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떨어진 코인. 아기를 생각하는 아스모데우스. 비형과 마왕의 관계. 무수히 많은 정보의 파도에 김독자는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분명 자신이 아는 아스모데우스는 이렇지 않았다. 뒤틀린 성욕에 칼로 찔러도 눈물 하나 안 나올 것만 같은 가증스러운 마왕이었다.

그런데 . . .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5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이건 수고비라고 말합니다.]

왜 자상한 건데?

실시간 캐붕의 현장에 김독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 한명오의 아기를 봤을 때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이름은 뭘로 했습니까?"

김독자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앉아서 숨을 몰아쉬는 한명오가 힘겹게 답했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복잡했다.

"한 . . . 다름."

"어머, 예쁜 이름이네요."

침체된 분위기를 띄울려는 듯 유상아가 활기차게 말했다. 유상아는 한명오에게서 한다름을 조심스럽게 받아들더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먹는 건 어떻게 . . . "

그리고 입을 싹 닫았다. 이길영이 무해한 눈빛으로 한명오에게 물었다.

"아저씨, 모유 나와요?"

"뭐,뭣?!"

정신이 번쩍 든 한명오가 소리치자 이런 대화에 면역이 없는 이현성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화신 '한다름'은 악마종의 혼혈이라 고기도 잘 먹는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안도한 일행들이었다. 하지만 이길영의 질문은 그칠 줄 몰랐다. 이제 보니 한명오 때문에 김독자가 당한 고초를 앙갚음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엄마예요, 아빠예요?"

". . ."

이길영의 순진무구한 물음에 어른들이 침묵했다. 유상아는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고, 이현성은 못 들은 척 군가를 중얼거렸다.

[성좌,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고뇌에 빠집니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그냥 엄빠라고 부르라고 제안 합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발동합니다!]

여러모로 아찔한 대화에서 '제 4의 벽'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빠져나온 김독자는 여기까지 온 목적을 되세겼다.

'아이템 . . . 맞아, 나는 아이템을 찾기 위해 여기 왔어!'

그리고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서 보상이나 열어 보죠."

다행히도 일행들은 김독자의 말을 잘 따라 주었다. 유상아는 '마력 회복의 팔찌'를 찾았고 이현성은 쓸 만한 방패를 팔목에 걸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이길영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못 찾았어요, 형 . . . "

"아직 메인이 남았으니 괜찮아."

'어둠 파수꾼' 처치 보상으로 얻은 보물상자를 열자 조그마한 마력 회로가 나타났다. 김독자는 마치 한번 써봤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마력 회로를 작동시켰다.

마침 주변에 널려 있는 게 땅강아쥐 였다. 고기 굽는 냄새가 어둠지락을 가득 메웠다. 몇 분 뒤, 일행들은 신명 나게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그중엔 한명오도 있었다. 유상아가 한명오가 출산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을 테니 영양소를 섭취해야 한다고 주장한 덕분이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군침을 흘립니다.]

[몇몇 성좌들이 자신도 저 맛을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역시 책으로만 읽는 것과 실제 맛은 다르구나 . . . '

남몰래 감탄한 김독자가 한다름을 슬쩍 바라봤다. 유상아가 고기를 조금씩 떼서 먹이고 있었다. 눈도 잘 안 보일텐데 받아 먹긴 잘 받아먹는다. 옆에서 이길영이 한다름을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못생겼어."

"원래 어릴 때는 다 그런 거야."

김독자가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따뜻한 손길. 내심 부모 있는 한다름을 질투하던 이길영은 그제야 마음 놓고 고기를 뜯었다.

마력 회로의 온기가 마음에 깃들기라도 하듯, 일행들의 마음이 노곤해졌다. 포근한 분위기 속에서 잡다한 대화가 오고갔다. 그렇게 일행은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처음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그땐 제가 앞으로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거든요."

김독자는 이현성의 속마음을 듣고.

"휴, 이러고 있으니까 회사에서 단합 대회 열렸을 때 생각나네요. 그때 참 재밌었는데. "

유상아의 추억을 듣고.

"음냐 . . . 곤충 좋아 . . . "

제 어깨에 기댄 이길영의 잠꼬대를 듣고.

"끄읍 . . . "

한 명오의 복받침을 들었다. 술은 안 마셨으나 언행에 솔직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갑자기 닥친 멸망이 버거운 탓일까. 수일 동안 쌓아온 정신적인 피로를 이곳에서 쏟아 내고 있었다.

'모두 힘들었겠지.'

[소수의 성좌들이 화신들의 사연을 동정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들이 행복해지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일어서야 한다.'

김독자는 유상아 뒷편에 있는 검은 상자를 힐끗 바라봤다. 몰래 훔쳐본다고 훔쳐본거지만 유상아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까부터 상자를 계속 보시네요?"

"아, 아 네."

"그러고 보니 상자에 뭔가 글씨가 . . . 랜덤 아이템 박스?"

'젠장 . . . '

막 잠에서 깬 이길영과 한명오가 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김독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몰래 확인해 볼려고 했는데 . . . 그래도 일행들이 김독자의 공을 높이 산 까닭에 김독자의 계획이 틀어지는 일은 없었다.

정작 발등에 불떨어진 이는 . . .

[우와아악!!!! 방송 종료룟!!!]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흑역사를 마주한 비형이었다. 다급히 채널을 종료 시킨 비형은 뒤늦게 아이템 박스를 회수하려 했으나.

[도검 계통의 아이템을 넣어 동일한 종류의 아이템이 보상으로 출현합니다!]

눈치 빠른 김독자는 이미 랜덤 아이템 박스를 작동시킨 후였다. 저게 누구 작품인가 했더니 저놈 아이디어였나 보네.

그리고 아이템 박스가 뱉어낸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보며 김독자와 비형은 각기 다른 의미로 멘탈이 나갔다.

.
.
.

- 너 때문에 시말서 써야 하잖아!
- 그러게 그딴 아이템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 . . . 젠장! 분명 다 회수한 줄 알았는데. 빌어먹을 땅강아쥐들 때문에!

화가 잔뜩 난 비형을 뒤로하고 김독자 일행은 금호역으로 복귀했다. 도중 이길영이 충왕종을 부르는 사태가 벌어졌으나 김독자의 만류로 동굴에 매장되는 사태는 막았다.

결과적으로 유상아의 스킬을 통해 일행들은 복귀할 수 있었다. 팔 한쪽에 땅강아쥐를 한 마리씩 끼고 가는 이현성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본 김독자가 생각했다. 

'아무런 기척도 안 느껴지네.

땅강아쥐는 무리 생활하는 개체. 많게는 수백마리가 몰려다니는 그들의 특성상 여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운이 좋다는 걸로 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아니면 저 아이 덕분이거나.'

한명오가 포대에 안아 든 한다름.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머리엔 뭉뚝한 뿔이 달려 있었다.

- 땅강아쥐는 악마종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한다름은 악마종의 혼혈이었다.

'한명오를 데려가는 것도 염두에 둬야겠어.'

본래 버리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딸이 아스모데우스의 총애를 받는 현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왕은 비록 꺼림칙한 존재지만 척을 지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코인도 많이 준다.'

김독자에게 가장 많은 코인을 준 성좌가 바로 아스모데우스였다. 초반 시나리오에서 코인은 필수 불가결한 재원이기에, 김독자는 아스모데우스와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김독자가 전략 수정을 마칠 즈음, 멀리서 빛이 보였다. 금호역 터미널의 전등이었다. 고기 냄새에 이끌린 사람들이 지하철 통로로 고개를 빼곰 내밀었다.

당연하지만 공짜로 줄 생각은 없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괴상한 표정을 한 천인호를 보며 김독자가 능글맞게 웃었다.

"아. 물론 이번에도 코인만 받겠습니다."

주도권을 빼앗긴 천인호가 이를 악물었다.


 *


화면 속에서 비형이 손가락을 튀기자 식량이 전부 소멸했다. 절망한 사람들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코인을 구걸하고, 남을 협박하고, 주류 그룹에 반항하고.

그러다 천인호의 선동에 속아 현 사태를 전부 김독자의 잘못으로 우기는 추태에 나도 모르게 눈썹이 찌푸려졌다.

시중을 들던 그리고리가 물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십니까?]

[시나리오 전개가 조금 답답하군요.]

물론 김독자는 기지를 발휘해 이 상황을 무난하게 헤쳐 나갈 것이다. 전독시의 애독자로서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허나 아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사뭇 달랐다. 나는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산책이나 가봐야겠군요.]

그러자 그리고리가 질문했다.

[오늘 약속 있지 않으십니까?]

무슨 약속?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리고리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게티아'의 첫 번째 모임 말입니다.]

[아.]

내가 정해 놓고 잊고 있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게티아의 일원들 중에는 나보다 서열이 높은 마왕이 있다. 기다림에 지친 그들이 어떤 꼬장을 부릴 지 상상해 보니 머리가 아찔했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지금이 몇 시죠?]

[32번째 마계 기준으로는 12시 정각입니다.]

12시라. 늦진 않았다. 그래도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 부랴부랴 아이템을 챙겼다. 요즘 들어 한숨이 늘은 그리고리가 옆에서 보조했다.

[사소한 건 다 기억하시면서 그런 걸 까먹으십니까?]

할 말이 궁해 지조 없는 변명을 내밀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내 나이가 몇인데 . . . ]

그러자 그리고리가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 봤다.

[혹시 치매십니까?]

[ . . . ]

[죄송합니다. 그냥 농담 좀 해봤습니다. 그러니까 그 흉물스러운 것 좀 집어넣으세요.]

나는 클로를 도로 아공간 코트에 수납했다. 내가 바빠서 다행인 줄 알아라.

그리고 흉물스럽다니! 내 집사도 그렇고 다른 성좌들도 그렇고 어째서 예리하게 제련된 클로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걸까? 다들 미적 감각이 부족했다.

[다 챙겼습니다. 그나저나 '은둔자의 망토'는 왜 들고 가시는 겁니까?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후후, 이래뵈도 다 쓸모가 있다구요.]

그리고리가 아공간 코트를 내 어깨에 걸쳤다. 나는 전신거울을 보며 옷새무매를 가다듬었다. 지금 보니 옷차림이 매우 독특했다.

고스 로리 복장의 소녀가 무릎까지 오는 하얀 코트를 두르고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보라색 머리카락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마왕보단 악동 같은 모습이랄까.

[이게 . . . 나?]

[지랄.]

- 콰앙!

예전 성격이 나온 그리고리를 벽에다 처박고 나는 근처 포탈로 이동했다. 지나가면서 나와 마주친 마계 주민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 마왕님을 뵙습니다!]

조금 딱딱해 보이지만 천년전 나를 보고 기절하다시피 한 저들을 생각하면 양반이었다. 그때 한 꼬마애가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는 정말로 . . . 음,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무슨 망태기 할아범이라도 된 기분이었지.

[일들 봐요.]

나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주민들을 몰렸다.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대로로 사뿐히 발을 옮겼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내가 일군 마계의 정경을 바라봤다.

대로를 끼고 유흥주점과 투기장이 양대 산맥을 이룬 모습. 완벽한 환락의 도시였다.

예로부터 인간은 강한 자극에 이끌려 왔으니. 도깨비들이 철수하면서 쇠퇴한 타 마계와 다르게, 32번째 마계를 방문하는 발걸음은 끊이질 않았다. 확실히 채널이 없는 게 아쉽긴 하다만, 뭐 조만간 생길 거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난잡한 계획을 정리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커다란 소용돌이가 나를 막아섰다. 제 1무림에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포탈이었다.

[목적지는 . . . 한때 성마대전의 무대였던 곳으로.]

그리고 5만 코인을 지급했다. 포탈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발광했다. 나는 그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풍경이 바뀌길 몇 차례. 나는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도착했다. 수많은 별들이 영면한 무대는 세월의 흐름이 무색하게 변함이 없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 눈을 감았다 뜨니 그림자가 다섯으로 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말했다.

[오래 기다렸나요?]

[딱히.]

이번엔 불화의 조성자, 안드레스가 답했다.

두 마왕은 그래도 비교적 나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오랜만이다. 미친년.]

성마대전 때 내게 뒤통수를 맞았던 모략스였다. 최근 순위가 많이 올랐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그게 내게 욕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오랜만이네요, 허접쓰레기.]

[뭐?]

발끈한 모략스를 엄격에게 맡겨두고 아직 인사를 못한 두 마왕을 바라봤다.

[우리 구면이죠?]

[. . . 성마대전 때 봤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별과 논리학의 군주' 부에르와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 바르바토스. 각각 10위, 8위의 마왕으로 나보다 순위가 높았다. 저희들끼리도 어색한지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본론부터 말해라, 격노와 정욕의 마신.]

나는 피식 웃곤 손바닥 박수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위가 다소 고요해졌을 때,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전부 모일 줄은 몰랐네요. 다들 제 계획이 궁금했나 보군요.]

내 말에 일부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멋대로인, 하물며 나보다 강한 마왕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성마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격의 입김이 있었더라도, 나에 대한 흥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에르가 입을 열었다.

[그것보단 그대 말에 담긴 뜻이 궁금했도다.]

- 밤하늘에 별이 너무 많아.

바르바토스는 그때를 상기하는 듯 낫빛이 확 바뀌었다.

[덕분에 거대 성운이 우리를 위험분자로 간주했지. 이제 어디 나가지도 못하겠군.]

나는 근처 바위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빙의 첫날, 마왕 무리에게 쫒길 때 방패막이를 해준 그 바위였다.

[하지만 마음에 쏘옥 들지 않았나요? 나름 그대들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줬다고 생각하는데.]

[ . . . ]

침묵 속에서 나는 마계의 정경을 바라봤다. 채널도, 성좌도 없는 고립된 지대가 쓸쓸히 빛나고 있었다. 이곳 황무지는 그런 마계에서도 버림받은 공간이었다.

나는 별들의 무덤에서 별의 죽음을 기원하는 장송곡을 읊었다.

[우리는 왜 약할까.]

바르바토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열 8위의 마왕에게 약하다는 문구는 거슬릴만 했다. 허나, 지금 내가 말하는 약함은 개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마계라는 병든 생물을 논하는 중이었다.

고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 별들은 왜 우리보다 강할까.]

가만히 있던 부에르가 꿈꾸듯 읖조렸다.

[수가 많아서겠지.]

[그리고?]

[설화가 많아서겠지.]

별이 저문 곳에서 별을 헤아리는 마왕. 역설적인 문장이나 그것보다 부에르를 더 잘 설명하는 말도 없었다.

마왕의 시선이 지나친 곳에 다시 내 시선이 닿았다. 무수히 많은 은하수가 보였다. 저들도 우리를 보고 있을까?

어쩌면 저들의 자리에서, 우린 너무 낮은 곳에 걸린 별이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좌를 저버리고 타락한 대가로 이곳에 고립되었죠.]

타락한 성좌들의 거주지.
관리국에게 버림받은 곳.
시나리오에서 소외된 지역.

모두 마계를 일컫는 말이었다.

[우리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끊임없는 박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안드레스가 주먹을 쥐었다. 최상위권 마왕은 몰라도, 중하위권 마왕들은 성좌들의 등쌀에 시달릴 때가 종종 있었다.

[저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혐오하죠.]

내가 시나리오를 찾아다닐 무렵, 불손한 시선으로 나를 보던 성좌들의 눈빛. 애써 무시했으나 마음 한 켠에 담아둔 모욕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되세기자 머리가 뜨거워졌다.

나를 괴롭히기란 마왕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적어도 뒤에서 수작질을 부리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괄시할 생각인가요?]

[ . . . ]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겁니까?]

엄격이 부리를 열었다.

[확실히 분하군. 그래서 성운을 만든 것인가? 복수를 위해?]

나는 어조를 가라앉혔다. 너무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은 신뢰를 사기 어려우니까.

[뭐, 어떻게 보면 복수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리고 되물었다.

[성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르바토스가 당당하게 답했다.

[나의 장총.]

[. . . 신화급 성좌까지 포함해서요.]

[아 그럼 아니지.]

그런 바르바토스를 한심하게 쳐다본 부리에가 입술을 달싹였다.

[운명.]

[흐음, 비슷한 맥락이긴 하군요. 조금 더 멀리봐요.]

갑자기 도래한 수수께기 시간에 안드레스가 적응이 안 된다는 듯 머리를 털었다. 그 옆에서 아몬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종말.]

나는 그것을 조금 더 순화해서 말했다.

[결말이죠.]

모든 성좌들이 원하는, 그리고 두려워하는 이야기의 끝. 그것이야말로 성좌들의 역린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결말을 구도할 겁니다.]

우리의 결말이 저들의 종말이 되도록. 

내 오만한 발언에 또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바위에서 내려와 마왕들의 말문이 트일 때까지 기다렸다.

영원한 스타스트림의 톱니바퀴에서 결말은 쉽게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의 기다림은 예상한 바 였다.

나는 성류 방송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정희원이 없는 탓에 김독자가 직접 나서서 천인호를 죽였다. 김남운에 이은 김독자의 두 번째 살인이었다.

그때 음울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들려왔다. 부에르였다.

[창조가 아닌 구도라. 의미심장하도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정해진 결말을 내가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따르고 약간 비트는 정도는 가능하리라.

그래서 '구도'인 것이다.

가장 오래된 꿈을 향한 . . .

[그건 나중에 가면 알게 될거예요.]

[그런가 . . . ]

부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침묵에 젖어 들었다. 안드레스가 발언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고작 여섯이서 저 많은 성좌들의 견제를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텐데.]

초치는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 둔 전략을 담담히 말했다.

[거대 설화를 얻어 맞서야죠.]

안드레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대 설화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

나는 넌지시 말했다.

[시나리오는 마계에도 있어요.]

마계에는 시나리오가 없는 게 아니다. 그저 방치되어 있을 뿐이지. 개 중 몇몇은 거대 설화로 피어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혹시 마왕 선별전을 말하는 건가?]

원작에서 김독자 컴퍼니가 보유한 '마계의 봄'. 그 바탕이 되는 '마왕 선별전' 말이다. 당연히 '마왕 선별전'은 김독자의 몫이므로 건들 생각은 없다.

[그것보다는 . . . ]

고로, 내가 원하는 설화는 . . .

[마계의 통일. 그 정도는 돼야 도전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하나의 마계.

그리고 이를 위한 첫걸음은 . . . 

.
.
.

[오랜만이군, 아스모데우스. 내 궐련에 고춧가루를 탄지 오백년 만인가?]

[후훗. 그런 사소한 일에 매달리다니. 당신답지 않군요.]

현 마계의 최강좌를 포섭하는 것이다. 

만약 안된다면?

[혹시 내 성운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요?]

[거절한다.]

힘으로 제압해야지. 한낮의 밀회로 신호를 주자 잠복해있던 마왕들이 일제히 '은둔자의 망토'를 벗어던졌다. 아가레스의 안면이 빳빳하게 굳었다. 

[. . . 비겁하군.]

[비겁함은 마왕의 덕목이라면서요?]

다 그쪽한테 배운겁니다. 클로에 핏빛 손아귀를 두르자 아가레스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옥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궐련 5개비에 불을 붙이더니 격을 발출했다. 

- 츠츠츳!!!

[이러다 폐병으로 먼저 뒤지겠군.]

한숨을 내쉬는 아가레스를 향해 성운 <게티아>가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