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재형은 가볍게 기지개를 켠다. 스케치부터 채색까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단편 치고 스토리 틀도 잘 잡혔다.


  웹툰 작가를 목표로 한 뒤로 이렇게 작업이 빨리, 만족스레 끝났던 적이 있었을까.


  테이블 위에 놓아둔 인스턴트 커피를 마신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은 식은지 오래지만, 어느 때보다도 향긋하기 그지없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온몸 이곳저곳에서 뚜둑, 소리가 난다. 찌뿌듯한 몸을 가볍게 풀어준다. 그리고 커피 옆에 놓아둔 담뱃갑과 라이터를 손에 쥔다.


  베란다로 나가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항상 애를 썩이던 싸구려 일회용 라이터도 유달리 불이 잘 붙는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픽 웃음이 터진다. 입에 담배를 물고 뻑뻑해진 눈을 잠시 감았다 뜬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해가 흐릿하게 잠긴다.


  *


  오늘은 운이 나쁜 편이다.


  민지는 전자담배의 연기를 내뱉으며 생각한다.


  “민지 씨, 거기 진짜 맛있다니까요? 아니면……. 아! 그래, 라멘! 라멘 드실래요? 제가 또 맛있는 집…….”

  “아, 그……. 선약이 있어서요. 죄송해요.”


  아하하, 민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꾸벅 숙인다. 최악이다.


  어느 순간부터  회사 옥상에 담배 피러 올 때마다 눈짓으로 인사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예 이렇게 대놓고 치근덕거리기까지 한다. 그의 동료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좀 막아줬으면 좋으련만, 아무도 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정을 보니 다들 그를 응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민지는 대충 인사하고는 서둘러 옥상에서 내려간다. 뒤에서 그들끼리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딱히 신경을 쓰진 않는다.


  라멘, 라멘이라.


  대신 기억에 엉키는 그 단어에 신경이 쓰일 뿐이다.


  *


  재형은 바짝 긴장한다. 국내 제일의 웹툰 회사라 그런지 시설부터 느낌이 다르다.


  눈앞의 그녀는 아이패드로 자신의 작품을 휙휙 넘긴다. 그녀의 요구대로 그리긴 했지만, 저렇게 빠르게 봐도 되나 싶을 정도다.


  식은땀이 등에 맺힌다. 몇십 시간의 결과물이 단 몇 초만에 넘겨지고 있다.


  후회가 된다. 역시 너무 서둘러 작업을 끝냈던 건지도 모른다. 하이라이트 장면에선 역시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구도를 그려야 했나? 선을 좀 더 얇게 처리했어야 했나? 아니면…….


  “좋은데요?”

  “예?”

  “좋다구요. 스토리도 괜찮고, 퀄리티도 좋고. 제가 사실 은근 이게 좋거든요?”


  담당자는 자신의 눈을 손짓하며 어깨를 으쓱여보인다. 재형은 어색하게 웃는다.


  “역시 박 작가님은 잘 하실 거 같아, 느낌이 와. 응. 우리 잘해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허리를 숙였는지 모른다. 심지어 나갈 때마저 뒷걸음질하며 인사를 해대는 통에, 그녀를 웃게까지 했다.


  회사 밖으로 나온 재형은 주먹을 꽉 쥔다. 온몸이 짜릿하다. 자신의 눈앞에 드높이 서있는 이 건물이, 벌써부터 자신의 회사가 된 것마냥 괜히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아직 결정난 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벌써 설레기 시작한 건 어쩔 수가 없다. 벌써 웹툰 작가가 된 것만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순간 머릿속으로 한 사람이 스쳐지나간다. 그 사람 역시 편집자였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살며시 기쁨이 빠져나간다.


  때마침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다. 재형은 미묘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다.


  “응, 윤채야.”


  이내 상쾌한 목소리가 자신을 반긴다. 머릿속에 스치던 사람을 지워내기라도 하듯.


  *


  “민지 씨, 민지 씨, 이거 봐봐.”

  “이게 뭐예요?”

  “요즘 내가 눈 여겨 보는 작가님. 어때, 괜찮지.”


  민지는 옆자리의 그녀에게서 아이패드를 받아들고서 찬찬히 화면을 훑어본다. 굳이 편집자로 종사하는 민지가 아닌 일반인이 보더라도 괜찮을 퀄리티였다. 민지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한다.


  “어디서 찾으셨어요? 좋은데요?”

  “인터넷에서 딱 눈에 보이자말자 바로 메일이랑 DM부터 넣었지. 요즘 이런 인재 어디서 구하기 쉽지 않다?”

  “역시…….”


  민지가 리액션을 건성으로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성격이 무던할 뿐. 상대 역시 그 사실을 안다.


  둘은 관계가 좋은 편이다. 같은 편집자로서도 말이 잘 통했고, 좋아하는 작품 취향마저 비슷했다.


  “뭐라 검색하면 나와요?”

  “브이웹툰 들어가서 박재형이라고 치면 제일 맨 위에 나와.”

  “네?”

  “재미없지? 필명도 안 쓰고 자기 본명 쓰는 사람 오랜만에 봤어.”


  깔깔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뒤로 흩어진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민지는 서둘러 타자를 두드린다. 정말로 그 이름이 뜬다. 그의 아이디를 확인한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오늘은 운이……. 나쁜 걸까?


  *


  하루가 지나도록 계속 신경이 쓰였다. 민지가 아는 그 사람은 낙서하는 걸 유독 좋아했지만, 만화를 그리는 걸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디는 자신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


  민지는 자신의 위에 지친 나머지 풀썩 엎드린 남자를 바라본다. 이 정도면 얼굴도 꽤 잘생겼고, 몸도 좋은 편이다. 잠자리 매너도 있고, 이 정도면 하룻밤 상대로 충분한 사람이다.


  “그냥…….”


  무언가를 말하려던 민지는 입을 다문다. 괜한 이야기다. 어차피 이렇게 헤어질 사람이다.


  “누나, 우리 더 만날래요?”

  “파트너 하자고?”

  “아뇨, 진지하게 만나자는 뜻인데.”


  그러면서 그는 생글생글 웃는다. 민지는 대답하지 않는다.


  평소였다면 고민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담배가 피고 싶다.


  *


  브랜드 카페. 재형은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사귈 때까지만 해도 한 번도 적극적인 적이 없었던 민지가, 몇 년만의 연락으로 갑자기 자신을 불러낼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 회사에서 소식을 들었다면서.


  눈앞의 민지는 전보다 많이 예뻐져 있었다. 머리도 많이 길렀고, 화장도 전보다 더 연해서 보기 좋다. 향수도 바꾼 모양이다.


  “잘 지냈어?”


  민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재형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재형도 마찬가지였다.


  “응, 너도 이직 잘했네.”


  잠시 대화가 끊어진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커피향과 뒤섞여 둘 사이를 메운다. 민지는 가볍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묻는다.


  “……아직도 라멘 좋아해?”

  “그럭저럭.”

  “만화는 언제부터 그렸어?”

  “……군대에서부터.”


  군대……. 기껏 이어지던 대화가, 다시 둘 사이처럼 끊어진다.


  *


  무더운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벤치에 앉은 둘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지독한 더위였다. 구태여 이런 장소로 잡았던 것은, 민지가 원해서였다.


  그리고 바보 같은 재형은 그걸 또 들어줬다.


  민지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상했다. 기분이 이상하리만큼 가라앉는다. 분명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건조한 공기 속, 담배 연기는 더욱 매캐하게 뿜어져 나온다. 재형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상태로 재형은 우묵하게 말한다.


  “……진짜, 후회 안 해?”


  이 사람은 여전히 모든 것이 엉성하고 서투르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될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게 내심 짠하기까지 하다. 민지는 덤덤하게 말한다.


  “안 하도록 노력해볼게.”


  재형이 군대를 간 시간, 민지는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딱히 괴로운 건 아니었지만,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재형을 향한 애정이 식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그와 사귈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머뭇머뭇거리며 고백하던 그가 귀여워서 고백을 받았던 것 뿐이었으니까. 물론, 그런 그에게 애정을 가질 때야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기껏 재형이 휴가를 나와도, 설레진 않았다.


  “다른 남자 만나는 건 절대 아니니까.”


  괜한 말이지만, 민지는 혼자 찔려서 그렇게 말한다. 순진무구한 그라면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재형은 답이 없다. 그의 어깨가 떨린다. 무책임한 자신에게 화를 낼 줄도 몰라서 혼자 부들거리는 것이다. 민지는 타다 만 담배를 지지고는 이내 그를 끌어안아준다.


  그것이 그들의 이별이었다.


  *


  “미안, 담배 좀 피고 올게.”  


  재형은 물끄러미 민지를 바라보며 한 박자 늦게 말한다.


  “나도 가.”

  “……너도 담배 펴?”

  “응.”


  다행히 민지는 언제부터 피웠냐며 굳이 묻진 않는다. 사실 민지와 헤어지면서 피우기 시작했던 것이기 때문에, 물었다면 대답하기 곤란할 뻔했다.


  가게 앞, 재형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민지는 전자담배를 꺼낸다. 민지를 따라 연초를 피우기 시작했던 것인데, 정작 민지는 이제 전자담배를 피우는 모양이다.


  향긋한 포도향까지 나는 연기를 내뿜으며, 민지는 입을 연다.


  “나 진짜로 너 전역할 때까지, 그리고 전역하고 나서도 한동안 아무랑도 안 만났다?”


  그 말을 굳이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당연히 자신에게서 칭찬을 바란 것은 아닐 것이다. 민지의 자조적인 미소에 재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헤어졌지만, 그래도 민지는 연락을 끊진 않았다. 전역할 때까지도.


  “그리고……. 그 뒤로 몇 명 만나도, 별로더라고.”


  포도향이 흩어진다. 동시에 그 빈자리는 자신의 매캐한 향이 자리잡는다. 민지는 멀거니 시선을 두고 있다. 재형은 말없이 담배만 태운다. 심란하다. 민지는 애써 밝은 척 말한다.


  “너무 늦게 알았어.”

  “뭐를?”

  “그냥, 그냥 착한 게 제일 좋은 거더라고. 바보처럼 착한 게.”


  재형은 어색하게 웃는다. 민지 역시 그런 재형의 반응에 머쓱하게 웃는다.


  민지는 예뻤다. 그러나 성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둔하다고 소문난 재형조차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화나 신경질을 곧잘 내는 성격은 아니지만, 너무 무뚝뚝한 게 흠이었다.


  그러나 그런 민지에겐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남들이 뭐라해도, 재형은 그런 그녀가 좋았다. 그래서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재형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다. 기이한 타이밍이다.


  “아, 미안.”

  “받아받아.”


  윤채다. 재형의 표정이 애매해진다. 그 모습에 민지가 넌지시 묻는다.


  “왜, 누군데.”

  “……여자친구.”


  민지는 아, 하는 탄식과 함께 고개를 자그맣게 끄덕이며 생각한다.


  아무래도, 무엇이 중요한지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 같다.


  *


  전화를 끝마친 재형이 돌아온다. 민지는 멍하니 서있다. 재형이 오는 것을 본 민지는 고개를 돌린다. 이윽고 허탈한 웃음과 함께 나지막하게 말한다.


  “역시 너무 늦었나봐.”


  당연하게도 재형은 대답하지 않는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어이없어서, 민지는 웃으며 묻는다.


  “미친년 같다, 그치.”


  재형은 말없이 고개 젓는다. 민지는 차라리 그가 자신을 욕해줬으면 했다. 이기적인 년, 미친년. 그러나 바보처럼 착하기만 한 그는, 그저 무던하게만 있는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민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모습이었다.


  네가 좋은 남자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우습게도 자신은 그 말을 내뱉지도 못한다. 이기적이고 미친년인 자신은, 자존심 때문인지 입을 열 수조차 없다. 입을 열면, 바로 무너질 것 같아서.


  오히려 그렇게 먼저 자신을 위로한 것은 재형이었다. 


  “넌……. 좋은, 좋은 아이였어.”


  말을 더듬는 것마저, 너무나 그답다.


  민지는 전자담배를 내린다. 그리고 다른 손으론 제 입을 틀어막는다.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손등 위로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미안, 미안해…….”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를 안아주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


  오늘은, 지독하게 나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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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없어서 허덕이고 있었는데 지인이 하나 써줬음


허락 맡고 올려봄


같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