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regrets/104672022 (전편링크)


*


"아가씨.잠시만 진정을-"


"집사. 이거 놔."


"아가씨....."


"카일이 돌아왔다잖아. 나 가봐야해."


"지금 가도 접견 요청을 받아줄 리가 없잖습니까. 저희가 공식적으로 에카르트 가에 서한을 보내 놓을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지요."


"왜 안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카일의 약혼녀잖아. 약혼녀니까. 가족이 될 사람이니까.그니까.응."


.....상태가 평소보다 더 심각하군.


공자의 복귀 소식을 들었을 때 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여기서 막아야 한다.'


지금 아가씨가 공작가로 향하면 분명 사고가 터진다.


그건 필시 아가씨에게도, 공자에게도 큰 상처를 입힐 거다.


특히, 저번에 보았던 공자의 상태를 생각해보면 지금 아가씨를 만났다가는 정말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그러니......이번 한번만은 용서해 주시길.


"아가씨. 실례지만 지금 아가씨께선 카일 공자의 약혼녀가 아니십니다."


-움찔


효과가 있다.


"지,집사.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카일의 약혼자가 아니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가주님들이 직접 정한 약혼을 누가 깨기라도 했다고?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지.응. 장난이 과해."


"아가씨가 직접. 당신의 손으로 깨트리셨습니다. 더이상 빛나지 않는 공자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아니야!!!!! 아니라고!!!!"


"......."


"그건,그건 내가.....잘....."


-폭


"흐으..."


발작적으로 고성을 내지르던 아가씨는 이내 기절하듯 쓰러졌다.


어째 전쟁터에서 구르는 것 보다 아가씨 케어가 더 힘든지,원.


"수고가 많네.에반."


"가주님.보고 계셨습니까?"


"그래."


잠시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가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 더 이사벨에게 신경을 썼다면....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맥락 없는 말 이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게 아니란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따져보면 그렇기야 한데,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카일 그 아이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


전장에서 마주쳤던 공자의 모습을 떠올리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평생 칼밥을 먹고 산 무부인 나 조차 섬칫할 만큼의 살기와....텅 빈 눈동자.


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의 것이 아닌듯 한 눈동자.


저런 눈을 한 이들은 최전선의 기사 중에서도 드물었다.


"난...아직도 처음 그 아이와 재회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네. 리암 그 친구를 쏙 빼닮았던 소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검귀 하나가 그 자리에 서있었으니 말이야."


".....거기에 아가씨가 일조하셨다고 생각하셔서 그리 자책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사벨이 그 시발점은 아니었다 한들 쐐기를 박았다는 건 자명하지 않나. 결국 내 책임인게야. 내가 이사벨을 좀 더 잘 가르쳤다면, 잘못된 생각으로 카일을 내치려 했을 때 진작 막았더라면, 아니. 그 아이에게 소가주의 인장을 맡기지만 않았어도..."


"......."


어디서부터 엉켰는지 모를 거대한 실타래.


그 실타래의 한 끝을 내 작은 주인이 잡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파왔다.


'담배가 땡기는 날 이구만...'


전장에서 은퇴하고 나서 끊은지 꽤 됐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한개비 태워야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몽롱한 정신 속에서, 과거의 환상이 물감처럼 퍼져나갔다.


"나와 파혼해줬으면 해.카일."


할수만 있으면, 저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


감히, 감히 카일에게 파혼을 요구하고, 카일이 선물해 준 반지를 내던지고, 감히.....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질렸거든. 더이상 예전처럼 빛나지 않는 너한테."


"......그래.파혼을 받아들일게."


-터벅터벅


문 앞에 선채 몸을 돌린 카일이 미소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행복해야해.이사벨."


저 미소를 잃기 싫다.


걸어나가는 카일을 붙잡고 잘못했다고,자기가 잠깐 어떻게 됐었나 보다고 사과하고 싶다.


파혼같은 얘기는 다신 입에도 담지 않을 테니 자기 곁에만 머물러 달라 말하고 싶다.


..그때의 나는 어쨌더라.


"그래.잘가."


귀찮다는 티를 전신으로 풍기며 대충 손을 내젓고 있었다.


".....씹어먹어도 모자랄 년."


마지막 기회였다.


카일과의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단 말이다.


그런 기회를 고작 저렇게 날려버리다니.


과거에 나는 끔찍하게도 멍청했었다.


...사실. 그러지 않았다면 애초에 카일과의 관계를 손수 망가트리지도 않았겠지만.


-화아악


흩어져버린 물감이 이내 새로운 풍경을 그렸다.


더이상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웠던 과거를.


*

"안녕? 네가 이사벨이야?"


"네.이사벨 유스티아 라고 해요. 소문으로만 듣던 공자님을 직접 만나뵙게 되어-"


"에이. 뭘 친구들 사이에 그런걸 따지고 그래. 말 편하게 해."


"....친구,요?"


"응. 아버지가 자기 제일 친한 친구의 딸이니까 나도 잘 지내라던데?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첫 만남은 별 것 아니었다.


예전부터 막역한 친우였던 에카르트 공작님과 아버지.


그 두분의 관계 덕에 자연스레 우리 둘은 만나는 일이 잦았다.


허약한 체질 탓에 밖으로 나가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던 내게 카일과의 만남은 매번 새로웠고, 매번 즐거웠다.




"카일.어서와. 이번에는 뭐하고 놀까?"


"제도에서 신년맞이 축제가 열린다던데, 구경 가볼래?"

"축제? 하지만..."


"에이. 아저씨도 이제 몸은 다 나았으니까 밖에 돌아다녀도 된다고 하셨잖아? 오히려 너무 집에만 있어서 걱정이라고 하시던데."


"그렇긴 한데..."


카일의 말 대로, 그동안 건강은 많이 호전되어 외출 정도야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한평생 집 안에서만 살았던 내게는 저택 밖으로 나간다는  일 자체가 두려웠다.


모르는 일 투성이일 바깥세상은, 그 자체로 미지의 공포였다.


"에이,그러지 말고.한번만 가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어,어어??"


그렇게 나는 카일의 손에 이끌려 축제가 열리는 광장으로 끌려갔고.....이 뒤는 뻔한 이야기다.


처음으로 마주한 바깥세상의 활기넘치고 생동감 있는 모습에 정신을 못차리던 나와, 그런 나를 데리고 다니며 곳곳에 숨겨진 축제 명소를 소개해 준 카일.


그리고.....


"빨리와!! 좀 있으면 불꽃놀이 시작한데!!


"으,으응."


카일의 재촉을 받으며 어느 종탑 위에 도착했다.


"이사벨."


-피융


"처음 바깥에 나오는거라 무서웠을텐데, 날 믿고 따라와줘서 고마워."


-펑


"어때? 이런것도 괜찮지?"


"......응."


터지는 불꽃 아래의 네가 너무나 밝게 빛나서, 네가 너무나 멋져 보여서, 그만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근


그와 동시에,지금까지는 별 생각 없이 잡고 다니던 손에서 열이 오르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아.그렇구나.


나는 카일을...


-화아악


"아......"


또다시 흩어진다.


내게 웃어주던 카일의 모습도, 사위를 밝히던 불꽃도 전부.


"아아아아....."


한순간에 사라진 광경에 멍하니 손을 뻗고 있자니, 흩어진 물감들이 다시금 모여들었다.


우리의 마지막이 될, 한편의 비극을 그려내기 위해서.



*


"......아."


깜빡 잠이 들었었나.


"기분 한번 거지같네."


얼마전엔 누님이더니, 이번엔 또 이사벨인가.


하나같이 떠올리기 싫은 장면만 꿈에 보여주니 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긴 커녕  정신적으로 더 힘들기만 하다.


-섬칫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려는 찰나,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몸을 굴려 자리를 벗어난 순간,피어오르는 흙먼지와 함께 서있던 땅이 가루로 변한다.


내 회피와 거의 동시에 쏘아진 섬광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다.


"마법사..!!"


그것도 꽤나 실력있는 마법사다.


갑자기 왜 나를 습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위치를 들킨 이상 이대로 도망쳐봤자 움직이는 표적이 될 뿐이다.


잡아야 한다.


-파앙


다시금 한줄기 섬광이 내게 쇄도하는 동시에,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캉!!


쏘아진 섬광을 쳐내고 횡으로 검을 크게 휘두른다.


뻗어나간 검기가 주문이 쏘아진 곳을 향해 날아간다.


-우웅


"......쯧."


막혔다.


주문의 상태를 보고 짐작하긴 했지만, 쉬운 상대는 아니다.


"후우....."


숨을 크게 내쉬고, 검을 고쳐잡았다.


접근은 쏘아진 주문에 견제당하고, 쓸 수 있는 유일한 원거리 공격 수단은 통하지 않는다.


뭐 시간을 들여서 어거지로 뚫으려면 뚫을수야 있기는 한데 전투를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았다.


요 며칠 사이의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심적인 여유가 부족했다.


그냥 눈 앞의 일은 빨리 치워버리고 다시 걷고 싶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무아(無我) 의 상태가 절실했다.


-키이잉


잡생각을 지우고, 검명을 울리는 검을 쥔 체 상단세를 취했다.


적도 내 기운을 감지했는지, 대규모의 주문이 짜올려지는 낌새가 보였다.


'완성하기 전에 끝낸다.'


곧게 들어올린 검에 검기가 피어오르고, 점점 그 밀도를 높혀가던 검기가 임계점에 달한 채로 불안하게 요동쳤다.


-쿠우우웅


휘두르는 것은 대지요, 베는것은 하늘이라.


에카르트류 제 7식 참천.


불완전 하게나마 재현된 지고의 검격이 적을 향해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초식을 휘두름과 동시에 완성된 주문이 쏘아진 검격과 격돌했다.


"늦었.......어라?"


주문의 완성 전에 끝내려던 생각이 틀어져 혀를 차기도 잠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길.


올곧게 뻗어나간 하나의 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가시덩쿨을 비롯한 온갖 장애물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험한 길 위에 새겨진 발자국.


홀린듯 다가가 그것을 관찰한다.


보폭은 좁다.


달려나간 것이 아닌,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나아갔다는 얘기다.


발자취를 따라 길을 걷는다.


중간중간 보이는 기억들은....꽤 쓰라리다.


내것이 아니지만, 내 기억을 자극할 만큼 유사한 장면들이 계속해서 펼쳐졌으므로.


그리고 한참을 걸은 끝에 발견한 거대한 벽과 그 위에 새겨진 수많은 상흔들.


.....나와 같다.


이 길은 아마 저 마법사가 걸어온 길 이겠지.


금새 눈앞의 광경은 사라지고, 어느새 저 멀리 숨어있던 마법사는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나이는 얼추 나와 비슷해 보이는 백발의 여인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자줏빛 눈에 동질감,연민,슬픔,반가움 등 여러 감정이 스치고 지나간다.


아마 나도 똑같은 상태겠지.


"...너.이름은?"


"카일.그쪽은요?"


"아이네."


"반가워요.아이네씨."


"나도 만나서 반가워."


방금 전까지 서로 죽이려 들던 사람들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따스한 인사가 오고간다.


"....힘들었지?"


맥락없이 치고 들어온 말이지만, 이해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힘들었죠. 포기하고 싶기도 했고,두렵기도 했고...."


"그냥 조용히 있을걸 왜 뛰쳐나왔나 싶고, 주어진 삶에 순응하면 되는 걸 몸 비틀어가며 저항하다가 이 꼴 난거 보면 약간 후회되기도 하고..."


"그렇죠. 역시 잘 아시네요."


"나도 너랑 동류니까."


"네. 꽤....신나네요.말이 통하는 사람은 오랜만이라."


"나도 그래."

.

.

.

.

오랜만에 만난 대화 상대에 서로 신이 나 떠들다 보니,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타닥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어 아이네에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아까 저는 왜 공격하신거에요? 저정도 되니까 피했지 아니었음 첫번째 걸로 다 죽었을 건데."


"마물인줄 알고 공격했어."


"예? 제가 무슨 마물......처럼 보이긴 하네요."


오랜 시간 관리를 안한 탓에 헤진 망토와 피가 스며들어 검붉어진 갑옷.


거기에 요 며칠 잠을 못자서 안광도 흉흉했으니...충분히 오해할 만 하다 싶었다.


"프흐흐."


그런 내 모습이 유머 코드에 맞았는지 웃음을 흘린 아이네가 손을 휘젓자 백색의 빛무리가 튀어나와 내 몸을 감쌌고, 이내 갑옷과 망토가 깔끔해졌다.


"오.감사합니다. 역시 마법은 편리하네요."


"별 거 아냐. 그런데...같이 다니는 일행은 있어?"


"아뇨. 아까 그 꼴로 전선만 골라서 돌아다녔는데 같이 여행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


"그럼 나랑 같이 다닐래? 나도 나름 실력에 자신 있는데. 우리 둘 조합도 꽤 잘 맞고."


"흐음...."


확실히, 받아들여서 나쁠 거 없는 제안이긴 했다.


뛰어난 후위의 존재는 전투 효율을 훨씬 높혀주고, 그 후위가 마법사라면 증가 폭은 배가 되는 법이니까.


게다가 딱히 배신할 걱정 같은것도 없었다.


이미 서로가 걸어온 길을, 서로의 인생을 모두 지켜본 둘인데, 어떻게 상대를 속이겠는가.


무엇보다....아이네와 함께 있으면 편안했다.


긴장으로 조여졌던 마음이 좀 편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저야 환영이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아이네씨."


"그냥 아이네라고 편하게 불러."


"그럼 그럴까요? 아이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나도.카일."

.

.

.

.

다음날,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걸었다.


내 보폭에 맞춰 함꼐 걸어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퍽 즐거웠다.





-

.......나도 모르겠다.잠은 죽어서 자면 되는거지.


후회 클라이맥스 직전에 끊어서 후회 농도가 좀 아쉽긴 한데, 다음편에 카일 누나 후회 클라이맥스랑 같이 쓸라고 원기옥 모은거라 양해좀...


그리고 약혼녀 이름을 라니아에서 이사벨로 수정함. 별 이유는 없고 그냥 어감이 안좋아서.


이번화는 후진이 등장+소소한 배경 위주라서 좀 아쉬운 부분이 없잖아 있는데...다음편에 깔끔하게 후회 Max 찍고 2화 내로 마무리 하겠음.


항상 모자란 글 읽어줘서 고마워.





+TMI 몇개(무시해도 됨)


-카일의 원래 성격은 아이네랑 있을때 나온 가벼운 모습에 더 가까움


-이 소설은 회귀장르보고 감동을 받아서 쓰기 시작한 거임


-등장인물 나이


린(카일 누나) :29


카일:24


이사벨:24


아이네: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