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세계는 상냥하지 않다(상)


제가 그와 만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가족이랑 함께 친척 집에서 차를 타고 귀가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당신안 피곤해요?”

   

으음약간 졸리긴 한데아직 괜찮아.”

   

어떻게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저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저는 꼬박꼬박 고개를 흔들고 있는 상황이었고,

아직 3살 된 동생은 이미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끼이익-, !

   

그랬던 제가 잠을 깬 이유는

갑자기 느껴진 커다란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본 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무들과

눈앞에 또렷하게 보인 7시 48분이라는 시각.

그리고 뒤집혀 아래쪽에 놓인 밤하늘뿐입니다.

   

다음에 정신이 들었을 때제가 느낀 것은

극심한 가슴의 통증이었습니다.

눈앞에 보인 것은 여러 명의 구조원 아저씨들,

그리고 한 명의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은 일어난 제 얼굴을 보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다른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나보니 저는 병원에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께서

고라니를 피하려다가 그만 사고를 내신 듯 했습니다.

   

다행히 한 소년의 장난전화로 인해서 목숨은 살았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가족 전부가 큰일 날 뻔 했다면서

하늘에 감사하라고 간호사분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난 뒤에도 막막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장 부모님부터가 오랫동안 입원해 계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마침나눔회라는 재단에서 우리의 사정을 듣고,

생활비를 지원해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덕에 우리들은 큰 탈 없이 사고에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병이 어느 정도 낫자,

우리들은 우리를 위해서 신고를 해 준 그 소년을 수소문했습니다.

하지만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그 근처에는 사람사는 집이 없고,

소년도 장난전화 한 게 들키면 부모님께서 혼내실 거라며

신원정보를 밝히지 않은 채 돌아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소년을 만나는 건 물거품이 된 일인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학생이 된 저는반 친구들을 둘러보던 도중 숨이 멎을 뻔 했습니다.

저를 구해주었던 소년이 뚱한 표정으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저는 첫 번째 수업이 마치자마자,

바로 소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저번에는 고마웠어!”

   

그러자 소년은 짚이는 게 없다는 듯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무심하게 대답했습니다.

   

별로 감사인사 받을 만한 일을 한 건 없는데.”

   

아니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아마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기억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는 매일매일이 그런 삶이었으니까요.

   

저번에 교통사고 났을 때 도와주지 않았어?”

   

그 말에 소년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작게 라고 중얼거렸지만,

순식간에 표정을 돌리고는 대답했습니다.

   

“...사람 잘못 봤어.”

   

그래그래도 고마워.”

   

저는 꾸벅 인사를 하고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옆을 슬쩍 보니 소년의 표정은 매우 곤란해 보였습니다.

아니지금 생각해보면 착잡한 표정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 소년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의 학교생활은 평범했습니다.

눈에 띄지 않고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평범하게 하교를 하던 도중,

소년이 평소 귀가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왠지 호기심이 생긴 저는한번 소년을 따라 가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멀리서 따라갔을까요?

멀쩡하게 터벅터벅 코너를 돌아 들어갔던 소년이,

갑자기 접질리기라도 했는지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뭐야따라온 거야?”

   

아니잠깐 산책 나온 거야근데어디 다쳤어?”

   

“...신경 꺼.”

   

그리고는 최대한 멀쩡하게 걸어가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았습니다.

소년이 뛰어가던 아이 한명이 넘어지는 걸 붙잡은 뒤에,

기세를 죽이지 못해서 발이 접질린 광경을요.

   

기다려한 번 괜찮은지 확인해보게.”

   

괜찮아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나서려는 소년을 두고,

저는 접질린 다리를 살며시 찼습니다.

   

아얏뭐 하는 거야!”

   

안 멀쩡하잖아보여줘 봐.”

   

저는 소년을 강제로 앉힌 채 소년의 다리를 확인했습니다.

이미 접질린 곳은 부어올라서 치료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병원 가자한동안 제대로 못 걸을 것 같은데부축해줄게.”

   

필요 없다니까.”

   

저는 소년의 말을 무시한 채소년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별다른 치료는 하지 않았습니다그냥 냉찜질을 한동안 했습니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고 의사가 이야기했습니다.

병원을 나오면서저는 핸드폰을 들고 둘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치즈~”

   

찰칵.

   

“...찍은 거야?”

   

퇴원기념 사진 한 컷.”

   

애초에 입원조차 안 했어지워.”

   

싫어!”

   

애냐빨리 지워초상권 침해야.”

   

그러면 지우는 대신네가 우리 가족 구해줬다고 부모님한테 이야기한다?”

   

“...”

   

세상에 이런 협박이 어디 있을까요.

그래도 그 시절의 제가 그렇게 해서라도 사진을 남겨둔 건

지금 와서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 이후로저는 그 소년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쫒아다니기도 하고,

학교를 안 나올 때면 병문안을 가기도 했습니다.

   

매번 볼 때 다치든안 볼 때 다치든,

다쳐서 올 때마다 항상 상비하고 있는 구급상자로

간단한 상처는 치료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상처가 점점 많아져갔기에

제가 치료해주는 일은 자주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머왔구나걔는 방에서 또 쉬고 있어.”

   

또 어디가 아프나요?”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다고 하지 뭐니조그만 애가 뭘 저리 많이 다치는지.”

   

이제는 부모님하고도 서로 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가족을 구해주었다는 건 아직 둘만의 비밀입니다.

부모님은 그때 의식을 잃고 있어서 얼굴을 모르고 있으니까요.

   

나 왔어~. 어때병문안 와 주니까 한결 낫지?”

   

“...머리 아파지니까 환자 방에서 떠들지 마.”

   

하지만 넌 항상 환자잖아그럼 언제 떠들어야 해?”

   

그니깐 내 앞에서는 떠들지 마.”

   

... 싫어!”

   

크기도 조그만한게... 애냐.”

   

놀리지 말라고 했잖아!”

   

그럼 조용히 하든가.”

   

싫습니다마음껏 놀다 갈 겁니다~”

   

“...마음대로 해.”

   

좋아다 나으면 같이 웃는 얼굴로 사진 찍는 거다?”

   

귀찮으니 조용히 좀 있어.”

   

또 말 돌린다~”

   

그렇게 말하고 소년은 어느새 평온한 얼굴로 잠에 듭니다.

잘 때 만큼은 천사 같은데.

아뇨원래 마음은 항상 천사 같았으니까요.

   

한동안 소년을 관찰하면서 안 사실이 있습니다.

소년이 다칠 때는누군가의 불행을 막을 때입니다.

아마 타인이 당할 불행을 자신이 받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어디를 가든지 귀신같이 불행을 만납니다.

아마 무시하면 그는 멀쩡하게 지나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중 3때 되던 해.

저는 그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좋아합니다사귀어주세요!”

   

“...?”

   

그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했는지,

평소와는 달리 매우 허둥지둥했습니다.

   

뭐야빨리 대답 안 해줘?”

   

“...안 돼.”

   

안 돼?”

   

정확히는 ...싫어.”

   

또 왜좀 사귀어주면 어디 덧나?”

   

“...그거 고백하는 사람의 태도 맞아?”

   

이미 차였는데 상관없잖아다음에 또 고백할 테니까~”

   

너는... 에휴...”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돌아섰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등 뒤만큼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은 없을 겁니다.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우리는 고등학교에 갔고,

그는 훨씬 더 많은 상처를 입고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은 오토바이 사고를 막다가,

크게 다쳐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다쳐서 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구원받은 우리 가족이었기에,

더더욱 그런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그러면 우리 가족을 구했을 때는 왜 다치지 않았던 걸까?’

   

만약 이때 생각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다른 결말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그래도 결말은 변함없을 것 같아요.

   

이 생각을 두 번째로 하게 된 건고 2때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여느 때처럼붕대를 감싼 채로 입원실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그 때 우리 가족을 구해주었던 거 있잖아.”

   

또 그 소리야그거 나 아니라니까.”

   

그 때정말 장난전화였어?”

   

병실 안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저는 여전히 느긋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나무에서 지저귀는 새들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실수였어.”

   

작게 들린 그의 목소리.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때의 저는

그의 목소리를 온전히 듣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그니까잘못 누른 번호였다고길을 잃어서 경찰서에 전화하려 했는데당황해서 잘못 누른 거였어.”

   

전화만 걸면 구급차가 오는 거야?”

   

“...살려달라고 외쳤어너무 무서웠거든됐지이제 그만 물어봐쪽팔린 기억이니까.”

   

저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참 미묘한 기분이었습니다.

드디어 시원스레 우리를 위해서 전화를 걸어주었다고 인정한 것은 기뻤지만,

그걸 부끄러운 기억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좀 슬픈 기분이었습니다.

   

이때쯤 이상함을 느꼈더라면.

그가 남을 구하는 일을 한 번도 부끄럽게 생각했던 적이 없다는 걸 그때 생각했더라면.

무서워서 전화했다고 하기에는,

나를 보고 오히려 안심한 표정을 지었던 어렸을 적 그의 모습을 떠올렸더라면.

   

...과거에 만약은 없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이 생각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던 건,

고등학교 3학년 졸업 직전의 날이었습니다.

   

몸이 성할 날이 없었던 그였지만,

다행히 그날만큼은 크게 다친 부분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습니다.

   

어차피 마지막 날이고,

이미 성인도 되었기 때문에,

저는 그를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술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는 별로 술을 마셔보고 싶지는 않다고 했지만,

평생에 있어서 몇 번은 마시게 될 테니까

지금 한 번 정도 마셔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니 조용히 따라왔습니다.

   

흑심이 없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기정사실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기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으응그런 거 없는데...?”

   

독한 술을 여러 잔 마셔서인지그는 많이 취한 듯 했습니다.

그럼에도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또렷한 정신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럼 이야기해 줘어떻게 그렇게 사고를 미리 알고 다쳐서 오는 거야?”

   

으응말 안 해줬나-?”

   

.”

   

사고가 보여이유도원리도조건도빈도도 아무것도 모르겠지만장소와 시간만큼은 문득 생각이 나한정적인 미래예지일지도...?”

   

?”

   

그의 말을 들은 저는한편으로는 허무맹랑한 소리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그래서 사고를 그렇게 자주 만날 수 있었다고 납득을 했습니다.

   

잠깐만이쪽으로 좀 더 와.”

   

잠깐갑자기 말이야물론 난 좋긴 하지만...”

   

시끄럽고빨리 와!”

   

그는 홱 저를 자기 옆으로 잡아끌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책상 다리 하나가 비틀리면서

방금 전까지 제가 앉아 있던 장소로 술이 쏟아졌습니다.

   

“...방금 그게 예지야?”

   

방금 내가 뭘 했었나-?”

   

아무래도 그는 취한 탓인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 듯 했습니다.

하지만적어도 그 광경은 제가 그의 말을 믿기에는

너무도 충분한 증거였습니다.

   

그리고동시에 하나의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설마 그때 장난전화라고 했던 것도 사실...”

   

그 말을 들은 그는갑자기 표정이 싹 바뀌었습니다.

지금껏 평온하던 표정에서갑자기 어두운 표정으로요.

그리고는 저를 보면서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그건내가 미안했어...”

   

“...?”

   

진작에 끝났어야 하는 건데... 내가 그때 머뭇거려서... 곧 끝날 거야...”

   

잠깐만그게 무슨 소리야?”

   

“...”

   

그는 취한 탓인지그런 알쏭달쏭한 말만 남기고 잠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졸업식을 위해 학교에 등교하면서 그 이야기를 물어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일축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졸업식이 마쳤습니다.

   

오늘 졸업 축하는 우리 집에서 하자.”

   

뭐야갑자기또 무슨 바람이라도 분 거야?”

   

한 번씩은 이래도 좋을 것 같아서난 음식 좀 사서 들어갈게먼저 가서 상 좀 차려줄래?”

   

그래놓고 또 다쳐서 오는 거 아니야?”

   

아냐오늘은 다쳐서 가는 일은 절대 없어약속할 수 있어.”

   

그럼약속해 줘.”

   

기어오른다약속손가락도 걸었다이제 됐지?”

   

뭐야오늘은 꽤 상냥한데내 남자친구 할래?”

   

헛소리 말고들어가서 상이나 차리고 있어.”

   

이 때 저는 킥킥 웃으면서 

그저 오늘은 예지가 보이지 않았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느긋하게 그의 집에 가서방에서 상을 차리는 걸 마쳤을 때였습니다.

   

상은 다 차렸는데얘는 왜 이렇게 안 와... 이틈에 슬쩍 취향 조사라도 해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전,

침대 밑이나 책장 뒤의 숨겨진 공간,

그 외에 이것저것 주워들었던 비밀 공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온 건낡은 노트 한 권 뿐이었습니다.

   

뭐야이 노트는글씨체는 익숙한데...”

   

그가 직접 쓴 글씨로 쓰인 글.

어렸을 때부터 써왔는지,

삐뚤빼뚤한 글씨부터 정자가 되기까지의 변천이,

그 노트 안에는 확연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하지만저는 그런 글씨체의 변화조차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그 노트는 그가 지금껏 겪어왔던

모든 사고에 대해 기록한 노트였으니까요.

   

[xx년 x월 x

사고내용오후 4시 28분 14아이가 넘어져서 인대가 늘어날 것.

결과아이를 받아들이다 다리를 접질림병원에서 치료받음 – 성공.

   

yy년 y월 y

사고내용오후 2시 32분 44아주머니가 돌부리에 헛디뎌 혹이 날 것.

결과아주머니를 지지하다 팔이 빠짐스스로 맞춰 넣음 – 성공.

   

zz년 z월 z

사고내용오전 11시 51분 23자전거 타던 사람의 자전거가 박살남.

결과자전거와 부딪혀 타박상이 생김자전거는 멀쩡함 – 성공.]

   

노트에는 빼곡한 성공사례들과 함께,

몸의 가치는 생각보다 높게 쳐주는 듯골절 하나당 천만원 정도

불행의 사실을 아는 사람이 상대방의 불행을 대신하면불행은 지불됨(가설)’

과 같이그가 생각한 내용들이 추가적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을 살펴보아도성공이라는 글자밖에는 보이지 않는 노트.

저는 문득, ‘혹시 실패한 적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처음부터 차근히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글을 쓸 적부터는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의 체질에 대해 이해했던 덕인지,

한동안 살펴보아도 실패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시간낭비일까 해서 그만 노트를 접으려는 찰나,

갑자기 제 눈에 실패라는 단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00년 0월 0

사고내용오후 7시 48분 2일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함.

부모는 중상큰 아이는 사망작은아이는 무사.

결과: 119에 신고함부모는 중상큰 아이는 가까스로 생존작은 아이는 무사 – 실패.

대신 죽는 건 무서웠다.’ ‘중태는 죽음을 늦추는 것 같다. 132p.’]

   

저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 글을 되뇌었습니다.

과거 입원실에서 나눴던 그 대화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았습니다.

왜 실수라고 했었는지왜 처음 봤을 때 저를 피하려고 했는지,

왜 저한테 미안하다고 했는지하나씩 퍼즐이 맞춰져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황급히 노트에 적힌 대로 132p.를 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aa년 a월 a

사고내용오전 7시 33분 12등교하던 소녀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사망.

결과소녀는 평소와 다른 길로 가도록 유도. 2주간 휠체어 신세 – 실패.

소녀와는 친구가 되었다.’ ‘죽음이 별로 멀어지지 않았다.’ ‘149p.’]

   

[bb년 b월 b

사고내용오후 3시 22분 16하교하던 소녀가 복권 당첨자를 노린 강도의 흉기 난동에 휘말려 사망.

결과소녀에게 청소를 떠넘기고 도주배 쪽이 심하게 찢어지기는 했으나생명에는 지장 없음 – 실패

소녀가 병문안을 와 주었다.’ ‘죽음이 조금 더 멀어졌다’ ‘복권 당첨 번호는 나눔회에 보냄’ ‘169p.’]

   

[cc년 c월 c

사고내용오전 10시 26분 34쇼핑을 나간 소녀가 5층 높이의 난간에서 사람에게 밀려 떨어져서 즉사

결과소녀와 함께 쇼핑을 나감전신골절을 당하기는 했으나 죽지는 않음 – 실패.

소녀에게 고백을 받았으나 승낙하지 못함.’ ‘죽음이 좀처럼 멀어지지 않는다.’ ‘소녀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 ‘190p.’]

   

...

   

저는 점점 다급해지는 마음으로사고 내용을 거의 읽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빠르게 다음 내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고 주기는 점점 짧아져갔고내용도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제 손이 멈춘 건하나의 사고내용 앞이었습니다.

   

[dd년 d월 d

사고내용오후 5시 2분 3소녀가 길을 가던 중 음주운전트럭에게 부딪힌 채로 10미터가량을 밀려나감과다출혈로 사망.

결과함께 하교하던 중소녀를 편의점에 잠시 보냄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함 – 실패

소녀는 꼬박꼬박 병문안을 와 주었다.’ ‘이번 퇴원 사진은 웃으면서 찍어주기’ ‘죽음이 더 이상 멀어지지 않는다느낌상 이번이 마지막’ ‘이제는 대신할 수 있다.’ ‘204p.’

   

결론타인의 불행을 대신하기 위해서는진정으로 타인의 불행을 짊어지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함행여 조금이라도 무서워하거나 머뭇거리면 일부만 옮겨가고불행은 계속됨.

-나는 소녀가 있어서 내 삶이 매우 행복했다.

]

   

저는 차마 다음 내용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보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저는 결국 204페이지를 펼쳤습니다.

   

[ee년 e월 e

사고내용오후 2시 13분 44소녀는 근처 음식점에서 졸업파티를 즐긴 뒤 ㅇㅇ교차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여 즉사

결과소녀를 집으로 보낼 예정더 이상 노트에 아무 말도 적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녀가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사랑했었다미련은 없다.’]

   

어느새 제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저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시계를 보았습니다.

   

2시 4.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저는 그저 교차로를 향해 뛰쳐나갔습니다.

신발을 신기는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저 제 남은 기억에는

달려오는 차 앞에서 그를 밀쳐 쓰러뜨렸던 기억뿐입니다.

   

정신을 잃어가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무인도같은... 전라도... 해변...’ 이라는 말을 듣고는

저도 곧바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다음에 정신을 차렸을 때,

저는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습니다.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간호사의 말을 거의 무시하시다시피 하면서,

저는 급하게 그의 병실부터 찾았습니다.

   

다행이도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이 붕대에 감겨 있고의식도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안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노트에 적힌 대로라면분명 우리 둘 중 한명은 이미 죽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둘 다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노트를 꼼꼼히 읽어보면서 이유를 찾던 도중,

갑자기 졸업 전날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때분명히 그는 제가 술에 젖지 않도록 도와주었음에도,

어떠한 불행도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와 지금서로 비교해 보았을 때,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에서는,

다시 말하자면 불행을 대납했다는 생각이 없는 사고에서는

그 영향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 알고 찾아온 거니?”

   

아주머니벌써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우리 아이니까... 그렇게까지 심하다는 건 몰랐지만...”

   

아무래도 그는 우리 가족에 관련된 사고내용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세상 어느 자식이 부모한테 죽으러 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기억이 없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거죠?”

   

저는 아주머니에게 조용히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제 말에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했습니다.

이윽고아주머니가 말을 꺼냈습니다.

   

“‘나도그 사람도 불행하지 않는다면그 불행은 어디로 가나요?’”

   

?”

   

그 아이가 옛날에 입버릇처럼 묻던 말이야나중에 물어봐도, ‘그러면 처음부터 불행만 피할 수 있게 해야지누군가 당하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매번 말도 안 듣고 나갔어.”

   

둘 다 안전한 장소로 가면 되지 않나요?”

   

나도 그러면 될 줄 알았는데... 웬걸어떻게든 한 명은 다치더라니까... 하루는 수도가 망가져서 내가 다 젖을 거라고 한 말을 듣고 수도를 고쳤는데그 애가 아빠는요?’라고 묻더라고그 날 저녁 애아빠가 비에 젖어서 온 모습을 보고그제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으니까...”

   

저는 묵묵히 그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진짜 그렇게 된다면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어떻게든 미룰 방법은 없을까,

저는 노트 내용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리고노트 안에서 하나의 문장을 찾아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은 불행이 유보됨다만 예지가 반복될수록 하나씩 윤곽이 잡히고어느 날 사건이 생각나는 순간 그 즉시 불행이 시작됨.’

   

그날부터 저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장소.

전라도의 어느 무인도같은 해변.

장소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둘째로는기억 상실의 부작용이 있다는 몇몇 수면제를 상비했습니다.

그 외에도 거기서 생활할 물품들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족과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큰 반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그의 가족과도 함께 모여서 이야기가 될 정도로

무거운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죄송하지만... 혹시 우리 애를 꼬득이신 건아니죠?”

   

저는 물어본 말에만 대답했어요물론 저도 어머니로써 아이가 살기를 바랍니다하지만그렇다고 아이의 뜻을 꺾으면서까지 살리고 싶지는 않아요자신이 선택한 길이니까요사실은 이 이야기도 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뇨아주머니저는 아주머니께서 모르셨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거예요이제 필요한 물건들만 사면 되는데...”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한 애가 무슨 그런 큰돈이 있다고... 저분들도 저렇게 이야기하시고포기하자?”

   

아니요엄마어차피 걔가 일어나는 순간 어차피 누군가는 죽어요그렇다고 걔를 죽일 수는 없잖아요!”

   

“...”

   

부모님은 침묵에 빠졌습니다.

믿기 힘든 내용에충격적인 딸의 말까지 더해지니

더더욱 판단할 수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확고했습니다.

   

아무튼 전 어떻게든 해결해 볼 거예요혼자서 알바를 뛰든재단에 연락을 하든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그렇게 큰돈을 지원해주는 재단이 어디있다고...”

   

왜요우리 다쳤을 때 지원해준 나눔회도 있고찾아보면 얼마나 많은데요!”

   

거긴 뭐 땅 파서 지원해주는 줄 아니?”

   

하아... 잠깐만 진정하시죠.”

   

우리 모녀의 말다툼이 격해지려는 찰나,

그의 아버지께서 한숨을 내쉬면서 우리의 말다툼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굉장히 괴로운 표정으로 한 마디 말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나눔회 말입니다... 아마 지원을 해 줄 겁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게... 그건 우리 아들이 만든 재단이니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 가족 모두는

그 말에 망치를 한 대씩 얻어맞은 듯 했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어릴 적 자주 다쳐서 돌아오는 자신 때문에

행여 부모님에게 부담이 될까 하여,

예지를 통해서 얻게 된 돈을 모아둔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커지고 커져점차 예지로 인해 피해본 사람들을 지원해주고,

결국 일반적인 재단에 이르기까지 성장한 게나눔회라고 합니다.

당연히본래 목적상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후의 대화는 저도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릅니다.

그저 기쁨에 잠겨서 계획을 구상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다만그 이후로 부모님이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것을 보아,

큰 충격이었던 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저는 계획대로,

찾아둔 장소에 집을 짓고 그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꼭 성공해서 돌아오라며 신신당부를 했고,

그의 부모님은 무리하지 말라면서 언제든 포기하고 와도 좋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처음 눈을 뜨고저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

저는 정말로 뛸 듯이 기뻤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고,

그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채 살 수 있었으니까요.

   

제 행복은 반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꿈과 같은 신혼생활이었고믿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웠습니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는반 년이 지난 가운데 시작했습니다.

맑은 하늘을 보면서비가 올 거라고 이야기하는 남편.

처음에는 빈말인 줄 알았으나다음날 정말로 비가 왔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다행히비가 옴으로써 불행해진 사람은,

빨래를 다시 해야 하는 저 뿐이었습니다.

아직 괜찮습니다아직 술을 흘린 것도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예지 능력이 돌아왔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을 다독이면서 지냈습니다.

   

9개월이 지난 때,

남편은 빨래를 계속 다시 하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어떻게든 비 오는 날씨를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너무도 고마운 일이었지만한편으로는 매우 슬펐습니다.

   

정답률이 올라갈수록남편의 예지가 점점 돌아오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언젠가는... 유보된 우리들의 운명을 다시 예지할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남편은 도시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마음은 압니다당연히 편한 곳에서 저랑 함께 살고 싶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사소한 것 하나로 기억이 돌아온다면요?

그건그 누구에게도 행복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기어이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남편은 쓰러지는 옷장에 깔릴 뻔한 절,

몸을 날려서 지켜주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어쩌면어쩌면 말입니다.

결국 남편은 이번에도 제가 모르는 사이에,

저를 구하겠다고 또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그것만큼은 싫었습니다.

   

저는 하루의 숙고 끝에그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예지는 이전과 같은 빈도로 돌아왔고,

어느새 제가 만들어놓은 평온은 이미 금이 갈 대로 가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이렇게남편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상냥하고그렇게 남을 위해 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된 행복을 느껴본 적 없었던 남편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떠나기 직전에일주일동안은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도이 행복한 기억을 발판삼아더 좋은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돌아오면 꼭 나한테 벌 받아야 해!’

   

네네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는 과연 제가 내린 마지막 벌을 달게 받아 줄까요?

   

   

잘 가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와야 해.’

   

과연 그는제 유언대로 천천히 삶의 길을 걸으며 올까요?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와의 추억을 이렇게 회상해 보니,

역시 제 삶은 즐거웠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인도같은... 전라도... 해변...’

   

어째서 그는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

그런 말을 남겼던 걸까요.

...슬프게도그의 예지는 빗나가는 일이 없습니다.

   

[현재 거대한 태풍으로 인해남서부 지방에 폭풍해일이 발생할 예정입니다해변에 계신 모든 여러분들은 신속히 고지대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반복합니다-]

   

쓸데없이 고생하지 말고진작 내버려두지 그랬어그래도... 나한테 이런 즐거운 기억을 남겨줘서 고마워.”

   

저는 마지막으로 땅속 깊숙이 묻은 기둥에,

비닐로 감싼 편지를 묶어두었습니다.

약속대로그는 돌아올 테니까요.

   

기다려주지 못해서미안해사랑했어달링.”

   

그 말을 마지막으로제 시야는 어둡게 물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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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침대 위침대 옆에서는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핸드폰핸드폰 좀 주세요.”

   

어머니는 갑자기 깨어난 나한테 놀라면서도

급하게 핸드폰을 주었다.

핸드폰으로 본 뉴스에서는 이미 전라도 남서부 부분이

폭풍해일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올라오고 있었다.

   

설마...”

   

왜 그러니여긴 어떻게 올라온 거고...”

   

미안해요엄마잠깐 나가볼께요!”

   

잠깐만!”

   

나는 황급히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설마설마 아니겠지그럴 리가 없다.

주변에 많은 것들이 들어왔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빨리, 1초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죄송합니다여긴 현재 폭풍경보가 일어난 장소라 출입이 어렵습니다.”

   

알고 있으니까 비켜주세요!”

   

어어잠깐만요!”

   

안전요원들을 뿌리치고 도착한 집.

하지만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다 쓰러진 나무판자 여러 개.

그리고 몇몇 옷가지들과 생활용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기다리고 있겠다고했잖아.”

   

행여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지금도 어디서 장난스럽게 나타나는 것 아닐까.

   

어디 간 거야... 꼭 돌아오라고 했잖아...”

   

아무리 중얼거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스산하게 우는 바람 뿐.

그럼에도나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럴 거였으면... 이럴 거였으면 그냥 팔다리를 잘라서라도 못 가게 막으란 말이야!”

   

울분에 못 이겨서 바다 저 너머를 향해 외쳐보았지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니사실은 알고 있었다.

번지수 틀린 원망의 말이라는 것 정도는.

   

만약내가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만약그저 모르는 척 그 생활을 즐겼더라면

만약내가 아내를 좀 더 믿었더라면

그러면 나와 그녀는 지금도 즐거운 삶을 보낼 수 있었을까.

   

과거에 만약은 없다.

   

멍하니 쓰러진 옷가지와 나무판자들을 풀어해치던 중,

무언가 이상한 게 팔랑거리는 것을 보았다.

   

이건... 봉지...?”

   

꽉 묶인 비닐봉지 안에 있는 종이 한 장.

떨리는 손으로 펼쳐보니아내가 남긴 편지였다.

   

[언제 봐도 귀여운 당신의 아내입니다~

먼저는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그래도 난 달링 덕분에 정말 즐겁게 지낼 수 있었어.

원래는 12년밖에 못 사는 거였는데, 7년 넘게 더 살았잖아?

달링은 최선을 다했어달링과 함께였던 시간은 정말 즐거웠어~

   

그러니까울지 마달링은 내 삶을 아름답게 꾸며주었고,

80살 먹은 할머니들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았어.

나도 달링을 좀 더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달링을 두고 가서 미안해... 

사실은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상냥한 달링이니까 부탁할게

우리 부모님 대신 위로해 주고우리 동생도 챙겨주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우리 남편.

꼭 천천히중간에 있는 꽃밭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천천히 와 주었으면 해.

이제는 어디 도망갈 데도 없잖아더 이상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나 대신 재미있는 거 많이 해보고,

이야깃거리 많이 만들어서 나중에 이야기해 줘.

아무 추억도 없이 오면 나 화낸다?

   

먼저 가게 되어서 미안해지금껏 고생시켜서 미안해.

항상 달링을 사랑했고또 사랑할 거야사랑해.

   

 -달링의 귀여운 아내가-

]

   

편지에는 물방울이 떨어진 듯,

둥그렇게 흐려진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읽는 동안에도흐려지는 부분은 늘어갔다.

   

미안해... 내가 조금만 빨리 각오했어도...”

   

아니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아내가 들었다면 대노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그래도 구하고 싶었다...

   

내가 꼭... 이야깃거리 많이 만들어서... 찾아갈게... 기다리고 있어 줘...”

   

내 울음섞인 목소리는 폭풍에 잠겨서 하늘 높이 사라져 갔다.

그 하늘 한 가운데서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기대돼기대돼천천히 많이 즐기고 와~’

라고 외치는 아내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폭풍이 멎을 때까지나는 조용히 집에 앉아 어여쁜 아내의 모습만을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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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적으니까 생각한대로 끌어가기가 훨씬 힘드네요

다음에는 분량조절 좀 할 생각입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 이따가 5시에 호떡집에 불이 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