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기억해줘. 

 

우리가 만들어온 이야기를.


*


.


.


.


.



*



모든 것을 덮어가던 눈.

그리고 그 눈을 만들어낸 겨울이 끝나가며, 마침내 찾아온 봄.


심어둔 흰튤립이 고개를 숙이자, 라일락이 개화(開花)하며 계절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창문 사이로 비춰지는 따스한 햇살이 나를 향해 두들겼고,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벌써 아침이야…?”


앞에 노트북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니, 또 글을 쓰다 잠들었나보다.

맨날 이러다가 잠드니깐 피로가 안 풀리지.


“끄응...”


개운하게 기지개를 피다보니, 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김독자와 내가 브이를 하고 있는 사진.


시나리오가 끝난 후에, 아바타 김독자와 찍은 사진이었다.

뭐, 내가 원해서 찍은건 아니고! 지혜랑 유승이가 자꾸 찍으라고 하니깐…


됐다. 말해서 뭐해.


한숨을 후, 하고 내쉰 다음, 다시 한번 사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사진에 보이는 김독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립네.”


이때만 해도 김독자랑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즐거웠고, 그 녀석의 얼굴만 봐도 재밌었었는데.


“다시 그 날이 올까.”


너와,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정말 희미했지만, 그 무엇보다 뚜렷했던 순간이.


「“한수영.”」


사진에 비친 녀석이 오늘따라 그리웠다.

네가 내 곁에 있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깊은 감상에 젖어있을 무렵,


띵!


그 감상에서 깰, 노트북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난 마우스를 움직여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이설화한테 온 메시지인데?


ㅡ 오늘은 안 오세요?


난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오후 3시 28분.

약속 시간은 오후 4시.


ㅡ 아.


난 재빨리 보라색 후드티를 걸치고, 집 밖을 나섰다.



*



아름답게 자라난 벚꽃 나무들, 흩날리는 벚꽃 잎들.


수많은 인파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장관에 감탄하고 있을 때, 난 열심히 뛰고 있었다. 지각은 용납할 수 없으니깐.


즈즈즈즛.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바삐 뛰는 와중에도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확인해보았다.


ㅡ 김독자의 상태는 어떤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이 회귀자 녀석은 항상 나한테 묻는 것일까. 지가 오면 될 것을.


ㅡ 기다려봐. 지금 다 왔으니깐.


겨우 도착해 병원으로 들어서자, 날 기다리고 있던 이설화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늦으셨네요.”


“온게 중요한거지. 독자는?”


“안에 계세요.”


난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의 문을 열어 들어갔다.

그 뒤로 어린 모습의 김독자가 눈에 들어왔다. 새삼 곤히 자고 있는 김독자.


“누님 왔다. 녀석아.”


반응이라도 좀 해주지.

난 김독자에게 다가가곤 살짝 내려가 있는 이불을 올려주었다.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 몸도 약한 애가.”


하얀 김독자의 피부. 원래 하얗긴 했지만… 오히려 ‘창백하다’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런 애가 어떻게 시나리오를 버텨올 생각을 했을까.


난 잠시 김독자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차갑네.”


평소보다 차가운 김독자. 이제, 별로 남은 시간이 없다는 걸까.

조금만 버텨줘. 나도 노력하고 있으니깐.


어두웠던 병실을 밝히기 위해 불 대신 암막커튼을 거두고, 의자와 책상을 김독자의 침대 옆에 붙여두었다.

그리고, 유중혁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ㅡ 이상 무. 그리고 이제 니가 와서 확인해라. 일도 없는 애가.


할말을 하고 나니, 은근 속이 후련했다.


"이제 슬슬 시작해야지.“


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조용한 병실에는 고요하게도, 오직 내가 치는 타이핑 소리만이 메아리를 치며 울려 나갔다.


난 괜히 옆에 가만히 누워있던 김독자를 향해 말을 꺼냈다.


“이런 소설에 우리가 목숨을 걸었었다니. 참 웃겨, 그치?”


그리고, 그 말 또한 메아리를 치며 울려 나갔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주라고. 사람 민망하게.


난 의자를 끌어 김독자에게 다가갔다.


“에잇.”


그러고는 괘씸한 김독자의 볼을 잡아 땡겨보기도 하고, 양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괴상한 표정을 짓게도 해보았다.

일그러지는 김독자의 표정을 바라보니 마음이 편해지는 한편, 순간 김독자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인지하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시나리오가 한창일 때도 똑같은 짓을 했던 거 같은데… 같이 보내온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 걸까.


슬픈 표정의 김독자를 바라보니, 시나리오가 끝났을 때의 그가 생각이 났다.


「“같이 내릴 거지?”」


나의 질문에 씩 웃으며 다가오던 너.

나에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걱정되는 마음을 주던 그 미소.

그 미소를 짓던 그때의 너는, 정말로 너였을까.


「“그럼. 내려야지.”」


“...바보.”


정말로 항상 묻고 싶었다.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건지.


난 잠시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 그리고 활짝 피어오른 벚꽃 나무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벚꽃들을 흩날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엔 같이 산책하러 나가는 건데.


지금의 김독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독자다. 내 이야기를 읽어주겠다고 했던 독자.

그러니, 이런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잠좀 그만 자고. 같이 밖에나 나가자.”


모쪼록 좋은 날인데 말이야, 응?


용기 내서 말하는 건데... 사람 무안하게 하지 말고, 대답 좀 해줘 봐.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고 해서 삐진 거야?”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눈을 감으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알았어, 읽을게.」


흔쾌히 웃으며 답했던 김독자의 모습이.


「“로맨스는 어때?”」


지금과는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얄밉게 말하던 김독자의 모습이.


「“······로맨스를 어떻게 3천 편이나 쓰냐?”」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취소할게. 그깟 로맨스 소설, 네가 원하는 만큼 써줄 수 있으니깐…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대답해줘.


난 김독자의 손을 꽉 쥐었다. 나의 손을 포근히 잡아주었던 그의 손을. 부러질 만큼 세게.


「“아야. 아프다고!”」


언제였던가, 같은 짓을 했을 때 능글스럽게 받아쳤던 김독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왜. 왜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일까.


울컥, 눈물이 흘러내리려고 했지만, 난 참아내었다.

적어도, 네가 돌아오기 전까진 울지 않기로 했으니깐.


난 애써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무시한 채로, 다시 이야기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이 이야기가 네게 닿아,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며.




*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무심하게 운행을 시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무더위를 몰고 와, 모두를 혹사 시켰던 여름.

푸르른 낙엽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을 이뤄가던 가을.

지금,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곤 다시 한번 찾아온 겨울.


겨울의 세찬 바람이 불며 모든 것을 꺾어가고 있을 때도, 새하얀 눈들이 모든 것을 덮어가고 있을 때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ㅡ 이제 마지막 부야.


ㅡ 그러면 독자 아저씨 볼 수 있는 거예요?


ㅡ 그래.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돌아와 주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 일행들은 열심히 이야기를 쌓아나가고 있었다.


끼익ㅡ


“김독자. 나왔어.”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가 쌓여가는 시간. 그 모든 시간을 이 병실에서 김독자와 함께 보내고 있었다.


유중혁이 지구를 떠난 지 대략 3개월이 지났다.

3개월째 연락이 없길래 살짝 걱정은 했지만, 다행히 어제 연락이 왔다. 들어보니, 비유와 함께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잘하고 있는 거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유중혁을 믿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는 비유를 믿는다. 그 회귀자 녀석을 믿어서 뭐 해.


나는 쓰고 있던 안경을 슬쩍 들어 올리곤 TV를 바라보았다.


ㅡ 오늘의 날씨는 맑으며······


ㅡ 저희 공단은 오늘도······


“으으으...”


TV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나, 앓는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삑ㅡ!


“알았어, 알았어. 맨날 자는 녀석이 불만은 많아.”


찡그리고 있는 김독자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미안하게 이러네.


“너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있다고.”


나는 시선을 돌려 노트북에 띄워져 있는, 곧 있으면 완성될 작품을 바라보았다.


‘전지적 독자 시점.’


처음 글을 적을 때만 해도, 솔직히 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었다. 


반드시, 김독자를 위해서라도 완성되어야 했으니깐.


침대에 기대어 김독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쓰여가면서, 이 녀석도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긴 속눈썹과 산뜻하면서도 창백한 그 표정.

내가 알던 김독자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그 얄미운 인상도 돌아오고 있긴 하지만.


난 무심코 김독자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그래도 귀엽다니깐.”


············음?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한ㅡ


순간적으로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미쳤나 봐, 한수영. 도대체 무슨 말을…


힐끗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자고 있어서 다행이지, 쟤가 들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도 달아오른 열은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꾸만 김독자의 생긋 웃는 표정이 내 눈에 아른거렸다.


「“······맛있냐?”」


「“요즘 이상하게 단 게 땡겨. 너도 먹을래?”」


「“근데, 그거 내가 먹던 건데.”」


「“그래서?”」


「“······재미없네, 진짜.”」


솔직히, 그때 기회만 있었어도… 확 그냥...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한수영. 이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난 노트북을 들여다보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흠흠. 뭘 써야 할까.”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 대신에, 짙은 한숨만이 퍼져 나왔다.

김독자가 보는 건데… 그래도 조금 좋은 결말이 되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건 김독자,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온 이야기이니깐. 내가 바꾸고 싶다고 해도,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옆을 바라보자, 새근새근 자는 김독자의 모습이 보였다.


도당체 이 녀석이 무슨 결말을 원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김독자가 바라던 것이 아주 찬란한 결말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그저 평범한 결말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게 낫겠지.


“너는 무슨 결말을 원해?”


“...”


...대답을 원한 내가 바보지.


난 다시 노트북에 띄워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


비어있는 칸. 1863회차의 내가 겪었던 일이 쓰여질 자리였다.

솔직히, 무엇을 적으면 좋을지 며칠 동안 심히 고민해보았다.


[설화, ‘예상 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었어.”」


「“한 번쯤은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되냐?”」


‘예상 표절’이 들려준 이야기는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 또한, 내가 겪었던 일이라고.

그런데도 쉽게 적어낼 수 없었다.


어떤 문구가 들어가든지 간에, 그때의 이야기를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으니깐.


난 눈을 감아 생각해보았다.


그녀 또한 나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때의 내가 전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난 천천히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말로는 전할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전할 수 있으면.


그리고, 한 글자씩 무언갈 적어나갔다. 


「이 이야기가 태어난 것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앞으로 네가 겪을 일들은 결코 너의 죄가 아니라고.」


나만의 독자에게만 말해줄 수 있는 그 말을.


「너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자랐지만, 이 이야기가 될 필요는 없다고.」


또 다른 ‘한수영’이 만족하길 바라며.


[설화, ‘예상 표절’이 ‘가장 오래된 꿈’을 바라보며 미소 짓습니다.]


기분 탓이었을까, 흰 코트를 입고 있는 여성이 김독자를 바라보곤 무언갈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슬프지만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ㅡ 고마워.


그녀를 바라보니 ‘멸살법’을 연재하던 나의 기분이 무엇인지 알 거 같은 느낌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단 한 명을 위해 보내는 것.

그저, 단 한 사람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뭐랄까, 김독자?


그 기분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을 거 같지만.

그것이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과 같은 것 같네.




*




서서히,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눈을 떴다.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미지의 공간에서.


“어으... 머리야...”


[일 어 났 어?]


‘제 4의 벽’의 말이 들리는 것을 보니, 아직 죽지는 않았나 보다.


“여긴 어디야…?”


[나 도 몰 라.]


‘제 4의 벽’이 모르는 게 있다고?


[그 냥 보 이는 건저 것 뿐.]


앞을 바라보니, 어떤 병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떤 아이가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나였다.


끼이이이익ㅡ


병실의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찰랑이는 흑발, 눈 밑에 뚜렷하게 보이는 눈물점.

레몬 사탕을 입에 물고 오는 이는 단 한 사람 밖에 없었을 것이다.


ㅡ 김독자. 나왔어.


“한수영?”


정말 오랜만에 보는 한수영의 모습이었다. 정말... 아주... 오랜만에.


나도 모르게 화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당장이라도 저 아이가 되어 벌떡 일어나고 싶지만…


그때, 갑자기 한수영이 나의 볼을 꼬집는 것이 보였다.

굳이 자는 사람을 왜ㅡ


ㅡ 그래도 귀엽다니깐.


············뭐?


쟤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날뛰는 한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무심결에 나온 말이겠지. 그러겠지.

나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지고 있었다.


힐끗 보이는 화면으로 폴짝이는 한수영. 살짝 귀여운 거 같기도 하ㅡ


그때, 갑자기 화면이 암전되더니, 다른 화면을 띄우기 시작했다.


ㅡ 야, 김독자. 언제쯤 인사 해줄 거냐?


한수영의 옷이 가벼워진 것을 보니, 시간이 지난 듯하였다.


ㅡ 오늘 발렌타인 데이잖아. 왜 내가 이런 거까지 챙겨줘야 되는 건데.


다시 화면이 암전되더니, 이제는 화이트데이를. 다음은 크리스마스를.


그 외에도 날마다 빠지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수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난 그 모습을 몇 날, 며칠째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혼잣말하는 한수영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사소한 것이라도 챙겨주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수영은 알고 있을까. 난 아직, 너의 독자가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고.


오히려, 지금. 지키고 있다고.


“근데 로맨스 소설을 써달라고 했더니, 현실판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네.”


[킥 킥.]


농담이었지만, 나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한수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무언가 불편했다.


그녀 옆에 내가 있어줄 수 있었다면.


우우웅ㅡ


내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바라보자, 알 수 없는 글이 나타나 있었다. 본래 읽던 ‘멸살법’ 이외의 글.


문장과 문단들은 제각기 파편처럼 흩뿌려져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노트북을 쥐고는, 곤히 잠들어 있는 내 옆에 기대어 졸고 있는 한수영.


그 노트북과 나의 휴대폰이 희미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위해 써준 글인 건가.”


다시 한번 나를 위해서.


너를 희생하면서까지.


잠에서 일어난 한수영이 내 주머니에 무언갈 넣어주곤, 병실 밖을 나섰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자, 부스럭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만져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


난 주머니에서 그 물체를 꺼내 보았다.


“...사탕이네.”


레몬 사탕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한수영한테 넙죽 받아 먹어본 적이 있는 사탕.

난 그 사탕을 꽉 쥐었다. 그리고,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넌 나를 기다려주고 있구나.




*




또 시간은 흘러갔다.

아주 오랜 시간이, 아주 짧게.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당신이 가진 ‘관리국’의 설화가 이야기를 멈춘 상태입니다.]


나의 손에 있던 설화가 곧 활자가 되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활자가 사라지는 자리에는 유중혁이 서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공허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유중혁의 표정. 그리고 나는, 그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그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나는 유중혁에게 달려가고는,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럴 일은 없었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고, 실행에만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고.


모든 이야기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우리가 걸어온 길, 그리고... 김독자가 걸어온 길을 적어놓은 이야기.


“말해. 말하라고. 제발… 성공한 거지…?”


난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김독자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줘, 제발. 장난치지 말고. 나 이런 장난 싫어하는 거 알잖아.


“수영 씨.”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이현성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손을 붙잡았다.

아무리 둔한 이현성이라도 알고 있던 것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일행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모두 원했을 것이다. 그저, 행복한 결말만을 볼 수 있기를.


모든 것이 유중혁에게 달린 상황. 그 상황 사이에서, 유중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실패한 것은 아니다.”


.


.


.


.


유상아가 끌고 온 리무진. 우리는 그 리무진을 타고선, 유중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된 것이다.”


유중혁이 전해준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우주에 표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은밀한 모략가’와 그의 일행들을 만나게 되어 비유에게 보내졌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우주를 떠돌며 이야기를 전파하고 다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들이, 완벽하게 전해졌는지는 모른다.”


내게 있어서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말은, 김독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니깐.


유중혁이 나를 흠칫, 바라보더니 작게나마 중얼거렸다.


“네 이야기 덕에, 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너한테 그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어...”


김독자를 위한거라고.


“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그 이야기를 읽었을 테니.”


그래야지… 그랬길 바라야지…

이제, 그 이야기는 나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런데도, 내가 원하던. 그런 김독자는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러면 다른 세계선의 독자 아저씨들이 쳐들어오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실없는 농담을 하는 일행들이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내 귀에 들려온 것은 다른 것이었다.


ㅡ 그 이야기는…


뭐...?

더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ㅡ 그 이야기는, 지하철에서 시작되었다.


언제였을까. 아주 오래전에 들어보았던 설화의 이야기.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설화였다.


일행들도 이 소리를 들은 것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ㅡ 그리고, 이 모든 세계의 결말을 아는 한 사내가 있었다.


설화에서 아주 익숙한 문장들이 들려오자, 그들은 확신을 가득 찬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는 무수히 많은 활자들이 은하수처럼 길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단 한 곳을 향해서.


“이거...”


[……바앗?]


그리고 바뀐 비유의 모습. 본래라면 시스템이 소멸하여 사용 할 수 없던 능력이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끼이익ㅡ 소리와 함께, 공단에 도착하자마자 일행들은 리무진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설화, ‘예상표절’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세히는 들리지 않았지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마음속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일행들은 모두 정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갈 길이 어딘지 안다는 듯이, 단 한 곳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넘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틈도 없이, 재빨리 일어나 다리를 짚고 달려 나갔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그 일행들보다 앞서 달리고 있었다. 이현성, 정희원... 심지어 유중혁보다 빨리.


잔뜩 부푼 근육들이 옥죄어오며 다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난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시간이다. 아니, 평생을 기다려온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한수영, 넌 작가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멍청한 질문을 했던 너.


「“작가는 자기가 쓴 글 속에서 정말 전지전능한 걸까?”」


네 말대로, 나는 전지하지 않아.

모든 이야기는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니깐.


그러니, 이 이야기의 마지막쯤은 같이 장식하여도 괜찮지 않을까?


쉬지 않고 달려온 발걸음은 어느샌가 공단의 병원의 앞에 다달아 있었다. 가쁜 숨이 내쉬어졌지만, 그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는,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계단 하나하나를 오르자, 내가 써왔던, 모두가 함께 써왔던 이야기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마지막 문장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이것이 이 이야기의 종착점이 될 것이라는 듯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뒤에서 유중혁이 무언가를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계속하여 나아갔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병실 앞에 섰다. 지난 4년 동안, ‘전지적 독자 시점’을 적어오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방문했던 그 장소 앞에.


이 문을 열면, 환한 모습으로 김독자가 반겨줄까? 아니면, 그저 어두운 현실만이 나를 반겨줄까?


기대가 찬 빛과 같은 마음과 어둠으로 가득한 두려움이 동시에 엄습해왔다.

고개를 떨구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만약, 이야기를 읽은 김독자가 안 좋은 결말을 상상했다면.

방향성을 찾지 못한 채로, 난독을 일으켰다면.


“그래도, 난 널 믿어.”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넌, 나의 독자잖아.”


이 문 뒤에 무엇이 있든, 내가 맞이할 결말이 무엇이 되었든, 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살아남을 거란 사실이다.」


나는 힘껏,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이이익ㅡ


삐걱거리는 문의 소리.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볕. 그리고 그 햇볕 사이로, 침대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난 서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사람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져 갔다.


긴 속눈썹, 눈동자. 눈처럼 새하얗게 빛나는 뺨과 언제나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얄밉지만 그리웠던 그 표정.

그 표정을 짓고 있는 입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한수영.”


울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툭. 툭.


김독자가,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생긋 웃으며 날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 나는 확신이 들었다.


「당신은 새로운 ■■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의 종착점이라고.


「당신의 ■■은 ‘오랜 이야기의 끝’입니다.」


그리곤 미처 이야기가 전하지 못한 글, 내가 쓴 글을 떠올리며 김독자에게 달려갔다.


한 걸음씩.


「네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기억해줘.」


네게 보일 수 있는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우리가 만든 이야기를.」


그대로 김독자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돌아와 줬구나. 마침내...”


김독자는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눈을 감고 나를 안아주었다.


“미안해. 오래 걸려서.”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김독자.”


행복해 보이는 네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 시간을 버텨왔고,


“어?”


오래전부터 전하려고 했지만, 전하지 못했던.

정확히는, 방황하고 있던 나의 마음을.


“...사랑해.”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그 시간은 의미가 있었다고.


“...”


김독자는 대답 없이 나를 더 꽉 안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들어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시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나는 눈을 감고 김독자를 받아들였다.


다행이다. 네 생각이 나와 같아서.


이때만이라도 아무말없이 보내고 싶었다. 이 순간만을 영원히.

때로는 그 어떤 말보다 행동이 더욱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깐.


부드럽게 느껴지는 그의 입술. 지난 4년 동안과는 달리, 아무리 찾을 수 없던 김독자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밀접하게.

나의 눈물이 김독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가 입고 있던 옷을 적셔갔다.


입을 떼자, 생긋 웃으며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 김독자가 보였다.


“나도 사랑해, 한수영.”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미소.」


“응.”


그때, 우리의 몸에서 활자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빠져나간 활자들은 이내, 우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저는 독자입니다.”」


「"저는 작가입니다."」


각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니깐.


“한수영! 이게 무슨...”


“독자 씨는요? 독...”


갑작스럽게 들어온 일행들 또한 김독자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저마다의 감상을 내놓고 있었다.


「“김독자.”」

더이상 회귀자가 아니게 된 유중혁.


「“독자 씨.”」

그의 오랜 친구, 유상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

그의 방패가 되어주었던 이현성.


「“다시는 못 도망가게 할 거에요.”」

그의 검이 되어주었던 정희원.


「“독자 형!”」

「“아저씨.”」

언제나 그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이길영과 신유승.


「“뭐야, 아저씨. 여전히 못 생겼네.”」

항상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던 이지혜.


일행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김독자에게로 날아왔다.


“...아름다운 이야기네.”


김독자가 그 문장들을 어루만지자, 어지럽게 뭉쳐져 있던 활자들이 마치 개화(開花)를 하듯이 퍼져나갔다.

그렇게 흩날리며 펴져나가는 활자들 사이로, 단 하나의 문장만이 남아있었다.


끝내 적진 못했지만, 언젠가는 너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문장.


난 아무 말 없이 바보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 문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원(永遠)할 이야기의 종장(終章)을 알리는, 그 문장을.



또한 새로운 이야기의 개막(闿幕)을 알리는, 그 문장을.



「이것은,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이야기이다.」



떠오른 문장을 바라보며, 넌 웃으면서도 울고 있었지만.



그런 너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더라.










그냥 새로운 필기 방식으로 바꿔보고 하면서 써본 연습글.


근데 로맨스 소설을 많이 봐본 적이 없어서...

개연성 맞추기 되게 어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