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공작이 쓰러진 지 한 달이 지났다.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그 호흡은 갈수록 느려지기만 했다. 

 

“아가씨, 많이 야위셨습니다.”

“그래요? 필립...”

 

 아버지를 간호하던 세나 역시 그런 말을 하며 노집사를 돌아보았다. 사돈 남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역시 노령에 공작의 일까지 떠맡으려니 고생이 많은 것이겠지.

 

“영주들은요?”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가씨의 혼사 문제가 일단락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요.”

 

 무거운 한숨이 방을 메웠다. 

 

“...메논은요?”

“그 분은...일단 공작님의 차도를 빌자고 하신 뒤 계절이 바뀌면 다시 모이자고 하셨습니다.”

 

 경계심이 누그러지는 말에 그녀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청혼자 자격으로 온 그에게 이런 식으로 감정의 품을 허용해서는 안되는데.

 

‘카를...’

 

 왜 편지 한 장 없는거야.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지? 왜 이렇게 힘든데 나를 혼자 둬? 그런 물음이 꼬리를 물며 그녀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필립.”

“예, 아가씨.”

“제가 메논과 결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필립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래도 후계자는 변함없이 세나 아가씨가 되실 겁니다. 결혼 후에 후계자 자리를 낚아채려는 사람들이 많아 제국 법으로 그런 사례는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결혼 후 1년이 지나거나 아이가 태어난다면 공식적으로 메논님께 통치자 자리를 양도하실 수는 있습니다.”

 

 정석적인 대답에 세나는 쓰게 웃었다. 필립은 카를과 자신의 관계를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도 숨겨왔지만 그 중에서도 필립에게는 정말 철저하게 감춰왔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반대할 가능성이 제일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보다 영주님들과의 관계는 원만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역시 그렇죠?”

 

 그녀는 필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가...희생해야 하는 거겠죠?”

“아가씨, 귀족의 자손에게 희생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가문을 유지시키고 영지를 안정시키는 것은 귀족으로서 지녀야할 의무에 가깝습니다.”

 

 노집사를 향했던 고개가 다시 떨어져 나갔다. 역시 그는 가문의 보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구나. 

 

‘카를과 내 관계를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런데, 카를은? 그 당사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세나는 일말의 분노까지 일었다. 

 

“필립,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아가씨.”

“서쪽 변경의 국경 조사를 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세나는 말을 멈췄다. 필립은 와병 중인 공작의 방에 자신과 세나 말고 찾아올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불쾌했던 것인지 성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 자리에는 두 명의 하녀들이 서있었다. 필립은 꾸짖듯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아직 아가씨의 식사 시간은 멀었거늘!”

“죄송합니다. 집사님. 저...”

 

 앞의 하녀가 의자에 앉아있는 세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메논 님께서 세나 아가씨께...”

“지금은 안된다고 전하세요.”

 

 쌓이고 쌓인 불만이 모여 있던 세나는 어느 때보다 칼같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녀는 곤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것이 아니오나, 이것을 전해드리라고...”

 

 앞의 하녀가 물러서자, 뒤의 하녀가 들고 있는 작은 바구니가 보였다. 그 안에는 남쪽의 과일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와병 중에 지치고 피곤하실테니 조금이라도 드시고 기운을 내시라는 말씀도 덧붙여달라고 하셨습니다.”

“...메논 공은 직접 오지 않는다고 하더냐.”

“예, 공작님께서 투병 중이신데 함부로 뵙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쩌자고 이런 것들을 계속 보내는지.

 

“...너희들끼리 나누어 먹거라.”

“예? 하지만 메논 님께서 직접 보내신 것인데...”

“내가 나누어주었다고 하면 될 것이다. 메논 공께도 나중에 내가 설명드릴 것이다.”

 

 이런 과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차피 지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그 순간, 세나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라.”

“예? 역시 놓고 갈까요?”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드릴 것만 다오. 나머지는 방금 전에 말한대로 너희들이 먹어라. 그리고...”

 

 금이 간 벽 사이로는 물이 흘러 넘친다. 지치고 외로운 마음 사이로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쉬웠다. 

 

“메논 공께도 고맙다고 전해드려라.”

 

 그 태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모르지는 않았다. 단지 지금은 좀 힘들다. 그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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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은 쓰러진지 한 달 동안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에 위용을 자랑하던 체력조차 그의 목숨을 연장시켜주는 것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마지막 숨결이 피어올랐을 때, 그 자리에는 딸인 세나가 홀로 임종의 순간을 지켰다고 한다.

 

 사흘에 걸친 장례가 끝난 뒤, 명목 상 공작령의 통치자가 된 세나는 오래지 않아 메논과의 결혼을 공표했다. 결혼식은 보통 의례보다 절반 정도 단축된 기간, 대략 세 달 정도 뒤에 이루어졌다.

 

 동부 귀족들의 대다수가 이 결혼을 축복했다. 서부의 귀족 중 유일하게 이 결혼식에 참가한 가르프 백작은 간단한 축하의 말만 남긴 뒤 서부로 돌아가버렸다. 다른 귀족들은 그의 태도가 불량하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공작령의 통치자는 세나였다. 세나가 여공작의 자리에 앉고, 메논이 그 남편의 자격으로 동등한 자리에 앉았다. 센트리올의 여공작의 통치 아래 열린 첫 번째 귀족 회의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가르프 백작의 자리가 비었고, 맨 앞 자리로 다가온 멜레오르 백작이 제일 먼저 발언했다.

 

“공작 마마, 우선 이번 결혼을 알리는 소식을 왕국의 수도로 발송하도록 하시지요.”

“그리하라.”

 

 간결하게 대답한 그녀는 옆에 있는 남편 메논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이었다. 

 

“공작 마마, 그리고 또한 공작령에 속한 모든 영주들에게 이 결혼을 축하하도록 하는 서한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

 

 그렇게 하라는 말이 끝나기 전에, 세나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쪽의 영주들, 그들은 영토가 없거나, 혹은 사람이 없어진 상태였지만 모두 공작령에 속한 영주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쪽에서 귀화한 카를의 조상도 마찬가지였고, 그 직책은 조부와 아버지를 거쳐 카를에게까지 계승된 상태였다. 만약 그런 서한을 내리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카를도 그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황야 앞에서 그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대략 7개월 전, 그가 마지막 편지를 보내온 것은 6개월 정도 전이었다. 그 반년 동안 그가 어떤 소식을 듣고, 결혼 공표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만약 그가 이 일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분노할까? 아니면 그냥 포기해버릴까.

 

‘5년 안에 돌아올게.’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세나는 지금 자신이 어디까지 와있는지를 실감했다. 그 5년의 10분의 1이 지나기도 전에, 그와 그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내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허상 속에서 그녀를 향해 날아드는 비난의 화살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방어했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찬 물이 담긴 잔을 힘겹게 들었다.

 

“...메논.”

 

 그 잔을 들어 건네주는 메논은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시죠, 공작 마마.”

 

 받아든 잔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세나는 움직이지 않던 입을 움직였다.

 

“그리 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멜레오르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사항은 없는가.”

“그 외에도 몇 가지 있기는 합니다만, 지역 간의 사소한 문제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자네들이 의결해서 처리하도록 하게. 나는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쉬어야 겠네.”

 

 그리하십시오. 고개를 숙이는 십여 명의 귀족들, 그들을 보고 세나는 정말로 저들이 아버지에게 바락바락 대들던 그들이 맞는지 의구심을 품었다.

 

 허나 그러면 어떤가. 지금은 후계자 구도도 정리가 되었으니, 자신이 이제 아이만 낳게 되면 저들도 더 이상 공작가의 일에 트집을 잡을 명분도 사라질 터.

 

‘그래. 다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거야.’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세나는 복도를 지나 성 저편에 있는 자신과 메논의 침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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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회의실에 있던 메논은 멜리오르 백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지역 간의 사소한 문제라는 것이 무엇인가?”

“동부 영지 간의 언덕 지분 다툼, 그리고 부군께서 다스리고 계시는 영지 사이에 다리 건설 논의, 마지막으로...”

 

 그는 서류를 넘겨보더니 말했다.

 

“서쪽 변경 수비대장 카를 경의 지속적인 내방 요청입니다.”

 

 그런가. 메논은 탁자 옆에 놓여진 공작가의 인장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거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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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연재 못한 거 미안하다 내일 연참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