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대로라면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옳았다.

김독자는 아직 하찮은 화신일 뿐이니까.

반면에 상대는 별. 

정말 하늘과 땅 만큼의 간격이 있는 셈이었다. 


고로, 잘쳐줘야 자신이 진기한 볼거리 취급을 면치 못함을 김독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좌를 증오하지 않았던가.'


'이야기에 미쳐 화신을 농락하는 별을 모두 떨어뜨리겠다고 각오하지 않았던가.'

 

다만 몇 번의 메인 시나리오가 흘러간 지금, 김독자는 이미 모든 별을 공평하게 증오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였을지도 모른다. 


- 이번 화는 재천대성이 주인공이네 . . . 이계의 신격을 저렇게 간단히 처리하디니!


- 우리엘은 등장할 때마다 멋지다니까.


- 아. 파피루스, 베다 개새끼들. 작가님, 저것들 좀 어떻게 해주세요. 작가는 데우스 엑스 마키마 못 쓰나요?


제천대성의 위용에 감탄하고 우리엘의 불꽃을 상상하면서 유중혁을 방해하는 성좌들은 증오한, 김독자란 인간은 모순투성이었기에. 


별을 헤아리는 독자의 마음은 막연한 증오보단 애증에 가까운 감정이었으니까.


김독자는 별을 미워하며, 동시에 사랑했다.


'그렇다면 아스모데우스는?'


김독자는 대답하길 망설였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저처럼 마왕도 모순투성이 였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마왕이라니. 대체 뭔 조합이야 . . . 


'지금 아스모데우스를 등장인물로 볼 수 있을까?'


김독자의 사랑은 자신이 아는 것, 이야기에 근거한다.


제천대성이 아니라 '불굴의 의지를 뽐내며 이적에 맞서는 제천대성'을 좋아했고, 우리엘이 아니라 '악에 맞서 싸우는 숭고한 대천사 우리엘'을 좋아했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지금 마왕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라면, 읽을 수 있을까?


김독자는 자신이 없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아스모데우스의 이야기는 이제 백지와 같았다. 읽을 수 없는 것. 대신 그 위엔 무엇이든 적힐 수 있었다.


그것은 아스모데우스가 가진 가장 큰 무기이자, 김독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 이유였다. 


"혹시 tls123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긴장된 마음을 달래느라 마른침을 삼켰다. 야속한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 갔다. 


어딘가의 초침이 반 바퀴쯤 돌았을 무렵, 김독자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두 귀로.


[그건 비밀.]


츠츠츳!!


개연성 스파크와 함께 들려온 짖꿎은 진언.


가벼운 어조와 달리 진언에 실린 막대한 격에 김독자가 기함을 토했다. 


"허억!"


간접 메시지가 폭주했다.


[성좌, '불을 삼킨 도마뱀'이 깜짝 놀라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황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답답해 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락가'가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바라봅니다.]


.

.

.


설마 진언까지 쓸 줄이야 . . . 

순순히 알려줄 생각은 없나 보군

그래도 방금 대답으로 한 가지 의문이 해소되었다.


'아스모데우스는 tls123을 알고 있다.'


아니라면 굳이 비밀이란 단어를 쓰진 않았겠지. 이 또한 거짓말이라기엔 소비한 개연성 코스트와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이것만 해도 큰 소득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 . . 


"그렇다면 권속도, 화신도 아닌 저를 도와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김독자'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라고 답합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그럼 뭐 사랑의 세레나데라도 되는 줄 알았냐며 조소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김독자'를 비웃습니다.]


과거 비슷한 생각을 했던 김독자가 헛기침했다. 

하여튼 성격 나쁜 건 확실하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질의응답은 여기까지라고 말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아쉬워 합니다.]


[절대선 계열의 성좌들이 '김독자'를 경계합니다.]


" . . . 알겠습니다."


김독자는 특유의 사기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담화를 맺었다. 그리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유중혁을 등에 업었다.


그때 메인 시나리오 갱신을 알리는 창이 떠올랐다. 


"다행이네. 유중혁 이 자식, 깨어 있었다면 자기가 대장하겠다고 난리를 쳤을 텐데." 


"뭐 . . . 라고?"


김독자의 고개가 녹슨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다. 그리고 때마침 기상한 회귀자와 눈빛을 교환했다.


"어 . . . 좋은 아침?"


"말 돌리지 마라, 김독자."


조심스럽게 유중혁을 내려놓은 김독자는 딴청을 피우다가 충무로 역 본진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검날에 비친, 잔뜩 부어오른 뺨을 확인한 유중혁은 눈이 훼까닥 돌아간 채 김독자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죽인다!"


"야! 말로 하자! 말로! 애초에 네가 고집만 안 부렸어도 됐을 일이잖아!!"


"멈춰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지."


"너 같으면 멈추겠냐?!"



*



장하영과 아일렌을 내보낸 침실.


패널에 비친 사이좋은 두 화신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자, 말 한 번 더럽게 안 듣는 불청객 디오니소스가 머리맡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런 취향이었어?]


[아닙니다.]


내가 우리엘도 아니고, 남자 둘 사이에 므흣한 관계를 지지하고픈 마음은 없다. 취향도 아니거니와 일단 캐붕이다. 김독자는 이성애자고 유중혁도 마찬가지. 


두 사람이 각자 한수영, 이설화와 결혼한다면 직접 주례를 서줄 의향도 있는 나지만, 전우애는 도저히 먹을 만한 게 못 된다. 


내 단호한 거부 반응에도 디오니소스는 매를 벌었다.


[왜, 소년애는 유서 깊은 역사라고. 너는 모르겠지만 아폴론 형님도 한때- ]


[원반 던지기를 하다가 애꿎은 소년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죠.]


[신랄하구만. 아무튼 그것 또한 사랑이라는 거지.]


거 사랑 한번 했다가 여럿 골로 가겠다만.


[게다가 우리 아버지께선 모든 성을 두루 섭렵하셨지.]


[. . . 이래서 내가 수식언 때문에 고민이 생긴다니까요. 아랫도리를 좆대로 놀리는 <올림포스>의 유서 깊은 치정극을 보면, 감히 나따위가 '정욕의 마신'을 참칭하기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큽. 그건 그래. <올림포스>식 사랑은 애욕과 질투로 가득하거든. 그나마 프시케 정도가 멀쩡한 편일려나?]


[<명계>의 왕이 올림포스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군요.]


[뭔데?]


[그대들의 허리 놀림에 몰락한 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명계>로 쏟아지는데, 제아무리 명왕이 성인군자라 해도 혀를 차겠죠.]


[하하.]


디오니소스가 건조한 웃음을 뱉었다.


[요샌 흔한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전승이지. 왜, 그래도 '기간토마키아'처럼 멋진 설화도 있다구?]


[<올림포스>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기간토마키아'는 숙명의 전장에서 전승 유지를 위한 관광코스로 그 위상이 추락했죠.]


경직된 성장.

고착된 이야기.

변화를 두려워하는 성좌들.


고인 물은 언제나 썩기 마련이다. 그나마 눈앞의 성좌는 그 고리타분한 퇴물들 사이에서 깨어있는 축에 속했다.


[그래서야 ■■을 볼 수 있으려나?]


[ . . . ]


디오니소스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목 넘김이 쭈욱 이어졌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잔. 이제 텅 빈 술잔을 채운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새콤한 잔향이었다. 


잔향에 취해 잔을 기울여도 흐르는 것은 부재하니. 


실속이 없었다. 


그리고 <스타스트림>에서 실속없는, 허울뿐인 설화만으로는 결말을 볼 수 없다.


지금의 <올림포스>가 그렇듯. 


[. . . 말하고 싶은 게 뭔데?]


[그냥 궁금하다고요. ■■을 쫓는 성좌는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달고 살아가는지 - 따위가.]


[너도 참 악질이야. 그냥 대놓고 '난 <올림포스>와는 편먹을 생각이 없다' 라고 말하지 그래?]


아까부터 눈앞에 아른 거리던 히든 시나리오를 외면한 디오니소스가 실소를 뱉었다.


[큭. 아무튼 우린 아직 멀었어. 내 아버지처럼 '끝의 자격'을 얻고 나서야 겨우 출발점에 설 수 있다고.]


[정말 그럴까요?]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머리맡에 뜬 상태창을 가리켰다. 새로 갱신된 히든 시나리오가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디오니소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시나리오 창을 바라봤다. 


+


<히든 시나리오 - 하나의 마계>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1. 모든 마계는 '인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인장'은 오직 마왕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 해당 마계에 마왕이 부재한 경우 '인장'은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무방비 상태의 '인장'은 가장 먼저 확보한 마왕에게 그 소유권이 이전됩니다.)


2. 다른 마계의 '인장'을 뺐을 수 있습니다. 무력충돌로 인해 마왕이 사망한 경우, 해당 마계는 시나리오 실패로 간주합니다.


3. 시나리오가 종료될 때까지 생존한 마왕들의 위치는 실시간으로 공유됩니다. 

 (* 해당 시나리오는 중도 이탈이 불가합니다.)


4. 모든 인장을 모으시오.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10,000,000코인

실패 시 : 해당 마계의 처우는 최종 승리한 마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


[내 눈엔 출발점으로 삼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데.]


[확실히 . . . 이 정도면 '기'에 해당하는 거대 설화를 쌓을 수 있겠지.]


디오니소스가 잠시 망설였다가 말했다.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남 설화에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도 아니고. <올림포스>와 네가 척을 진 이상, 우린 언젠가 적으로 만날지도 모르지. 그럼 내가 지금 한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혹시 모르죠. 그전에 올림포스가 망할 수도 있으니까.]


[크큭. 그럼 나야 좋고.]


디오니소스가 내게 술을 따르며 밝게 웃었다.


[아스모데우스.]


[왜요?]


[나는 네가 ■■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갑자기요?]


[그래야 이 천국 같은 도시도 쭈욱 들락날락거릴 수 있을 테니까. 되도록 죽지 말라고, 친구.]


그게 본심이냐?


바보처럼 웃은 디오니소스는 내게 일말의 온기를 남기곤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제 조용해졌구나 생각할 찰나,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경첩 소리가 잇따르고, 문틈새로 금발 리트리버와 당당한 시계점주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직 안 갔나요?]


"그 . . . 물어볼 게 있어서."


장하영이 면목 없다는 듯 뒷목을 쓸었다. 그새 반말로 회귀한 말투는 그냥 불치병으로 진단내렸다. 


갑판에서도 다짜고짜 반말해서 기분이 상했던 거지 저렇게 유순한 새끼 양같은 태도면 반말이어도 기분 상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나는 꼰대가 아니니까. 


[말해 봐요.]


허락이 떨어지자 아일렌이 나섰다.


"대금을 코인이 아니라 다른 걸로 받고 싶어요."


[ . . . 20만 코인만큼 값비싼 대가인가요?]


"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린 화신들을 마주 봤다. 손짓 한 번에 꺾일 여린 몸. 허나 그 속에 담긴 기상은 어느 성좌 못지 않았다.


바라는 것이라 . . . 나는 원작을 바탕으로 그 정체를 대강 추리할 수 있었다.


[73번째 마계 시나리오에 관한 것이라면, 무리입니다.]


[아니, 그, 히든 시나리오라 하는 김에 겸사겸사 도와주면 -]


[내가 혁명가 시나리오에 개입하려면 막대한 개연성을 지불해야합니다. 그리고 설사 개입해도 누가 혁명가고 처형자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 거리에 존재하는 모든 화신을 쓸어버려야겠죠.]


과거 염룡이가 43번째 마계를 잿더미로 만든 것처럼.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힘이 부족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격언을 몸소 체험하게 되겠지.


그래도 염룡이는 시나리오 도중이었다. 배후에 있어야 할 내가 무대에 난입하는 것도 모자라 화신들을 사그리 죽여 버린다면, 성운의 개연성을 끌어모아도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드리라. 


따라서 미안하지만, 두 화신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단지 말뿐인 약속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진짜 혁명가가 올 겁니다.]


[네? 그걸 어떻게 - ]


[내 눈을 봐요.]


나는 염룡이에게 했던 것처럼 한쪽 눈동자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변신스킬이 숙달된 덕분에 동공을 캔버스로 삼아 작은 시계를 그릴 수 있었다. 


모 만화의 정령이 떠오른다면 아마 맞을 거다. 나중에 염룡이한테 보여주면 아주 좋아 죽겠네.


"오오!"


"그건 . . . ?"


[후후, 이건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입니다. 미래와 과거를 투시하죠. 이게 없다면 아일렌, 그대의 소재를 파악하긴 어려웠겠죠.]


[. . . 이제 이해가 되네요. 마계 변두리에 있는 저를 어떻게 찾았는지.]


제멋대로 납득한 아일렌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하영은 고도의 스킬 운용으로 스파크가 튀는 내 눈동자를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야, 이걸 속네. 


나는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크흠. 아무튼 이 눈으로 본 그대들은 이미 해방된 상태였습니다. 그게 과거일리는 없으니 아마 미래의 광경이겠죠.]


"그렇다면 . . .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 거죠?"


아를렌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다 죽어 가는 얼굴보단 보기 좋았다.


[짧으면 1년, 못해도 2년.]


츠츠츳!


"아."


짧은 단말마에서 해방감이 묻어나왔다. 자포자기 해온 나날들을 곱씹는지, 아일렌은 그 뒤로 생각에 잠겨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조용히 다가와 아일렌의 등을 어루만진 장하영이 내게 질문했다. 


"혹시 그 해방자가 누군지도 알 수 있어?"


나는 패널을 힐끗 쳐다 봤다. 어찌저찌 유중혁과 합의를 봤는지 아니면 그새를 못 참고 사기를 쳤는지, 김독자가 충무로 역 깃발을 들고 있었다. 참 재주도 좋다니까. 그러니 주인공이겠다만.


[그 이상은 말해주기 어렵군요.]


". . . 개연성 때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하영이 투덜거렸다.


"망할."


때마침 들어온 그리고리가 두 화신을 다시 밖으로 인도 했다. 장하영이 반쯤 끌려 나가며 조잘댔다.


"그냥 여기 눌러앉으면 안 될려나?"


[염치가 없군요. 이미 주인님께선 당신들에게 과도한 친절을 배푸셨습니다.]


"친절은 베푸는 사람 마음이지. 왜 네가 이래라저래라야?"


[그야 저는 마왕님의 심복이니까요. 마왕님의 마음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헹! 심복이고 나발이고. 다른 사람 마음을 잘 안다는 그거, 완전 착각이야. 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 못 들어봤어?"


[못 들어봤습니다.]


"무식하긴."


[말 다 했습니까?]


"둘 다 시끄러워."


그새 친해졌는지 서로 긁는 솜씨가 일품이다. 괴연 '불가능한 소통의 벽'을 가진 자 답다.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몸이 근질근질 하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친애하는 내 스킬 께선 하루라도 벽을 넘지 못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모양이고. 


[전용 스킬, '벽을 넘은자'가 '정체불명의 벽'을 - ]


안 돼.


[전용 스킬, '벽을 넘은자'가 시무룩해합니다.]


그렇게 다시 패널로 시선을 돌린 무렵이었다.


- "저, 저게 뭐야?"


[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배불뚝이 중년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 푸드득!


[까마귀?]


- "하하 김 씨, 무슨 새 한 마리 갖고 겁먹고 그래?"


지하철 길을 힐끔 바라본 유중혁이 앞으로 나섰다. 


- "한 마리가 아니다."

- "뭐?"

- "여러분, 전투테세를 갖추세요."


어둠 속에서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출몰했다. 이윽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그것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내게도 까마귀 한 마리가 왔다. 그것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권속임을,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몬.]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의 권속이 부리를 달싹였다. 한탄하는 어조였다. 


[운이 나빴다. 내 화신의 표적역이 충무로인 모양이야.]


[저런.]


나는 아몬의 화신들, 진씨 형제들의 명복을 빌어줬다.


그도 그럴게


- 죽어라.

- 자,잠깐! 

- 형!


지금 저 미친 회귀자를 말릴 화신이 없거든. 지하철길에서 몰래 기습을 준비하던 진자현이 다급히 진율현을 구하러 뛰쳐나갔지만, 결국 형제 둘이 사이좋게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나름 강해 보였다만, 회귀자에겐 무리지.


그 참극을 지켜본 아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슬그머니 질문했다. 


[어떻게. <명계>의 여왕님께 부탁 좀 해볼까요?]


[ . . . 됐다. 어차피 흥미거리에 불과했으니.]


[그 흥미거리에 꽤 많은 코인을 투자한 거로 아는데.]


잠시 침묵이 감돌고, 까마귀의 부리가 다시 달싹였다. 


[<스타스트림>은 씨발이다.]


아, 그건 동의.


.

.

.


한편 그 시각, 관리국 최심부. 


[오늘따라 귀가 간지럽군.]


스타스트림의 거두가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이군, 나의 오랜 친우여.]


[우리의 악연에 비하면 오래된 것은 아니지.]


도깨비왕과 혹부리왕의 회담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