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regrets/102648210(소재글)


"있잖아, 난 네가 정말 부러웠어.


그저 근처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나이가 비슷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애의 옆자리를 차지했으니까.


소꿉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가 너희를 커플이라고 불러주고 은근슬쩍 밀어줬으니까.



난 네가 정말 미웠어.


내가 바라 마지않는 자리를 당연하다는 듯 차지하고는 우유부단하게 시간을 끌었으니까.


당연히 후붕이가 네 곁에 있어줄 거라고 생각하고는 무심하게 대했으니까.


끝끝내 후붕이한테 큰 상처를 줬으니까.



이젠,너한테 정말 감사해.


네 멍청한 짓거리 덕분에 나한테도 기회가 생겼으니까.


바라고 바라던 일을 이룰 수 있게 됐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얼굴에는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

한 소년과 한 소녀가 있었다.


부모님들끼리 친했기에, 나이가 같았기에 자연스레 친해진 둘은 언제나 함께였고 사람들은 그들을 단짝,혹은 소꿉친구라 불렀다.


아마 그래서 였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며 둘 모두 이성관계에 관심이 생겼을 때 당연하다는 듯 서로를 떠올렸던 것은.


"야.김후붕. 너 후순이랑 언제 사귀냐?"


"뭔 헛소리야 진짜."


"어어? 얼굴 빨개진다?"


"빡쳐서 그래 이새끼야!!"


"어어? 그러면서도 후순이 싫다고는 절대 안한다?"


-


"후순아. 그래서 너 후붕이랑 사귀는거야?"


"에이. 그게 무슨소리야. 걔랑은 걍 친구야.소꿉친구."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딨냐?"


"맞아. 맨날 하교할 때도 같이가고 휴일에도 같이 놀러다니고. 이게 사귀는게 아니면 뭔데?"



주변인들도 둘이 연인이 되는것이 당연하다 여길 정도였으나, 처음 맛보는 관계가 주는 설렘과 오랜시간 서로를 보아오며 생긴 가족애에 가까운 감정 탓에 둘은 친구와 연인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적어도 후붕이는 곧 둘의 관계가 그 이상으로 발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 남친생겼다?"


어느 비내리는 겨울날, 후순이가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


*


"야!!김후붕!!! 후순이 남친 생겼다메!!! 이게 뭔 개소리야!!!"


"........"


"너네 둘이 썸타고 있는거 아녔냐? 근데 대뜸 너 말고 딴애랑 커플 됐다는 게 뭔 말도 안되는 소리야!!"


"......"


"뭐라고 말이라도 좀..."


책상에 엎드린 채 침묵으로 일관하는 후붕이의 모습에 화가 난 후돌은 그의 멱살을 잡아채 얼굴을 들어올렸다가,마주친 물기어린 눈동자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애초에 그가 화를 낸 이유도 답답함과 놀람이 뒤섞여 터져나온 결과였지,후붕이를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순간 열이 올라서 그만."


"괜찮아."


후붕이의 갈라진 목소리에 이게 장난도 뭣도 아닌 진짜란 걸 깨달은 후돌이 천천히 후붕이의 옆에 걸터앉았다.


".....좀 괜찮냐?"


-스윽


말할 기운도 없는지 고개만 저어 보이는 후붕이를 바라보던 후돌이 말없이 후붕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여간 그 미친년은 이런 애를 두고 왜 딴데에 발을 뻗어가지고는....."


후돌이의 뇌까림에 무언가 솟구친 후붕이 일어나 한마디 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내가 뭐라고..'


"후,후붕아!! 너 지금 울어?괜찮아?"


때마침 나타난 다른 반 친구들이 다가와 무어라 말을 건넸지만,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후붕이...

-질렸다고...

-이런 경우가....


드문드문 들리는 말소리로도 어찌 된 일인지 아는데에는 문제가 없었기에 애써 들으려고 하지 않은 것 이었을 지도 모른다.


더 들어 봤지 아프기만 할 게 뻔했기에, 후붕이에겐 그 이상이 필요치 않았다.


'결국...다 내 잘못이었네.'


후순이를 만족시키려 조금 더 노력했었더라면.


후순이의 마음이 식어가는걸 눈치 채고 미리 수를 썼더라면.


아니, 그냥 적당한 때에 고백하기만 했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매번 같은 모습만 보여주면 질리는 게 당연한데, 일평생을 붙어 살았다고 너무 안일했다.


후붕이가 그러한 생각들로 까지 뻗어나가고 있던 때, 후돌이 후붕이를 배려 해 애들을 데리고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분노에 찬 듯 입을 앙다문 채, 동시에 환희에 젖은 눈을 하고 있던 한 소녀가 이내 온전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거지...?"


그런 말들을 혼자 되뇌이며 돌아선 소녀,후진은 이내 교실을 빠져나갔다.


"흐헤헤헤헤..."


...조금,어쩌면 많이 실없어 보이는 웃음을 흘리면서 말이다.


*

그날 이후, 얼마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던 후붕이는 곧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미련해서 벌어진 일이고, 애초에 후순이가 남친을 사귄다고 둘이 친구로 지낸 세월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그저 원래대로,소꿉친구 관계로 돌아온 것 뿐 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하는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실연당한 이의 어둠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였다.



그날 이후로 후붕이는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모든 여자들에게 일정한 선을 그었다.


그저 친구.


그 이상의  관계를 노리던 이들은 그 곧은 선에 가로막히곤 이내 포기했다.


후순이의 존재 때문에 참고 있었을 뿐 준수한 외모와 상냥한 성격을 지닌 후붕이에게 호감을 지닌 이들은 많았고, 후순이가 사라지자 그 공백을 노리던 이들 또한 많았지만 후붕이의 단호함에 질린 이들은 대부분 그를 포기했다.


"후붕아! 같이가자!"


단 한명. 후진이를 빼고는.



"그래."


-나 이제 남자친구랑 같이 집 갈꺼니까, 후붕이 넌 먼저 가도 돼.


어차피 혼자인 하굣길에 말동무라도 한명 있는 것이 그에게도 더 좋았으니, 후붕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은 고백하면 받아 줄거야?"


"한동안은 그럴 생각 없다고 이미 말했잖아."


"그래도 괜찮아. 난 절대 포기 안할꺼니까. 네가 받아 줄 때까지 고백할 꺼니까 결국 성공확률은 백퍼센트 아닐까?"


"너 과목 선택 잘못했나보다. 이과가 확률계산을 못하면 어떡해."


"원래 이과는 확통 안해. 나 기백 골랐는데?"


"그게 그 말이 아니잖아."


"헤헤."


실없는 소리를 하며 집으로 향하던 둘의 위로 먹구름이 드리웠다.


"아 시발. 하필 꼭 우산 없을 때 비가 오냐."


"나 우산 갖고 있어.같이 쓰고 가자."


가방에서 주섬주섬 우산을 꺼내는 후진이를 바라보며 후붕이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언제까지고 저 마음을 무시해도 되는걸까?'


한달.


그녀가 후붕이를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사랑을  고백한지도 벌써 한달이 지났다.


이제는 선택을 할 때가 됐다.


더이상 미루면 후진이에게도 민폐를 끼치는 거다. 하지만....


-후붕아!


아직까지 그의 마음속에 남은 한명의 소녀가, 그 선택을 방해하고 있었다.


-툭.투투투두둑.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끝자락이라곤 해도 아직 계절은 가을.


낙엽과 함께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로 하여금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야!김후붕!!"


샛노란 우산과 함께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조그만 얼굴 또한 그를 상념에서 꺼내기에는 충분했고 말이다.


"비 다 맞잖아. 가만히 서서 뭐하는거야.날도 추운데."


"아..."


그제서야 젖은 교복에서 오는 불쾌함이 느껴졌다.


"미안."


"혹시 어디 아파...?"


"아냐.괜찮아."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평소와는 다른 감정이 조금씩 느껴졌다.


"그럼 이제 갈까?"


"응.길가에 너무 오래 서 있었-"


-부우우우웅!!


그런 말을 나누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갑자기 달려오는 자동차에 후붕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촤아아악


"....!?!??"


갑자기 끌어당겨진 몸에 놀라기도 잠시, 후붕이에게 안겼다는 것을 인지한 후진이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후붕이 또한 자동반사로 후진이를 끌어당기고 나서야 자신이 그녀를 안은 꼴이 되었다는 것을,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심장박동을 알아챘다.


품안에서 멍하니 그를 올려다 보는 후진이의 얼굴을 마주하자 후붕이에게 남아있던 주저함이 눈녹듯 사라졌다.


지금이다.


머리속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후붕이는 때를 직감했다.


저번에는 한발 늦었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다시는,마음에 둔 이를 놓치지 않으리라.


"후진아."


"으,응?"


"너, 그 고백 언제까지 할 거야?"


"...네가 받아 줄 때까지."


평소보다 멍한 어투긴 하지만 확고한 답.


후붕이는 그녀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자신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럼 이제 고백하지 마."


".....어?"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할께. 사랑해.후진아. 나랑 사귀어 줄래?"


"....응!!!"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로 범벅이 된 얼굴로, 후진이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

.

.

.

어느새 내리던 비가 눈과 섞여 진눈깨비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젠 진짜 겨울이네...엣취!!"


"더있다간 감기 들 거 같으니까 일단 집가서 옷부터 갈아입자. 빨리!!"


"응.헤헤."


*

"그나저나 요즘 통 후붕이를 못봤네."


갑자기 생각 났다는 듯 후순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남친이 생긴 이후로 둘은 서로에게 선을 그었다.


서로가 괜한 오해를 사지 않게 하기 위한 둘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였다.


그 전에 둘에게 흐르던 미묘한 기류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그렇다고 해서 매일같이 보던 친구를 자주 보지 못하지 후순이도 약간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이정도면 후붕이도 마음 정리가 끝났을 거고, 남친한테는 그냥 남매같은 사이라고 잘 설명하면 되니까.음음. 그런 일 한번으로 10년지기를 잃어버리는건 좀 아니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후순이는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후붕이 얼굴이나 보러 반에 놀러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후붕이가 고백한 날 이후로, 둘은 함께 등교하기 시작했다.


"좋은아침!!"


"후진이 너도 좋은아침."


자연스럽게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후진이를 보며 작은 미소를 흘리던 후붕이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후붕아 안녕? 오랜만이...."


골목길을 돌아 나오며 인사를 건네다 후진이에게 시선이 닿은 후순이가 말꼬리를 흘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했네. 둘이 사귀는거야?"


"응. 오늘부터 2일."


어딘가 자랑스런 표정으로 손가락을 펼쳐 보이는 후진이를 바라보던 후순이가 반박자 늦게 축하를 보냈다.


"좋겠다.축하해 후진아. 내가 오래 봐서 아는데,얘가 진짜 속 깊고 좋은 애거든."


"축하해줘서 고마워. 근데 네 남친은 어디가고 혼자야?"


"그냥,어제 우산 없이 비맞고 가다가 감기가 들어서 오늘은 집에서 쉰데.그럼 난 먼저 가볼게.안녕."


황급히 말을 얼버무리고 발걸음을 돌리는 후순이를 바라보던 후진이가 문득 후붕이의 마이 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후진아?"


"...도둑고양이."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도 이제 가자. 늦겠다."


"프흐.그래.빨리 가자."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볼을 부풀린 후진이의 모습이 다람쥐 같아 귀여워 웃음을 흘린 후붕이도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후붕이는 내꺼야.절대 안넘겨줘.'


'...후붕이한테 여친이 생겼으면 축하해 줘야 하는 일이 맞는데,왜 이렇게 속이 답답하지?'


*


"후붕이가...여친이라...."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 까지도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지 못한 후순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곰곰히 이 이상한 기분의 근원을 좆아 보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분명 후붕이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이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으니 그것과 관련이 있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기분과의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한테, 그것도 10년지기 절친한테 여친이 생겼으면 축하해 줘야 하는 일 일텐데 이런 기분이 드는건 이상하잖아.'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래.나랑 후붕이가 그냥 친구도 아니고 10년을 넘게 같이 다녔는데 이제 서로 연인이 생겨서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주니까 그런거겠지.'


친구보다 가족에 가까울 정도로 오랜 시간 함께해온 친구와 떨어져서 생기는 아쉬움.


그 미묘한 기분을 그렇게 정의한 후순이는 문제가 해결되어 통쾌하다는 듯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우웅


그런지 얼마 되지도 않아 울린 알람소리에 폰을 켠 후순이는 화면에 뜬 알람을 눌러 SNS에 접속했다.


"으음...."


후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와있는 후붕이의 계정.


후순이는 다시금 원인모를 찝찝함을 느끼며 SNS를 둘라보았다.


하굣길, 스터디카페, 영화관,북카페 등등 온갖 곳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뭘 모르네. 후붕이는 영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차라리 그럴 시간에 카페가서 수다 떠는걸 더 좋아해. 커피도 아메리카노보단 카페모카를 더 좋아하고.'


역시 아무리 여친이라고 해도 자신보다 그를 잘 알수는 없다는 기이한 우월감에 휩싸인 후순이가 조소를 흘렸다.


저렇게 자기 하고싶은 것만 하면서 후붕이를 끌고다니면 분명 얼마 안가 헤어지고 말리라.


그때가 되면 위로나 해 줘야 겠다고 생각한 후순이는 한결 가벼진 마음으로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

"후진아."


"...응?"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지 그랬어?"


이빨 자국이 수두룩히 남은 자신의 목과 어깨 부근을 바라보던 후붕이가 말했다.


"그,그런게 아니라...."


안절부절 못하는 후진이의 모습에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린 후붕이가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후진아."


"...응."


" 지금 나한텐 너밖에 없어.앞으로도 그럴거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알고,있었어?"


"그럼 몰랐을 줄 알고?"


등굣길에 후순이를 만난 날 이후로 뭔가 불안해 보이더니, 급기야 하교하는 도중에 자신을 골목길로 끌고가서는 계속 몸에 흔적을 남기려 애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후붕이는 후진이를 감싸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


그렣게 후진이는 한동안 후붕이의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도둑고양이."


너무나 희미한, 그래서 길가의 소음에 묻혀버릴 듯한 목소리가 그녀를 스치고 지나갈 때도.


*


"우리.헤어지자."


"...그래."


이별을 고하는 남자친구의 말에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대답한 후순이가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애초에 둘 사이가 점점 뒤틀리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았으므로, 별 다른 감정은 없었다.


아마, 그 시작은 후붕이의 연애 사실을 후순이가 알고 나서 였을 것이다.


점점 차가워져 가는 후순이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질린 남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별이었다.


"....."


어째서일까.


지금 그녀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후붕아..."


어째서일까.


지금 후붕이한테 연락해서 뭘 하겠다고?


그녀 자신도 알 지 못하는 감정이 그녀에게 후붕이를 찾으라 재촉하고 있었다.


'그래. 나랑 후붕이는 가족이니까.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족이 위로해 주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자신을 합리화 하던 후순이는 이윽고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가족..."


별 다를 것 없는 그 단어 하나가, 오늘따라 다르게 들려왔다.


가족.그녀와 후붕이는 가족이었다.


함께 웃고,함께 눈물흘리며 누구보다 많은 것을 나누는 가족.


항상 곁에 있어주고 힘들때 버팀목이 되어주며,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아..!"


그순간, 퍼즐 조각이 들어맞는 듯한 감각과 함께 복잡했던 후순이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이 멍청이..."


그녀에게 후붕이는 가족이되 가족이 아니었다.


같은 피를 타고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


그녀는 후붕이를 혈육이 아닌 배우자로 여기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분에 넘치는 그의 헌신을 감히 지겹다,질린다 생각했다.


그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벌인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그녀와 그의 관계를 뒤틀었다.


그녀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동안 나타난 도둑고양이가 후붕이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이 아닌 사람이 후붕이에게 사랑을 속삭이고,그의 입술을 탐하고, 그와.....


"우욱."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괜찮아.아직...돌이킬 수 있어."


아직은 기회가 있다.


그 도둑고양이년은 명백히 자신보다 후붕이와 함께 한 세월이 짧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후붕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

-똑똑


"누구세요?"


"나야."


"후순이? 이시간엔 어쩐 일이야? 심부름 하러 온 거면 지금 집에 부모님이 안 계셔서 좀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


"그런건 아니고. 그냥 할 말이 있어서.잠깐만 나와 줄 수 있을까?"


"........."


"잠깐이면 돼. 조금 힘든 일이 있었는데 얘기 들어줄 사람이 너말곤 없어서....안될까?"


".....후우. 잠깐만 기다려,옷만 갈아입고 갈께."


애써 기쁨을 감춘 후순이는 후붕이를 잡아끌어 그들이 어릴 적 함께 놀던 놀이터로 향했다.


"와.여기도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그래서,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시간에 나오자고 한 거야?"


"사실은-"


후순이의 얘기를 경청한 후붕이는 후순이의 말이 끝나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들었겠네."


"...응."


-끼익 끼익


"그나저나 그거 기억나? 너 여기서 그네타고 놀다가 줄 놓쳐서 날아갔던거?"


"아.그랬었지. 그때 거의 놀이터 밖까지 날아갔던 거 같은데."


자연스레 과거의 이야기를 꺼낸 후순이가 둘이 쌓아온 추억을 하나 둘 씩 풀어낸다.


그땐 그랬지.이때는 진짜 재밌었는데. 아.그거는-


얘기를 나누며 어느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후순이는 천천히 후붕이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놀란 후붕이가 손을 빼내려고 하지만 그런 후붕이의 손을 더욱 세게 잡은 후순이가 입을 연다.


"이제와서 정말 이기적인 얘기로 들릴 수도 있는 거 아는데....사실 나 널 좋아하는 거 같아. 이번에 걔랑 헤어지고 나서야 내 마음을 깨달았어."


"......"


"우리 둘보다 서롤 잘 아는 사람도 없잖아. 그러니까 그년 말고 나랑-"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인 후순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던 찰나,


-턱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이 그녀의 손을 쳐냈다.


"그만. 여친 있는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아마 너도 헤어지고 많이 힘들어서 착각한 걸 꺼야. 그러니까-"


"아냐!!! 그런게 아냐!!!"

"...."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른 후순이가 돌아서려던 후붕이를 붙잡는다.


"ㄴ,나랑 너는 10년도 더 넘게 본 사이잖아. 고작 2년도 안 본 그딴 년이 나보다 소중한건 아니지?응?"


"말.똑바로 해. 후진이는 그런 취급 받을 사람 아니야."


"그래봤자 나랑 너 사이에 낀 방해꾼 이잖아!!! 그딴 얄팍한 관계로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으녀는 그년이 나쁜거라고!!!"


"......그래. 네 말대로 너랑 나는 10년지기 친구고, 후진이는 만난지 1년정도 밖에 안되긴 했어."


"그,그래. 그러니까-"


"근데, 만난 시간이 길든 짧든 좋아하는건 좋아하는거잖아."


"......어?"


"난 후진이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후진이 그 자체를 좋아하는거야. 함께 지낸 시간이야 앞으로 차차 쌓아나가면 되는 거니까 문제 될 거 없지."


"그...."


이게,아닌데.


빨리 뭐라도 반박할 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애써 입을 열어 보려지만 움직이지 않는 입은 그저 침음만을 흘릴 뿐 이었다.


"난 이제 들어가볼게.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말 안할 테니까 너도 맘 정리 잘하고."


뒤돌아 멀어져가는 후붕이에게 손을 뻗어보지만, 닿을 리 만무하다.


"아.아아아아..."


그저,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칠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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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소꿉친구 후회물 소재를 보고 뽕이 차올라서 내 기준 후챈 소꿉친구물 GOAT를 오랜만에 읽다가 필 받아서 쓴 글(이름은 말 안해도 알거라 믿음. 중간중간에 오마주를 넣은 부분도 있어서.)


맨날 판타지 같은 걸로 사건 짜맞추고 글을 쓰다보니까 이런 감정선 묘사가 들어가야 하는 글 쓰기가 너무 어려웠음.


이 반편짜리 글쟁이. 앞으로는 더 노력해서 질좋은 글들을 마구 뿌릴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키보드 두들겨 보겠음.


그럼 오늘도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읽는동안 재밌었기를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