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릉!

이지혜가 검을 뽑았다. 검날에 비친 눈빛이 달라졌다. 신유승과 있을 때 가벼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 명의 검귀가 그곳에 있었다.

"너 누구야."

"야 잠깐 - "

"누구길래 사부의 동료라고 사칭하지?"

추궁받는 김독자로선 억울할 따름이었다.

- 결정했다. 너를 동료로 삼겠다.

'그 자식이 그렇게 말했는데.'

하지만 물증이 없었다.

멱살까지 잡혀 동호대교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황에서 증거물 확보를 위해 녹음기를 틀 정도로, 김독자는 미친 인간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미쳤다면 아마 김남운 대용으로 끌고 갔겠지. 자신은 일개 독자일 뿐, 여타 등장인물처럼 비범한 능력을 갖춘 자가 아니었다. 

김독자는 다급히 신유승을 바라봤다.

일단 오해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야 했다.

"저기 유승이라고 했니? 왜 아저씨가 거짓말했다고 말한 거야?"

신유승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배후성님이 아저씨보고 거짓말쟁이래요."

배후성?

머리에 물음표를 띄운 채, 김독자는 신유승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이름 : 신유승
나이 : 11세
배후성 : 격노와 정욕의 마신
전용 특성 : 비스트 테이머(희귀), 반성적 살해자(일반)
전용 스킬 : [길들이기 Lv.5] [다중 교감 Lv.6] [기민한 발 Lv.7] [이종 호의 Lv.3]
성흔 : 핏빛 손아귀
종합 능력치 : [체력 Lv.13] [근력 Lv.10] [민첩 Lv.15] [마력 Lv.23]

김독자는 눈을 비비고 다시 상태창을 확인했다.

요새 잠을 잘못자서 피곤한가?

수상할 정도로 높은 능력치는 둘째치고 배후성 상태가 . . .

배후성 : 격노와 정욕의 마신.

. . . 나도 모르겠다. 생각하길 포기한 김독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말했다.

"장난은 이쯤에서 끝내시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짖꿎게 웃으며 알겠다고 답합니다. ]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킬킬거립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보인 행적이 전부 연기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김독자는 이지혜와 신유승의 표정을 감상했다.

일순간 당황한 낫빛이 스치다가 곧장 멋쩍음, 미안함으로 탈바꿈은 하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었다.

"크흠, 미안. 오해했네."

"죄송해요. 마신님을 대신해서 사과드릴게요."

김독자는 나름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너희가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해. 배후성 말이라고 무조건 믿지 말고"

신유승은 수긍하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 들어 배후성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지긴 했다. 반면, 배후성도 아닌데 속아넘어간 이지혜는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했다.

여튼 경계심이 한층 풀어졌으니, 꽤 괜찮은 첫인상을 남긴 셈이었다.

전화위복.

비유하자면 그랬다.

'설마 이걸 노리고 장난을 친 건 아니겠지? '

골똘히 생각하던 김독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비약이었다.

"그럼 우릴 충무로 역으로 안내해 줄래?"

"쳇. 따라와. "

그렇게 오해를 푼 일행은 이지혜의 인도를 받아 충무로 역으로 입장했다. 이동하는 도중, 간만에 재회한 이길영과 신유승은 누구의 배후성이 더 강한지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성좌가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물러섭니다.]

"아싸! 내가 이겼다!"
"마신님 . . . "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성좌,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채널에 입장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경악합니다!]

[성좌,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화신 '이길영'의 배후성을 바라봅니다.]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성좌가 깜짝 놀랍니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어깨를 으쓱입니다.]

뭔가 토론이 토론이 아니게 됐다만 . . . 아무튼 재밌게 노는 모습에 유상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보기 좋네요."

덕분에 음산한 분위기도 한결 가셨다. 유상아가 말을 이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김독자는 동의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장을 늘여놓았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는 세상이 되었죠."

". . . 슬프네요.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 . . "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유상아를 위로하며 김독자는 천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화신들의 비극을 관람하는 배후가 그곳에 있었다.

"책임을 물을 수도, 용서를 할 수도 없죠.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군가를 죽여야 살아남는 세상이 됐다고."

[소수의 성좌들이 화신 '김독자'의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자신들의 '첫번째 시나리오'를 떠올립니다.]

유상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이현성도 신음을 삼켰다. 사실 저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인간적인 고뇌이고.

오히려 이상한 사람은 김독자 자신이다. 그는 이 세상이 소설처럼 느껴졌으니까. 단단한 벽이 자신을 외부로부터 괴리시켜 놓은 듯했다. 때문에 그는 냉철하고 이성적이었다.

그런 김독자이기에 방금 같은 조언도 할 수 있던 것이다.

"동물이 최고야!"

"곤충이 최고라고!"

"조용히 좀 해, 이 망할 꼬맹이들아!"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김독자가 쓰게 웃었다.

"애가 셋이네요."

"꺄르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다름이 웃었다. 김독자가 말을 정정했다.

"넷 . . . "

이현성이 방패를 등에 매며 허탈하게 웃었다.

"어째 어린이집에 온 것 같습니다."

". . . 그러게 말입니다."

덕분에 가는 길은 심심하지 않았다.


*

[드디어 채널이 하나로 합쳐졌군요.]

채널이 처음 오픈했을 때는 신유승, 김독자, 유중혁을 모두 보기 위해 3개의 채널을 띄워 놓았다.

이후 내 인도를 받아 신유승이 금호역에 합류하면서 2개로 줄었고, 마침내 김독자 일행이 이지혜와 조우한 지금, 비형 채널 한 개만을 띄워 놓고 있다.

정말 경사스러운 일.

허나 내적 기쁨과 무색하게 나는 침대에 쏙 들어가 시체처럼 누워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리의 부축을 받아 32번째 마계로 돌아온 이후 계속 이 상태였다.

움직일 때마다 밀려드는 불쾌한 한기와 통증.

역시 최후의 벽의 일부를 수정하는 건 좀 무리였는지, 개연성과는 별개로 화신체를 구성하는 설화자체가 훼손된 듯했다. 라파엘에게 썼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물론 피해 정도는 팔한 짝이 날아간 그때가 더 컸지만, 적어도 아파서 골골대지는 않았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빙의한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선 감각이 둔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어쩌면 '몰입도'와 관련있으려나. 혹은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내가 이 세계에 녹아든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고통이 달갑게 느껴졌다.

[흐흐 . . . ]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온 웃음에 설화팩을 교체하던 그리고리가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안나는데 . . . 실례지만 미치셨습니까?]

[안타깝게도 정신은 멀쩡하답니다. 그러니 후환이 두렵거늘 단어 선택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그리고리.]

그리고리가 일그러진 웃음을 띄우며 타박했다.

[이 상태로 절 어쩌실려고 합니까? 지금 싸우면 저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후환이 두렵거늘' 이라고 말했잖아요. 아니면 뭐, 지금 반란이라도 일으키게요?]

그리고리는 입을 꾹 다문 채 링거를 갈아 끼웠다. 설화팩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투약한 설화액이 화신체를 한 바퀴 완주하자 차츰 온기가 샘솟았다.

포근한 침대 위에서 눈꺼풀을 살포시 덮으니 수마가 몰려왔다. 몽롱한 기분에 취해, 나는 나직이 속삭였다. 

[그리고리, 화났어?]

[. . .]

침묵은 곧 긍정이라, 대답이 없지만 알 수 있었다. 화가 났구나. 그것도 엄청. 눈꺼풀을 열어 세상을 보자, 그리고리의 얼굴이 꽉 들어차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포커페이스가 무색하게 살벌한 기세가 피부를 찔렀다. 

그나저나 조금 부담스러운데 . . . 툭 건들면 무너질 것 같아 가만히 내비두었다. 저런 표정은 오랜만이네. 15위 마왕 엘레고스의 습격을 받아 내가 중상을 입었을 때도, 그리고리는 저렇게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리고리가 입을 열때까지 기다렸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그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타인과 자신을 가르는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네. 화났습니다.]

[그리고?]

[서운했습니다. 적어도 미리 말씀은 해주실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리의 얼굴이 점점 멀어졌다. 감정을 통제하기 버거운지 전신에서 흘러나온 검은 에테르가 침실을 들썩였다.

이러면 밖에 시종들이 또 오해할 텐데. '마왕이 틈만 나면 시종장과 뜨겁게 불타오른다' 같은 헛소리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외설적인 동네라 도는 소문도 그따위다.

가뜩이나 개차반인 이미지를 나락으로 내리꽂을 이유는 없지. 나는 침대 메트리스를 꾹 누른 채 그 반발력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덜그럭거리는 링거를 뽑고 손을 횡으로 휘저었다.

- 스르륵.

검은 에테르가 바닥에 삼켜졌다. 침실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실수를 자각한 듯, 그리고리가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러게 죄송할 짓하지 말았어야죠.]

내가 손을 뻗자 그리고리가 이후 벌어질 미래를 직감한 듯 눈을 감았다.

바보같긴.

나는 짖꿎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잘못했으니까 - ]

그리고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고.

[이걸로 넘어가도록 하죠.]

그렇게 문장을 맺었다.

그리고리가 얼떨떨한 듯 이마를 매만졌다. 예상했던 결과가 아니어서 당혹스러운 표정이었고, 내가 늘여논 문장이 사과의 의미를 담고 있어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입을 헤벌레 벌린 그리고리. 상당히 바보같았다.

그 광경에 만족하며, 나는 아공간 코트에서 종이 묶음을 꺼내 던졌다. 정신이 든 그리고리가 종이를 홱 낚아챘다.

[이건 . . . ]

[오랜만에 드라이브나 갔다 오라고요. 보아하니 스트레스가 꽤 쌓인 것 같은데.]

끈이 풀리자 낡은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밀조밀하게 밀집한 공장과 시가지. 그리고 낯익은 지명에 그리고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싶다가 이내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73번째 마계 아닙니까?]

[정답.]

[. . . 혹시 저, 해고된건가요?]

[ . . .  하핫!]

파르르 떨리는 눈썹에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은근히 순수하다니까. 내 웃음소리를 들은 그리고리가 말을 정정했다.

[. . . 아니면, 제가 찾아와야 할 물건이 있습니까?]

[맞아요. 단, 물건이 아니라 화신이지만.]

눈물을 닦으며, 핏빛손아귀로 지도에 표시된 구역을 지목했다.

[마왕 님께서 소유하신 토지군요.]

[지금은 거기에 시계점이 들어섰죠. 가서 '아일렌'이란 이름의 화신을 데려와요. 설화를 수선하는 능력자니까 몸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죠.]

[. . . 꼭 데려오겠습니다.]

결의에 찬 그리고리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아, 되도록 무력은 쓰지 말아요. 옆에 금발 머리 꼬맹이도 있을텐데 건들지 말고. 자기도 가겠다고 떼를 쓰면 그냥 다 데려와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자들이니까.]

[알겠습니다.]

주변을 정리한 그리고리가 방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방문을 닫을 찰나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시종장은 누구에게 맡길까요?]

[공석으로 둬요.]

내 말에 그리고리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오직 시종장만이 마왕님의 침실에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를 공석으로 놔두시면 마왕님을 간호할 자가 없어요.]

[어차피 여기 있을 것도 아니라 상관없답니다.]

[네?]

내가 윗옷 단추를 풀자 그리고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순식간에 외출용 옷으로 환복을 마쳤다.

공적인 일에 입고 다니는 고스로리 복장과 다르게, 다소 캐쥬얼한 치마와 윗옷이 한 세트였다. 그 위에 아공간 코트를 두르고 그리고리를 불렀다.

그리고리가 마른세수를 하며 답했다.

[제발 미리 말 좀 . . . 하아 . . .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네?]

딱히 볼 것도 없는데 반응 한번 격하다. 나는 그리고리의 부탁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채, 내 행선지만 통보하고 밖으로 나섰다.

['흑운'에 있을 거니까, 일 끝나면 연락하고요.]

그렇게 나는 게이트로, 그리고리는 차고로 향했다.

.
.
.

[그래서, 그게 끝?]

[네.]

할아버지가 손자손녀 보는 느낌으로 여기까지 온 경위를 들려주다 보니, 목이 탔다. 내가 물컵에 손을 뻗자 샐리맨더가 번개처럼 내 손목을 붙잡더니 뒷목을 받치고 내 입에 물을 따라주었다.

[저기, 이 정도는 내가 - ]

[아스모.]

[. . . 잘 마실게요, 샐리맨더.]

이 나이에 아기가 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참 묘했다. 허나 거절하고 싶어도 벌겋게 달아오른 샐리맨더의 눈가를 보면 도저히 말이 안 나와 그냥 체념한 상태다.

명백히 과보호라고 이거 . . . 구해 달라는 눈빛을 사방팔방에 발산했지만, 돌아온 것은 차디찬 외면이었다.

아니, 한놈은 예외다.

[정말 마계의 2인자와 혈투를 벌이셨다고요?!]

[. . . 어.]

깜짝 놀라며 스스슷 소리를 내는 소년. 목에 노란 여의주를 건 그는 전(前) '용이 되지 못한자', 현(現) '바다의 용'이었다.

[대단하십니다, 누님!]

[그래.]

그리고 귀찮은 뱀 새끼였다. 죽을 끓여 온 청룡을 바라보자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시달린 모양이군. 하긴, 저 녀석 성격상 시도때도 없이 여의주 자랑을 했을 테니 상당히 피곤했을 거다.

[제 여의주 보셨나요?! 참 멋지지 않습니까?! 이걸 어떻게 얻었냐면 - ]

결국 지켜보다 못한 흑염룡이 뱀새끼를 쥐어박았다.

- 콰직!

어디서 돌 깨지는 소리가 . . .

[악! 아픕니다, 형님!]


[시끄러워. 너 그거 자랑하는 것만 벌써 49번째다.]


[그것밖에 안 됐습니까?]


[. . . ]

- 휘잉!!!

[으아악!!]

뱀새끼의 꼬리를 잡고 흑운 어딘가로 던져 버린 흑염룡이 후련하게 웃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그러게요.]

그렇게 고요해진 방에서 우리는 다 함께 다과를 먹었다. 간만에 평화로운 분위기. 나는 샐리맨더가 주는 사탕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으며 흑염룡의 화면을 훔쳐봤다.

모자에 1이 적힌 코트를 입은 남자를 필두로, 열댓명의 화신들이 모여 있었다.

[관심 있나 보네요?]

[복장이 간지나서 보고 있지. 뭔가 흑막같은 놈들이라 눈여겨보고 있다.]

역시 중2병 최고봉 아니랄까. 이런쪽으로 정통한 모양이다. 나는 개중 모자에 1이 적힌 화신, 정확히는 화신의 아바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남자, 김남운 정도는 아니어도 당신 마음에 들거예요.]

[. . .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라고 중얼거리며, 흑염룡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샐리맨더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운채 충무로 역 화면을 띄웠다. 물컹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사실 샐리맨더는 도마뱀이 아니라 도룡'농'아닐까?

[으음?]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엄청난 빛이 화면에서 뿜어져 나왔다. 황급히 내 눈을 가렸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매끈한 두상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랐네.

알고 보니 공필두의 대머리에서 반사된 빛이었다.

근데 왜 두상이 확대되어 있던 것일까? 몇 초 뒤 흘러나오는 광고에서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숱없는 당신,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이거 하나 바르면 머리가 쑥쑥 자라거든요!]

비형비형아 . . .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니?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해당 광고에 격한 관심을 보입니다!]

그 와중에 광고에 야단법석인 원숭이 왕을 나는 동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성좌,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해당 광고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나저나 쟤는 빠질 머리도 없는데 왜 저러는 걸까?

광고 수수료에 미친 도깨비, 탈모위기 원숭이왕, 대머리 까마귀가 이룬 삼위일체에 나는 옅은 한숨을 흘렸다. 


*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화신 '공필두'를 안타까워합니다.]


"?"


갑작스러운 동정의 눈길에 공필두가 보고 있던 신문을 접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나 간접 메시지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공필두는 콧방귀를 내쉬며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놈이군.'


그리고 낚시용품 광고를 읽을 즈음, 잡음이 들려왔다.


"꼬마야, 부모님 어디 계시니?"

"잠시만요. 얘는 쟤 친구라고요."


그린존을 침범한 이길영과 통행료를 독촉하는 건물주 연합의 간부. 이를 말리는 신유승.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쯔쯧,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들 같으니라고.'


통행료를 면제 받은 것은 유중혁의 동료인 신유승 뿐. 이길영에게는 그런 특권이 없었다. 고로, 월세 대신 코인을 받아먹는 건물주들의 처지에서 이길영은 사유지를 침범하다 걸린 꼬맹이에 불과했다.


공필두는 귓동냥으로 대화를 엿들으며 사태를 관망했다. 땅주인의 처지에서 통행료를 받아먹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행위였으니까. 유중혁의 동료인지 딸내미인지 모를 여자애가 울먹이기라도 한다면 그때 나설 작정이었다. 뒷감당은 해야 했으니까.


허나 공필두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신유승이 어른들의 핍박에 울먹이는 그저 그런 소녀였다면, 정녕 그 지독한 유중혁이 신유승을 데리고 다녔을까?


"야, 꼬마야. 유중혁, 그 자식이 도와준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

" . . . "


배불뚝이 중년의 발언에 신유승의 눈이 짜게 식었다. 중혁 아저씨나 희원 언니, 지혜 언니 앞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짐승들이 제 앞에서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짜증보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중혁 아저씨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 죽어라.


- 그럼 죽어라.


- 그냥 죽어라.


'. . . 너무 극단적이야.'


하지만 그랬기에 아무도 유중혁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점을 상기하며 신유승은 뒷짐 진 손에 금빛 마력을 휘감았다.


- 두두두 . . .


땅이 울렸다. 당황한 중년들이 땅밑을 주시했다.


"지, 지진인가?"


지진이라기엔 진동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흔들림 역시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변을 느낀 공필두가 성흔 '무장 지대'를 발동시키며 말했다.


"멍청한 놈들. 아래가 아니라 앞이다."


"필두씨, 그게 무슨 . . . ?!"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그냥 쓸어 버리라고 독촉합니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가만히 있으라고 '심연의 흑염룡'을 힐난합니다.]


공필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괴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반은 땅강아쥐 떼였지만 '긴급방어전' 시나리오에서 길들인 8급 괴수종도 있었다.


2층 로비가 비좁게 느껴지는 괴수들의 파도를, 소녀는 단 한마디로 제동을 걸었다.


"앉아."


금빛 마력이 휘몰아치고, 괴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마치 하나뿐인 왕을 섬기듯. 그 장엄한 광경에 건물주 연합의 입이 떡 벌어졌다.


누군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겁먹지 마. 어차피 저것들은 여기 못 들어온다고 . . .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 메인 시나리오에서 그린존은 괴수종들이 침범할 수 없는 안전지대니까. 그러나 그것이 신유승의 강함을 저평가 하는 요소가 되지는 못한다.


당장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마력량만 봐도 공필두에 맞먹을 정도다. 유중혁의 그늘에 가려졌을 뿐, 신유승 역시 그들이 넘볼 수 없는 화신이었다.


경직된 건물주 연합 앞에서, 신유승이 웃으며 말했다.


"화장실 가도 될까요?"

" . . . "


공필두가 성흔을 해제하며 말했다.


"그냥 들여보네."

"하지만 필두씨!"

"저 꼬마가 그놈에게 오늘 일을 일러바치면 귀찮아지는 건 우리야."


그놈.


충무로 역에 도착하자마자 칼춤을 추며 연합을 궁지에 몰아세운 남자.


유중혁의 험악한 상판대기를 떠올리자 중년들은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신유승이 넋이 나간 이길영을 불렀다.


"길영아."

"어,어?"

"들어가자."


그렇게 두 꼬마들은 당당히 화장실에 입성했다. 이길영은 신유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도 유승이처럼 강해질거야!'


한편, 또 돈을 떼어먹힌 공필두가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요즘 젊은 놈들은 건방지군."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덕분에 멋있는 장면을 봤다고 기뻐합니다.]


"거 아까부터 계속 떠들던데, 돈 안 아깝나?"


정신 사나우니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나빴다.

아스모데우스는 공필두를 조롱하듯, 연이어 간접 메시지를 띄웠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자신은 화신 '공필두'보다 부자라고 자랑합니다.]


"알겠으니 그만 좀 . . ."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좌, '디팬스 마스터'가 머리를 부여잡습니다.]


"제기랄."


결국 단념한 공필두가 신문을 세게 펼치는 것으로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


한편, 그 시각 충무로 역 환승로 부근에서는 두 남녀가 첫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김독자라고 합니다."

"정희원이예요."


김독자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켜 그녀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그리고 동시에, 유중혁이 정희원을 동료로 삼은 이유 또한 알 수 있었다.


'멸마의 심판자 . . . 회귀자 자식이 탐낼 만 하네.'


헌데 이 정도의 재능이 멸살법에서 한 번도 묘사되지 않은 이유가 의문이었다. 등장인물 알림이 떴으니 분명 정희원은 멸살법의 등장인물이 맞다. 하지만 김독자의 기억 속에 '정희원'이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작 3회차와 다른 유중혁의 행적, 자상한 아스모데우스에 이은 3번째 변수.


그것은 김독자의 개입과는 무관계한 변화였다.


이에 의문을 품고, 김독자는 정희원을 뚫어져라 쳐다 봤다.


"할 말 있어요?"

" . . . 없습니다."


싱겁긴. 픽 - 웃은 정희원이 대화를 주도했다.


"지혜한테 들었어요. 중혁 씨 동료라면서요."

"생과 사를 따로 한 동료죠."

". . . 보통 같이 하지 않나요?"

"아무튼, 친하면 그만 아닙니까?"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사람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문장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었다.


"그럼 독자 씨도 알고 있나요? 중혁 씨가 그 . . . "

"회귀자라는 것 말입니까?"

"역시 알고 있네요."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필터링을 궁금해합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확인을 마친 정희원은 김독자와 일행들을 데리고 충무로 역을 소개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건물주 연합의 일원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쯧!"


정희원이 혀를 찼다.


주류 그룹의 핍박을 피해 유중혁을 따라온 정희원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강자들이 약자들의 생존을 좌우하는 상황이 혐오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싹 밀어 버리고 싶었다. 공필두가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다면 진작에 그랬을 터고.


"저분들이 잘못한 게 있나요?"


하여, 유상아의 순진무구한 물음에 정희원은 차디찬 경멸을 담아 답변했다.


"금호역의 천인호 같은 놈들이예요. 그린존에 냄새 나는 엉덩이를 붙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코인을 뜯죠. 가끔 땅노름도 하고요. 개자식들."


"저기, 그린존이 무엇입니까?"


"아,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아직 시나리오가 갱신되지 않은 까닭에, 김독자가 충무로 역의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일정 시간마다 튀어나오는 괴수 무리.

그들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안전지대 '그린존'

금호역처럼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나뉜 충무로의 현황.


일목묘연한 정리에 정희원이 감탄했다.


"누가 보면 나 말고 독자씨가 여기 먼저 온 줄 알겠어요."

"이 정도는 시간만 주어진다면 누구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추측이라 보기엔 틀린 말 하나 없던데요?"

"그건 . . . 영업비밀입니다."


정희원이 웃음을 삼켰다.


"뭐, 그쪽은 미래라도 볼 수 있나봐요?"

"비슷합니다."


정확히는 미래가 적힌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이지만. 소설이 현실이 된 지금 따로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정희원이 낮은 어조로 소근거렸다.


"그나저나 저 인간은 용캐 살았네요."


정희원의 시선이 닿은 곳엔 일행들에 둘러싸인 한 명오 한다름 부(?)녀가 있었다. 철두파와 함께 위세를 떨치던 한명오라 썩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딸도 있었나요?"

"어제 출산했습니다."

"네?"


인지부조화가 온 정희원이 눈알을 굴렸다.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른 탓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지나고, 정희원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애 엄마는요?"


김독자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하지?' 고민하던 와중, 아스모데우스가 선수를 쳤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화신 '한명오'가 죽였다고 고자질합니다.]


다소 비약이 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 . . "

"어 . . . 희원씨?"

"나 말리지 마요. 저 쓰레기 같은 인간 내가 오늘 꼭 죽일 테니까."


식겁한 김독자가 정희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허나 검은 계속해서 뽑혀 나왔다.


'뭔 힘이 . . . ! '


김독자가 근력에 3000코인을 투자하고 나서야 검은 멈춰 섰다. 정희원의 눈에 의아함, 그리고 약간의 실망이 깃들었다. 김독자의 입에서 정리되지 않은 문장이 우르르 쏟아졌다.


"잠시만요.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저 애는 한명오가 직접 낳았습니다."

"네?"

"직접 낳았다고요. 영화 '에일리언' 아시죠? 그거랑 같은 경우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한 김독자는 그 결론을 뒷받침할 본론을 뒤이어 말했다. 김독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검은 검집에 들어갔다.


정희원이 사건의 전말을 요약했다.


"그러니까 독자씨 말은 악마종이 저 사람에게 알을 수태했고, 그게 마왕의 저주를 받아 부화했다. 이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허! 뭔 그딴 일이 . . ."


정희원이 팔짱을 낀 채 하늘을 노려봤다.


"이봐요. 마신씨. 하마터면 엄한 사람 죽일 뻔했잖아요."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향변합니다.]


정희원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변명하지 말고요."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휘파람을 붑니다.]


"혹시 '격노와 정욕의 마신'과 친합니까?"

"음 . . . "


[절대선 계열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그냥 심심풀이 삼아 장난치는 거라고 답변합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정희원이 짧게 혀를 찼다. '멸망의 심판자'의 개화로 절대선 계열의 비호를 받는 상황이라 '격노와 정욕의 마신'의 편을 들 수 없었다.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친하다는 것을 친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영 못마땅했다.


김독자는 정희원의 눈치를 살피다가 멀리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김독자."


음영 진 충무로 역 복도에서 검은 코트가 펄럭였다.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온 얼굴은 신이 빚어낸 듯한 잘생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등장조차 멋있다고 분한 소감을 남긴 김독자는 특유의 사람 약올리는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중혁아."

". . . "


[소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반응을 기대합니다.]


'시건방진 웃음을 보니 놈이 맞군.'


묵묵히 김독자의 신변을 확인한 유중혁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빠져나왔지?"

"소화액 사출구에 검을 박아 넣었어."

"네놈에겐 검이 없었다."

"어룡 뱃속에 있더라. 운이 좋았지."


스트림 계약에 대해 발설하는 것을 시기상조라 판단한 김독자는 탈출 방법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아직 '거짓간파'가 없는 유중혁이기에 할 수 있는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탈출했냐 가 아니다.'


"다리에 떨어지기 전에 한 말, 지켜야지?"


[절대선 계열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신의를 지켜봅니다.]


동료로 삼겠다.


유중혁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망할 회귀자는 밥 먹듯이 사람을 죽이지만, 내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과연, 김독자의 예상대로 유중혁은 과거의 발언을 부정하지 않았다.


" .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김독자가 질문했다.


"혹시 여기 빈방 있냐?"


원작에서 충무로 역에 남은 방은 없었다. 때문에 유중혁은 건물주 연합과 혈투를 벌여 그린존을 확보했다. 허나, 아직 건물주 연합은 건제한 상태. 유중혁 일행이 머무를 정도로 큰 방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녹록지 않았다.


"그런 건 공필두에게나 물어봐라."


냉소적인 거절이 서두를 열고


"우리에게 남은 방은 없다."


현실을 자각시키는 문장이 마침표를 찍었다. 김독자가 정희원을 바라봤다.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우리 몸 뉘일 곳밖에 없어요."

"그렇군요 . . . "


잠시 생각에 잠긴 김독자는 다시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 . . 좋아. 방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 대신 정말 위험할 때 내 일행들을 지켜줘.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저들도 나중에 네 동료가 될 사람들이니까."

" . . . "


유중혁은 '현자의 눈'으로 김독자의 일행을 탐색했다.


성흔을 개화한 이현성과 성운과 계약한 유상아.

마왕의 가호를 받는 한다름.


제대로 키우면 한 사람 몫은 톡톡히 할 화신들이었다.


'나쁘지 않군.'


저들을 이끈 김독자의 지도력도 두드러졌다. 아마 이현성의 특성진화도 저 하야멀건한 녀석이 일조했을 터.

미래를 알고 미래를 설계하는 예언자는 확실히 필요한 재원이었다.


허나 김독자의 필요를 인정한 것과는 별개로, 유중혁은 아직 김독자를 신용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저들은 누구지?

- 당신의 동료가 될 사람들이예요. 유중혁.


2회차에서 유중혁은 안나 크로프트라는 예언자에게 뒤통수를 맞고 그녀의 노예처럼 살았다. 그 끝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도 지키지 못한, 불행한 최후였다. 


안나 크로프트 역시 자기 일행, 차라투스트라를 아꼈다. 유중혁은 느낀 기시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저 녀석은 안나 크로프트를 닮았다.'


예언자라는 공통분모 말고도 설득하는 말투와 기분 나쁜 미소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고로 유중혁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김독자가 어떤 인간인지, 그의 목표는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만약 그 과정에서 거슬리면 . . .


'죽인다.'


이런 사고의 흐름을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엿본 김독자는 어이를 상실했다. 안나 크로프트를 닮았다니. 차라리 쌍욕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억울한 김독자를 앞에 두고, 유중혁이 말했다.


"염두에 두지."


유중혁은 정희원을 살짝 흘겨보더니 이내 극장던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긴장된 분위기가 이완되자 김독자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던 정희원을 불렀다.


"뭐가 그리 재밌습니까?"

"왜 생과 사를 따로 한 동료인지 알 것 같아서요."

" . . . "

"뭣하면 내 방이라도 빌려줄까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쿨하게 고개를 끄덕인 정희원은 이지혜를 찾아 떠났다. 김독자는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이길영까지 해서 총 6명. 


6명이 머물 그린존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 츠츠츳!


[자, 자. 슬슬 3일차 메인 시나리오를 진행해볼까요?]


<메인시나리오 #3 - 그린존(3일차)>

분류 : 메인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역내 그린존을 차지하여 매일 밤 몰려드는 괴물들로부터 살아남으시오. 이 시나리오는 총 7일 간 지속됩니다.

지속시간 : 8시간

보상 : 1000코인 

실패 시 : - 


우리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성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오늘 밤에 벌어질 일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