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무튀튀한 황색이, 지천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새로운 탄생을 대비하는 초목들의 푸르름이라고 일컬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것들은 그저 다시 솟아날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죽어버린 식물들이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는 무너졌다. 건물 잔해들이 즐비해 있고, 정체모를 덩굴들이 무너진 과거의 영광을 대지에 속박하듯, 잔해들을 타고 기어올랐다. 초목은 그 색을 잃고, 철의 숲은 그 위광을 잃은 광경 속에서, 오직 하늘의 별바다만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자연이 만든 도시가 무너졌고, 인간이 만든 도시가 무너졌다. 하늘 아래 모든게 무너졌다. 세계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다.


가히 세상(世上)이 무너져내렸다고 봐도 좋을 광경이다.


한때 내가 지켜내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렸다.


이곳은 키보토스. 더 정확히 말하면 키보토스의 잔해.


얼마 걷지 않아 눈에 들어온 꺾어벼린 표지판이, 내가 이곳이 키보토스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나는 선생이다. 키보토스에 와서, 한 번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돌아온.


나는 내가 이 세계에서 그리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능력이 있는 편도 아니였고, 결국 모든건 스토리라인을 알아서 유능해보였던 것 뿐이다. 정답지를 보고도 문제를 맞추지 못한다면 그건 병신조차 되지 못하지 않나.


게임의 '선생'은 인간적이고, 유능한 인물이였다. 주인공에 걸맞을 만큼. 나는 아니였고. 그래서 나는, 내가 죽을 때, 내가 없어도 이 아이들이라면 분명 멀쩡한 생활을 영위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죽었다.


[아직 살아있는 학생이 남아있다면, 학생 대피소로 모여주세요.]


찰박, 바닥에 고인 물이 내 발걸음에 튀어올랐다.


많은 일이 있었다. 학생들이 나를 싫어하게 될 일도, 증오하게 될 일도.


학생들이 나를 반길까. 가자마자 몸뚱이에 구멍이나 숭숭 뚫려서 죽어버리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으나, 결국 나는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무얼, 선생이란 결국 학생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겠나. 비록 학생들에게 미움 받을지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사실, 옛날의 키보토스는 어딜가든 볼거리가 있는 도시였다. 그게 비단 하늘을 뚫을듯 높이 솟은 첨탑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였다.


어딜가든 웃고있는 학생들. 길을 걷고 있노라면 포근한 웃음을 지은채 선생님, 이라며 다가오는 학생들. 나는 그런 것들이 좋았다. 좋아하는 것들은 발을 멈추게 한다. 여기서 나오는 정체는, 덫에 걸린듯한 감각이 아닌, 기분좋은 무언가다.


그러나 이제 키보토스에는 그런게 존재하지 않아서, 나는 걸음을 멈추는 일 없이 빠르게 목적지로 걸어갈 수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외부인을 거부하는듯 우뚝 세워진 칠흑색 벽이 나를 맞이했다. 


슬쩍 보이는 내부 모습은 이전의 키보토스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였으나, 그럼에도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정문을 바라보면, 수많은 학생들이 총을 들고 사주경계를 하고 있다. 밀레니엄, 게헨나, 트리니티, 심지어는 아리우스까지.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조금 헤진 교복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생각해보면 조금 웃긴 일이다. 그렇게나 서로 투닥대던 학교들이 지금은 그 세기와 신념의 벽을 허물고 단결하고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는 아이들의 눈에는 살기위한 열망이 존재할 뿐, 서로의 등을 맡긴 타학교 학생을 향한 불신따윈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명분이나 권력구도따윌 신경쓰지 않고 모두가 함께하는 광경. 내가 바라마지 않던 결과는 바라지 않았던 최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누구냐!"


"선생님이란다."


철컥, 하는 소리. 무기질적인 총구가 나를 향해 겨눠졌다. 옛날의 나였으면 여기서 꽤 버벅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학생에게 총을 겨눠지는 경험은 다수 있었다.


"살려줘."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지랄발광하며 양손을 들며 목숨을 구걸했을 과거의 나와 다르게, 지금의 나는 얌전히 손을 들고 침착하게 목숨 구걸을 할 수 있었다.


그거 알고 있나?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상황이 개좆됐을때 좆됨을 받아들일 수 있냐없냐의 차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과거의 나라는 하찮은 존재에서 벗어나 하나의 어른으로 우화했음을 세상에 증명했다.


"뭐하는거야?"


이제 이 개좆창난 상황을 탈출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냥 어른이 아니라 개쩌는 어른이 될 수 있었을테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내가 한층 더 성장할 기회를 앗아가고는 하는 것이다.


내 뇌 속의 무수히 많은 뇌세포들이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6974개쯤 생각해놨으나, 아쉽게도 그 방법들은 폐기해야할 일이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내 뇌세포들의 노력을 짓밟은 여성의 목소리는 시야 밖에서 들려온 것이였다. 나는 조금 익숙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으나, 새하얀 팔이 우악스럽게 시야의 사각에서 튀어나와, 내게 겨눠진 총을 움켜쥐었다.


그거 알고 있나? 여고생은 총열을 구부릴만한 악력을 지니고 있다는걸? 어떻게 알았냐면, 나도 딱히 알고싶진 않았다. 다만 그저 그 총의 주인일 이름모를 게헨나 여학생에게 애도를 표할 뿐이다.


"뭐하는거야?"


그녀는 다시 한번 그렇게 물었다. 불어온 바람에 그 아이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칙칙함이 가득한 세상을 유영하는 비단결같은 분홍은, 잠시나마 세상에 싱그러움을 가져다 주었다.


"미, 미카 님...?"


"뭐하는거냐고."


찬란히 빛났던 황금색 눈이 게헨나의 학생을 향했다. 한 때 가을의 가장 풍요로운 밀밭을 담고 있던 눈은, 아까보았던 탁한 황색의 풀더미와 같이 부패한 어두운 감정들을 담고 있었다.


"수, 수상한 사람이 접근해서, 겨, 경계를........"


아쉽게도 그녀의 보고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에게 질문했던 여성이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타격음보단 파공음에 가까운 소릴내며 3m쯤 날아간 아이를, 여성은 무표정하게 뒤쫓았다.


"수상한 사람?"


이번에 들린 소리는 총성이였다. 한번, 두번, 세번. 그 아이의 비명에 붉음이 묻어날때까지, 그녀는 총질을 계속했다.


"수상한 사람? 수상한 사람? 수상한 사람?"


그녀는 망가진 인형처럼 그렇게 말했다.


"네 까짓게 왜 그걸 결정해? 저 사람은 감히 네가 총을 겨눠도 될 사람이 아니야. 죽어. 여기서 죽어. 소라사키 히나한테는 내가 전해줄게. 넌 아마 내 자비로운 처사에 감사해야할꺼야. 그 머저리가 이 꼴을 봤다면 넌 진즉에 머리가 없어져 있었을테니까."


그녀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러니까, 미소노 미카는, 과거 나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 TOP5에 들던 학생이였다. 솔직히 다 또이또이하게 날 좆같아했어서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긴한데, 굳이 가리자면 그렇다고.


그래서 나는 미소노 미카를 만나선 안될 인물 목록 중에서도 상위권에 등재시켜놓고 있었다. 내 목숨은 차차하더라도, 기껏 도와준답시고 와놓고 오자마자 다진고기가 되서 개새끼 먹이가 되면 쪽팔리지 않겠나.


저 표현은 과장이 아닌 사실적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본 미소노 미카라면 기꺼이 날 어떻게든 좆되게 하기 위해 시체훼손쿠킹도 서슴치 않고 하겠지.


그러니 눈앞에서 일종의 학교폭력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내가 뇌정지를 일으킨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아닌게 아니라, 나한테 칼들고 쫓아오던 애가 갑자기 나를 지켜주면 누구라도 스스로가 처한 상황에 대해 고찰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미소노."


저게 고도로 발달된 나를 향한 돌려까기인지, 아니면 그냥 쟤가 맘에 안들었던건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미카를 말리기로 했다. 미카가 다음 총탄을 그녀에게 갈기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였다.


"아."


그제야 미카는 빳빳한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물이 가득 찬 컵처럼, 표면장력으로 아슬아슬하게 내용물을 담고 있는 컵처럼, 일렁이는 금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왼쪽 눈이 가려웠다.


"선, 생님."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왜일까. 나를 때려죽이기 위해서? 쏴죽이기 위해서? 모르겠다. 하지만 선생이 되어서 꼴사납게 학생에게서 도망칠수도 없지 않겠나.


"내가, 내가 혼내줬어. 선생님."


그러나 그런 내 각오와는 달리, 그녀가 내게 행한 것은 어떠한 폭력도 아닌 대화였다. 그것도 무겁고 질척이는 감정이 가득 담긴.


그렇게 타르같은 질감의 감정을 가득 담은 그 아이가, 마침내 나와 지근거리에서 마주보았다.


대중매체 속 아가씨 학교의 표본인듯한 트리니티. 그 트리니티를 관리하던,  단 세명으로 이루어진 조직 '티파티'. 트리니티의 한 축을 담당하던 소녀는 이제 흐른 세월을 증명하듯 피어난지 얼마 안된 꽃과 같은 싱그러움과 미약한 성숙함을 담고 있었다.


"저, 저 몹쓸 년이 선생님한테 총을 겨눴잖아. 그, 그래서."


사람의 얼굴이 참으로 다채로운 감정을 한번에 품을 수 있다는걸,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눈으로는 불안을, 입꼬리로는 환희를, 언어로는 그 너머의 무언가를, 미카는 담아내고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걸까. 모르겠다. 딱히 이해하려고 하진 않았다. 그녀들의 행동방식을 이해하는건 꽤 옛날에 포기했다. 무얼, 나는 그저 선생으로써의 역할만 다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친구한테 몹쓸 년이라고 하면 안돼, 미카."


"하, 하지만........!! 알았어, 알았어요, 마, 말 잘 들을게요. 선생님 말, 잘 들을게요. 그, 그러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미카가 내 오른팔 소매를 향해 슬그머니 손을 뻗어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내가 선생이라지만, 그녀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에는 불쾌함과 거부감이 남아있었다.


내 왼 눈을 직접 짓뭉갠 여자가 아니던가, 눈앞의 학생은. 내 눈알에 총열을 욱여넣어 터뜨린 여자가 아니던가.


"선생님........?"


미카가 놀란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무엇에 놀란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실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내 눈을 가져갔던 아이가 내게 총을 겨눴다는 이유만으로 한 아이에게 총탄을 쏜게 우습다고, 작게나마 생각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람.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내 죄의 증거.


미소노 미카에게 있어, 선생이란 그런 존재였다.


잠깐 옛날 이야기를 해볼까.


어느날을 기점으로, 선생의 행보가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생의 행보는 바뀌지 않았으나 곳곳에 수상한 흔적이 드러나곤 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게마트리아.


신뢰가 의심으로 바뀌고, 의심이 배신감으로 바뀌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명을 씌우는데 필요한 것은 적었고, 누명을 푸는데 필요한 것은 많았으니.


선생은 필사적으로 무죄를 호소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못했다.


선생이 미치도록 미웠으나 죽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 게마트리아가 모종의 이유로 협력관계인 선생을 경계해 키보토스를 침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


그러니 게마트리아의 흔적이 없어진 이상, 선생이 죽임당하는건 당연한 흐름이였다.


그렇게 선생은 죽었다.


눈알이 뽑혀 도망치다가, 다리가 없어 기어가다가, 팔이 없어져 기어가지도 못한 채, 끝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마치 하수구를 기는 버러지 마냥, 그렇게 죽었다.


복수심과 배신감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광기와 잔인함을 선사할 수 있는지.


미카는 가장 먼저 선생의 왼쪽 눈을 으깬 아이였다.


총알로 부술까 하니, 그러면 죽어버릴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손으로 부술까 하니, 감히 저런 것에 신체가 닿는 것이 혐오스러워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총을 눈알에 처박아 뭉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 미미, 카, 아아아........"


비명은 감미로웠고, 복수는 달콤했다. 


"사, 려, 저.......... 아, 프, 아..........."


선생은 끝에 가선 제대로된 단어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게 독이 든 성배였다는걸 깨닫는건 일주일도 채 안되서 일어난 일. 독이 전신에 퍼져 죽기 딱 좋을 즈음이다.


"가장 큰 방해물이 없어졌으니, 일이 이렇게나 수월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자랑스런 학생 여러분. 모두 당신들 덕분입니다."


새까만 양복의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이것은 선생이 과하게 뛰어났기에 일어난 일이였다.


그는 원작을 알았고, 원작의 선생보다 더 완벽하게 그들을 막아냈다.


그래서 그는 흥미로운 대상이 아닌, 필히 없애야할 위협적인 적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학생들의 손으로 그를 죽이게 하기로 했다.


학생들이 선생을 가지고 놀 동안 병력을 비축하고, 후에 진실을 알려 학생들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두 가지를 모두 잡는 묘책.


절반은 진실을 들은 자리에서 무너졌다. 절반은 분노해 총을 들고 일어났다. 미카는 후자였다.


첫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하고, 미카는 들것에 실린 채 구호기사단으로 이송되었다.


깨어나자마자 미카는 어느 구석진 골목으로 달려갔다. 미카가 선생의 눈알을 으깬 곳이였다.


골목의 벽에는 기분나쁜 그래피티처럼 굳어버린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마치 낙인과도 같이.


멍하니 그곳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선생님이 있을까봐였다. 다른 학생들이 선생님을 괴롭힌다면, 진실을 알아버린 미카가 선생님을 멋들어지게 구해주기 위해서. 왜냐하면 미카는 선생님의 공주님이니까.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선생님이 나한테 한 눈에 반해버려서 고백할지도 몰라.


미카는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생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였다.


그의 시체는 그 자리에서 태워버리지 않았나. 미카가 직접 그의 눈을 으깨지 않았나. 뭐가 공주님인지.


바닥에 질펀하게 늘어진 동그란 무언가가 있었다. 사실 동그랗다고 하기엔 어폐가 좀 있었다. 마치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같지 않나.


그걸 보자마자, 미카는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게 뭔지 깨닫고싶지 않았다. 이미 역치 이상의 절망을 맛봤는데, 이 이상 절망이 차오르면 미소노 미카는 필히 익사할 것이였다.


하얀색, 검은색. 길다랗게 늘어진 붉은 무언가. 터져버린 실핏줄. 바닥을 질펀하게 적셨던 모종의 액체.


충동적인 행동이였다.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간 미카는 그것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선생의 일부였던 고기덩이는 미카에게 접촉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양 힘없이 부서졌다. 불쾌한 끈적임과 미끈함.


날이 더웠다. 시체든, 고기든, 썩으려면 진즉에 썩을 날씨 아니겠나.


그래서 미카는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주인 잃은 개가 먹이를 탐하듯, '무언가'를 게걸스레 입으로 집어삼켰다.


왜 이런 짓을 한걸까? 저게 선생님의  마지막 흔적이라서? 그냥 미쳐서? 죄책감에? 


눈물이 나왔다. 웃은거 같기도 했다. 선생의 일부가 내 몸에 들어왔다는 것에 저열한 쾌감이라도 느꼈나? 그게 너무나도 기뻐서 울어버렸나? 아니면 그저 슬퍼서 울었나.


물컹거리는 식감. 끈적이며 미끈하고, 차갑다. 맛은 어땠나? 끔찍했나, 황홀했나, 그도 아니면 끔찍하게 황홀했던가?


모를 일이다.


다만 미카는 그 이후로 웃지 않게되었다.


어떻게든 웃어보려고하면, 그 날의 물컹한 식감이 혀를 멤돌아서 도저히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미카는 지금까지도 웃지 못했다.


'키보토스'라는 실험체에 흥미가 떨어진 게마트리아가 떠나버린 지금도, 미카는 웃지 않는다.


살아갈 이유도 잊었다. 의욕도 잊었다. 동화속의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왕자를 집어삼킨 공주에게 무슨 비전이 남아있겠나.


다만 총열을 누군가의 눈알에 처박았을때의 감촉이 손끝에 생생히 남아, 차마 밤마다 머리에 조준하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할 뿐이다.


그러다가, 선생님과 재회했다. 다시 만나지 못할것이라 생각했던 사람.


그는 그가 바닥을 기며 죽었던 날과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멋들어진 양복. 뒤로 깔끔하게 넘긴 검은 머리. 다만 왼쪽 눈을 포함한 곳곳에 누더기를 얼기설기 봉합한듯한 바늘자국이 남아있을 뿐이다.


저것들 전부가, 그들이 선생에게 행한 학대의 흉터이리라.


그래서, 봉합자국이 남아있는 왼쪽 눈을 마주하자마자, 미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뻗은 손은 허공을 유영할 뿐이였다. 발을 한발짝 뒤로 뺀 선생은, 조금 머쓱하다는듯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귀여운 감정이 담긴 표정과는 다르게, 한때 꿰찔렸던 눈은 확실한 거부의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옛날엔 이러지 않았는데. 옛날에 내가 손을 뻗으면, 선생님은 내 손을 잡아줬는데. 손을 통해 전해지는 열기가 좋았는데.


"선생님..........?"


물컹한 무언가가 손에 닿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봤지만, 거기 있는건 마녀의 손 뿐이여서. 미카는 눈앞의 선생이 당장이라도 없어질까 불안해 그를 불렀다.


선생은 여전히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옛날에는 그가 기뻐하는 것, 슬퍼하는 것, 설레하는 것이 모두 보였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니?"


"네, 네?! 죄,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냐아냐, 신경쓰지마렴."


선생은 자연스럽게 미카를 지나쳐, 아까 미카가 '혼내'주었던 학생에게로 향했다. 미카를 무척이나 괴롭게한 점은, 그가 미카가 싫었다거나, 혐오스러워서 피한 것이 아닌 그저 볼일이 없어서 피했을 뿐이라는 점이였다.


그게 마치,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같아서. 미카의 실수 뿐만 아니라, 미카와 선생이 함께 지내왔던 모든 나날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아니게 된 미소노 미카를 여기 버린채, 선생이 떠나버릴 것 같아서.


나는 아직도, 매일 밤마다 꿈을 꾸는데. 수많은 적을 마주한 당신이 내 앞에 서서, 나를 공주님이라고 불러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죄, 죄송합니다, 선생님인줄, 저, 정말 몰랐어요.......!"


"음........ 괜찮다니까 그러네. 정말 미안하면, 선생님 안내 좀 해줄레? 아무래도 이....... 뭐라고 해야하지. 대통합학교는 처음이라서."


가증스러운 년, 가증스러운 년, 가증스러운 년. 저 당황하는척 하는 꼴을 보라. 순진한척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꼴이라니! 미카는 저 년을 당장에라도 죽이고싶었으나, 선생의 존재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서, 선생님! 나도 해줄 수 있는데, 길 안내? 내가 더 잘알아, 선생님!"


어떻게든 선생님에게 뻗어지려는 손을 반댓손으로 꾹 누른채, 미카는 말했다. 그 표정은 마치, 겨우겨우 잡은 동앗줄이 끊어지려는걸 지켜보는듯한 표정같기도 했다.


"아냐아냐, 미소노는 여기서 있어야하는거 아니야?"


"하지만 그건 쟤도.......!"


"둘이 강한게 다르잖니."


정론이였다. 학생들이 게마트리아와의 전투 이후 학습한 적이 하나 있다면, 한계까지 강한 무언가와 싸울때에 수적우위는 그저 희생자로 치환된다는 점이였다.


그래서 정해진 규칙이 이것. 키보토스의 최강자들 중 한명씩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며 경계를 서는 것이다. 그리고 위험도가 높은 적이 나타나면 그 한명이 최대한 버틸동안 다른 일반적인 학생들이 달려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


그게 수적우위 무용론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의 미카에겐 어찌되든 좋은 일이였다. 어차피 이 대피소도 멸망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호위! 내가 호위해줄게, 선생님! 나 세잖아, 응?"


그래, 이거라면 되겠지. 선생은 최중요인물 중 한 사람이다. 선생의 호위라면 명분도, 이유도 충분하다. 미카가 선생에게 다가가려는 찰나였다.


"음......... 내가 미소노를 어떻게 믿고?"


그 말은, 벽처럼 미카에게 다가갔다.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해도, 저 말에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의 안에서 미소노 미카와의 신뢰도가, 오늘 처음 만난, 그에게 총을 겨눈 학생보다 낮다는걸 믿고싶지 않았다.


아까부터 병적으로 왼쪽 눈을 긁고있는 선생을 보고있자면, 심장이 멎는듯 했다. 아마 지금 선생을 놓친다면 그대로 심장이 멎고 말리라.


그러나 선생을 다시 만난 지금, 미카는 죽고싶지 않았다.


"제, 제발....... 응? 선생님...... 가이드, 가이드로 쓰면 되잖아, 응? 쟤는 호위로 쓰고, 아니면, 고기방패라도 좋아, 그것도 아니면..........!"


그래서 미카는 추하게 자비를 구걸했다. 그리고 결국 선생은 허락했다. 비록 그것이 미카의 말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일반 학생들이 많은 상황에서 미카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상황 때문에 어쩔수 없이 허락한 것이라도, 미카는 기뻤다.


"저 건물은 뭐니?"


"아, 저 건물은...... 밀레니엄의 '전지'가 있는 건물이예요. 뭘하시고 계신지 까지는...... 저는 모르겠어요..."


"그럼 저 큰건?"


"저건, 통합구호센터예요. 아무래도 얼마 전까지만해도 전쟁중이였다보니..... 구호센터를 가장 크게 지었어야했거든요.."


그 가증스런 년은 이제 선생이 편해진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선생의 관심을 다 앗아가는 꽃뱀년이 질투나 미칠 지경이였지만, 미카는 선생님에게 할 이야기를 고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둘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우선, 오해가 전부 풀렸다고 이야기하는거다.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화를 내시겠지. 그럼 잘못했다고 빌자. 용서해주실때까지, 빌자.


"선생님, 나........ 할 이야기, 있는데........"


"응? 얘기하렴."


"그게......... 둘이서, 얘기하고싶어."


"음...... 그건 좀......."


"무, 무기도 얘한테 맡겨놓을게! 그리고 선생님이랑도 조금 떨어져있을게! 부족하면, 그러면........!"


"아냐, 그냥, 음....... 응. 무기만 맡겨줘. 선생님으로써 해야하는 일이니까..."


멋대로 불러놓고 미안해? 아뇨, 괘, 괜찮아요! 이름모를 게헨나의 학생과 그런 대화를 나눈 선생이 미카를 따라왔다. 둘이 향한 곳은 인적이 드문 골목이였다.


"흣......... 그, 그게, 있잖아? 선생님?"


순간 그 날의 선생이 지금의 선생에게 오버랩되어 숨이 막혀왔지만, 미카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오해가 풀렸다는 것까지, 전부. 이제 선생님이 화내시겠지. 그러니까 빌자, 뭐든지 하자, 용서받기 위해서. 미카가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을 꿇으려던 찰나였다.


"그랬구나...... 그것 때문에 오자고 한거니?"


"어, 에?"


그건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였다. 일순 미카의 움직임이 굳을 정도로.


"그럴 수 있지. 너희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잖니. 너희 실수를 용서하고, 바로잡는게 내 '일' 인걸."


기뻐해야할 일이다. 분명. 선생이 용서했다. 용서해줬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기뻐해야할 일인데, 미카는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정말, 진심으로 용서한게 맞아?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선생님!"


"왜그러니?"


"사, 사랑한다고 해줘."


"뭐?"


"나, 나 사랑한다고 해줘. 아니면, 아니면 공주님이라고 해줘. 지금."


"갑자기......?"


"지금 당장........!!"


어쩌면, 그는 정말로, 나를 용서한게 아닐지도 몰라. 그냥, 이제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여서, 신경도 안쓰는 일여서 용서한다고 한걸지도 몰라. 왜냐하면, 왜냐하면.


미카는 차마 그 다음을 생각하지 못한 채, 선생을 바라봤다. 선생은 그저 만날때부터 계속 지었던 쓴웃음을 지은채, 가만히 서있을 뿐이였다. 미카는, 그게 참을 수 없이 두려웠다.


"그, 그러고 보니, 왜 나 미소노라고 불러? 옛날에는 미카라고 불러줬잖아. 고,  공주님인데. 나, 선생님의 공주님인데. 이상해."


미카는 애써 웃었다. 질나쁜 농담이니까. 곧 선생님이, 그런가? 미카? 라며, 불러줄테니까. 그러나 선생은 그러지 않았다. 미카는 조급해졌다.


"왜, 왜 내가 뻗은 손 피했어?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물어봐? 왜, 내가 선생님을 다치게 했는데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대해?"


미카는 조금 더 조급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스스로가 낸 고성에, 미카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미, 미안해, 선생님, 큰 소리내서? 그치만, 서, 선생님이, 아무말도 안해주니까, 자꾸,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사이인 것 처럼,"


"미소노 미카."


그의 부름에, 바닥을 향했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가면이 사라진 선생은 무척이나 피곤해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잘잘못 따지기나 사과나 받으려고 온게 아니란다."


양손으로 눈두덩이를 짓누르며, 선생이 말을 이었다.


"알고있니? 너희가 죽은 줄 알고 날 불태울때, 난 살아있었단거? 아, 그런 표정 짓지 마렴. 너희를 책망하려는게 아니란다.


불타면서, 나는 생각했지. 내가 뭘 잘못한걸까, 내가 뭘 해야했을까, 너희가 잘못한걸까, 너희를 내가 용서할 수 있을까."


선생은 스스로의 잘못을 찾지 못했다. 이 이상 더 해야할 것도 찾지 못했다. 그저 못된 어른에게 속은 어리석은 학생의 잘못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나 스스로를 비참하게 한 학생들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어서,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해를 그만두었다. 이해가 없으니 공감도 없고, 공감이 없으니 소통도 없으며, 소통도 없으니 인간적인 교류도 없다.


선생은 학생을 그저 학생으로 보기로 했다.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선생이 알고지내고, 교류해온 '미소노 미카'라면, 이런 행위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린 충분한 교류를 바탕으로한 신뢰가 있고, 신뢰가 있다면 이러지 않을테니.


그러나 그저 '학생'이라면. 그것과 함께했던 추억, 교류, 이야기, 그 모든 것을 배제한 그냥 '학생' 이라면.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학생'은 미숙하니까. 실수 할 수 있으니까.


선생은 '미소노 미카'를 용서할 수 없지만, '분홍머리 여학생'은 용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생의 미숙함을 용서하는게 선생의 '일'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말렴. 학생과 선생이 하기엔 부적절한 말이잖니. 사실 사과도 불필요하단다. 그게 내 일이잖니."


갈까, 라며, 선생이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미카는 움직일 수 없었다. 무서워서. 너무나도 무서워서. 선생과 미소노 미카에서, 그저 선생과 학생으로 변절되어버린 이 관계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나도 무서워서.


아까 선생이 피곤해하던 표정을, 미카는 본 적이 있었다. 티파티의 또다른 멤버이자 소꿉친구, 나기사가 조금 귀찮은 서류를 처리할때 짓던 표정이다.


그게, 지금 그와 연을 쌓았던 모든 학생들과 그의 관계였다. 선생과 학생. 조금 귀찮은 서류. 일.


미카가 그를 공격한 것도, 그가 미카의 편이라고 해주던 것도, 그가 미카에게 공주님이라고 해주었던 것도, 모든 추억과 과거와 절망과 이야기가, 전부 그에게는 일이였다. 이미 지나가버린. 큰 관심을 쏟지 않는. 상관이, 없는.


그러므로 미소노 미카도 그 정도의 위치였다.


"미, 미안해. 미안합니다, 죄송해요, 죄,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걸 깨달은 미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양손을 비비며 빌었다. 더러운 골목의 바닥에서, 트리니티의 정점에 선 인물들 중 하나가 그에게 빌고있었다.


오만했다. 오만한 판단이였다. 희망적인 관측이였다. 그가 화낼거라고? 그가 용서해줄때까지 빈다고? 미카가 생각해야할 것은 그에게 미움받지 않을 방법이 아닌, 관심이라도 받을 수 있는 방법이였다.


미소노 미카는 지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저를 다시 사랑해주세요'가 아닌, '부탁드립니다 인간으로써 저를 마주봐주세요 제게 일말의 관심이라도 나누어주세요' 라고 빌어야했다.


'미소노 미카'는 하나 뿐이고, 특별했으나 '분홍머리 여학생'은 하나 뿐이지도 않고 특별하지 않으니까. 뒤돌면 신경도 안쓰일만큼.


그러나 미카의 사과에도, 선생은 여전히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나 진짜 다할 수 있어. 다할 수 있어요."


조심스레 선생에게 기어간 미카는 살짝 고개를 올려, 선생에게 정수리를 내밀었다.


"응? 응? 머리, 머리 쓰다듬는거 좋아하잖아, 선생님. 마음껏 쓰다듬어도 돼. 그야, 나 선생님 꺼인걸. 나, 나 사실, 선생님이 머리 쓰다듬는거 싫지 않았어. 그냥, 그냥 한번 싫다고 한거였어, 응?"


"미소노."


"아, 이거론 부족해, 그치,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그러면 있지? 자, 여기, 선생님 사실, 옛날에 음흉한 눈으로 내 가슴 훔쳐보던거 다 알고있다? 가슴도 선생님꺼야, 응. 어, 어때, 선생님?"


"후우........ 미소노."


"아, 그, 그러면, 더 줄게! 내 소중한 곳까지, 전부 줄게 선생님! 나, 나는 선생님이라면, 응 괜찮아, 자, 손 줄레, 선생님? 내가,"


"그만. 학생이면 스스로의 몸을 소중하게 여기렴."


재회 이후 처음 들어보는, 강압적인 말투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선생이 학생에게 내미는 충고 내지 걱정이였다.


미소노 미카의 눈에 절망이 차올랐다.


"뭐든, 뭐든지 할게요. 버, 벗으라면 벗고, 지나가는 개한테 다리를 벌리라고 해도 따를테니까. 다른 것도, 다, 지금 당장 죽으라고 해도, 죽을테니까......


제, 제가 미친년이였어요. 제, 제 눈, 눈도 드릴테니까. 부족하면 다른 것도 더 드릴테니까, 하, 한번만,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


시, 싫어, 싫어요, 살려주세요, 사, 살려주세요.... 나, 저, 죽어요, 선생님이 나한테 그렇게 대하면, 나, 나 죽어... 마음이 죽어서, 나....... 그러니까 제발, 한번만......... 읏."


고개를 든 미카와 선생의 시선이 교차했다. 지금에서조차, 선생의 눈에는 곤란함 이상의 감정이 없어서, 미카의 눈에 절망이 가득 찼다. 그 무엇보다도 투명한 액체가 되어, 절망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미카는 완전히 절망했다.


"그, 그러면, 그러면요, 선생님."


선생님은 끝까지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써 봐주지 않겠지. 미카는 생각했다.


"시키는거 다 할게요."


아까랑 똑같지만, 다른 말이였다.


"죽여야할 애가 있으면, 내가 다 죽일게요. 트리니티 학생이건, 나, 나기 쨩이건, 세이아 쨩이건, 다 죽일게요.


필요한거 말해주면, 무슨일이 있어도 구해올게요. 바, 방해되지 않고, 얌전하게, 시키는거만 할게요."


미소노 미카는, 차라리, '말 잘듣는 학생'이 되기로 했다. 다른 '학생'을 한번 찾을때, 두번 찾아지는 학생이 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내, 내가...... 미카가, 말 잘들으면, 잘했어 라고, 한 마디만 해주세요. 마, 말 잘듣는 학생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선생님이 학생을 칭찬하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요."


선생의 눈에 찰나의 고민이 스쳐지나갔다. 미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심스레  개처럼 바닥을 기어 선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공예품에 닿듯 조심스레 양손을 선생의 손을 향해 뻗었다.


"..........음."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선생이 손을 빼지 않았다. 암묵적인 긍정이였다.


물론 선생이 책임감으로 이곳에 서있는 이상, 정말로 미카에게 그런 일들을 시키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미카가 정말로 선생에게 큰 힘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카가 장황히 지껄인 모든 맹세는, 선생에게 있어 '말 잘들을게요' 이상의 활자조합이 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분명, '학생'보다는 '말 잘듣는 학생'을 조금 더 예뻐하리라.


"그러니까, 착한 아이가 되겠다는 뜻이라면..... 당연히, 그만큼 칭찬을 해주겠지?"


".........아."


미카의 양손에 소중히 쥐어진 보물이, 가볍게 미카의 빰을 흝고 지나갔다.


미카는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뇌에 전기를 꽂아넣는듯한 자극이 전해진다. 마약을 한 적은 없지만, 세상 모든 마약을 단숨에 뇌에 처박는다해도 이것보다 덜 행복하리라.


"아, 흐, 헤, 고, 고마워, 선생니힘. 열심히 할게에, 나아......"


옛날에는, 미카도 선생님께 사랑 받는다는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의 사랑 하나를 온전히 받겠다는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지금 뺨을 스쳐지나간 한번의 손짓은 분명, 그 온전한 사랑의 찌꺼기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다. 지금의 미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 그 손짓 한번 만으로도, 아랫배가 울려대며 하반신이 젖어간다.


아마 미카는 이 마약같은 사랑의 파편을 느끼기 위해 매일같이 선생님을 쫓겠지. 그러다 한번이라도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시면, 하루종일 밑을 적시다가 침대 위에서 스스로를 위로하겠지. 


그렇게 축축히 젖은 침대에 누우면, 어쩌면 있었을지 모를 선생님과의 행복한 미래를 망상하며 후회하리라.


그러나 땅에 떨어진 공주는, 한번 맛본 사랑의 맛을 잊지 못한채 끊임없이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발악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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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움약 언제 나오냐고!!!!!!!!!


다음화는 미움약 성분이 부족해지면 쓸지도 몰?루.....


1화 쓰고 튀는 어쩌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