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성으로 복귀하는 도중, 나는 한 전갈을 받고 32번째 마계에 들렸다. 집무실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신차는 언제 나올 예정입니까?]


[빠르면 내년 이맘 때 - ]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리고리가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마왕님.]


[손님 받느라 수고했어요. 이제 나가 봐요.]


[. . . 알겠습니다.]


그리고리는 묵례를 하고 집무실에서 퇴거했다. 미련 뚝뚝 떨어지는 눈빛은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집무실에 남은 노신사가 말했다.

 

[S급 페라리는 잘 쓰고 있나?]


[그 애물단지라면 방금 나간 녀석이 잘 쓰고 있답니다.]


[이런. 여전히 스포츠카를 싫어하나 보군.]


[투자 대비 효율이 영 아닌지라.]


나는 의자를 끌어와 착석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그래서 여기까진 무슨 용건입니까, 양산형 제작자.]


양산형 제작자의 말은 내 최근 근황을 토로하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요새 많이 바쁘다고 들었네. 마계에 그런 거대한 시나리오가 아직 남아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제가 알았죠.]


[. . . 자네 화법은 도통 적응이 안 되는군. 크흠, 아무튼 이번에 내가 자네를 찾아온 이유는 관리국 때문이야.]


[관리국이요?]


양산형 제작자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최근 나와 거래하는 도깨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양산형 제작자는 코인의 흐름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성좌. 새간에선 관리국이 그의 눈치를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 성좌의 경고를 가볍게 흘러들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마계에 간섭하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양산형 제작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급 도깨비들 사이에서 비슷한 소문이 나도는 모양이야.]


[흐음.]


도깨비들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채널을 개설하는 것과 시나리오 관리하는 것. 나를 싫어하는 별이 많아 둘 다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 도깨비는 내 마왕생에 도움이 안 된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의자등받이에 등을 기댄 양산형 제작자는 밤하늘을 흘겨보며 심심한 감상을 남겼다.


[밤하늘은 여기나 저기나 비슷하구만.]


그리고 테라스로 나섰다. 나는 고민을 잠시 접어둔 채 그 뒤를 따랐다. 겹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바람결에 요동치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내가 말했다.


[이제 본론을 말해 봐요.]


[본론이라니?]


[이런 정보는 한낮의 밀회로도 전할 수 있잖아요. 직접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내 추궁에 양산형 제작자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 . 역시 눈치가 빠르구만. 맞아. 사실 본론은 따로있네.]


양산형 제작자가 코트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 제목을 읽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럼 그렇지. 이 영감이 빈손으로 왔으리가 없다.


[그새 이런 걸 계획했군요.]


[서둘러 작성하느라 허술할 수도 있어. 꼼꼼히 읽어보고 결정하게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마대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를 광고 모델로 써먹겠다는 계약서였다. 진한 밑줄이 그어진 품목엔 내가 착용할 아이템이 계시되어 있었다. 


아공간 코트에 각종 버프 효과가 있는 액세서리 . . . 뭐, 양산형 제작자의 아이템은 품질은 전혀 양산형이 아니니까. 써도 문제는 없겠지. 


[로열티는요?]


[순이익의 20퍼센트를 자네 몫으로 하겠네.]


[오. 저번보다 올랐군요.]


[자네 이름 값이 오른 거지.]


양산형 제작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마계의 이단아' 시리즈를 새로 런칭했지.]


나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서 말했다.


[망했습니까?]


그리고 기대는 처참히 박살 났다.


[호황일세. 완판났어.]


[ . . . 도대체 왜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본래 성좌는 마왕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진정한 슈퍼스타는 빠와 까를 미치게 하는 법이지. 내색은 안 할뿐 자네 행보에 관심을 갖는 녀석들이 많아.]


[그게 피규어와 무슨 상관입니까 . . .]


[크흠!]


참고로 마계의 이단아 시리즈는 내 모습을 본딴 피규어 세트다. 별점은 나락인데 수상할 정도로 판매량이 높은 게 특징이다. 인기가 좋아서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다나 뭐라나.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있다.


[하아, 싸인이나 하죠.]


나는 양산형 제작자의 제안을 수락했다. 계약서가 반짝 빛을 발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것을 돌돌 말아 품에 넣은 양산형 제작자는 이번엔 담배를 꺼냈다. 


칙. 칙. 


스치는 소리만 날뿐 불이 붙지는 않았다. 라이터가 고장 난 모양.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튀겼다. 허공에서 발생한 에테르 불꽃이 담배 끄트머리에 옮겨붙었다.


[고맙네. 자네도 하나 피우겠나?]


[사양하죠.]


[그러지 말고 하나 피워 보게나. 요새 근심 걱정이 많아 보이던데.]


나는 잠시 맘설이다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담배 겉면에 양산형 제작자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양산형제작자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원한다면 몇갑 가져가고.]


속셈이 뻔한 말에 헛웃음을 흘리곤 한 개비를 물었다. 내가 모 대원수도 아니고, 참.


아까 양산형제작자에게 했던 것처럼 불을 피우고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분명 처음 펴보는데 이상하게 그리운 맛이 느껴졌다. 동작에도 일체의 위화감이 없었다.


'내가 예전에 담배를 피웠던가?'



흐릿한 기억이 떠오를락 말락 하다가 담배 연기를 타고 흩어졌다. 나는 서서히 날숨을 뱉으며 말했다.


[후우우 . . . 아까 했던 말,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답니다.]


[무슨 말?]


[근심 걱정이 많아보인다는 거요.]


걱정이야 없을 수가 없지. 하나의 마계 시나리오도, 앞으로 시나리오의 행방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모르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김독자도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까?


[워낙 벌려놓은 일이 많아서 골치 아프긴 합니다. 그래도 재밌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즐기고 있다는 소리구만.]


침묵속에서 담배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담배잎 대신 가미된 설화가 조금씩 바스라졌다. 양산형 제작자가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 . . 자네는 결국 무엇을 하고 싶은 겐가. ]


[질문의 취지가 궁금하군요.]


[그냥 물어보는 걸세.]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전독시의 한 문장을 떠올렸다.


- 아주 커다란 집을 사서, 다같이 살면 좋겠네.


[집.]


[음?]


[작은 집을 하나 구해서 조용하게 살고 싶군요. 때때로 지인도 만나고, 여행도 가고 하면서.]


[ . . . 마왕성은?]


[그리고리에게 물려줘야죠.]


겸사겸사 서류업무도 짬처리 시키고. 그리고리가 아주 좋아서 미쳐 날뛰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온다.


[마왕 위를 포기할 생각인가?]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은퇴하는 겁니다.]


양산형 제작자가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니만, 이내 저 혼자 실실 웃기 시작했다. 내 꿈이 뭐 어때서. 조금 빈정 상했다. 


[뭐가 그렇게 웃기나요?]


[크흠, 미안하네. 너무 소박하다는 생각이 든 나머지 그만 무례를 저질렀군. 용서하게나.]


뒷머리를 긁적인 노신사가 두번째 담배를 집어들었다. 나는 검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튀겼다. 팟 -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그래도 부럽군. 나는 내 돈을 어디다 써야할지 아직도 모르겠어.]


[천천히 생각해봐요.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데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사건으로 가득한 내 설화에서 부족한 것은 여백이었다. 채워넣는 게 아니라 덜어내는 것. 생사가 오가는 전장이 아니라 조용한 늘그막처럼 마음 놓고 쉴수 있는 곳.


-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는 좀 쉬어도 되겠지.


이처럼 꿈은 사소한 부재에서 피어나곤 한다.


양산형 제작자가 긴 한숨을 뱉었다.


[하아 . . . 결국 시간이 약인가 보구만.]


[우리가 가진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봐요. 지금도 하염없이 시간을 태우고 있잖아요.]


나는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즈려밟았다. 검은 에테르가 잔재를 삼켰다. 양산형 제작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자네 말이 맞아. 성좌란 그런 족속이지. 하지만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결국 성좌들도 시간에 먹히고 말아. 어쩌면 나역시 이미 먹혀버렸을지도 모르지.]


[. . .]


[참 신기해. 자네를 대화하다 보면 항상 패기 넘치는 젊은 별들이 떠올라.]


[그렇군요.]


[혹시 비결이 있나?]


실재로 젊어서 라곤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 문장을 입에 담았다.


[내 이야기를 계속 읽다보면 알게 될겁니다.]



*



양산형 제작자와 작별한 나는 오로성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에게 들은 정보를 공유했다. 마왕들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그러니까 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마계에 채널이 개설된다는 거로군.]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요.]


[웃기는 놈들이군. 철수한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 . . ]


[혹부리들의 반발은?]


[꼬득였나 보죠. 아니면 대장끼리 타협을 봤을 수도 있겠군요.]


그러고보니 혹부리 왕에게 받은 소원권이 하나 남아 있었다. 물론 관리국의 사정을 알아내는 데 쓸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인장을 만지작거리던 아몬이 발언했다.


[채널이 개설되면 성운이 개입할지도 모른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멋모르고 마계에 발을 딛은 놈들은 싸그리 죽여줘야지.]


[만약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성좌가 현현하면 그땐 어쩔 셈이냐, 증오의 마신.]


[당연히 도망가야지.]


[. . . ]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복수도 우선 살아야 할 수 있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다 죽는 건 개죽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레드 말이 맞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숨통은 붙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우리 게티아 컴퍼니는 사후보상 제도가 없다. 그걸 챙겨주면 마계가 아니라 에덴에 있어야지. 입신양면 할려면 재주껏 생존해서 제 밥그릇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물론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진다. 이번 전장에서 얼마나 활약하냐에 따라 설화 지분이 달라지겠지. 마왕들이 활약할 무대를 만드는 것이 바로 대표인 내 몫이었다. 


[아무래도 채널이 열리기 전에 레메게톤을 쳐야겠군요.]


[좋은 방법이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사고와 나눈 채팅을 공유했다. 아가레스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처형식이라 . . . 재밌는 이름이구나.]


그리고 주머니에서 궐련을 꺼내며 전용라이터를 불렀다.


[불좀 다오.]


[ . . . ]


안드라스의 손가락에서 아가레스의 궐련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안드라스 취급도 참 . . . 그래도 배운 건 써먹어야지. 나는 양산형 제작자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안드라스를 불렀다.


[저도 불좀 주세요.]


[ . . . 너도 피우냐?]


[안 피울 이유는 없죠.]


안드라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튀겼다. 작은 스파크가 일더니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연기가 채 올라오기 전에 담배를 꺾어 바닥에 던졌다. 안드라스가 어이 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냥 해보고 싶었어요.]


올빼미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반응 맛있네. 어쩌면 아가레스도 저 표정을 보기 위해 일부러 불을 붙이는 거 아닐까? 여러모로 타격감이 좋다.


일련의 흐름으로 분위기가 유화된 상태. 나는 슬며시 웃고 있는 아가레스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가장 오래된 악은 탄생 설화인가요?]


[탄생 설화는 아니다.]


[그렇다면 인장을 뺏겨도 타성운의 신화급 성좌들과 맞설 수 있나요?]


[ . . . 장담할 수 없군.]


바르바토스가 내게 질문했다.


[그건 왜 묻는 거지?]


[혹시라도 성운이 개입할 경우, 신화급 성좌들이 끼어들 개연성의 발생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아가레스가 게티아에 속한 이상 승리의 저울은 우리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 허나 시나리오는 언제나 균형을 수호한다. 우리가 강할수록 더 강한 적들이 끼어들 공산이 생긴다는 소리다. 


반대로 참여좌가 약할수록 그들이 끼어들기 위해선 더 많은 개연성을 지불해야할 터. 성좌와 연이 없는 마계에서 그러긴 어렵다. 여긴 흔한 신전이나 석상조차 없으니까.


[인장을 잠시 양도해 아가레스의 격이 줄어든다면 그들이 참여할 개연 역시 사라집니다.]


[놈들은 끝의 자격을 얻은 자들이다. 어치피 태반이 방관자일텐데 . . .]


[본래는 그랬죠. 근데 제겐 계시가 있잖습니까.]


- 마계의 이단아가 시나리오의 종말 너머를 보리라는 계시가 있었다.


'끝'과 관련된 것은 모든 성좌들의 역린이다. 제아무리 엉덩이 무거운 신화급 성좌들이라고 하더라도 움직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물론 저를 도와주실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래서야 벼룩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죠.]


그러다 '더 네임리스 미스트'라도 오면 다같이 뒤지는 거고. 아무튼 성좌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레메게톤 무리도 이점엔 동의하리라 믿는다. 


그렇게 채널이 설정되었을 때, 설정되지 않았을 때 전략을 대강 완성하고 나는 바사고에게 미끼를 던졌다.


- 제가 아가레스의 배를 뚫죠. 그 뒤로는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길.


헌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 . . . 존재를 맹세하게.


그 순간, 나와 아가레스의 눈이 마주쳤다. 아가레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다음날, 지난 성마대전의 무대였던 황야.

텅빈 공터에서 막대한 격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 츠츠츳!!!


서쪽에서는 우리 게티아가, 동쪽에서는 레메게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측은 서서히 이동하다가 황야의 중심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멈춰섰다. 두 성운 사이의 간격은 불과 3미터 남짓한 거리였다.


아가레스가 입을 열었다.


[재밌는 조합이구나, 바사고.]


[그대를 싫어하는 자들이 많아 모으는 게 어렵지 않았네.]


바사고가 뒤를 돌아봤다. 그새 포섭한 모양인지 4위 마왕, 강령의 마신이 레메게톤 측에 있었다. 


승천한 바알과 파이몬을 제외하면 10위권 내 최상위권 마왕들이 전부 이곳에 모인 것이다.


바사고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이럼 대충 쪽수가 맞겠지.]


허나 그 웃음은 아가레스의 광오한 발언에 금이 갔다.


[부족하다.]


[뭐?]


[내가 너희 중 셋을 상대할 것이다. 나머지 셋은 그 다음에 죽일거고.]


그의 성흔, 만능궐련에 불이 붙었다.


[순서에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너희는 다 죽게 될 거다 . 그러니 더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 나는 시체와 말하는 취미는 없어.]


그러다 문득 강령의 마신, 가미긴을 보며 말했다.


[네가 살아있다면 시체와 말을 섞게 되겠구나. 결정했다. 너부터 죽여주마, 가미긴.]


살벌하고 담담한 선전포고에 일대가 침묵에 물들었다. 나는 재차 클로를 점검했다. 핏빛손아귀를 두르고 혹시 몰라 아공간 코트에 수납한 응급아이템을 점검했다.


좋아. 준비는 끝났다. 나는 바사고의 팔짱 낀 손을 확인했다. 검지 손가락을 제 팔에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어제 아가레스가 한 말이 멤돌았다.


- [고작 배에 구멍 하나 뚫린다고 죽지 않는다.]


입가에 실소가 맺혔다. 내가 그동안 아가레스를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잊고 있었다. 


눈앞의 마왕이 얼마나 거대한 악인지를.


바사고의 손가락이 정지한 순간, 나는 클로를 힘껏 내질렀다.


푸슉!


짧은 피륙음을 내며, 클로가 아가레스의 복부를 관통했다. 


휘청거리며 아가레스가 돌아봤다.


[. . . 네놈이 왜?]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나는 원작의 대사를, 이 상황에 어울리는 대사를 그대로 읊었다.


[악은 언제나 선보다 쉽다고.]


입이 찢어져라 웃던 바사고는 당황하지 않는 우리 모습을 보고 위화감을 느꼈는지,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아가레스를 관통한 손의 중지를 치켜세웠다. 고개를 드니 아가레스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살벌한 광경에 넋이 나간 <레메게톤>을 향해 나 또한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습니까, 악은 언제나 선보다 쉽다고.]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바사고의 정신이 돌아올 무렵,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설화가 몸을 일으켰다.


['가장 오래된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 . 젠장!]


축제의 개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