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어중간한 존재였다.

좋게 말하자면 평범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이도저도 아닌 반푼이. 딱히 모난 부분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두드러진 부분도 없는 둥그런 원 같은 존재.

특별한 것에 대한 동경을 품은 적은 있었지만, 내겐 그걸 실천으로 옮길 능력도 깡도 없었다. 이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노력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겁쟁이었으니까. 나는 그저 상상 속에서만 그 열망을 해소했다.

하지만 언젠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일상을 뒤흔들 정도의 대격변이 한 번 정도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사건이 제법 일찍 일어났었다. 스물 세 살. 막 군대에서 전역하고 사회에 물들어갈 무렵.

그 사건에 대해 말하기 전, 잠시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 '동방 프로젝트'라는 게임을 들어봤는가. 느닷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하다. 앞으로 설명할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게임에 대해 아는 것이 필수니까.

그 게임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자면, 환상향이라는 외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미소녀가 해결하는 탄막 피하기 게임이다. 워낙 세계관도 방대하고 등장인물의 개성도 강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동방 프로젝트는 게임 본연보다는 팬들의 2차 창작으로 인해 더욱 부흥했다는 점이다. 팬픽, 팬아트, 팬게임까지. 이 중에서도 나는 팬픽에 빠져 주로 시간을 보냈었다.

'우연한 계기로 동방 프로젝트 세계에 빙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가지게 된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환상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흔한 줄거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 흔한 줄거리가 뭐가 좋았는지 아주 깊게 빠져들었다.

내가 저 주인공이 된다면 어떨까?
나도 멋지게 사건을 해결해서 히로인의 마음을 쟁취할 수 있을까?

아무 영양가 없는 망상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재밌잖은가. 나는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스스로를 팬픽의 주인공에 대입해보곤 했다. 그러다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서 그 생각만으로 밤을 샌 적도 있었다.

하지만 유치한 상상력을 유희거리 삼는 것도 언젠가 질리기 마련이다. 서서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동방 프로젝트를 향한 나의 애정은 조금씩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 인터넷 검색기록에서 동방과 관련된 키워드가 거의 사라져갈 무렵.

그 사건은 일어나버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기습적으로.


***

인정한다. 내가 '동방 프로젝트' 세계에 빙의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엔 제법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일생을 평범하게, 둥근 원처럼 살아오던 남자에게 소설의 도입부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개미 배설물처럼 작게 남아있던 나의 동심과 모험심은 몸집을 마구잡이로 부풀려댔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소설같은 전개를 기대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추슬렀다.

쌓아가는 인연, 피어나는 사랑, 위기와 극복, 약속한 듯한 행복한 결말.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중학교 시절 이래로 애인 하나 없던 내게, 환상소녀들과의 사랑은 아주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래서 나는 움직였다. 여타 동방 팬픽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약속된 전개를 위해.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막연한 낙천성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멍청한 생각이기도 했고.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걸 깨달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내가 동방 프로젝트 세계에 떨어지면서 얻은 능력은 세 가지가 있었다. 늙지 않는 것, 번역, 그리고 '사람을 찾는 정도의 능력'.

사람을 찾는 정도의 능력,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능력이 마음에 들었다. 그야 환상소녀들과 연을 맺기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이었으니까.

이 능력을 사용해서 가장 먼저 만나러 간 소녀는 야쿠모 유카리였다. 첫만남 당시 그녀는 동굴 속에서 아기자기한 손으로 토끼 사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아우?'

흔히 묘사되는 풍만한 가슴과 매혹적인 몸매는 어디 가고, 그곳에는 아장아장 기어다니는 자그마한 아기 하나가 있었다. 솔직히 당황스러웠지만 나쁘진 않았다. 히로인이 어릴 때부터 호감도를 쌓아가는 팬픽도 많지 않던가.

난 그날 이후로 유카리에게 온갖 먹을 것, 읽을 만한 서적 같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심심함을 달래주기 위해 노래를 불러주거나,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면 유카리는 꺄르르 웃으며 고사리같은 손으로 나의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가슴 한 켠이 간질거렸다. 나는 이 감정이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훗날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자신과 함께 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어느덧 말하는 법을 배웠다. 글을 쓰는 법 역시 배웠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도 익혔다. 그리고,

내가 불러주는 자장가 없이도 잠들 수 있게 됐고,
내가 먹여주지 않아도 스스로 젓가락을 쥐게 되었다.

그녀는 서운할 정도로 빠르게 나에게서 독립하기 시작했다. 딱히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점점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여성으로서의 풍만한 몸매를 갖춰갈수록, 마치 부녀 관계가 그러하듯, 권태기가 온 오랜 연인이 자연히 그러하듯이 우리 사이에는 간극이 생기기 시작했다.

같은 식탁에서 함께하던 식사는 이제 따로따로 해결한다. 오가는 말수는 점점 줄어들고, 대화의 주제는 서로 맞물리지 않아 뚝뚝 끊어졌다. 서로 얼굴을 맞대는 시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어쩌면 우리의 이별은 진즉 예고되어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눈돌리고 있던 것일 뿐, 마치 수풀에 머리를 쳐박고 안도하는 타조마냥.

그렇게 우리 둘이 만나고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날 즈음이었다.

'잘 있어, 당신. 지금까지 고마웠어.'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오겠다는 것처럼 담담한 말투로, 그녀는 내게 이별을 고했다. 갑작스러웠다. 머리가 새하얗게 바래지는 것 같았다.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아니, 왜?


그녀를 붙잡을 몇 가지 명분이 머릿 속에서 떠올랐지만 이윽고 지워버렸다. 내가 왜 그녀를 붙잡아야 하는지, 그 답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잠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나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잘 가라고,
나야말로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유카리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경계 너머로 사라졌다. 능력을 사용한다면 그녀를 따라갈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스스로 나에게서 멀어지길 원했으니, 그 의지를 존중해줄 셈이었다.

그날 나는 멍하니 동굴에 앉아 유카리와 내가 생활하던 흔적을 바라보았다. 같이 앉던 식탁, 같이 자던 침소, 같이 읽던 서적들. 모든 한 쌍의 물건들은 이제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되었다.

지난 십 년 간, 그녀에게 나는 무슨 존재였을까. 아버지? 오라버니? 아니면 참견쟁이 인간? 어쩌면 그 이하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그녀가 살아갈 수 천 년의 세월 속에서 나와의 추억 따위는 먼지 한 톨에 불과하겠지.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공허함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웃음을 참기 힘들어서 푸하하 소리내어 폭소했다.

바보같은 놈. 뭐가 하렘이냐, 뭐가 사랑이냐. 얼굴이 반반한 것도 아니고, 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닌 반푼이 주제에. 어찌 그리도 분에 넘치는 야망을 품었던가. 십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고도 야쿠모 유카리에게 먼지 한 톨조차 되지 못했던 한심한 놈이.


마음 한 켠이 끝없이 아렸다. 매몰차게 떠나버린 그녀가 밉기도 했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더더욱 고통스러웠다.


 유카리는 허무하게 나의 곁에서 사라졌지만, 나는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인연을 만드는 것에 연연하며 보답받지 못할 노력을 반복했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시간이 흘렀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꼬마 여우를 주웠다. 오 년 간 상처를 치료해주며 같이 생활하다가, 녀석이 도망쳤다.

사이교우지 가의 여식과 만나 종종 이야기상대가 되어주었다. 이십 년 후, 사이교우지 가문이 멸망하면서 자연히 연을 끊었다.

죽지 못해 사는 백발의 여인을 만났다. 불로에 대한 고충을 공유하며 두 달 동안 같이 여행을 다녔다. 느닷없는 도적의 습격으로 인해 헤어지게 되었다.

인간과 요괴의 화합을 꾀하는 승려를 만났다. 일주일 동안 객으로서 머물렀다. 요괴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그 외에도 수많은 신과 요괴들을 만나며, 짧은 인연을 만들었다가 금세 헤어졌다.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는 가지지 못했다.

나는 결국 이곳에서도 어중간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둥근 원처럼, 모자란 부분도 없지만 특출난 부분도 없이 평탄하게.

시간이 지나고 환상향에 입성하면서, 나는 과거의 인연들과 재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녀들은 오랜만의 재회임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저 '오랜만이네, 당신.' 이라는 틀에 박힌 인사를 건네는 것이 전부였다.

환상향에서의 생활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일어나면 간단히 산책을 하고, 인간마을에서 장을 보고, 가끔 마주치는 소녀와 일상적인 담화를 하다가 헤어진다. 그런 하루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나쁘지 않은 삶이다.
나쁘지는 않은, 삶.
하지만 이래서야...내가 살던 현실세계와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소설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소설같은 전개가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불만 없이 살아갔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먼 옛날에 그러했듯이 특별한 것에 대한 열망을 접고 일상에 순응해갔다.

그렇게 계속, 평범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 사건은 일어났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기습적으로.

마치 옛날처럼.

[지루한 환상에 지쳐버린 당신, 현실로 깨어나겠습니까?]

마치 상태창처럼 흐릿하게 눈 앞에 나타난 메세지가 보였다. 그 메세지 아래엔 '예'와 '아니오'가 있었다. 마치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처럼 두 개의 선택지는 눈 앞을 떠나지 않았다.

현실로 깨어난다니, 그 얘기는 설마.

나는 침음성을 삼켰다. 이제는 흐릿한 현실 세계의 기억이 머리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살 어린 동생 하나. 전역한 군대의 소대원들과, 대학 동기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

지루한 환상보다는, 어쩌면 지루한 현실이 낫지 않을까.

적어도 현실엔 내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와, 피가 섞인 가족들이 있다. 아무런 자극없이 이대로 하루하루를 낭비하느니, 차라리 현실로 돌아가 새롭게 살아갈 목적을 만들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은 짧았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어느새 검지 손가락은 '예'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이 나의 손가락을 다급히 멈춰세웠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가는 게 맞겠지.


나를 떠났던 소녀들도 최소한의 작별 인사는 전했다. 그런데 어찌 내가 아무 연고도 없이 이곳을 떠나겠는가. 그것은 연의 깊이를 떠나서 상식과 도리의 영역이었다.


낡은 이불을 거두고 침대에서 일어선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능력이 발동되며 소녀들의 위치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일주일, 나는 나와 함께 했던 소녀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전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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