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뜨고 침대에 앉았다. 방금 막 잠에서 깨었지만 여전히 잠기운이 많이 남아있었다.


마지막으로 엔터프라이즈를 본 지 일주일쯤 되었다. 그전까지는 확실히 그녀에게 감정이 남아있던 것 같다. 나 스스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그녀가 나오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항에 있던 다른 함선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내게 없었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단점은 이제 딱히 사는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 지금부터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야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에는 또 같은 일이 생길까 두렵고 단순히 내 취미들만을 즐기기에는 금방 질려버릴 것 같았다. 다른 것들은 또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하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고양이나 키워볼까"


.

.

.


인터넷을 뒤져서 나는 고양이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다. 화장실, 모래, 사료, 밥그릇, 스크래치, 장난감, 간식 그리고 이것저것.... 이제 고양이만 데려오면 될 일이었다.


"길냥이 하나 주워오면 되겠다."


뭔가 기분이 들뜬다. 그냥 고양이를 찾기 위해 옷을 입는 것, 신발을 신는 것, 집을 나서는 것, 하나하나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긍정적인 감정들을 일깨워주는 듯 했다.


어릴 때 애완동물을 꼭 한 번 키워보고 싶었는데 이런 일을 계기로 키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자를 잊으려고 고양이를 키운다니 뭔가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무렴 어때? 잘만 키워주면 되지. 적어도 사람이라면 끝까지 책임지고 키워야지.'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집 밖을 나와 근처를 계속해서 어슬렁거렸다. 본디 길고양이라 하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역시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냐옹!


길냥이 답지 않은 고급스런 흰 색이 눈에 띄는 고양이였다. 겁도 없는지 내 다리에 자기 얼굴을 계속해서 비벼댔다.


"아가야, 나랑 같이 살자."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흰 고양이는 냐옹거리면서 내 몸에 앵겨왔다. 그러다가..


-하악!


갑자기 녀석이 위협을 하는 듯한 소릴 내면서 자기 몸을 부풀렀다. 그리고는 내 뒤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도 놀라 내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입니다.....지휘관님. 그리고 이제서야 사과드리게 되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 곳에는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벨파스트가 있었다.


"난 이제 지휘관이 아니지만 말이야. 뭐, 대충 모항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엔터프라이즈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 하지만 내그 돌아갈 일은 없을 거야. 애초에 그 녀석이 버젓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잖아? 넌 가서 걔한테 아양이나 떨어. 원래 그러고 싶어하지 않았어?"


내 마음에 쏙 드는 귀여운 고양이를 만난 이 순간을 방해 받아서인지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 입에서 평소 하고 싶었던 말들이 폭포처럼 쏟아져나왔다. 엔터프라이즈 에게 말할 때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정말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지휘....주인님. 그럼에도 저 벨파스트는 과거를 바로잡고 주인님께 용서를 구하고자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지휘부에 돌아오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돌아간다...."


나는 나를 생각했다는 듯이, 그리고 다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벨파스트를 보면서 말했다.


"그래. 돌아갈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녀석을 죽여버린다면 어느정도 모항이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겠지. 내가 너희의 옆에 있어준다면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대해준다면, 너희는 죄악감을 버리고 다시 아름다운 소녀가 될 수 있겠지."


벨파스트의 얼굴에 약간의 의문이 서린 듯 했다. 그렇지만 난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를 용서해줄 수 있어. 사실 당연한 일이야. 난 이제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거든. 하지만 그건 내 문제고 너희는 달라. 너희는 책임을 져야해."


"그....게 무슨 소리신지?"


벨파스트는 용서해 줄 수 있다는 말에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책임이란 말에 불안감이 생긴 듯 했다. 그리고는 다시 결연한 듯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저희가 어떤 책임을 지면 되는 거죠? 전 주인님과 다시 함께할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습니다. 몸을 바칠까요? 평생을 노예처럼 살까요?"


이 녀석이 뭐만하면 몸을 바치겠다고 말하는 것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너희 지휘관에게 돌아가. 너희가 선택한 결과를 받아들여. 평생 그렇게 살아."


"..네? 그..그런..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벨파스트는 애원하듯 말했다. 방금 전까지의 결연한 태도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저 바닥을 기면서 내게 말했다.


"싫어요. 그건...그건 정말 안됩니다!"


"솔직히, 너네, 내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 그냥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그걸 피하려고 고통스러움을 피하려고 하는 거잖아."


"아니...아니에요! 저희는, 저는 정말 주인님이 필요합니다. 제발...제발 돌아와 주세요. 로열 네이비와 모항의 모두가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글쎄, 난 엔터프라이즈에게도 말했는데. 나와 엔터프라이즈의 서약반지. 가져와. 가져오면 모항에 가보도록 할게."


"서약...반지...서약반지? 하하하, 어...어딘가엔 있겠죠. 있을 겁니다. 지휘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사실 벨파스트도 알 고 있을 거다. 서약반지 같은 거 못찾을 거라고 이미 엔터프라이즈가 박살을 내버렸는데 찾을 수 있을 리가 있나.


한껏 무기력해져서 돌아가는 벨파스트와 내 품에 꼭 안겨있는 흰 고양이를 보니 뭔가 좀 더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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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게 없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지적할 거 지적해주시면 고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