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물 범주에 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이과에게 문과의 가이드라인을 다 지켜서 창작하라는건 뇌절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모티브로 변형하는 방법 적당히 때려박았으니 적당히 하세오... 이상처럼 자동기술법에 의식의 흐름으로 쓸려다가 한 번 고쳐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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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9시가 넘어간 시점, 조용한 골목길에 택시가 멈춰서더니, 취객 두 명이 내렸다. 갈 지 자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등속원운동을 하는 여자와, 삐딱하지만 그래도 일직선으로 운동하는 여자. 둘다 코는 벌게졌고 단정했을 정장도 이미 풀어헤쳐져 있었다.


"야이 쌍노마! 그렇게 내가 보기 싫었냐? 왜 잘 사귀다가 차는건데."

"야야, 그만해. 너 너무 취했어."

"후지 너 나 막지마. 오늘 끝장 볼거야!"

"후붕이 지금 집에 없는거 알잖아 너도. 불도 꺼져있고."

"아 그래서 어쩔건데"


"오늘은 그만하고 그냥 돌아가자. 너 일요일날 회사 나가봐야 한다며."

"씨바 그래서, 불금에 전 남친 찾아 온 내가 잘못이다 이거야?"

"너무 늦었어. 네가 방해 하기엔 다른사람 입장도 생각해"

"어! 지가 ㅈ도 공부 안할거면서, 그 어렵다던 과탐 2를 선택해놓고선 재수하는 주제에 그런 말이 나오겠어?"

"그래도 마음 다잡고 공부하게 놔주는게 맞아. 오늘은 너무 늦었잖아."

"아 진짜, 꼴받게하네. 야, 너 그냥 혼자 들어가."


머리를 쓸어넘기다가 그대로 담벼락에 쭈그려 앉는 후순을 보며 후지는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참 착하고 좋은 친구였는데 후붕이와도 중3,고1을 사귀다 문/이과로 나뉘어지며 헤어진 이후로 성격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독종처럼 아무것도 안보고 공부만 하다가 명문대를 뚫고 대기업 인턴까지 붙은 게 멋지긴 했지만, 일빼고는 다른 것에 신경 안쓰는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게 설마 전남친 다시 찾아가려고 그런건줄은 몰랐지. 그때 못마시게 할걸'

이대로 놔두자니 사람 하나 죽을 수도 있을 거 같고,만약 후붕이를 보면 어떤 꼴이 날지 전혀 알 수 없기에, 조용히 친구를 치울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후순이가 쭈그려 앉은 채로 토하려했다.


"으그, 우, 우웨엑"

"어머, 얘 뭐하는거야."


길바닥에 먹은걸 자랑하는 모습을 보니 후붕이라도 정떨어져 도망갈거 같아 후지는 조금이나마 친구를 챙겨주기로 했다.


"야, 편의점 가서 닦을 거 사올게."


근처 편의점에서 물티슈와 숙취 해소제를 사오는 길에, 후지는 ㅈ됏음을 직감했다. 누가 꽐라가 된 후순이 옆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술냄새와 토사물에서 나오는 역한 냄새가 섞여 시선을 안주고 지나치려 하는 모습에 빨리 후순이를 끌고 나오려던 찰나, 후순이가 후붕이의 이름을 불렀다.


"후붕이 너지!"


덥수룩한 머리가 꽤 길게 내려왔고 츄리닝에 슬리퍼 차림이라 후진이도 못알아볼 뻔 했지만 후순이는 어찌된 일인지 알았던 모양이었다. 깨어나 지ㄹ 할걸 생각해보면 빨리 가서 데려와야한다는 생각이 후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 후순이 친구 후진인데.후순이가 많이 취해서 말이야. 최대한 조용히 집으로 돌려 보내려 하거든?"

 입가가 더 굳어지는걸 본 후진이는 자신이 역효과를 냈나 진지하게 의심했다. 하지만 답은 뜻밖이었다.


"대체 얘는 언제까지 이러는 거야. 나잇값을 못하네."

"뭐어? 후붕아, 나 안취했써."


해맑게 웃는 후순이.


"시끄러워지면 곤란하니까 일단 들어와."


후진이는 열린문으로 후진이를 업고 내려왔다.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선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나고 있었다. 방 한 켠에 조촐한 이불 과 배개, 벽 한 구석을 채우는 수능 문제집과 책 몇권, 싱크대와 옷장 밖에 없는 매우 초라한 방을 보며 후진이는 안타까웠다.


"무울"


분위기 파악 못하는 후순이는 개의치 않고 물을 마셨다.


"후붕아. 너 나랑 다시 사귈 생각 없냐? 솔직하게 과 바뀌었다고 나 찬거 아니잖아. 왜 찬건데?"

"어머, 얘가 왜이래.  얘 술만 먹으면 이러네."

"3학년때도, 2학년 성적 갈아엎었으면 니가 문과로 돌아올 줄 알았어. 솔직히 니 수준이면 1달만 줘도 다 할거잖아. 내 얼굴 보기가 껄끄러워서 안온거야 아님 쪽팔렸던거야? 왜 바보같이 말아먹을거 알면서도 계속 그랬어?"

"후순이 너 그냥 조용히 해. 방해하는게 실례야."

"너 정말 병신같아. 그리고 널 좋아하는 나도 병신이고. 존나 웃기네. 근데 다시 사길 생각 없어? 다른 여친 생긴거야? 아님 설마 고자야?"


후진이는 후순이의 모습에 당황했다.


"얘는 내가 잘 재워 볼게."

"그래. 이불 있으니 그냥 같이 자."


"어휴 요뇬아, 대체 왜 숟가락을 걷어차고 난리니."

"뭐, 수저? 나 은수전데"

"됐다. 그냥 잠이나 자라."


다행히 비워내고 난 이후의 주사는 적어 후진이는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새벽녘일까, 눈을 뜬 후진이는 인기척에 놀랐다.

"어..., 잘잤어?"

"우리가 어제 민폐를 끼쳤지, 미안해."

"아니야. 후진이나 챙겨서 데려가. 난 책가방 챙겨야 해서 이만 나가야 해."


후순이가 일어난건 5분도 안되서였다.


"아 씨바, 여기 어디야?"

"너 정말 기억 안나?"

"어. 2차로 맥주 먹고 그 다음이 하나도 기억 안난다."

"여기 몰라?"


지금 장냔하냐는 표정으로 후순이가 후진이를 째려봤다.


"내가 술쳐먹고 후붕이 집에서 잤다고?"

"지금 보면 알잖아.여기가 어딘지."

"와 내가 미쳤나."

"그리고 방금 나갔어."

"아니 왜 그걸 지금 말해. 어? 나 화장은 또 왜 이러고."

"어제 토한 주제에 말이 많다."

"토했다고 ?"


순간 후순의 얼굴에 절망의 기색이 완연했다. 후진이는 후순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해장이나 하러가자"

"나 진짜 걔 얼굴 어떻게 보냐. 개쪽이네 진짜."

"그래도 너 진짜 열심히 하긴 했어. 미친짓"

"그냥 해장이나 하러 가자. 뭐 세탁비나 돈 좀 주고 사과해야지."

"너 쿨한척 하지마. 전혀 아닌거 티나. 게다가 연락 못할거잖아.술 안먹을 땐 그렇게 정상적이더니 술만 먹으면 사람이 확 바뀌네."


둘이 티격태격 하면서 후붕이의 집을 나섰다.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는데, 후진이가 후순이의 전화기를 빼앗아갔다.


"야, 뭐하게."

"음. 생각해보니 비밀번호가 얼마더라. 나 어디서 들었는데 찌질하게 매달릴 수록 헤어진 사람걸 기념한다더라. 대충 각잡아보면 처음 사귄 날 아니면 깨진날일거 같은데. 한 번 해봐야지."


몇초도 안되어 잠금은 풀렸고, 후순이 전화기의 전화앱을 들어간 후진이는 놀랐다.


" 너 정말 미친년이다. 어떻게 어제 술먹다가도 전남친에게 전화하냐? 어? 전화만 38건인데? 화장실 들락거린게 전남친에게 전화 걸려고 그런거야?"

"아니라니까!"

"그럼 지금 전화 걸수 있겠네? 건다?"

"야, 잠깐만."

"뭐래."


후진이는 바로 후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붕아. 잘 지냈어? 어제 봤던 후진이야. 후순이 옆에 있던 친구. 다름이 아니라 후순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네? 바꿔달라고? 알았어."


얄밉게 메롱하는 후진이를 보며 진짜 손올라가는걸 참은 후순이는 목소리톤을 잡았다.


"어머, 후붕이니? 오랜만이야. 다름이 아니라 내가 어제 실례가 많았지? 미안해서 그러는데 무엇을 해줘야할지 엄두가 안나서 말이야."

"더이상 술먹고 찾아 오지 마.너 벌써 네 번째고 너무 추해. 그냥 신경 쓰지 말고 각자 인생 살면 안돼? 굳이 다시 찾아올 필요가 있어?"


후순이는 그야 내가 좋아하니까 라는 말을 목구멍까지 눌러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몰라. 필요없고 나 다른 곳으로 갈거니까 찾지나 마. 진짜 찾아오는 것도 정도껏이지 내가 없는걸 알면서도 남에게 피해주는건 정말 최악이니까 그 쪽으로 얼씬도 하지 말라고."

"다시 사귀어 주면 안돼? 솔직히 나 네가 버리고 나서 진짜 고민 많이 했어. 미워야 하는데 미워할 수가 없더라고. 대신 날 다잡고 있었는데, 술먹거나 절제가 안되면 요즘도 튀어나와. 시간이 약이라 하는데 점점 악화되어 정신과도 다니고 있어."

"결국은 네가 필요하니까 사귀자는 거잖아. 사람은 원하는대로 가져다 쓰고 갖다 놓는 물건이 아니야. 치료나 잘 받아."

"적어도 기회라도 달라는 거지."

"지금껏 술먹고 주정부린거면 찾아와도 몇백번은 찾아왔어. 무엇보다 그때 상황이 자연스럽게 멀어진거고 둘다 적극적이지 않았잖아. 잘 다잡고 직장 다니는데 뭐가 더 필요해? 이것저것 다 해보고 질리니 옛 사랑이 그리워?"

"그게 아니라..."

"너 이러는거 정말 정떨어진다."


비수같은 말에 후순이의 눈물샘이 열렸다. 전화 저편에서는 말이 없다. 보다 못한 후진이가 냅킨을 건네주면서 휴대전화를 뺏어왔다.


"저기요. 우리가 전날 술먹고 안좋은 짓 한건 맞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이게 사과하는 사람에게 할 말이에요? 하. 얘 내 친구에요. 고2때 방황했는데 고3부터 진짜 독종같이 공부했다고.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사는 성실한 앤데 말이 너무 심한거 아니냐구요. 공부밖에 안하던 애가 사회생활도 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다양하게 노력했는데 당신이 다 지켜본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당신도 친구면 술먹고 저렇게 안하도록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주사도 한 두 번이어야지.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심한거 아니야? 왜, 입장바꿔 생각해보니 커버 못치겠어? 사람마다 사정있는거 다 알지. 근데 그게 다 해결해주는건 아니야."

"후순이 너 울지마.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렇지만 아직도 그때가 생각나는걸 어떡해."


허나 눈앞의 기대하는 눈으로 처다보는 후순이를 후진이가 초칠 수 없었다.

"방금 뭐랬어?"

"어.. 그냥 잘먹고 잘 살래. 더이상 연락 할 필요는 없을거 같다고 그러네?"


후순이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어. 그래. 오늘은 먼저 들어갈게. 다음에 보자."

"그래. 잘 들어가."


비척거리면서 들어가는 후순이를 후진이는 몰래 뒤쫒았다. 공동현관에 들어가는 후순이를 따라 문이 닫히기 직전에 쫒아들어갔다.


"쒸불뇬. 높은데 사네."


5층까지 절반즈음 올라갔을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후진이는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후순아 잠깐 멈춰봐."


"어? 후진이 네가 왜 여깄어?"


"너 또 들어가서 울려고 했지? 같이 들어가자."


"어. 그래."

후순이를 따라 집안에 들어간 후진이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물을 한 잔 마신 후순이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후진이는 슬슬 짜증나기 시작했다.


"후순아?"

"나 너무 슬퍼. 슬픈데 뭐라 할 말이 없어. 내가 너무 찌질한거 같고, 후붕이를 못잡은게 너무 안타까워."

"저기 후순아? 날 봐봐."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걸까."


짝! 손바닥이 볼에 휘감기는 소리가 났다.


"들어. 너 지금 심각해. 술 덜 깼으니 숙취 해소제나 먹어."

"우우, 왜때려."


후진이가 후순이의 손에 물컵과 약을 쥐어줬다. 후순이는 곤히 잠들었다.


"빨리 진짜 후붕이를 찾아야 할텐데. 얘는 약도 안먹고 일부러 환상에라도 빠지려는건가."


진짜 다음에는 정신과에 같이가야겠다고 마음먹는 후진이였다. 후순이가 토한 토사물로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고, 대충 후순이의 옷을 뺏어 입었을때, 후순이가 깨어났다.


"아, 잘잤다."

"야.. 많이 힘들었지?"

"왜그래. 업무야 있는건데. 어? 그거 내옷 아니야? 맞는거 같은데?"

"이거 봐봐."


후진이는 안뜯긴 약봉지들을 내밀었다. 이미 한달이 지난 것부터 지난주 날짜가 쓰인 것까지, 약들이 수북히도 쌓여있었다.


"어? 내가 약을 이렇게 안먹었었나? 까먹었나 보네. 뭐 다음에 먹지. 뭘."

"야! 너 언제까지 후붕이에게 매달려 있을건데?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떠나버린 그 놈 잊고 제대로 살 거냐고."

"인턴십으로 바쁜거 뿐이야. 왜그래."

"너 인턴십 잘렸잖아. 팀원들이 이상한 소리 중얼거리고 이상행동한다면서 무섭다고."

"내가 잘렸어?"

"너 어제도 후붕이 집갔어. 후붕이는 없었고, 아침에 전화 거는 척 했는데도 넌 혼자 환청도 듣고 눈물도 짜고 미친년으로 안보이게 맞춰주는 내가 더 어려웠다니까?"

"하 진짜 그랬나 보네."

"어떻게든 수소문 해봐? 후붕이 지인이나 가족은 찾을 수 있을 텐데 후붕이도 그사람들 앞에는 모습을 드러낼 거잖아."

"그러다 그것까지 잃으면? 그 다음은 없어지는 건데?"


후진이는 후순이 뺨을 갈겼다.


"너, 후붕이에게 차이고 미친듯이 공부할땐 안그랬어. 그땐 당당하고 멋지게 앞에 서려고 노력했는데. 대학생때 재수생한테 차였다고 멘탈 터져? 미친거 아니야?"

"하지만 소중한걸 어떻게 하라고!"

"그건 나야 모르지! 근데 확실한건 이건 아니잖아! 막말로 존나 돈 많이 벌어서 후붕이 취향인 여자로 얼굴을 갈아엎든지! 아니면 존나 성공해서 후붕이보다 좋은 남자 거느리고 짓밟으러 가든지! 정신이 있어야 사람이지 니가 지금 사람이야? 과거에만 얽매인 시체잖아!"


후순이가 비틀거렸다. 후진이도 안타깝지만 현실을 보여줘야만 했다.

"다음에 볼땐 정신 차려라. 나도 더이상 못봐줘."

"안잊혀지는걸 어떡해!"

우는 후순이를 뒤로하고 후진이는 후순이 집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