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의 종. 한 해의 마지막 밤을 울리는 종이다. 

 한때 멸망했던 세계는 마모되어 잊혀져 가는 과거의 한 조각이 되었고,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은 이 종을 말미암아 매년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대앵


 서기 2059년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저물었다. 모든 시나리오가 끝난지 정확히 25년이 흐른 뒤였다. 다시 말해 시나리오해(After Scenario Year) 25년. 

 전 세계는 시나리오 이후 황폐화된 지구를 재건하기 위해 합심하였다. 세계정부는 멸망한 세상에서 인류애를 도모하고 협업을 촉진하기 위해 여러 제도와 시스템을 차용하였고, 새 기년법은 그 중 하나였다.


 시나리오해 25년이 주는 의미는 휘발적이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25년이란 세월은 시나리오의 허물을 벗어 던지기에 충분했다. 시나리오와 성좌, 화신과 도깨비.. 이런 것들은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유산에 불과했고, 실제로 젊은이들 중 과반수는 시나리오에 대해 무지하였다.


 비록 시스템의 영향으로 '젊은이'의 구별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이번 타종인사인 김독자씨를 향하여, 다시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겉모습은 젊은이 그 자체인 김독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전국에 송출되고 있었다.



*



 "또 뭔 놈의 종을 울린다고.."


 종로구 보신각에 가득한 인파 사이로 작은 얼굴이 빼곰 튀어나왔다. 북적거리는 광장을 뚫고 앞쪽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체구가 작은 한수영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비유, 사람 많으니까 내 뒤에 붙어있어."


 "엄마보다 내가 더 크거든?"


 한수영은 대꾸없이 비유의 손목을 꽉 잡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비유의 몸은 한수영보다 약간 컸고, 심지어 앳된 한수영의 얼굴 때문인지 둘은 전혀 모녀 관계로 보이지 않았다.


 붙잡힌 손목이 아팠는지 비유가 바앗 소리를 내며 도깨비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내가 사람 많은데서 그거 하지 말랬지."


 "한수영 은 멍청 이 이다"


 한수영이 고개를 홱 돌려 비유를 째려보았다. 


 "너 한번만 더 말 안들으면"


 "어, 저기 아빠다!"


 작은 솜털뭉치가 가리킨 방향에는 평소같이 능글맞게 웃고 있는 허여멀건한 녀석이 있었다.


 "김독자...!"


  말끔히 정돈된 머리와 잘 갖춰입은 양복.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초췌한 얼굴의 김독자.


  한수영은 그를 더욱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좁은 틈을 비집고 나갔다. 어깨에 매달린 비유가 불편한 듯 작게 울었다.


 "시발 진짜..."


 "이년아 똑바로 안 보고 다니냐?"


 다급하게 움직이는 한수영과 부딪힌 몇몇 대학생들이 욕지거리를 한사발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예전 같았으면 저런 놈들은 내 손에 다 죽었을텐데. 하긴 시나리오의 시자도 모르는 것들이 그걸 알 리가 없지.


 한수영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욕을 삼키고선 가장 맨 앞자리에 간신히 자리잡았다. 

 막바지에 다다른 김독자의 멘트가 코앞에서 들렸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25년도 모든 분들께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6년에도 모두들 행복한 한 해 되시길 바라며....."


 진부한 클리셰적인 멘트가 줄줄 흘러나왔다. 평생 들은 적도, 들을 필요도 없다 생각하여 새해에도 글이나 쓰고 있던 한수영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럴 셈이었다. 새해 기념으로 <전지적독자시점>외전 연참이나 때리고, 김독자랑 저녁이나 먹은 다음에 더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런데 왜일까. 사람들은 김독자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가 돌아온 지 이제 막 2년이 지난 터. 재작년엔 몸 상태 때문에 그렇다 치고, 작년에는 조용했는데.. 왜 올해는?

 성탄절 전부터 온갖 연말 행사에 참가하랴, 정부에게 불려나가랴, 회사 업무를 보랴 김독자는 쉴 새 없이 바빴다.


 그 때문에 한수영이 원했던, 연인과 함께 보내는 연말의 행복은 몽땅 무산되고 말았다. 

 그나마 일년의 마지막은 그가 곁에 있길 바랬지만, 암암리에 이곳저곳을 버정이는 김독자를 보니 이번에도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카운트다운 시작하겠습니다. 10, 9, 8,,,,,,,"


 박진감 넘치게 줄어드는 숫자를 크게 외치고 있는 군중. 

그래, 이렇게 된 거 종소리나 한번 들어보자고.



 대애앵


 고막을 울리는 커다란 종소리. 마치 개벽을 알리는 듯한 종소리가 밤하늘에 서서히 번져나갔다. 


 그와 동시, 각기다른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던 등불을 놓았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올려보낸 무수한 등불이 모여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야경을 만들어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행복 가득한 한 해가 되시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새해의 첫 순간은 언제나 상서롭고 감동적이다. 

 공기를 저릿하게 울리는 종 소리, 밤하늘을 수놓는 등불. 그 가운데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가호를 비는 시간.


 이 아름다운 풍경이 그렇듯, 한수영 역시 김독자의 곁에서 그 순간을 맞이하고 싶었다. 이악스레 맨 앞자리를 차지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김독자!"


 한수영은 크게 김독자를 불러보았다. 순간 한수영 쪽을 향하는 김독자의 시선. 그러나 이내 진행되는 멘트에 김독자는 눈길은 다른 곳으로 전향하였다.


 은근한 섭섭함과 그보다 큰 애욕에 한수영의 초점은 김독자를 떠날 줄 몰랐다. 평소보다 더 창백해보이는 낯빛과 힘겨워 보이는 몸동작. 그를 빤히 보고 있던 한수영은 괜스레 울컥해졌다.


 "....넌 집에서 보면 혼내줄거야."



 "무얼 말이니?"


 "뭣.....!"



 갑작스럽게 들려온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 한수영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오랜만이다 수영아."


 "아줌마가 여긴 왠일로..."


 "그야 아들 보러 왔지. 그런데 우리 며늘아가도 있을 줄은 몰랐다."



 ".......추운데 집에서 티비로 보지."



 한수영이 입을 비죽거렸다.


 이수경은 얕게 웃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한수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뭐야?"


 "레몬사탕. 독자가 아까 너 주라고 맡겨두고 갔더라."


 "아."

 

 한수영은 손에 쥐여진 사탕을 만지작거렸다. 자기 어머니를 만나서 맡겨 놓는다는게 고작 레몬사탕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바아앗!"


 한수영의 어깨에 붙어있던 비유가 이수경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비유도 있었구나?"


 "할마아앗..!"


 "비유는 시나리오 때랑 달라진 것이 없구나."


한수영은 비유를 쓰다듬고 있는 이수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독자의 친모, 이수경 역시 집단회귀했던 일행 중 한명이다. 그들이 다른 세계선에서 돌아온 것은 1864회차에서는 거의 20년이 지난 후였고, 실제로 보낸 '시나리오 이후'의 일상은 몇 년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이곳의 다른 이들보다 시나리오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을 터였다. 


 도깨비왕인 비유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수영아."


 비유의 털을 빗어주던 이수경이 한수영을 불렀다.


 "독자랑은 요즘 어떻니?"


 "뭐... 그럭저럭."


 그렇게 답한 한수영이 보신각 위 김독자를 일별했다. 여전히 바빠 보이는 그는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결혼은?"


 "저 녀석은 별 생각이 없어 보이네."


 "결혼하면 시어머니 취급 해주는 거니?"


 "........어"


 이수경이 픽 웃었다. 

 웃을 때 버젓이 올라가는 입꼬리는 그녀가 김독자의 부모란 방증이었다.


 "아 맞다. 또 전해줄 게 있었는데."


 이수경이 묘한 미소를 띄며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뭔데?"



이수경이 말했다.


 "독자가 요즘 같이 못 있어줘 미안하다고, 또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더라."



 달아오른 한수영의 얼굴이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의 광휘를 머금었다.

 


*



"그럼, 타종행사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놀이를 끝으로, 군중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드디어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김독자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독자씨, 며칠동안 진짜 수고 많았어."


 행사 주최 측에서 일하고 있는 한명오. 이 인간은 어딜 가나 빠지질 않는다.


 "네...부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가서 어여 쉬게나."


 김독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무거운 어깨에 짐까지 올라가니 힘에 겨웠다.


 "택시!"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행사의 영향으로 서울시는 평소보다 역동적이긴 했지만, 이미 대다수의 인파는 도심을 빠져나간 후였다. 


 "젊은이가 새해부터 야근인가? 고생이 많네."


 김독자의 양복 차림을 흘긋 본 택시기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예. 기사님도 고생 많으십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젊었을 땐...."


 간만의 손님이 반가웠는지, 늦은 밤의 운전이 적적했는지 택시 기사는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아, 예..."


 대충 장단을 맞춰주던 김독자는 휴대폰을 켰다. 읽지 않은 메시지 수십통이 쌓여있었다.

 대부분은 것들은 김독자컴퍼니 단체채팅방. 새해라고 신난 이지혜와 갓 성인이 된 아이들이 의미없는 톡을 남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잘 만나야 해."


 "젊은이, 듣고 있나?"


 쉴 틈 없이 인생 조언을 되뇌던 운전기사가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김독자가 대답할 새도 없이 운전기사는 말을 이었다.



 "자네 애인은 있나."


 ".....예."


 "애인이랑 궁합은 괜찮고?"


 .....이 아저씨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건지.


 "별다른 건 아니고, 지금 빨리 보러 가라고."


 "아..."


 "별거 없어. 그냥 자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옆에 있어주면 돼. 내가 그걸 못해서 지금도 후회한다니까."


 알고보니 낭만꾼이었던 이 아저씨도 나름의 사연이 있는 듯 했다.


  "안 그래도 지금 가고 있습니다."


 수영이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밥도 안 먹고 기다리고 있겠지.

 읽지 않았던 채팅이 떠올랐다.



 한수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물씬 몰려왔다. 일주일 넘게 얼굴을 비추는 일이 드물었고, 그제야 한숨 돌릴 줄 알았던 새해에마저 예기치 못한 행사가 잡혀버렸다.

 제야의 종만 울리고 바로 간다고는 했는데..어쩌다보니 새해가 밝은지는 꽤 지난 상황.


 "맞는거 같아요..그거."


 아까 어머니를 통해 전해준 말은 잘 들었으려나. 어머니가 집에 잠깐 들리겠다고 하셨으니 전해졌겠지, 뭐.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김독자를 기사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미터기를 탁탁 두드렸다.


 "다 왔어 젊은이."


 "고맙습니다."


 김독자가 택시에서 내리자 오가는 이 없이 적막한 거리가 그를 반겼다. 도심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주택가 지역은 새해라는 소식과는 무관하게 고요한 잠에 젖어 있었다.


 '보고 싶다 수영아.'


 이미 잠 들어있으면 어떡하지, 너무 늦었다고 화내진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김독자는 마지막 코너를 앞두고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한수영...?"


 작은 체구와 어깨에 닿는 단발 머리. 가로등 빛이 반사되어 더욱 부각되는 흰 피부. 

 구체적인 이목구비는 분간되지 않았지만 그건 영락없는 한수영의 것이었다.


 "수영아!"



 한수영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에 손에는 레몬사탕 하나가 꾹 쥐어져 있었다.


 "수영아, 연락 못 해서 미안"


 아무 말 없이 품에 안기는 한수영의 촉감에 김독자는 말문이 막혔다.


 "왜 이렇게 늦어..."


 "미안해."


 "일주일동안 집에도 안 들어오고."


 "미안."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김독자는 한수영의 옷깃을 바로잡아주며, 그녀의 찬 손을 감싸 잡았다.


 "옷까지 차려입고...마중 안 나와도 되는데."


 한수영이 토라진 듯 김독자를 노려보았다.



 "너 나 온거 진짜 몰랐어?"


 "어?"



 ".....하여간 눈치라곤 1도 없어요."


 뾰족한 어투와는 상반되게 다시한번 그의 품에 안기는 한수영의 몸짓에는 숱한 애정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들어가자, 수영아."


 "응."


 "밥은 먹었어?"


 "너 두고 먹었겠냐, 바보야."



 둘의 새해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되었다.

 


*




침대에 누운 한수영이 몇 시간 전 있었던 일을 회상하였다.


 "있잖아, 김독자."


 "응."


 "아까 너희 어머니 만났거든?"


 "아 진짜?"


 끝까지 모른채 하는 김독자가 괘씸했던 한수영이 그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뭐라 하셨는데?"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김독자의 표정이 어둠 속에 아른거렸다.


 "별 건 없었어."


 기대했던 것과 다른 한수영의 답에 김독자의 몸이 오징어처럼 축 늘어졌다.


 방이 편안한 정적에 휩싸였다. 무언가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 한수영의 입술이 달싹였다.



"김독자."


 "어."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냐."


 김독자는 말 없이 한수영을 품에 안았다. 가녀린 한수영의 몸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글쎄...우리 작가님께선 어떤 말을 원하실까..."


 소중한 것을 다루듯 부드럽게 보듬는 김독자의 손길에 한수영의 감각이 노곤해졌다. 

 정말이지 바보 같아. 한수영이 그토록 원하던 손길이었다.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해. 또 ... 사랑해."


 "........"


 "이런거 말하는 거지?"


 이게 놀리는건가. 이수경에게 전해 들은 말이 떠올라 얼굴에 열이 오른 한수영이 고개를 그의 가슴팍에 묻었다.


 "아줌마랑 작당모의를 잘도 했더라?"


 "흐흐, 꽤 괜찮았지?"



 한수영이 말 없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반작용인듯 김독자가 한수영을 더욱 끌어안았다. 


 "그거 말고."


 한수영이 이어나간 말에는 의문부호가 가득했다.



 "...결혼 생각은 있냐고."



 "음....."


 김독자가 뜸을 들였다.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혹시라도 이런 화두가 불편하진 않을까. 혼자만의 뜬구름일 뿐인건가.


 들려온 대답은, 희미하지만 푸근한 것이었고 푸근한 만큼 올곧은 것이었다.


 한수영의 이마에 닿는 작은 입맞춤.


 "안그래도 프로포즈 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하는 한수영의 불안감은 그저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공백은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서 존재한 것이구나.


 "나한테 선택권이 어딨어, 여보님 말 들어야지."


 밤이 무르익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숨쉬는 김독자의 숨소리에 맞춰 한수영의 눈도 스르르 감겼다.



 "김독자, 고마워.

 내 옆에 있어줘서."


 잠든 김독자가 들을 수 있을지 불확실한 속삭임이었다. 

혹시 모른다. 한수영이 먼저 잠에 들었을 수도.








떡국 퍼먹고 몇시간 끄적여 봤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