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팔목에는 유리 파편에 찢긴 상처가 즐비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상처 하나하나를 신경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동호대교 위를 달렸다.

 

 다리 중간까지 달려왔을 때였다.

 

 [시나리오 난이도가 조정되었습니다.]

 [시나리오 난이도 : E -> D]

 

 이것이 내가 최대한 빨리 다리를 건너려 한 이유였다.

 주변에서 그아아아, 하는 좀비나 낼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자의 사념이 돌아옵니다.]

 [주변의 대지가 검은 에테르로 차오릅니다.]

 [마인(魔)들이 깨어났습니다!]

 

 다리 위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부가 검게 변하며 일어났다. 목 위가 사라진 시체들이 걸어 다니는 광경은 비위가 좋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내게도 역겹게 느껴졌다.

 

 좀비, 그러니까 마인들이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모습으로 나를 사방에서 포위했다. 다리 위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금세 고립될 것만 같았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칼로 마인들의 왼쪽 가슴팍을 찔렀다. 심장이 꿰뚫린 마인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려 다시 시체가 되었다.

 하지만 숫자가 숫자인지라 내가 죽이는 것보다 내게 접근하는 게 더 많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무기를 버렸다. 어차피 따로 보관할 주머니 같은 것도 없고, 칼이 잘 안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칼을 버리고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마인들 사이를 제치고 나갔다. 마인 사이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날카로운 예기를 가진 마인들의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달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고립되지 않고 저 앞에 있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나는 것이었다.

 

 자동차 위를 건너뛰고, 난간 위를 아슬아슬하게 밟아 넘고, 마인들 사이를 지나친 내 시야에는 끊어진 다리가 보였다.

 

 거기에는 이미 다리를 건넌 건장한 사내와 아이, 거칠게 저항하는 여자를 들쳐메고 황금빛 징검다리를 외발 주제에 잘도 건너는 50대 아저씨, 그리고-

 

 홀로 끊어진 다리 끝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전독시’의 세 주역 중 하나인-

 

 “김독자.”

 

 -가 있었다.

 

 “뭐!?”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놀랐는지 고군분투하던 사내가 나를 바라봤다.

 

 이런, 실수했다. 지금의 나와 그는 조금의 일면식조차 없었다. 그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으니 그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상상만 하던 등장인물이 실재가 되어 생생히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광경은 몇 번을 봐도 감개무량했다. 하물며 그 대상이 가장 사랑했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교복을 입은 학생 좀비와 싸우고 있었다. 명찰을 보니 그 학생 좀비의 이름은 김남운이었다.

 

 허여멀건 그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아마 내가 자신의 이름을 외칠 때 한눈팔려 김남운의 공격에 스친 모양이었다.

 

 나는 김독자가 있는 다리의 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저 징검다리는 ‘짝수다리’라 나와 김독자가 같이 건너면 됐지만, 지금 김독자는 김남운에게 집요하게 쫓기고 있어서 그건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동안 세 번째 루트의 초석을 쌓을 계획이었다.

 세 번째 루트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마인들을 최대한 다리 아래로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다.

 

 사실 첫 번째 루트와 두 번째 루트도 있었지만, 그 두 가지의 실현 가능성이 세 번째 루트보다 낮은 이상 세 번째 루트도 계획에 넣어 놔야 했다.

 

 나는 침착하게 마인들을 넘어뜨려 끊어진 다리 아래로 떨어뜨렸다.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머리가 터져 죽은 마인들은 하나 같이 머리 위로 존재하지 않아서 시야가 없었다. 그래서 간단하게 발을 걸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인들은 저들끼리 걸려 넘어져 다리 아래로 연달아 추락했다.

 

 침착하게 하나하나 떨어뜨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싶었다. 김독자가 몸에 김남운의 것과 같은 검은 기운을 두르며 김남운을 상대했다.

 

 저걸 보니 이제 곧 ‘전독시’의 두 번째 주역이 등장할 듯 싶었다.

 

 ―콰앙!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까 내가 지나온 길에서 포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몇 번 더 쾅, 콰앙, 쾅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맞춰 후미에 있던 마인들이 터진 육편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드디어 왔다.

 

 나는 마인들로 이루어진 행렬을 정면에서 개박살 내며 걸어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옷 위에 검은 코트를 또 입은 사내 또한 나를 바라봤다.

 

 “ㅇ-”

 

 내 말은 한마디는커녕 한 음절조차 이루지 못했다.

 

 순식간에 허공에 붕 뜬 감각을 느끼는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에 황금빛 광채를 담은 채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한쪽 다리를 쭉 뻗고 있는, ‘전독시’의 두 번째 주역, 유중혁이었다.



 -후기


 전독시 팬픽은 초반부터 좋은 성좌들에게 푸쉬 받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길래 나는 처음부터 무시당하는 걸로 스토리 짬. 그래야 더 많이 구를 것 같아서.


 오늘도 감상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