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R요소 주의



1편 : https://arca.live/b/regrets/21444488

2편 : https://arca.live/b/regrets/21481458

3편 : https://arca.live/b/regrets/21548711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제대로 팔렸는지 꽤 긴 시간이 흘러 있었다. 신나서 이야기를 떠들다 보니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마저 들었다.

점원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내 입이 열리길 기다리는 모습이었으나 하나 둘 씩 들어서는 손님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아쉽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끝을 맺기로 했다. 얼마나 이 마을에 머물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고 가는데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네? 에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요."


창문 너머로 해가 지는 풍경이 보였다. 

방금까지 얼굴을 괴며 지루했을 지도 모를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그녀는 어느덧 황혼에 접어드는 시각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지금의 점원 생활이 지루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내 이야기가 그녀에게 있어 잠깐의 즐거움이라도 되기를 바랬다.


"여기 맥주 한 통 주쇼!"


자리에 앉은 손님 하나가 팔을 들더니 걸걸한 목소리로 주문을 한다. 슬슬 그녀의 본격적인 업무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내가 여기서 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녀에게 실례가 될 게 분명하니 주머니에서 금화를 하나 꺼내 바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방해되지 않게 슬슬 일어나봐야겠네요."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꽤 까마득했던 추억이 떠올라서 좋았어요."


미소를 지으며 되려 감사를 돌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자, 그럼 밤이 더 깊어질 때까지 어디서 시간을 때워야 할까.


"잠깐만요!"


"음?"


"여기 금화 하나를 잘못 올리셨어요. 은화 하나면 충분한데..."


점원이 허겁지겁 달려와 여관 밖으로 나서려던 내 손목을 붙잡는다. 생각 외로 손이 거칠어서 놀람과 동시에 손길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갑자기 가슴 깊은 곳부터 울컥하고 뭔가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던 그 모습이었다.


"아..."


"손님? 여기 금화..."


"아, 아니...! 아닙니다! 그건 그러니까... 대실 비용까지 합친 거였어요. 거스름돈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요."


갑자기 왜 이러지? 왜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 걸까.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무언가 심경에 변화라도 생겨버린 걸까?

그렇다 치더라도 왜 나를 배신하고, 용병 놈과 미친 듯이 몸을 섞은 그녀가 웃는 모습이 왜 지금 와서 떠오르느냔 말이야. 

그리고 왜... 왜 이렇게 눈이 뜨거운 거지?


"저기, 이 금화면 1달은..."


"제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신 감사라고 생각하시죠. 그럼 좀 있다 돌아오겠습니다."


"앗."


억지로 점원의 손길을 뿌리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도망쳤다. 설마 그녀가 보았을까? 내 뺨을 타고 흐르는 이 뜨거운 눈물을, 추한 얼굴을 보았을까? 보지 못했길 바랬다. 설령 보았더라도 침묵해주길 바랬다. 그래, 단순한 욕심이다. 그녀는 나의 이야기와 소문을 다른 손님들에게 퍼트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 슬펐다.


"헉... 헉... 헉..."


어떻게든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달려왔다. 거리를 비추는 불빛이 최대한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뒤를 돌아보니 반딧불이 같은 수준으로 작은 불꽃들이 보인다. 도망치듯 달려온 이곳엔 냇가의 졸졸 흐르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던 마음이 점점 차분해져 간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어 몸의 긴장을 풀고 마음을 안정 시키니 그나마 사고를 정리할 수 있었다.


"후회... 인가."


19지점으로 향한 것에 대한 후회, 아니 과욕을 부린 자에게 합당한 벌이라고 해야 알맞을까. 

과한 욕심을 부린 탓에 나는 던전에서 정신을 잃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고, 그녀를 지킬 수도 없었다. 그리고 빼앗기기까지 했지. 

어쩌면 내게 걸맞는 결말일지도...


일주일에 걸친 시간 동안 정신을 잃었고, 깨어났을 때는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며 의사도, 그녀도, 심지어 그 용병 놈도 놀라워했다.

온몸이 얼어붙어 있었고, 단순히 몸을 녹인다고 얼어붙은 몸이 멀쩡하게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확실하게 기적이라고 할만 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소식은 우리가 한참을 찾고 있었던 반지가 이미 용병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


아직도 그때 받은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나와 그녀가 그렇게 고생을 했음에도 2만금의 주인공인 반지 녀석은 우리가 아닌 건방지기 짝이 없는 용병의 손으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어떻게든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도박까지 했던 내가 바보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 2만금으로 그녀와 행복하고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보낼 거란 꿈도 이젠 영원히 꿈으로만 남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새끼 좆이 그리 좋더냐. 좆같은 년아..."


나는 혼잣말을 씨부리면서 그 용병 자식의 좆대가리를 하염없이 빨아댔던 그녀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차라리 거부하는 척이라도 했으면 들어가서 말리기라도 했을 건데, 그 놈의 기다란 막대기가 자신을 좆집으로 만드는 순간에도 기쁨에 겨운 신음을 터트리는 게 정녕 내가 기억하던 그녀가 맞는지 의심마저 들게 했으니. 결국 두 짐승들의 교미를 핏발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꼴았지.


생각해보면 대체 언제부터 였을까? 그녀가 용병 놈에게 몸을 판 걸까. 아니면 용병이 그녀를 유혹한 걸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애초부터 눈이 맞았던 사이였나?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나는 애초부터 놀아나고 있었다는 뜻이 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긴 커녕 목이 메이듯 답답하고 아리기만 했다. 그녀를 정말 사랑해서 일까? 아니 그건 아니야.

이미 나에게는 배신 당한 상처를 핥아줄 사람도 의지도 없으니까. 그냥 받아들인 거다.


결국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 뿐인가.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겠지. 이미 그런 광경을 봐버린 이상, 이전 같은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어.

아마 나는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겠지. 그때 19지점에 들어간, 아니 애초에 그런 건수가 있다며 그녀를 끌어들인 것을 후회하면서 말이야.


시간이 흘렀다.

졸졸 흐르는 냇가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래, 자연이 연주하는 자장가다. 기댈 곳 없는 자를 위로하는 노래다.

이 노래를 듣고 팁을 던져주지 않을 수 없겠지. 나를 위해 노래해준 자연에게 그녀에 대한 사랑을 냇물에 함께 흘려 보내기로 했다.


"행복해라 씨발련아..."


텅 빈 것처럼 공허했지만, 쓰라림은 확실히 줄었다. 나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마을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집집마다 걸린 횃불들이 보인다. 밤이 깊어서 그런지, 아니면 작은 마을이라서 그런지 주변이 고요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몇몇 집들 창문으로 노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어서 이 마을이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했다.


마을에서 유일한 대로로 향했다. 천천히 발을 옮기는 와중에 여관 겸 주점의 모습이 어느덧 시야에 담겼다. 그러고 보니 금화 한 닢을 남기고 왔었지.

그냥 아무 생각도 안하고 던져 놓은 금화, 그리고 1달치 대실비라며 실수가 아니냐 묻던 점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공허해진 가슴이 새로이 채워지길 원하는지 그녀에 대한 갈망이 서서히 커져 간다. 생기 넘치는 은발, 호박 같은 눈, 묘하게 색정적인 눈매, 입술.

가느다란 팔, 수줍게 솟은 젖가슴,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허리, 기본에 충실한 골반 등. 내가 지금껏 눈에 담아왔던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당장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이건 욕망인가. 아니면 갈망인가. 텅빈 나에 대한 구제가 되어줄 것인가.


딸랑딸랑 소불알처럼 울리는 저 작은 종을 보라. 손님이 왔다며 그 작은 몸으로 열심히 소리를 내고 있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삐걱대는 나무 발판 소리가 주점에 들어선 손님의 존재를 알려주지만 누구도 봐주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이 시간이면 아직 주점 문 닫을 시간도 아닐 것인데 말이다. 나는 의문이 가득한 시선을 들어 바테이블로 향했다.


"등불..."


작은 등불이었다. 내가 앉았던 의자 위에 작은 등불이 외로이 놓여져 있었다. 불빛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듯이 불안해 보였다.

마치 내 스스로를 마주 보는 느낌, 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하기 그지없는 경험이었다.


"오셨네요."


"..."


점원이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등장은 나를 아무 말도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매우 당황한 나머지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못한 탓이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낮에 보았던 것과 같이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침묵을 유지하며, 나는 미처 넘기지 못해 고여있던 침을 꿀꺽하고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불안해 보이죠?"


의자 위에 놓인 등불을 얘기하는 것을 파악하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묻더니 곧 팔을 들어 등불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걸린 등불의 모습은 그녀의 말대로 아까보다 위태로워 보인다.


"확실히 등불을 저렇게 두면 위험할 건데."


"일부러 딴청 피우는 거에요?"


사실이다. 나는 회피 중이다. 그냥 장난기가 동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더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나의 추한 모습이 드러날까 동문서답을 했다.


"만약 저 등불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이곳 전부 다 탈 걸요."


"그건 당신이 걱정할 부분이 아니죠. 지금은."


"지금은?"


무슨 의미지? 속으로 갸웃 고개를 기울이지만 말에 담긴 진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차차 알게 될 거에요. 그나저나 꽤 많이 털어내신 모습이신데요? 아니, 그냥 허한 느낌? 장어라도 드릴까요?"


"주점에 장어가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주점에 사람들이 전부 어디 갔답니까?"


"그야 집이겠죠 뭘. 오늘 장사는 일찍이 접었거든요."


"네? 점원이 마음대로 열고 닫아도 되는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아무래도 내 생각엔 그녀가 이곳 점장의 따님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게 문을 닫거나 할 수 있겠어? 게다가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 작은 마을에서 가게 닫는 시간을 마음대로 정한다 해서 그다지 나쁠 것도 없어 보이긴 했다.


"점원이자, 점주이자, 건물주인 셈이죠."


"...네?"


갑작스런 진실에 아무런 외마디 말고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 반응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는지 교태 어린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가벼운 걸음걸이로 바테이블의 객석에 앉는다. 헌데 그녀는 나름 우아하게 앉으려 하는 모습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꽤 앙증맞은 구석이 엿보였다. 최근에 저런 앉은 자세를 연습이라도 한 걸까.


"제 옆에 앉아요. 아직 이야기 안 끝났잖아요."


평소에 감성적이면서도 나름 외향적인 모습을 보이던 그녀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무어라 형용하기엔 이런 저런 느낌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나 어떻게든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건 유혹이었다. 그녀가 지금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혀를 살짝 날름거리며 입술을 적시는 그녀의 표정엔 나를 도발하려는 의사가 강하게 서려있었다.

나? 나는... 잘 모르겠다. 밖에서 나의 절반을 떠나보내기도 했고, 지금은 위로 올라가서 잠에 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는 여성의 풍만함이 부족했다. 그래서 일까. 생각보다 자극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지금의 나에게서 그녀가 무언가를 얻어낼 게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아, 뭐해요?! 빨리 앉으라니까!"


"네, 네."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기세에 화들짝 놀라 순식간에 그녀의 옆자리로 엉덩이를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 슬쩍 시선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의 뺨과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왜 그런 건지 고민하기도 전에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친다.


"정말... 짜증나. 당신."


"저, 저기..."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당신이라 칭하는 그녀의 모습은 주점에서 볼 수 있었던 익숙한 그 느낌이다.

그녀는 "괜히 이미지 체인지 했나... 멍청한 사람..." 같은 말을 하며 중얼거리는데 보통 당사자 앞에서 다 들리도록 말하는 건 실례가 아닐까.

설마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해서 저렇게 중얼거리는 건 아니겠지? 왠지 시시껄렁한 고민이 생겨날 무렵,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이야기 하시기 전에, 잠깐 고백해도 돼요?"


"네, 하시죠."


"거짓말 아니니까 진지하게 들어줘요...?"


점원은 무언가 불안한 기색을 띄며 이것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 보인다. 나 같아선 말하기 힘든 내용이면 굳이 말을 안 해줬으면 했지만 내 바램과는 다르게 그녀는 각오를 다진 듯 콧김을 푹 내쉬며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저는..."


"..."


"저는... 마녀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