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와 빌런이 존재했던 세계.

나는 최고의 히어로중 하나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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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자타공인 최고의 히어로였다.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도왔고, 빌런에게 맞서고, 정의를 관철하며 살아왔으며,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빌런 조직을 앞장서서 소탕했다.

그토록 바라던 평화로운 세계가 이루어졌다. 남은 빌런은 경찰이나 군대로도 충분히 대응 가능한 잡범들뿐.

난 실업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며 히어로를 그만두었다. 평화로운 세계에 히어로는 필요 없으니까. 


생계를 위해 취업 박람회에 들리자 그곳의 사람들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히어로라는 직업은 위험수당을 많이 받는 직업이었으니까.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하하.. 일자리좀 알아보려고요."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저금해둔 돈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사치는 부리지 않았다.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최대한 검소하게 살았지만 돈이 부족했다. 난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취업 박람회를 돌아다녔다.


"...선생님, 저희 어머니는..."

"시온씨, 죄송합니다. 하지만 말씀 드렸잖습니까."

리그레 종합병원. 이곳은 이 나라 최고의 의사들이 모인 커다란 병원이며, 동시에 나의 어머니가 입원하신 곳이었다.

내가 히어로를 하며 벌었던 돈의 대부분은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의 시한부 인생을 최대한 늘리고, 병을 고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쓰였다.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지만 언젠가 고칠 방법이 나오기를 바라며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었다.

50년치의 병원비를 한꺼번에 미리 지불한 덕에 돈은 없어졌지만 어머니의 목숨값이라 생각하면 싼 값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렇게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한 나는 때로는 막노동, 때로는 일용직, 어떤 날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고, 그렇게 십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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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 십년동안 변한 것은 우리 전 히어로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었다.

십년 전 마지막 빌런 조직이 소탕된 것으로 나를 포함한 히어로들은 각자의 짐을 내려놓고 사회인이 되었다.

그렇게 히어로라는 직업은 사라졌지만, 히어로로서 쌓아올린 부는 없어지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경기가 점점 안 좋아지며 히어로였던 사람들의 이미지는, 친절한 이웃에서 중세시대의 유대인 같은 놈으로 점점 바뀌었다.

히어로들의 집을 털다 잡힌 도둑은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동정의 시선을 받았고, 그 도둑을 잡아 법적 대응을 하려던 전 히어로에게 여론의 뭇매가 쏟아질 정도였다.

이런 사회의 흐름은 나에게도 악영향을 미쳤다.


"시온씨 그 동안 고마웠어요. 근데, 우리도 많이 힘들어가지고말야.."

"..네. 이해합니다."

그 동안 일해왔던 곳들에선 더 이상 나를 써주지 않았다. 나를 고용하는 것만으로 배달 앱에서 별점테러를 받거나 욕을 먹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만둔 일자리만 해도 대여섯개였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노력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고. 

전 히어로였던 나를 고용하는 곳은 별로 없었기에 월급을 더 적게 받는 조건으로 일자리를 더 구했고, 최저시급보다 더 낮은 봉급을 받으며 하루종일 일해야했다.

우리는 한때 히어로였고, 중세의 유대인이었으며, 지금은 소련의 부르주아 취급을 받고 있다.

경제는 점점 안좋아졌고, 시민들은 부의 분배를 원했다. 이 자본주의의 세계에 공산주의적인 주장이 점점 힘을 얻어가며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는 히어로세라는 새로운 세금을 만들어냈다. 전 히어로였던 사람들의 통장과 지갑에서 쥐어짜낸 돈으로 경제를 부흥시키려 한 것이다.

몇몇 히어로들은 일찌감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떠났다. 그러자 정부는 전 히어로들의 여권을 전부 정지시켰다.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도록. 이 정책에 대해 반발했던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빌런이라는 토끼들이 전부 잡혔기에, 사냥개는 하나둘씩 가마솥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냥개를 가마솥에 쳐넣은 정부는 푹 익혀 뼈에서 발라낸 고기들을 시민들의 입에 골고루 넣었다.

그렇다면 비쩍 마른 사냥개는 어떻게 될까.

봉급을 받아 돌아가는 나를 정부쪽 사람이 불러세웠다.

"구시온씨?"

"네?"

살다살다 국세청에서 나를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큰 죄 지은거 없이 성실하게 살았다 생각했는데.

그들의 목적은 말 안해도 알 수 있었다. 히어로세 미납이겠지.

"죄송합니다만.. 전 진짜 돈이 없는데요."

"하하.. 농담하지 마세요. 최고의 히어로중 한사람이셨는데 돈이 없으시다구요?"

"네."

"..그게 말이 됩니까? 다른 히어로들보다 두배는 더 벌었을 양반이 빈털터리라는게 말이 되나요?"

"제가 지금 갖고 있는 돈은 오늘 일용직 뛰고 받은 이거밖엔 없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흰 봉투 한장을 꺼내 보여주었고, 곧바로 국세청 직원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거 오늘은 굶어야겠구만.

봉투 안을 몇번이고 확인하던 그녀는 기어이 내 집까지 따라왔다. 숨기고 있는 재산 같은건 하나도 없었기에 그녀를 집에 들이며, 나는 말하였다.

"원하시는 만큼 뒤져보셔도 됩니다."

안방, 화장실, 거실과 부엌의 구석구석과 몇 안되는 가구들을 꼼꼼히 살핀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구시온씨, 국세청에서 왔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들려왔다.

내가 문을 열자마자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까지 마구 뒤지며 난장판을 만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정부는 나를 본보기로 삼기 위해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한 것이다.

그렇게 세무조사를 수 차례 받았지만 국세청에선 나에게서 히어로세를 받아내지 못했다. 

이젠 내 결백이 드러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잠을 청했지만, 머지 않아 그 생각은 글러먹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 나는 아침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바깥이 너무나도 소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대문을 누군가가 두드리고 있었다.

"구시온씨, 경찰입니다!"

아니, 경찰이 어째서 우리집에?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고,

내 손엔 수갑이 채워졌다.

나는 그렇게 히어로세 체납으로 구속되었다.

구속되어 경찰차로 향하는 나를 향해 흥분한 시민들의 자갈들이 마구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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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서 먼지 한 톨 안나올리 없다. 그런생각으로 정부는 나를 털었고,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안나오자 그들은 엉뚱한 주머니를 털었다고 생각했다.

기자들은 최고의 히어로였던 내가 세금 하나 제대로 못낼 정도로 가난한게 말이 되냐는 내용의 뉴스들을 뽑아냈고, 나를 본보기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집단광기와 함께 점점 커져갔다.

갖고 있지도 않은 몇 십억 이상의 돈을 내지 않은 죄로, 나는 구속되었고 재판장에 섰다.

판사도 검사도 국선 변호사도 내 편이 아니었고, 진실을 아는 사람들도 불똥이 튀는게 싫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나는 무기징역을 받아 특수 감옥에 수감되었다.

먹을 부위도 없는 비쩍 마른 사냥개는, 그렇게 케이지에 갇혀 썩어가게 되었다.


감방 벽에 몸을 기댄 채, 나는 내 인생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처음으로 사람을 구했을 때?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 아니면 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세무조사를 몇번이나 기꺼이 받아들였을 때?

되짚어보면 되짚어볼수록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왜 이런 사람들을 위해 힘을 썼을까.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히어로 따위는 하지 않았을텐데.


그렇게 내 몸과 마음 양쪽 모두 곰팡이가 피어갈 때쯤, 교도관이 감옥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 곳은 면회실이었다. 그리고 내 맞은 편엔 교도소장과 정부의 높으신 분이 앉아있었다.

"구시온씨,"

"네. 무슨 용건이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새로운 빌런 조직이 나타났고, 그들이 국가 전복을 목표로 활개치고 있으니 히어로로서 다시 한번 힘써라. 라는 그들의 말을 듣고 내 가슴쪽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북받쳐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나는 이게 뭔지 생각했다.

열정? 그럴리 없다. 내 열정은 이미 오래전에 식어버린지 오래다.

사명감?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하던 나의 귓가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시온씨, 만약 당신이 히어로로서 다시 한번 힘쓴다면. 귀하가 납세해야 할 히어로세를..."

아. 알았다. 이 감정은

"...절반정도 감면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분노다.

나는 손가락 하나를 핀 다음 그들과 나를 갈라놓고 있는 투명한 벽에 지그시 갖다댔다.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강화유리가 맥 없이 깨져버렸다.

두려움에 휩싸인 채 주저앉아 눈 앞의 죄수를 바라보던 정부의 인물과 교도소장을 내려보며, 죄수번호 4882번 구시온은 말하였다.

"꺼져."

"구시온씨, 그.."

"말귀를 못알아들었나보네. 알기 쉽게 차근차근 말해줄테니 새겨들어. 당신네들을 위해 힘쓰고 싶은 생각은 좆도 없으니까. 두개골이 아작나기 싫다면 당장 꺼져."

벌벌 떨며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에서 콘크리트제 벽쪽으로 시선을 돌린 구시온은 그대로 새끼손가락으로 벽을 찔러 구멍을 뚫으며 말을 이었다.

"셋 셀 동안 안 꺼지면 다음에 뚫리는 건 당신네들 두개골이 될거야."

구시온은 하나를 세기도 전에 허겁지겁 도망가는 그들에게서 진압봉을 든 채 벌벌 떨며 자신을 바라보는 교도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하였다.

"면회도 끝났는데 돌아가죠."

"도.. 돌아간다뇨? 왜...?"

"아니 뭐.. 어차피 밖에 있어봐야 뼈빠지게 일하고 하루 겨우 먹고 사는데, 그럴 바엔 여기 있는게 더 편하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가 감방으로 돌아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더 이상 저것들이랑 엮이기 싫다. 삶다 만 사냥개에게 다시 토끼를 잡으라는 정부도,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안냈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씌운 사법부도, 불똥이 튀는게 싫어 입을 다물었던 놈들도 전부. 

놈들이 망하든 말든 나랑은 이제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내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몇 주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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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히어로중 하나인 구시온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정부는, 다른 히어로들도 설득하려 했다. 그렇지만 정부의 부름에 응하는 히어로는 단 한명도 없었다. 쓸모가 없어지면 가마솥으로 들어가게 될테니까.

신흥 빌런 조직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대해졌다. 정부에 반감을 품은 전 히어로들이 하나둘씩 가세했기 때문이었다.

경찰도 군대도 당해내지 못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는 전 히어로들에게 공식적으로 머리 숙여 사과했으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또다시 교도관이 나를 면회실로 이끌었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정부쪽 인물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왔지? 사과 하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게 아닐텐데?"

"구시온씨, 진짜 염치 없는 부탁인것도 알고, 귀하가 이 나라를 용서할 생각이 없으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그냥 꺼져. 두개골이 으깨져야 정신을 차리려나?"

"두개골이 으깨진다 하더라도, 제발 한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신이 태어난 이 나라를 위해, 제발 한번만.."

"제발.. 제발이라.. 좋아. 내가 지금 찾고 있는게 있거든? 그것만 찾으면 도와줄게."

내 말을 들은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몇 번씩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며 나에게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었다.

"...네놈들 양심."

화색이 돌던 그들의 얼굴은 회색으로 변했다.

"...네?"

"수북하게 털 난 네놈들 양심부터 찾아서 다시 오라고."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닫은 채, 면회실을 나가려 했다.


몸을 돌려 면회실을 나가려는 시온을, 정부의 사람중 한명이 불러세웠다.

"구시온씨, 만약 당신이 끝까지 협력하지 않는다면 저희도 최후의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습니다."

들은 체도 안하며 면회실을 나가려던 죄수번호 4882번 구시온에게, 그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리그레 종합병원."

시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곳에 당신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죠?"

시온은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희도 이런 방법은 쓰고싶지 않지만, 만약 당신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대로 시온에게 머리를 잡혀 두개골이 으스러졌기 때문이었다.

"니들 역린이라는 말 알지?"

시온은 정부에서 온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으깨진 시체의 머리를 벽에다가 쾅쾅 박아대며 말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건드려선 안될 걸 건드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보여줄게."

잠시 후 시온은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채, 한때 교도소였던 돌무더기를 뒤로 한 채 어디론가 향하였다.


https://arca.live/b/regrets/77948422

최근에 쓴 요걸 좀 더 늘여서 내용을 추가함.

이 뒷이야기야 뭐 신흥 빌런 조직에 조건부로 합류하고, 나라는 결국 가마솥에 넣었던 사냥개들에게 마구 물어뜯겼다는건데, 뒤쪽에 무슨 후회를 넣을지 생각도 안나가지고 단편으로 끝내게 되었음.


사족으로 구시온은 솔로몬의 72악마중 11위의 이름이며 시온이라는 이름도 있을법하고 구씨도 있을법해서 채용한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