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트론의 눈꺼풀이 닫혔다. 아득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재생되었다. 그것은 그가 성좌가 아니라 '계약의 천사'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 바다를 가른 선지자가 어린 양을 이끌고 영엄한 산에 이르니 주께서 계시더라.


- 주께서 가로되, 너희가 나를 저버리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 그리고 대지와 계약하니 그들의 성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


- 옥좌에 모시고 있는 자가 그 신실한 계약을 하늘에 기록하더라.


옥좌에 모시고 있는 자.


그렇게 불리던 시절, 메타트론은 꾀죄죄한 몰골의 인간을 보며 생각했다.


'참으로 가엾도다.'


지상의 죄악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활개를 쳤다. 이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어린 양들은 믿음을 잃고 고통의 굴레에 빠졌다. 


다행히도 믿음을 잃지 않은 소수는 주의 은총을 입어 성지를 약속받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간사한 꼬드김에 넘어간 인간은 하느님을 배반했으니 결국 계약을 위반한 어린 양들은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끝없는 속죄만이 반복되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신의 전능함과 의중을 의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 저들의 죄는 언제 사라집니까?

- 때가 오면 알게 될 것이다. 


- 왜 지옥을 놔두시는 겁니까?

- 악을 경계하고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 왜 처음부터 무결한 세상을 만들지 않은 겁니까?

- 때가 오면 알게 될 것이다. 


두루뭉술한 문답이 이어질수록 메타트론의 고뇌는 깊어졌다. 명석한 그는 절대자의 의중을 이해하길 원했고 어린 양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고 싶었다.


답을 찾기 위해 천국의 서재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 쉬엄쉬엄 해.

- 이것까지만 읽겠습니다, 우리엘.


탐독한 도서가 어느덧 수천 권에 이르었을 무렵, 메타트론은 일찌감치 '하늘의 서기관'으로 불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선악을 판별하는 대천사. 


그런 그가 메시아의 뒤를 이어 선의 최고 담화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동료 천사들도 모두 그 결과에 동의했다. 


반박의 여지 없이 메타트론은 세상 그 누구보다 선에 가장 근접한 '하늘의 서기관' 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메타트론 본인은 기뻐하지 않았다.


자신은 한없이 무지한 존재였고, 감히 선을 연구하고 있었다. 선을 대표하기엔 부족함이 많다고 여겼다. 


그래서 거절했다. 


- 제겐 너무 무거운 자리입니다.

- 그럼 누구에게 맡기라고?


- 아! 악마■끼들!

- 입을 확 ■어버릴까 보다!


- 쟤네?

- . . . 그냥 제가 맡겠습니다.


저보다 결격 사유가 많은 동료들 때문에 결국 떠맡게 되었지만 . . . 그럼에도 메타트론의 생각은 여전했다.


- 저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 원래 완전한 존재란 없다. 


답지 않게 투정도 부려봤다.


- 안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 가야 한다. 그것이 <스타스트림>과 맺은 계약이다. 

- 계약 . . . 어째서 계약을 맺은 겁니까?

- 세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절대자는 메타트론의 머리를 쓰다듬고 천사들의 기도를 받으며 승천했다. 


승천하는 그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걸린 것처럼 보였다. 


휘광이 드리운 그림자일지, 혹은 대견함에서 우러난 미소일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지. 


메타트론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늘의 서기관은 끝내 절대자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다. 


- ['최초의 선'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 ['가장 오래된 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수만 년이 흘렀다.


긴 상념에서 깨어난 메타트론이 눈을 떴다. 턱을 궨 마왕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왕은 선악의 구분이 희미했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 


아가레스가 어두컴컴한 암흑, 메타트론의 순백의 빛이라면 아스모데우스는 회색 안개였다.


가변적이고 신념이 없었다. 그래서 위험했다. 그녀는 위악도 위선도 될 수 있었으니까. 따라서 메타트론은 그녀를 선악의 적이라 판단하고 경계했다. 단단한 벽을 세워 마음의 틈새를 빈틈없이 메꿨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하늘의 서기관'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메타트론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회의감이 드는 이유? 그야 무리해서 그렇죠.]


[그대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선을 정의내릴 뿐, 그 본질을 아는 자는 아닙니다.]


[메시아? 그분이야 선 그 자체니까 절대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죠. 하지만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히 완벽할 수 없죠.]


[그래도 . . . 고생했어요, 서기관. 나로선 그대가 짊어진 업을 감히 헤아릴 수 없군요. 수만 년 동안 선을 책임지다니. 나였다면 진작에 때려쳤을 텐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나고요? 푸핫, 서기관. 악은 선보다 쉬운 법이라고요. 수틀리면 반항하는 게 악마라는 족속입니다. 내가 서기관이라면 메시아가 짬을 때린 순간 역정을 부렸을 것 같군요. 아무튼, 나는 그런 년입니다.]


목소리는 벽을 넘을 수 있었다.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메타트론이 벽을 만졌다. 벽 너머에 제게 자유와 해방을 종용하는 이가 있었다. 메타트론의 동요를 알아챈 벽이 경고했다. 벽 위로 문장이 떠올랐다.


이윽고 목소리와 문장이 충돌했다.



- 세상의 선악을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 


[내 손을 잡아요, 서기관. 그대는 그대의 선을, 나는 나의 악을 실현하는 겁니다.]



- 그것은 영원불멸한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언제까지 그 고리타분한 이야기에 매몰되어 있을 겁니까?]



- 하늘의 서기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힘들 때는 쉬어도 괜찮아요.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어요.]



- 그리하여 선은 시작한다. 영원토록. 


[그렇게 끝을 향해 가는 겁니다.]



메타트론의 의식이 침잠했다. 몽롱한 기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흐려진 시야에서 마왕은 변신을 거듭했다. 엿가락처럼 휘였다가 압축되었다. 뒤틀리고 뒤틀린 위상. 


마침내 동그란 무언가가 그곳에 남았다. 


그것은 문장을 끝맺는 온점으로, 사이한 눈동자처럼도 보였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선악과였다.


아스모데우스가 메타트론의 선악과였다. 


메타트론은 어지러운 정신을 붙들은 채 눈을 감았다. 마왕의 속삭임이 아득한 저편에서 들려왔다. 


유혹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내 손을 잡으렴. 계약의 천사야.]


메타트론은 이 또한 알 수 없었다.


.

.

.


암전.



*



바르바토스의 함선에 탑승한 나는 찌푸둥한 몸을 풀기 위해 갑판을 올랐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별자리가 사방에 가득한 그곳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아직도 피고 있군요?]


[습관이다.]


아가레스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하나 피워볼 테냐?]


[사양하죠.]


연기만 봐도 겁나 독해 보였다. 피웠다간 골로 가겠지. 나는 딴청을 피우며 아가레스와 같은 자세로 착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가레스는 몇 번째인지 모를 궐련에 불을 붙였다. 


- 츳.


[하아 . . . ]


잇새로 흘러나온 연기. 고요한 밤하늘. 그 위로 가득한 별을 헤아리며 나는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했다.


조금만 어두웠다면 딱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하며 안면에 힘을 풀자 눈꺼풀이 살짝 내려앉았다. 좁아진 시야에서 별빛이 번진다. 밝아서,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의 모순.

과연 세상은 모순투성이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눈꺼풀을 전부 닫았다. 당연하지만 세상이 깜깜해졌다. 다시 눈을 떴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나와 함께 적막을 나눠 마시던 어둠을 불렀다.


[아가레스.]


[무슨 일이지?]


[생일 축하해요.]


아가레스가 담배 연기를 후 - 불며 답했다.


[나는 그딴 것 모른다.]


[그래요? 서기관은 오늘이 생일이라던데.]


[ . . . 선악은 세트, 뭐 그런 건가?]


[이해가 빠르군요. 서기관은 한참 벙쪘는데.]


아가레스가 조소했다.


[그놈은 머리는 좋은데 맹한구석이 있어. 그래서 늘 두 번 말해야 알아듣지.]


자신의 숙적을 떠올리며 은근한 즐거움을 내비친 아가레스가 나를 바라봤다.


[타락시켰나?]


나는 다소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아직.]


[그래도 표정을 보아하니 소득은 있었나 보군.]


나는 메타트론이 마지막으로 뱉은 문장을 떠올렸다.


-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지. 물론 동요를 불러일으킨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뭐, 잘하면 조만간 <게티아>에 천사 한 명이 들어올 수도 있구요.]


[성운이 발칵 뒤집히겠군.]


아가레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게티아>의 목적에 대해 듣지 못했다.]


[이 세계의 결을 보는 것. 그것이 성운 <게티아>의 목표입니다.]


[그런가 . . . ]


그러곤 스타스트림의 경광으로 시선을 돌린 아가레스에 의해 대화는 잠시 끊겼다. 나는 성류방송에 접속했다. 패널 속에서 김독자와 유중혁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 쓸모없군. 네놈, 정말로 예언자인가?


- 예언자라고 모든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유중혁이 시뮬라시옹과 마주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찾아간 김독자는 오히려 유중혁에게 붙들려 극장던전으로 직행했다. 그러니까 지금 둘이서 히든 피스를 깨고 있던 상황이었다. 


-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2000코인을 후원했습니다. 


김독자와 유중혁의 표정이 동시에 오묘해졌다. 반가우면서도 달갑지는 않은, 뭐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화면을 돌려 다른 일행들을 시청했다. 땡땡이를 치다 뒤늦게 도착한 이지혜가 정희원에게 혼나고 있었다. 


- 내 말 좀 들어봐요, 언니! 난 정말 몰랐다고!


- 거짓말.


-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 애들은 조용히 있어!


- 변명은 벌이 가중될 뿐이야. 


- 아, 언니!


이쪽도 활기차네. 내 조그마한 화신에게 생존 신고를 하고 창을 닫았다. 그새 내 화면을 훔쳐본 아가레스가 말했다.


[재밌는 조합이군.]


[심심하면 배후성이나 해볼래요?]


[마음에 드는 놈이 없다.]


아가레스가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마계 대통합 시나리오는 언제까지 미룰 작정이냐.]


[슬슬 다시 시작해야죠.]


[도움이 필요한가?]


[신종 기만입니까? 애초에 도와줄 생각도 없으면서.]


내 반응에 아가레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별빛에 드러난 얼굴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너희의 목표는 광오하다. 끝의 자격을 가진 신화급 성좌들조차 얻지 못한 것이지. 너희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 마왕 승급전은 성장을 위한 좋은 거름이지. 내가 간섭해야 좋을 것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물었다.


[흐음, 그럼 얼마나 죽여야 할까요?]


아가레스가 툭 내뱉었다.


[네 위에 몇이나 있지?]


[같은 편을 제외한다면, 열명?]


[아몬, 바르바토스, 부에르 셋이 저보다 높은 위계의 마왕을 상대한다면 . . . 여섯은 네가 죽여야겠구나. 모략스가 빠르게 성장한다면 모르겠지만.]


[하아, 갈 길이 멀군요.]


[모든 시나리오가 그렇다.]


가볍게 투정을 끊어낸 아가레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선이 2번째 마계에 가까워진 참이었다. 아가레스가 문득 질문했다.


[50위권 밖의 마왕들은 안드라스에게 맡길 심산이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드라스도 승급전을 치러야죠.]


[그럼 . . . ]


나는 훗날 구원의 수식언을 짊어질 73번째 마계의 주인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 일엔 적임자가 있답니다.]


아가레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갑판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는 아공간 코트에서 와인을 꺼내 잔에 따라 마셨다.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 명. 그중 하나는 익숙한 마기를 품고 있었다.


[걱정시켜서 미안. 그리고리.]


[ . . .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표정 관리에 성공한 그리고리 뒤로 아일렌과 장하영이 나타났다. 둘 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그때 장하영이 나를 손가락질했다.


"니가 아일렌을 부른 마왕이야?"


. . . 근데 왜 반말이지?


.

.

.


그날 갑판 위는 신음 소리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