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병원에 왔다.



내가 아파서 온 건 아니었고, 얀순이의 검진 때문에 왔다.



얀순이는 유학 생활 중에 사람을 구하다가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고 했다.



머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뼈에 금이갔고, 근육 대부분이 파열됐고, 내장도 일부분 손상됐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얀순이의 육신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만큼 재활도 빨랐다.



얀순이를 진료하셨던 의사선생님도 이렇게 강한 인간은 처음본다고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얀순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해당 사고로 인해 생긴 자궁 내막 손상이었다.



손상된 장기중 유일하게 수술로 해결하지 못한 장기였기에, 아직까지 호르몬 주사를 통해 회복 되기를 기도하고 있었고,



나와 아이를 가지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불안해했다.



"그게 그렇게까지 걱정돼?"



"아이를 못 가진다는 건 너무 슬픈일이잖아."



"괜찮아, 얀순아. 네가 불임이여도 떠나지 않을게."



떨리는 얀순이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얀순이도 내 손을 맞잡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고마워, 후붕아."



"아냐, 고마울게 뭐 있어. 당연히 이정도는 해야되는거지."



얀순이는 그렇게 한참동안 기대고 있었다.



서로 대화는 이어가지 않았지만, 불안해서 떨리고 있던 얀순이의 손이 차분해졌다.



얀순이가 나를 의지해주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얀순이에게 한번 망가졌던 내가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내가 은인이라서 그래?"



"아니, 그냥 네가 좋아서 그래."



얀순이는 그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단순히 맞잡고 있던 손도 어느샌가 깎지를 끼고 맞잡고 있었다.



"정말 고마워 후붕아."



"뭐가?"



"한번 널 차버렸던 나를 받아줬잖아."



"에이, 그건 서로간 오해때문에 생긴 일이지 뭐. 너무 신경쓰지마, 얀순아."



얀순이는 날 차버렸던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후순이와의 결혼 생활에서 입었던 내상을 치료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



그걸로 이미 충분했다.



누구보다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오해에서 비롯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며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다.



"여기가 제일 편안하네."



"아무리 그래도 얀순이네 집 침대보다는 불편하지 않을까?"



"심적으로 말이야. 후붕이가 곁에 있으니까 안심이 돼."



얀순이는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 기자들과 인터뷰도 했을 테고, 이사회도 참석했을테니, 피곤할만도 했다.



검진이 끝나면 또 다시 바로 일터로 뛰어가야 하니까 잠깐이라도 자두려나보다.



후순이랑도 분명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잔뜩 긴장해서 후순이를 깨우지는 않을까 쫄아있었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편안하게 잠을 못자거나 도중에 깨면 항상 짜증을 부려서 긴장하고 있어야 했는데,



얀순이가 기대고 있으니 오히려 편안했다.



약간의 긴장감은 있었지만, 얀순이가 내게 기대준다는 것 만으로도 불안하기만 하던 후순이와 달리 안정감을 느꼈다.



마음이 편안하니 잔뜩 긴장하고 노심초사하던 후순이때보다 얀순이가 더 편하게 잠이 들었다.



"얀순 환자님, 3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얀순아, 의사 선생님이 부르셔."



"아, 응... 미안. 편안해서 그런가 잠이 들어버렸네."



"괜찮아. 그런건 굳이 사과하지 않아도 돼."




*     *     *




검사 결과는 좋았다.



한참동안 낫지 않아서 정말 심하게 걱정했던 얀순이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와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제 거의 다 회복 되었대! 한번 정도만 더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 될것 같다는데?"



"잘됐네. 얀순이는 원체 강하니까 당연히 그럴 줄 알고 있었어."



얀순이는 어느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웃고 있어도 편하게 웃지 못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해맑게 웃고 있었다.



"고마워, 후붕아. 네가 곁을 지켜준 덕분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잖아."



어느새 자연스럽게 팔짱을 껴온 얀순이.



그런 얀순이의 비어있는 손을 붙잡아, 방금 전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처럼 깎지를 꼈다.



얀순이는 내가 팔짱을 풀었다는 것에 살짝 실망하다가도 손을 잡았다는 것에 표정이 풀려버렸다.



얀순이가 이렇게나 표정 변화가 많았었나 싶지만, 얀순이가 밝아졌으면 그걸로 됐다.



항상 표정과 감정을 감추고 사는 것 처럼 보여서 걱정이었는데, 내가 곁에서 긴장을 풀어줄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손을 잡고 병원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때까지도 얀순이는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은 표정으로 얀진 그룹 소속 리무진을 향해 나를 이끌고 갔다.



얀순이는 자연스럽게 나를 리무진에 태우려고 했다.



"자, 잠깐만, 얀순아. 아무리 그래도 일반 사원인 내가 최고 임원 리무진에 오르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우리 아직 부부사이도 아니잖아."



"아... 그랬지."



순식간에 풀이 죽은 얀순이.



방금 전 까지 그렇게 활기차던게 거짓말인 것 처럼 시무룩해져서 내 손을 놓고 리무진 문을 열었다.



괜한 말을 했나 싶기도 했지만, 이제 막 이직해온 일반 사원이 최고임원의 리무진에서 내린다면 그것대로 고생길이 펼쳐질게 분명했다.



나는 상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분명 주변에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얀진 그룹은 회사 분위기가 누굴 괴롭히는 분위기는 아니라지만, 최고 임원인 회장의 리무진에서 이직사원이 내리는 것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낙하산이니 뭐니 하면서 괴롭힐게 분명했다.



그리고 날 괴롭혔던 사람들은 얀순이에 의해 모조리 해고 당할 지도 몰랐다.



애꿏은 사람들 해고하고 싶지 않았다.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겠지만, 얀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평생에 걸쳐 괴롭힘 받았던 대상은 항상 얀순이가 멀리 치워주었기에,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쉽다. 후붕이랑 헤어지기 싫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사회고 기자회견이고 뒤로 미룰걸 그랬어."



"그러게, 아쉽네. 얀순이가 사장님만 아니었으면 회사 내에서도 자주 마주쳤을지도 모르는데."



"응? 아냐, 우리 회사 그렇게 안딱딱해. 아마 탕비실에서 자주 만날 수 있을걸?"



"...비서 안쓰고 네가 직접 준비해?"



"어머니도 그러시는데 그정도는 당연히 내가 해야지. 비서들이 할일 얼마나 많은데 음료 준비를 시키고 있겠어?"



얀순이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걸 보면 얀순이가 얀진 회장님을 어려워 하는 만큼 존경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모습이 참 멋있었다.



회장님을 따라서 정말 진지하게, 회장님과 사우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그 모습이 참 멋있었다.



"아, 후붕아. 잠깐 리무진에 타줄래?"



"응? 같이 출근하면 안돼잖아?"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야. 창문 너머로 알려주긴 조금 그런 문제라서 그래."



얀순이의 대답에 의아해 하면서도 얀순이가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기에 순순히 회장님의 리무진에 올랐다.



그래도 별일 있겠나 싶었지만...



얀순이와 회장님께서 알려주신 내용은 생각 이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었다.





*     *     *





얀순이가 후희가 맡겨졌다고 알려준 유치원 주소로 찾아갔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유치원 같아 보였지만, 사실상 고아원이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쾌락은 얻고 싶은데, 책임은 지기 싫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모아둔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곳에 후희가 보내졌다.



닮지 않았다고 매일같이 한 소리 들었지만, 후순이의 초대남들이 가져다주는 장난감이나 과자들이 더 좋아 나를 싫다고 쳐냈던 후희였지만, 6년간 키웠던 내 아이였다.



후순이에게 눌려있을 때야 정신적으로 너무 몰려있어서 아이에게까지 배신감을 느끼고 복수할 생각을 품었지만,



막 세상에 나왔을 때 부터, 걸어다니고 말을 하고 유치원에 다닐 때 까지 내가 키웠던 아이였다.



후순이를 택했던 것도 그땐 내가 너무 눌려 있었으니 약했던 나보다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후순이를 택했을 것이다.



후희 정도의 나이대에는 자기에게 좀 더 좋은 걸 가져다 주는 쪽을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야 더 윤택한 환경에서 살 수 있었을 테니까.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그... 여기에 후희가 맡겨져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요."



"아, 후희요? 후순 아가씨, 아니 후희 어머님이 맡겨두신 아이 말이죠? 혹시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후희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유치원 선생님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려진 아이들을 찾으러 올 리가 없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의외의 지적을 당했다.



"...전혀 안닮으셨는데요. 정말 아버님 맞으세요?"



"맞습니다. 못믿으시겠으면 후희에게 물어보시죠."



"돌아가 주세요. 수상한 사람에게 원생을 보여드릴 순 없습니다."



선생의 조치는 적절했다.



나같아도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이 아빠랍시고 나타나서 애를 데려가려고 하면 이렇게 거절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후희를 두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유치원 교사와 대치를 하고 있는 사이, 어떤 아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빠...?"



후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관리는 잘 되는 시설인지 후희의 상태가 엄청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아빠...!"



후희는 유치원 문을 열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후희를 안아들었다.



한달 전보다 훨씬 가벼웠다.



고작 한달 사이인데 이렇게 가벼워져도 되나 싶을정도로 가벼웠다.



"아빠가 미안해, 후희야. 일하느라 후희한테 말도 안하고 나와버려서, 미안해."



"괜찮아, 아빠. 난 아빠가 좋은걸."



후희는 내 품에 안겨서 내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어디 가지마. 난 아빠가 좋단 말이야."



"한 달 전에는 아빠 싫다며?"



조금은 짖궂게 물었다.



하지만, 후희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을게요!"



난생 처음 들어보는 후희의 존댓말이었다.



단순히 우는게 아니라, 공포에 질려서 떨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 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한껏 웅크렸다.



마치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엄마가 내 준 학습지를 다 풀지 못하면 밥을 먹지 못하거나, 흠씬 두들겨 맞았던 그때의 나를 보는 듯 했다.



아무리 그래도 후순이가 자기 딸을 때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누가 이렇게 공포를 심어둔 걸까?



나를 문전박대했던 유치원 선생은 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        *        *





후붕이가 차려준 아침상을 먹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울었다.



후붕이가 멀어지고 있는게 느껴져서,



후붕이가 내게서 마음이 떠나고 있는게 느껴져서 견딜수가 없었다.



항상 후붕이는 내게 넘치도록 사랑을 부어주었는데,



한 달간의 연수 끝에 집에 돌아온 이후로는 한번도 사랑을 보내주지 않았다.



항상 따스한 애정을 내게 품고 있었는데,



지금은 차갑게 식어서 춥기만 했다.



어떻게하면 후붕이를 돌려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후붕이가 다시 나를 사랑해줄까.



열심히 고민해봤지만, 뾰족한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후붕이가 나를 덮쳐주길 바라며 도발만 했지, 후붕이를 사로 잡는 방법 따위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후붕이가 내게 푹 빠져있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뭘 해도 좋아하던 후붕이가 아무리 좋아하던 걸 보여줘도 애정을 주지 않았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갑자기 집에서 사라졌을 때 처럼,



아빠가 사라졌다며 징징대는 후희의 울음소리가 집을 차지하고 있을 때 처럼,



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후붕이가 돌아와 준다면,



평소의 후붕이로 돌아와 준다면 단박에 해결 될 수 있는 문제였지만,



후붕이는 매몰찬 거절만 할 뿐이었다.



낙관적인 생각도 들었다.



회사를 갔다가 돌아오면 피곤해서라도 내게 기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제도 단호하게 나를 거절했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후붕이를 잡을 수 있지?



내 모든 걸 다 동원해봐도 후붕이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후붕이가 돌아올까?



순간, 후희가 머리속을 스쳤다.



아버지 회사의 아동 복지 시설에 맡겨져 있는 후희라면 후붕이를 붙잡아 둘 수 있을 것이다.



후희라면 후붕이를 되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후붕이를 내쫓아버린 결정적인 이유가 후희의 배신이었던 만큼



아빠를 배신한 후희를 데려와 처벌하면 후붕이도 나를 다시 돌아봐 줄 것이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눈물 자국이 보이지 않도록 짙은 화장을 했다.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갔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기사를 보내달라고 아버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날 따라 유난히도 엘레베이터의 속력이 빠르게 느껴졌다.



중간에 타는 사람도 없었고, 누군가 누르고 가서 서지도 않았다.



1층까지 쭉 내려갔다.



빨리 내려가서 후희를 데려오라는 듯이 빠르게 내려갔다.



하지만, 기사가 전화를 안받았다.



후희의 유치원으로 데려다 줄 기사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예약하기 위해 전화를 끊고 택시 예약 앱을 켰다.



마침 택시가 근처에 있어서 5분 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후... 다행이다.



아직 늦지 않았어.



후붕이가 퇴근할때까진 아직 시간이 세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충분해.



그 안에 후희를 데려다 놓으면 후붕이도 마음을 다잡아 줄거야.



후붕이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니까, 



후희를 봐서라도 나를 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거야.



아빠를 싫다고 했던 후희를 조금만 혼내주면 후붕이도 좋아해 줄거야.



그렇게 되면 다시 내게 사랑을 부어주겠지?



평소처럼 돌아와서 내가 조금만 달라붙어도 당황하고 귀여운 반응을 보여주겠지?



후붕아, 기다려.



다시 원래대로 돌려줄게.



나를 사랑해주는 후붕이로 되돌려줄게.



조금만 기다려줘.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마침 택시도 도착했으니 서둘러 엘레베이터를 나섰다.



"후순아, 어디가?"



...어?



이러면 안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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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력이 박살나고 있다는게 느껴집니다. 큰일이네요 이런 글 보여드리려고 글쓰는거 아닌데.


후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