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의 어느 공터.


한때 이곳에 중원 무림의 상징 중 하나가 존재했었노라 외치는 듯한 화려한 건물의 잔해들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갔다.


무언가 애잔한, 동시에 매우 화난것 같아 보이는 표정으로 잔해를 해치며 나아가던 사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四川唐家(사천당가)


기나긴 세월 동안 당가의 대문에 당당히 자리잡아 위용을 떨치던 현판은 이젠 빛바랜 채 반으로 쪼개져 나뒹굴고 있었다.


"......"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사내가 이윽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일련의 무리들이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창천을 새긴 검을 든 검수들과 금빛 가사를 걸친 무승들.


정파의 태산북두인 남궁과 소림의 주력이 오직 사내 하나를 막기위해 뭉쳤다.


그 사실에 긴장할 법도 하건만, 사내는 담담하게 선두에 선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정녕 저를 막으시렵니까.가주님."


"자네를 위해서라도."


"대사께서는."


"불도를 닦는 승려로써 살업을 저지르는걸 지켜만 볼 순 없기에."


"후우....."


원치 않았던,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될 것임을 짐작한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문주.나는-"


"저는 이제 하오문주가 아닙니다.가주님."


"..그런가...."


"한낱 복수귀에게는 과분한 이름이기에."


"...가겠네."




이날 벌어진 격돌은 칠주야 동안이나 이어지며 훗날 '하오문 혈사' 의 끝이라 불린다.




*

한 사내가 있었다.


흉성을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에게 죽임당할 뻔 했다가 하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망친 그는 이후 길거리를 떠돌며 살았다.


허나 버려진 꼬마를 그냥 둘 만큼 세상은 무르지 않았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힘을 길렀다.


뛰어난 근골과 오성을 바탕으로 저잣거리에 나도는 무공들을 전부 익히고 그것들을 자신에게 알맞게 뜯어고치던 그는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자신의 독문무공을 완성시킴과 동시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이제 스스로의 뜻을 펼 수 있을 힘을 지닌 사내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모아 무공을 가르치며 점점 세를 불려나갔고, 오늘날 하오문이라 불리는 문파를 만들기에 이른다.........


"형님, 그거 애들한테  골백번도 더 들려준 이야기요."


등에 창을 진 사내가 이마를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기들이 몸담은 문파가 어떻게 탄생한 건지 정도는 알아야지.여러번 들으면 기억도 더 잘할테니 좋은 거 아냐?"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뭐가 잘못됐냐는 듯 묻든 '형님' 을 보며 이마를 짚은 사내가 반문했다.


"그건 이해한다 쳐도 애들한테 거짓말은  안 해야 할거 아뇨! 뭐 약관도 안되서 독문무공을 창안해? 우리 없었으면 완성하지도 못했을 거, 심지어 이립이 다되서야 겨우 완성해놓고 뻔뻔하게 그럴거요? 애들이 아직 어려서 말하는대로 다 믿는다고 아주 신이 났구만?"


"어허, 장삼아. 문주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그리고, 나이를 조금 꾸미긴 했지만 그렇다고 독문무공 어디 만든게 쉬워보이디? 이립이면 저기 어디 문파에선 아직 제자로 있을 나인데-"


"얘들아. 이제 그만 방으로 가서 자라."


"네-!!"

"얌마!! 어딜 형님이 말하는데 말을 끊어!!"


빽 소리를 지른 사내가 던진 부채를 익숙하다는 듯 한손으로 받아든 장삼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하오문주 서량 하면 무서워 하긴 커녕 뺀질이라고 뭐라 하는 거 아니겠소. 제발. 이제 번듯한 문파도 세우고 문주 소리도 듣게 됐는데 좀 위엄있게 행동할 때도 않았소?"


"위엄은 무슨. 태생이 길거리 출신이라 그런건 어울리지도 않는다.그리고 하오문이 무슨 문파냐? 가장 낮은 곳에게 힘든 이들을 구하겠다고 세운 문파인데 문주가 저 어디 명문세가 가주처럼 무게잡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편하게 도와달라고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생글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서량을 보는 장삼의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틀린말은 아닌데 그래서 더 열받는다.


평민들한테 친근한건 문도들로도 족한데 왜 문파의 얼굴이 되야 할 문주까지 저러고 다니는 거냐고.


형님이 생각이 없는 사람도 아닌데 대체 왜.


장삼이 그런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다시금 입을 열려던 순간, 문이 열리며 문도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문주님!!!"


"누가 허락도 없이 집무실 문을 벌컥벌컥-"


"남궁 소저께서 문주님을 찾고 계십니다!!"


"-열 수도 있지.암. 형님!! 빨리 나가보셔야....벌써 갔네. 이럴때만 빠른 인간 같으니."


그리 말한 장삼도 훌쩍 몸을 날려 집무실을 빠져나가 버리고, 순식간에 방안에 홀로 남겨진 하오문도는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희아. 여기는 어쩐 일로 온 거야? 날도 추운데."


"가가 보려고 왔죠. 아버지도 안부 전해달라고 하시던데요."


"장...아니 가주님이 이리 나를 생각해 주시니 고맙네. 다음에 한번 찾아 뵙겠다고 전해줘."


"프흡. 그냥 장인어른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음.보기 좋구만.'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서로를 껴안고 속삭이는 둘을 보던 장삼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소를 짓는다.


'저 둘도 보다 보면 참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사람들 같은데.'


남궁희아야 말할 것도 없는 절세가인이고, 인정하긴 싫지만 서량도 한때 별호가 옥면공자였을 만큼 외모로는 꿇리지 않는다.


그림같은 선남선녀 한 쌍인데, 심지어 둘의 연애사 마저 정말 소설같다.


정체를 숨기고 암행을 나온 명문세가의 금지옥엽 아가씨.


뭣모르고 돌아다니는 그녀를 위협하는 파락호 패거리와 당황한 그녀를 구해주며 나타난 남자.


둘은 그 일을 계기로 점점 가까워지고 마침내.....


"크흐."


"아! 장삼도 있었어요?"


"엇."


무심코 터져나온 감탄사를 참지 못한 탓에 숨어있었던게 들켰다.


그 때문의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서량이 죽일듯이 노려보며 살벌한 전음을 날리지만, 장삼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서량은 희아 말 한마디면 금방 기분 풀려서 헤실거릴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고!! 형수님은 어째 뵐때마다 고와지셔?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님이라고 하면 그냥 속아넘어가겠수."


그래서 그냥 오랜만에 보는 희아에게 한껏 반가움을 표했다.


"장삼도 참. 그렇게 얼굴에 금칠해도 뭐 떨어지는거 없는데."


"우리 형님 데려가주신 귀인이 바로 형수님 아니요. 혼자 늙어갈 형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는데..."


"평생 연애도 한번 못해본 놈 말은 안듣는다. 내가 임마, 왕년에 옥면공자라고 하면 저잣거리에 여인들이-"


"...가가?"


"이런."


"방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안.내가 잘못했어."


"크하하하하!!! 이게 다 업보요 형님!!!"



이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정답게 웃고 떠들던 세명 중 한명은 싸늘한 시체가 되고 남은 둘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게 될 거라곤.


그들 앞에 펼처진게 행복하고 희망찬 미래가 아니라 절망뿐인 비극 이라는 것을.



*

시발점은 마교의 준동이었다.


기나긴 봉문을 풀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교가 다시금 중원 무림을 정벌하고자 하는 야망을 드러냈다.


사실, 무림인들에게 마교의 침공은 그리 낮선 일은 아니었다.


  20년마다 한번씩 쯤은 마교가 중원을 침범했으니 익숙하면 익숙했지 낮설 리는 없었다.


물론 한번 마교의 침략을 막아낼 때마다 수많은 피가 흘렀고 전 무림은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중원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모인 무인들은 매번 마교의 침략을 막아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흐르는 피를 두려워 할 지언정 마교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단결한 정파무림 앞에 마교는 무너질 것이기에.



"우습구나."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산산조각났다.


"커헉...."


"헛된 믿음에 취해 본좌에게 달려드는 것이 마치 부나방 같군."


이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

처음은 지방의 군소문파들이었다.


무림맹과 거대 문파들이 병력을 꾸릴 동안 스스로의 터전을 지키고자 일어섰던 이들 모두가 마교에게 패배하고 죽임당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마교가 평소보다 더 사나운 것 뿐이라고, 전의 대패가 그들이 독기가 오르게 했을 뿐이라고 넘겼다.


그렇게 해서 점점 부피를 키우려는 불안감을 누르고자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믿음은 굳건했다.



무림맹이 엄선해 보낸 정예부대가 천마의 직속 호위대에게 패했을 때도

.

무당의 팔검선이 마교의 장로와 동귀어진 했을 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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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산이 불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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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가의 가주가 천마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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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제서야 사람들은 패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마교와는  다르다고, 어느정도 희생을 감수하면 충분히 상대할 만 했던 이들이 아니라고.


처음으로 마교에게 지배당할 위기에 놓인 이들은 유래없는 대혼란을 맞이했다.


"우린 이제 모두 죽을거야!!! 마인들이 우리를 죽일거라고!!!"


"무림맹주는 어디갔어?! 싸워야 할 거 아니야!!!"


분명,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안휘의 남궁과 하남의 소림은 제 지역을 지켜내며 천천히 마교를 밀어내고 있었고


처음 마주하는 종류의 마공에 속절없이 쓸려나갔던 무림맹도 어느정도 대처법을 찾아낸 채 분전하고 있었다.


무너진 문파의 후인들 또한 세력을 재건하고 복수의 칼날을 들이밀며 마교에게서 산발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허나, 이 모든 승리를 합해도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정확히는, 사람들에게 승전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본디 무림의 정보를 다루는 개방은 마교의 준동과 전선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어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정보를 나를 여력이 없었고


혼란을 진정시켜야 했을 무림맹 또한  맹주 부터가 불리한 전황을 타파하기 위해 천하를 쏘다니며 싸우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남은 힘이 없었다.


그런 사정들이 겹치고 겹친 끝에, 미약하게만 들려오는 승리와 대비되게 사방에서 전해져오는 패배의 소식이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공포를 조성하던 것 이었다.


"그거 들으셨습니까? 안휘로 쳐들어온 마교의 장로가 남궁가주께 목이 베였다고 하던데요."


"나도 들었소. 저 소림에서도 나한승들을 내보내 마인들을 물리치고 있다던데?"


"맹주께서 직접 이끄는 정예들이 마교와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고도 하더이다."


이때 나선것이 바로 하오문이었다.


원래는 전선에서 양민들을 구출하는데 최선을 다하던 하오문은 사태가 진정되지 않는 원인을 파악하는 즉시, 사방으로 문도들을 흩뿌려 승전보를 전달했고 패배의 소식을 의도적으로 차단했다.


점소이,기녀,마부 등 양민들의 삶에 가까운 곳에 있던 하오문도들이 연일 정보를 퍼트리고 다니자 여론은 금세 잠잠해졌고, 혼란이 진정되어 후방이 안전해지자 무림맹과 문파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며 마교를 점점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장삼아.몇놈이나 잡았냐?"


"대가리는 세명정도 잡았소.형님은?"


"난 넷."


"쯧...내가 졌구려."


그리고 하오문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전투에 손을 보탰다.


아무래도 신생 문파인 만큼 전투원의 수는 다른 문파들에 비해 밀렸지만 하나하나가 전부 완숙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하오문의 간부들은 그들 만으로도 무시못할 전력이었고, 그 전까지 정사지간이라며 하오문을 매도하던 문파들조차 그들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맹주님은 뭐라시디?"


"총관한테 듣기로는 각 문파의 정예들만 골라 만든 부대가 몇개 있는데 거기에 우리 애들도 같이 편성하겠다고 하더이다."


"흐음...."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던 서량이 문득 장삼에게 말을 건낸다.


"우리 애들, 가서 잘 하겠지?"

"갑자기 이양반이 뭔 헛소리래? 걔들보다 싸움판에 익숙한 애들이 어딨다고?"


"그냥...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말이다. 원래 우리보고 천것들이니 뭐니 하던 놈들이 순순히 우리랑 손을 잡겠다고 한 것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건 아닐까 싶고."


피깃, 실소를 흘린 장삼이 다가와 서량의 어깨를 친다.


"이 형님이 나이를 먹더니 걱정이 늘었는갑네. 그쪽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면 남궁가주님이든 형수님이든 뭐라고 언질이라도 주지 않았겠수? 아무리 그놈들이 멍청해도 전쟁중에 제 살 파먹는 짓을 할려고."


"그래도...."


"거 쫌 있으면 싸우러 가는 사람들끼리 불길한 소리는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 합시다."


장삼이 내민 술병을 받아든 서량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병의 입구를 내민다.


"장삼아. 몸 성히 돌아와라."


-쨍그랑


"형님 걱정부터 하쇼. 당장 천마 모가지 치러 가는 사람이 누굴 걱정한데?"


서량과 술병을 부딪힌 장삼이 술을 들이키고는 말을 잇는다.


"이 장삼. 형님이랑 형수님 혼례 올리는거 보기 전까지는 죽을 생각 없으니까 형님도 몸 성히 돌아오슈."


"그래. 나도 너 장가가는건 보고 죽어야지."


비어버린 술병을 치운 그들은 이윽고 각자의 전장으로 향했다.



...이날, 서량은 무림맹 별동대 소속으로 천마의 목을 베는데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돌아온 그를 반겨준 것은 그토록 바라던 행복한 미래가 아니라,싸늘한 시체가 된 문도들과 사망자 명단이었다.


총관 진천-암습으로 인한 사망


전투대주 암향-적들과 교전 중 사망


의약당주 백화-암습으로 인한 사망

.

.

.

부문주 장삼-적들과 교전 중 사망


시체 회수 실패


"......."




서량은 이날 전투로 하오문을 세우기 이전부터 함께하던 동료들을,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 이들을 대부분 잃었다.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탓일까, 그들의 죽음 이후 서량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졌다.


마치 폭발 직전의 화약처럼 위태로운 상태를 유지하던 서량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던 것은 남궁희아의 도움이 컸다.


힘들어하던 서량의 곁에서 함께하며 정성스레 보듬어준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에 어딘가 망가져 버렸을 것이었다.



'그래, 그런 희아가 나를 속였을 리가 없어.'


그렇게 되뇌이던 서량은 끝끝내 떨림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희아. 우리 애들....마교한테 죽은 게 아니라는게 사실이야?"


"어,어떻게 그걸...?''


-까득


"그리고...그걸 덮으라고 지시한게 진짜 희아 너야?"


서량은 내심 그녀가 그 사실을 부정해 주기를 바랬다.


그럴 리가 없지 않냐고, 어떻게 자기를 의심할 수 있냐고 화를 냈으면 했다.


"......."


저렇게 놀라 굳어있는, 제 죄를 시인하는 듯한 모습을 바란 게 아니란 말이다.


"....어떻게,어떻게 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은 서량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핏발선 눈으로 희아를 바라봤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래..?"



*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걸까.


페를 쥐어짜는 듯한 압박감 속에서 남궁희아가 생각했다.


하오문에게서 정보를 숨긴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오만했나?


처음부터 사실대로 알렸어야 했나?


그랬다가 가가의 상태가 악화됐으면, 혹여 잘못된 선택이라도 했으면?


그걸 내 멋대로 판단한 시점에서 이미 잘못된 거였나?


점차 짙어지는 압박감에 흐려져가던 남궁희아의 의식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장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몇달 전,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운 가주를 대신해 전후 복구에 힘쓰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희아의 집무실에 믿을 수 없는 정보가 들려왔다.


"이게, 전부 사실이라고요?"


"예.아가씨. 말씀드리기 참담하지만..."


희아에게 서신을 가져다준 정보대의 대주가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똑바로 말할 자신이 없는 듯 했다.


"..전장에서 사망한 하오문도 전원이 같은 대에 편성된 대원들에게 살해당한 것 같아 보입니다."


이 어이없는 소식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그녀는 곹 불같이 분노를 토해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그래놓고도 뻔뻔하게 정파를 자처해??"


살해당한 하오문도들 전부 희아와도 면식이 있는 사이다.


특히 장삼같은 이들은 그녀의 몇 없는 친우들 중 하나이니, 그녀가 느끼는 분노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화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된 그녀가 정보대주에게 물었다.


"그래서,대체 왜 그런 거래요?"


"그....이번 전쟁에서 하오문의 활약이 크지 않았습니까."


"...설마."


"그 치들은 하오문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


"심지어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 하오문의 이권을 슬쩍 강탈해가는 이들도 있다고.."


"다들 미친거야...? 어떻게..."


이제는 숫제 공포가 느껴질 정도의 악의에 눌린 남궁희아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가는 이 사실을 아셔?"


"아직은 모르는 듯 합니다. 하오문의 세력이 줄며 정보를 입수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생긴듯 한 지라."


"......."


남궁희아는 고뇌에 빠졌다.


이 사실을 서량에게 알려야 하는가?


원래였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게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정보를 넘겨주기엔 서량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천마와의 결전 이후로 계속 불안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잠도 안자고 칠주야 내내 검을 휘두르기도 했고,마교에 관련된 소식이라면 진위 여부도 신경쓰지 않고 일단 달려갔다.


...가끔은, 죽은 동료들의 환상을 보는 듯 하기도 했다.


-장삼이더냐?


-가가...


-어딜,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온거냐. 나는, 너희들이 전부...


-가가!!


-......희아?.....이거 추태를 보였네.



그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그 인데 만약 문도들이 저 악독한 이들의 손에 생을 다했다는것을 알면 홀몸으로 그들 전부를 죽이고자 달려드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자 문득 두려움이 그녀를 파고들었다.


이미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주변인들이 죽었다.


가문의 어르신들, 친우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것 만으로도 견딜 수 없게 힘든데, 만약 서량까지 잘못된다면.....그런 생각을 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안된다. 그마저 잃을 수는 없다.


"이 건은 일단 숨기죠. 아무의 귀에도 안 들어가게. 철저히."


"괜찮겠습니까? 가주님 허락도 없이..."


"가주님이 저에게 직접 직인을 맡기고 가셨잖아요. 책임은 제가 질게요."


"...존명."


어두운 낮빛으로 방을 나가는 정보대주를 보며, 그녀는 조용히 뇌까렸다.


"일년. 딱 일년이면 돼."


그때쯤이면 남궁세가도 모든 피해를 복구할 거고, 서량도 어느정도 나아질 것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렸다가 정식적으로 그들의 죄를 고발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서량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처분을 맡기면 될 거다.



'아, 그랬었지.'


"...멍청한 년."


가가의 말 대로 내가 어떻게 가가에게 그런 짓을 한 거지?


가가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 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주제에, 가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런 사실을 숨겨?


사실은 그냥 가가가 잘못되서 자신의 곁을 떠날까봐 두려웠던 것 뿐이면서.이기적인 년.


지금이라도 사죄해야 한다. 받아주시지 않더라도...


"깨어났느냐?"


"...아버지?"


분명 가가와 있었는데, 어째서 눈앞에 아버지가 계시는 거지?


"..하오문주가 기절한 널 데려다 주었다.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더군."


"가가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었다."


순간적으로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 지며 막대한 기운이 그녀를 짓눌렀다.


"내가 정녕 너를 그리 가르쳤더냐?"


"아,버지.."


"문주로써, 가족으로써 그에게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모든 걸 알 권리가 있다.그 누구도 그 권리를 빼앗을 수 없어."


"하지만,저는..."


"그가 분노해 검을 휘두를까 두려웠느냐? 복수심에 불타 제 목숨마저 내버리려 할까 두려웠느냐?"


"..예."


"그랬다면 그 사실을 숨기는게 아니라 더 나은 방법을 찾았어야지. 그가 정당하게 그들의 피값을 요구할 방법은 많았다.무림맹을 찾든, 성명을 내 정식으로 저들의 죄를 묻든.그리고  너는 그가 그런 방법을 택하게 도울 수 있었지."


"....아."


"너는 그저 그가 네 곁에서 사라진다는 것만 두려워 해 어리석은 짓을 한거다."


"내...내가 뭘..."


쓰러져 우는 자신의 딸을 바라보던 남궁가주가 창 밖을 바라본다.


"천살이 나타났구나. 일평생 잠잠하던 흉성이 나타났어."


그는 서량을 기억한다.


요즘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의기롭고 올곧은 사내였다.


아끼는 딸을 내어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주는 더더욱 안타까웠다.


그가 기억하던 밝은 사내가 저 잠잠하던 천살성을 일깨울 정도로 망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겠느냐.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


이렇게 된 이상 복수를 해도 무언가를 얻기는 커녕 점점 더 망가져가다 끝내 무너질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 해도 그 끝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

.

.


"아버,아니. 가주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눈물을 흘리던 희아가 무언가 결심한 듯 일어나 말을 걸었다.


"힘든 길이 될 것이다. 더 이상 그와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아니,거의 확실히 그렇겠지."


그녀가 무어라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도 그는 그녀의 속내를 알아치리고 묻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으냐?"


"제 과오를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길 말한 그녀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던 가주가 몸을 일으켰다.


"창천검대를 소집하고, 구파와 오대세가에 서신을 돌려라. 힘을 보태달라고."


남궁 최강의 검수들이 다시금 검을 들었다.


목표는, 어느 한 사내의 구원.



*

"허.허허허...."


순간 조절하지 못한 기운 때문에 기절한 그녀를 세가로 돌려보낸 후, 서량은 무언가 텅 빈듯한 감정에 실소를 흘렸다.


'어째서,어째서 네가.'


골백번은 더 반복한 질문을 되새기면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우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로도 머리가 아파오는데, 희아마저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그를 미칠듯이 괴롭혀 왔다.


서량은 진심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고, 희아의 마음도 같았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결국 너도 내 등에 칼을 꼽는구나.'


밑바닥부터 시작해 하오문이라는 문파를 세우기까지 수없이 배신을 당해온 그였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웠던 것은 처음이다.


'결국, 내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어.'




만일 그가 조금만 더 멀쩡했다면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을 테고,어쩌면 남궁희아의 이야기를 한번 듣고 그녀를 이해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이미 문도들의 죽음 때문에 내몰려 있던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으드득


인간으로 살고자 포기했던 힘이 있었다.


선계가 얼마나 좋은 곳이던 간에, 내 사람들이 없는 세상으로 가고싶지 않아 봉해뒀던 힘이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비열한 수에 걸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고, 마지막으로 남은 이 조차 등에 비수를 찔러넣었다.


더이상 내가 이 세상에 남고자 할 이유가 없어졌다. 단 한가지 빼고는.


"복수."


안다.


죽어나간 이들은 내가 그들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피를 뒤집어 쓰는 걸 바라지 않을거다.


하지만 어쩌겠나.


아우들을 지키지 못한 못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탐욕에 눈이 멀어 내 가족을 죽인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둘 모두를 망가트리는 수 밖에.


 -으드드득


봉해놓았던 힘이 풀려나와 전신을 감싼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전능감이 몸을 가득 채운다.


-스르릉


어느새 도달한 첫번째 죄인들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가문 하나가 세상에서 지워졌다.


그 이후로 몇개의 가문과 문파들이 더 사라진 시점에서야 그를 따라잡은 남궁과 소림이 그를 막아서고, 서량과 그들은 전투를 벌이게 된다.


*

"허억..허억.."


자신을 막고자 달려드는 남궁과 소림의 무인들을 상대하던 서량은 점차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는 제대로된 검법을 펼치지 않은 채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독문무공 또한  사용하지 않았다.


아우들은 바라지도 않았을 복수에 그들과 함께 만든 검을 사용하는 것은 죽은 이들을 모욕하는 행위일 것이니.


지금까지는 오로지 죄인들을 베는 것에만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가진 힘을 휘두르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죽여서는 안되는 이들과 전투를 벌이니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까득


'어쩔 수 없나..'


저들이 자신을 구하고자 싸우는 것임을 아는 그로써는 그들에게 살검을 휘두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도 없었다.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고,베지 못한 죄인들도 남아 있었기에.


그래서 서량은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사용하지 않던 자신의 검을 펼처보였다.


'이 죄는 훗날 다른 모든 죄업들과 함께 심판받으마.'


무작위로 휘둘러지던 검에 쾌의 묘리가 실린다.


무인들이 그에 맞춰 대응하자 쾌검이 갑작스레 중검으로 변한다.


다시 강,패,유,변,환 등 검으로 펼쳐낼 수 있는 모든 묘리가 그의 검 끝에서 펼쳐지며 사람들을 몰아붙인다.


종적을 감췄던 서량의 독문무공, 백면검법(百面劍法) 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퍼지직


그리고 그순간, 검에 담긴 의념이 뒤틀리며 이변이 일어난다.


*

"....또 여긴가."


전투 도중 갑자기 시야가 뒤집히며 끌려온 백색의 공간.


놀랍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 주저앉은 서량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누구냐? 진천이?백화?암향이?"


이윽고 그의 눈 앞으로 장창을 맨 인영 하나가 튀어나온다.


"장삼이 너였구나."


그는 이 모든 것이 낮설지 않은 듯 태평하게 바닥에 주저 앉아있었다.


그도 그럴게 한번씩 죽은 아우들의 환상을 볼 때면 항상 이곳으로 끌려왔으니까.


그냥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겠거니, 하고 있었다.


-뻐억


"크윽?!!"


휘둘러진 창대에 머리를 맞고 넘어지기 전까지는.


"속이 다 시원하구만."


"..환영이 어떻게....?"


"이 양반이 아직 정신 못차렸네."


-캉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든 서량은 찔러드는 창을 쳐내고는 멍하니 장삼을 바라봤다.


그가 아는 가장 뛰어난 창수가 보여주던,자신의 상상력으로는 구현해내지 못할 완벽한 일섬.


"진짜 장삼이냐...?"


"그럼 진짜지 가짜겠수? 저짝에 대사님이 법력을 마구 쏟아 내시길래 거기 편승해가지고 겨우 넘어온 거요."


"어,어떻..."


"하고싶은 말이 많은건 이해하겠는데, 시간이 얼마 없어서 빨리 본론만 말하겠소."


"그게 무슨-"


"형님. 정신 안 차리시오?"


"...."


"우리가 복수같은거 안바라는거 안다메? 그런 양반이 그지랄을 떠는 거요? 다들 답답해 죽는 줄 알았소."


"하지만-"


"형님 마음도 이해는 하는데, 형님도 우리 마음 쫌 이해해 주시오. 형님이 그러고 있으면 우린 뭐 편하겠소?"


"....."


"큰건 안 바라오. 그냥 우리 몫 만큼 행복하게 형님의 삶을 살아줬으면 좋겠수. 지금처럼 죽으려고 사는거 말고."


"내가,내가 그럴 자격이..."


"확그냥, 자꾸 답답한 소리 할 거요? 이제 시간도 진짜 얼마 안 남았구만."


멍하니 서있는 서량에게 다가온 장삼이 그의 어깨를 꼭 끌어안는다.


"형님.만나서 반가웠소.오래오래 살다가 천수가 다하면 그때 다시 만납시다."


"큽..크으으읍....끄으으읍..."


"그리고 이건 형수님 관련된 얘긴데~~~~~




*

한편, 서량을 막아선 남궁과 소림의 무인들은 큰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뭔가 기세가 달라지면서 자기들이 밀리나 싶더니 갑자기 쓰러져서는 그 상태로 울고있다.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이들을 지나 서량에게 다가간 소림의 방장, 무학대사가 잠시 그를 살피더니 그 곁에서 불경을 왼다.


"저...방장스님. 이게 무슨 일 입니까?"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이들이 있고, 나는 그들이 평온하기를 비는 것 뿐이오."


선문답 같은 대답이었지만 서량과 연이 있는 남궁가주와 희아는 그게 무슨 말인지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놀란 그들이 무언가를 다시 물으려는 찰나,


"....아."


눈을 뜬 서량이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 고개를 돌려 무학대사를 바라본 그가 물었다.


"대사. 아우들은...."


"평안히 돌아갔소. 쌓은 선업이 작지 않으니 필히 극락왕생 할 것이오."


"그렇습니까..."


-쨍그랑


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그가 두 손을 들어올렸다.


"이제는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소. 순순히 죄값을 치르리다."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든 서량이 희아를 찾아 그녀에게 무어라 전음을 보냈다.


놀람 반, 기쁨 반으로 그를 바라보던 희아가 끝내 터져나오는 환희를 참지 못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서량의 복수혈전은 막을 내렸다.

.

.

.

.

.

.

.

"아빠!!!"


"어이구,우리딸."


"엄마가 밥먹으러 오래!"


"그래. 우리 희서 배고플라. 빨리 가자."


"응!가자!"



'음.보기 좋구만.'


단란한 부녀를 바라보던 거구의 장한이 발을 돌리자 그 형상이 흐릿해진다.



"아빠?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누가 왔다 간 거 같아서."


장한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사내가 이윽고 몸을 숙여 딸을 안아든다.


"늦으면 엄마가 뭐라 할 테니까 빨리 가자."







별 이유는 없고 갑자기 무협 후회가 땡겨서 갈긴 글


다 쓰고보니까 후회 비중이 쫌 낮은거 같은데....그래도 만 삼천자 쓴게 아까워서 일단 올리기는 함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다음부터는 글에 후회 농도를 더 높힐 수 있도록 하겠음


다시한번 못난 글 읽어줘서 고마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