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속은 것을 눈치챘음에도 레메게톤은 항전했다. 도망치고 싶어도 퇴로가 없었으며, 마왕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항복은 사절. 그렇다면 남은 것은 결사 항전 뿐. 여기까지는 예상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다음에 벌어졌다.


- 츠츠츳!


스파크가 터지더니 오세를 비롯한 마왕들이 레메게톤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가레스를 처리하면 게티아마저 삼킬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마왕들이 합류함과 동시에 강령의 마신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곳은 과거 성마대전의 무대였던 곳. 성좌들의 화신체는 둘째치고 수많은 악마 종, 천사들이 매장되어 있었다. 


즉, 시체를 부리는 강령의 마신은 이곳에서 제 능력을 100% 활용할 수 있었다. 바사고가 이걸 노린 거겠지. 강령의 마신, 가미긴이 괴상한 주문을 외우자 지반이 일어났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었다.


"끄어어!"


역한 악취를 풍기며 되살아난 시체들. 황야를 뒤덮은 언데드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개중엔 심심치 않게 1급 악마 종도 찾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중과부적에 처한 우리가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시체군대 사이로 마왕 놈들이 수작을 부리니 정신이 금세 어지러워졌다. 어이없게도 열띤 저항에 질색하면서도 내 입가는 미미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 쉽게가면 재미없죠.]


본디 적당한 시련이 이야기를 완성하는 법이다. 이 역경을 딛고 더 강해질 미래를 생각하면 뭐든 달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다소 전투광적인 사고에 휩쓸린 채 나는 핏빛 손아귀를 제멋대로 휘둘렀다. 특별한 묘리도, 형식도 부재한 공격. 굳이 따지자면 막춤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허나 춤에 속도가 더해지고 현란한 리듬이 붙으면, 더이상 막춤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검무라고 봐도 무방했다. 사방팔방으로 뻗치는 춤사위에 감탄한 관객들이 제 사지를 내놓았다. 


- 퍼엉! 퍼버벙!! 


사방으로 터지는 육편. 내가 발을 딛는 곳마다 조그마한 언덕이 생겼다. 이에 기겁한 마왕들이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쫒아 전장을 횡으로 가로질렀다.


- 콰쾨곽!!! 


시체로 가득찬 황야에 텅빈 실선이 주욱 그려지고, 그 끄트머리에 내가 있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고, 앞을 가로막으면 베어넘겼다. 


그렇게 웬 어중이떠중이 마왕을 잡았을 즈음엔 분명 멀리 떨어졌을 아몬이 내 옆에 돌아와 있었다. 문득 천년전 일이 떠올랐다.


[흐음, 이러고 있으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 넌 제정신이 아니었다.]


[. . . 지금은요?]


아몬이 나를 살피더니 혀를 찼다. 


[물론 지금도 아니지. 넌 언제나 반쯤 미쳐 있는 년이니까.]


허위사실을 유포한 아몬이 가볍게 1급 악마 종을 참살 했다. 나는 아몬의 사각을 노리는 마왕의 목을 졸라 죽였다. 이 와중에 승급전이라니. 참 미친놈도 많다. 녀석의 시체를 재차 곤죽을 낸 아몬이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맛보려는 자는 이야기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 말 . . . 아직도 기억하는군요.]


[꽤 인상 깊은 문장이었으니까.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경광이기도 하지.]


아몬이 바라보는 곳에 레메게톤의 일원들이 있었다.


[저 반항은 내가 이야기를 먹는 ‘대가’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저번처럼 품위 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어.]


[누가 그런 망언을 했는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만, 그것 참 다행이군요.]


[ . . . ]


[말을 한 당사자도 뿌듯하게 생각할 겁니다.]


[너는 입을 다물면 오래 살 거다. 내 장담하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아몬이었다. 나는 전장을 훑다가 유독 언데드가 밀집된 곳으로 향했다. 아몬이 나를 따라왔다. 이유를 묻자 아몬이 입맛을 다셨다.


. . . 어쩐지 요즘에 잠잠하다 싶더니, 그 괴상한 식욕이 재발한 모양이다. 그래도 나름 미식협의 일원으로서, 나는 아몬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다.


[메뉴는 만족스럽나요?]


[나는 만족한다. 다른 놈들은 모르겠지만.]


[모르면 물어봐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아몬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녀석이라 질문하기 꺼려지는군.]


[. . . 하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도 없을 겁니다.]


말하지 않으면 듣질 못하고,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 그런 당연한 말을 듣고 누군가의 행동이 변했다면 그 사람이 변한 건 아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을 때, 아몬은 꽤 많은 게 변했다.


[. . . 네가 추구하는 미식은 뭐냐?]


[함께 즐기는 것. 단지 그뿐입니다.]


[단출하군.]


[하지만 그만큼의 별미가 또 없죠.]


신기하게도 대화를 이어 나갈수록 손발이 잘 맞았다. 내가 핏빛 손아귀로 퇴로를 막으면 아몬이 일검에 베어버렸다. 예전부터 애용한 전략이지만 그 효과가 배가 된 느낌이었다.


[다른 분들도 힘내고 있군요.]


우연의 일치인지, 다른 게티아 일원들도 우리처럼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선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나는 싸우는 와중에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일단 객관적으로 봤을 때, 게티아의 대처는 레메게톤보다 유연한 구석이 있었다. 아마 일전에 아가레스와 싸우며 얻은 경험 덕분이겠지. 


물론 레메게톤이 경험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평균적인 연차와 순위는 레메게톤 쪽이 더 높으며, 저들도 성마대전에서 천사들을 죽이기 위해 손발을 맞췄다.


허나 마지막 성마대전이 열린 지도 벌써 천 년이 지났다. 영원을 사는 별에겐 짧은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투쟁심을 잊어 버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최근 들어 격전을 치른 게티아에 비해 레메게톤은 아직 손이 덜 풀렸다. 그 손속과 첨예함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또한 게티아에는 레메게톤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뢰로, 나는 궁지에 몰린 모락스에게 인장을 던지며 이를 보였다.


- 인장에는 몸이 가벼워지는 버프 효과가 있다. 


나도 한때 그렇게 알았다. 허나, 틈날 때마다 별을, 설화를 연구하던 부에르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인장을 빼앗겼을 때 디버프는 탄생설화의 잠금. 그렇다면 버프 역시 설화와 관련된 것이 아니겠냐고. 그 말을 듣고 나는 부에르에게 인장을 양도했고,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인장은 설화를 강화시킨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은 강화된 설화에 힘입어 화신체와 진체의 동화율이 올라간, 부차적인 효과였다. 과연 인장을 두 개 이상 보유한 상태에서 성흔을 사용하니 이전보다 강한 위력이 나왔다.


다른 마왕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저보다 낮은 순위의 마왕을 터는 데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벨레드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냈다. 레메게톤과 싸우기 전에 하위권 마왕들부터 정리하는 게 어떻겠냐고. 나는 여기에 반대했다.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 소요된다.’


시나리오 룰대로라면 마왕들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인장의 소유권이 마왕에게 있으니 이는 곧 인장의 위치를 아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여 인장을 강탈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문제는 우리의 꿍꿍이를 저들도 눈치챈다는 것. 간을 보고 있던 중립 세력이 레메게톤의 편으로 돌아설 빌미가 생긴다.


판이 커진다. 자연히 게티아와 레메게톤 사이의 대립도 고착될 것이며, 채널이 개설될 때까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도 없게 된다. 성좌들이 참여하면 계획이 더 꼬이고. 때문에 벨레드의 제안은 여러모로 하책이었다.


‘대신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여기에 내가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작금의 전략이었다.


- 인장은 서로를 지원하는 용도로만 사용할 것.

- 대신, 잘못하다간 자기 인장마저 잃을 수 있으니 판단은 알아서 할 것.


내 이야기를 들은 마왕들은 제각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막상 전장에 도착하니 알아서 잘 써먹고 있었다. 특히 평소 붙어다니던 바르바토스와 부에르 쪽은 아얘 바르바토스가 부에르에게 인장을 양도한 채로 싸우고 있었다. 부에르의 성흔이 버프에 특화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올바른 처신이었다.


잡념에 빠진 채 아몬과 전장을 휩쓸던 사이, 악마 종의 파도에서 기어코 오세의 목을 딴 모략스가 내게 다가왔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면 평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마왕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다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 . . 잘 썼다.]


그러다 감사라고 하기에도 뭐한 한마디와 내 인장을 툭 던지곤 다시 전선으로 향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답지 않게 감상에 젖었다. 


어쩌면 ‘하나의 마계’가 원하는 것은 무력으로 통일된 72개의 마계가 아니라 하나로 뭉친 72마왕들의 집합이 아니었을까.


[집중해라.]


잡념은 아몬의 엄중한 진언에 의해 깨졌다.


[아직 끝날려면 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미긴의 시체 군대는 여전히 건제했으며 전장의 균형은 얼핏 보기엔 팽팽하게 유지되는 듯 보였으니까. 


하지만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은 조금 달랐다. 마계의 붉은 하늘 한 켠에 자리한 곳. 방금까지 1대 3의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에서 승패가 갈렸다.


[커헉!!]


내 예상대로 당초 하나였던 쪽이 허리를 쭉 핀 채 고고히 기립해 있었다. 아가레스가 담배 꽁초를 털며 무기질적으로 말했다. 익숙한 멘트였다.


[그것이 너희의 전부인가?]


진언엔 막대한 격이 실려 있어 전장의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언데드 군세가 일순 멎었다. 누군가는 탄식을 흘리고 누군가는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바사고를 포함한 3인의 마왕이 아가레스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가 초래할 미래는 단 하나뿐이었다.


레메게톤의 끝.


눈앞으로 다가온 파멸에 지고한 마왕들이 동요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그들의 사고를 예상했다.


‘도망칠까?’


마계전역이 시나리오 지대라 도망칠 곳도 없다.


‘인장을 넘기고 항복할까?’


이미 음모가 들통났다. 아가레스는 자신을 죽이려 든 마왕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답이 없었다. 활로가 절실하겠지. 썩은 동아줄이라도 건넬까 생각하던 참에 알림음이 울렸다. 양산형 제작자의 메시지였다.


- 얼마 남지 않았네.


다소 추상적인 문구였지만 뜻하는바는 확실했다. 곧 마계에 채널이 개설된다. 텅 빈 마계의 하늘이 빛날 것이며 수많은 별들이 우리를 내려다 볼 것이다.


별에는 반짝이는 것과 어두침침한 것들이 섞여 있겠지. 개중 어두침침한 것들을 생각한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채널의 관람객은 성좌들뿐이 아니다.


같은 마왕들도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채널에 접속할 것이다.


즉, 마계 전역에 우리의 목소리를 전할 기회가 온다.


나는 이 사실을 자각하고 한낮의 밀회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


아스모데우스 : 레메게톤을 회유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라?]


옆에서 당황한 아몬이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것은 아몬의 반응이 아니었다. 몇 초의 말미를 두고 아가레스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가레스 : 이유는?


아스모데우스 : 곧 채널이 열립니다. 성좌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왕들도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되겠죠. 동족을 학살한 성운과 포용한 성운. 어떤 쪽이 우리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늘리는 데 더 유리할까요?


솔직히 아가레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치고받고 싸워 봤자 최종적으로는 같은 마왕들끼리 자멸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것을, 그렇게 하나가 된 마계로 내로라하는 성좌들과 맞설 순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빈사 상태에 빠진 바사고를 죽이지 않고 방치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어디까지 볼 수 있을지 제 나름대로 시험해 것이다. 분명 아가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결에 닿기 위해선 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그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설화의 가짓수나 개개인의 격이었지만, 그런 것들은 강함을 나타내는 극히 일부의 개념일 뿐이었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강함이 있다. 소드 마스터는 한 번의 검격으로 산을 베어넘기는 물리적인 강함을 갖췄고, 오래된 수도승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인 강함을 갖췄다. 그리고 강함은 대게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기인해 그 척도가 달라진다.


생사의 경계에서 살았기에 소드 마스터에겐 검이 그들의 기준이 되었으며, 생사의 덧없음을 직면했기에 수도승은 해탈을 구도했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로 정제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시나리오를 해석하고 올바른 답변을 제시하는 능력이야말로 강함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강함이야말로 설화나 격을 우선하는, 보다 근본적인 해답이 되리라. 김독자가 그러하듯.


아스모데우스 : 제 것을 지킬 무력과 남의 것을 품을 아량. 그 둘이 시나리오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침묵 속에서 나와 아가레스의 시선이 오고 갔다. 영문 모를 대치에 당혹스러워하는 레메게톤의 마왕들도 저희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아가레스가 입을 벌렸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떨어진 것은 수긍, 동시에 인정이었다.


[고마워요.]


이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나는 레메게톤의 일원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들에겐 조금 다른 의미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우리와 함께할 생각 없나요?]



*



여차저차 레메게톤은 게티아의 휘하 세력으로 편입됐다. 죽기는 싫었는지 그들은 꽤 협조적인 태도로 나섰다.


간혹 잡음이 조금 일긴 했지만, 내가 “꼬우면 아가레스와 영혼의 맞다이를 뜨던가”와 “설화 지분 독식 안 할게”를 시전한 끝에 전원 회유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잡아먹을 기세로 쳐다보던 마왕들도 시간이 차츰 지나자 서먹한 친구 사이쯤으로 돌아섰다.


사실 여기 있는 마왕들 모두 서로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그도 그럴게 마왕이란 족속은 이 드넓은 스타스트림에 고작 72명밖에 없는, 인간의 기준으론 멸종위기종(?)인 셈이다.


고로, 원작의 나처럼 어지간히 승급전에 미친 마왕이 아니고서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한층 풀어진 분위기에서 나는 부상당한 마왕들에게 응급 아이템을 전해 주는 것으로 호감작을 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는 바사고의 표정이 일품이었다.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아가레스가 질문했다.


[계획이 있나?]


[방금 세웠어요.]


[내 도움이 필요한가?]


[흐음, 혹시 연설 잘하나요?]


[ . . . 달변가는 아닌 것 같군.]


[뭐, 그럼 내가 하죠.]


나는 머릿속으로 대본을 정리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마왕들의 위치를 세팅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부유중인 부에르에게 물었다.


[좌우대칭 잘 맞나요?]


[‘용과 악취의 대공작‘이 조금 오른쪽으로 가야 할 듯싶도다.]


나는 용과 악취의 대공작, 아스타로트의 소매를 잡아 옆으로 이동했다. 멍한 표정의 마왕이 내 발걸음을 따라왔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이러면 어때요?]


부에르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만족하며 이번엔 모략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까 했던 거, 또 부탁해요.]


[너 . . . 내 성흔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잔뜩 투덜댔지만 아까 내가 도와 준 게 있어 제대로 된 반항 한번 못 하는 모략스였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모래바람이 일었다. 성격과 다르게 섬세한 조절로 내가 모래 바람 한가운데 홀로 선, 다소 분위기 있는 그림이 나왔다.


[콜록콜록!]


[ . . . ]


비록 목이 칼칼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리허설을 시작하죠.]


[ . . . ]


[후훗.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요.]


[ . . . ]


[그러고 보니 아직 내가 손님을 소개하지 않았던가요?]


[ . . . ]


말을 맺으며 손을 힘차게 휘저었다. 핏빛 손아귀에서 일은 바람과 모략스의 도움이 합쳐져 모래 바람이 아침안개처럼 순식간에 스러졌다.


[오늘부로 게티아는 레메게톤과 선의의 경쟁관계에서 벗어나 한 몸으로 일체가 됩니다. 레메게톤에 대한 공격은 게티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니 이점 양해해 주시고 - ]


내가 열심히 포고문을 읊는 사이 주변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 . . 쟤 지금 뭐 하는 거냐?]


[그냥 내버려 둬라. 이해할 생각은 하지 말고.]


[아가레스. 어쩌다 저런 년과 같은 배를 탄 것이냐?]


[ . . . 나도 모르겠다.]


하여간, 틀딱들 같으니라고. 본래 이런 선전포고는 연출이 생명이라고 아까부터 어필했건만 도저히 들어 먹질 않는다. 오랜만에 정식채널에 등장하는 데 멋있게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비록 우리는 너희를 올려다보지만 결코 기세에서 꿀리지 않는다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이번 연출의 핵심이었다. 나는 일장 연설을 마치고 관객 역할의 부에르를 바라봤다.


부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별들이 와서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연설이었도다.]


[후훗. 그랬나요?]


내가 만족하고 있자 바르바토스가 궁시렁댔다.


[돌려 말한 거잖아 . . . ]


[잘 안 들리는 데 크게 말해 줄래요?]


[멋진 연출이구나. 도깨비 놈들이 배워야겠어.]


갑자기 식겁한 바르바토스가 나를 칭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늘에서 번쩍이는 스파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채널이 개설됩니다.]


[드디어 왔군요.]


이제 실전에 나설 차례다.



*



[다른 마왕들도 이 방송을 보고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대들에게 전할 말이 있군요.]


마왕이, 성좌가 보는 앞에서 아스모데우스가 서두를 열었다. 장난기 어린 표정은 여전했으나 그 눈빛은 서늘했으며 뿜어내는 기세는 명백히 최상위권 마왕의 그것이었다.


[그대들은 무엇이 그리 두려운 겁니까?]


도발적인 문구에 패널 뒤로 지켜보고 있던 마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 ‘지옥 서부의 지배자’가 몸을 일으킵니다.]

[마왕, ‘거짓된 선의 추종자’가 적의를 보입니다.]

[다수의 마왕들이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음에도 그녀의 기세에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되려 살벌한 격이 그 부피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마왕들이여. 우리는 스타스트림에서 절대악의 이름을 받은 존재입니다. 악이 무엇인가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또 다른 이름 아닙니까?]


[소수의 마왕들이 ‘격노와 정욕의 마신’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드넓은 우주에 단 72위(位) 밖에 없는 우리에겐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아갈 권리가 있죠. 그 끝이 파멸과 죽음일지라도. 우리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문장을 이어갈수록 목소리는 점차 침잠했다. 허나 이상하게도, 듣는 자들에겐 문장이 더 또렷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나는 그 권리를 존중할 겁니다. 동시에 나 역시 내 권리를 실천할 겁니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시나리오의 이권을 전부 먹어 치우고 거대 설화를 손에 넣을 겁니다. 그리고 대항하는 자는 철저히 짓밟을 겁니다.]


[절대선 계열의 성좌들이 침음합니다.]

[마왕, ‘거짓된 선의 추종자’가 그것은 괴변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세상 순진한 소녀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궤변을 하는 것도 내 자유입니다. 궤변을 듣지 않는 것은 그대의 자유죠. 하지만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대는 분명 후회할 겁니다. 시류에 뒤처진 설화는 잊혀져 사라질 뿐이죠. 안 그렇습니까, 거짓된 선의 추종자?]


가볍게 마왕 한 명을 침묵시킨 아스모데우스는 제 손에 감긴 핏빛 손아귀를 흘겨봤다. 별뜻 없는 몸짓에도 우아함이, 동시에 악의가 묻어나왔다. 외견 때문이었다. 가냘픈 소녀의 모습과 선혈의 조합은 정말 역설적이었기에.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염없이 핏빛을 바라보던 마왕은 다시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이런 내가 싫다면 여기로 오세요. 죽이고 싶다면 죽이러 와요. 내 화신체를 취하고 싶다면 취하러 오고요. 내 설화를 먹고 싶다면 먹으러 오던가요. 그대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던,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그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일단 아스모데우스 본인이 마계에서 손꼽히는 강자이자 거느린 세력 또한 막강했다. 당장 화면에 잡히는 것만으로 10위권 내 마왕들 태반이 그녀의 아군이었다. 누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겠나. 


그녀의 행동거지를 못마땅해하는 성운들이 간간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뿐이었다. 그런 작태에, 소녀는 진심으로 실망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겁쟁이들.]


초반과 다르게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마왕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엔 약간의 호의를 담아서, 찌푸린 인상이 한순간에 해맑은 웃음으로 변모했다. 급격한 변화는 되려 마왕을 향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지폈다.


[그리고 이 말은 즉슨, 나는 그대들이 나와 함께 싸우고자 하는 것도 부정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겁니다.]


[채널 내 성좌들이 반감을 드러냅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흥미진진해 합니다.]

[다수의 마왕들이 귀를 귀울입니다.]


[나는 내 편을 아끼는 성격입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바알이 있던 시절, 마계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한다면 . . . 기쁜 나머지 무언가를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1%의 설화지분과 20%의 경쟁지분을 말이죠.]


아스모데우스의 발언에 간접 메시지 창이 또 한 번 불타기 시작했다. 그때, 아스모데우스가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얹는 제스처를 취했다.


광란에 휩싸인 별들이 가라앉았다. 그들은 아스모데우스가 보여주는 이야기에 이미 빠져 있었다. 그녀가 마왕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 이야기가 더 이어지길 원할 뿐.


아스모데우스는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는 아직도 저를 싫어할 겁니다. 어차피 시나리오에서 단단히 한몫 챙기는 건 결국 저, 아스모데우스라 말할지도 모르겠군요.]


해명이 반론으로 이어지고


[근데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반론이 자유의 탈을 쓴 겁박으로 이어져도.


[싫어하는 건 그대의 자유입니다만 받아들이는 건 내 자유니 . . . 떨어지는 콩고물의 양이 줄어들 수도 있겠군요. 뭐, 우리가 언제 그런 사소한 지분다툼에 연연하는 존재였습니까? 하핫.]


주장하는 바는 명확한, 신기한 기예를 보여줬다.


[그대들이 별들의 가호를 등에 업고 나를 노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거대 설화를 얻는 또 다른 방법이겠죠.]


그리고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기 시작했다. 결말에 목 메인 자들 앞에서 마왕이 결말을 맺었다.


[하지만 마왕들이여. 이곳은 마계입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끝모를 탐욕과 격노을 욱여넣고.


[별의 땅이 아니라 좌를 버리고 타락한 자들의 무대입니다.]


자신들이 성좌가 아닌 마왕임을 역설하며.


[정녕 우리의 무대를 성좌들에게 내어 줄 셈입니까?]


말미에는 지금까지의 발언이 전부 한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몽롱한 어조로 발음했다.


[본분을 다하자고요, 다들.]


이야기를 마무리한 아스모데우스가 뒤편에 옹기종기 모인 마왕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옅은 한숨을 뱉으며 난처한 웃음을 흘렀다.


[후우, 말하다 보니 조금 진심이 되어 버렸군요. 뭐 실수한 거 없었습니까?]


아가레스가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너 같은 마왕은 정말 처음이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동의합니다.]


선악이 오랜만에 합의를 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