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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으로부터 며칠이란 시간이 지나, 완전히 기력을 되찾은 아즈사는 구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트리니티의 거리를 보며 옛 향수를 느꼈다.

지금의 트리니티는 아즈사의 고향, 아리우스 자치구를 떠올리게 했다.

갈 곳을 잃은 증오는 학생들에게서 활력을 앗아갔고, 거리에 감도는 분위기에 중력이 배가 된 듯한 중압감을 부여했다.

무게가 있을 리 없는 공기가 무거웠다. 다가올 전쟁, 그리고 죄 없는 이를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죄악감이 학생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구금 전과 바뀐 것은 학생들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거리의 풍경도 전과 달랐다. 식료품점과 총탄 등을 구할 수 있는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앞으로 올 전쟁에서 식량과 총탄 등은 중요한 전략 물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통제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었으나 그 탓에 학생들의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었다.

철저한 정보 통제 덕분에 DU와 아비도스 접경지대에서 벌어진 처참한 승리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티파티가 민간 식료품점까지 단속하는 이유를 모를 정도로 학생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잔혹한 전쟁이 될 것이다. 단신으로 수십의 적을 쓰러트리는 동화 속 영웅의 등장 따위는 기대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학생의 헤일로가 파괴될 것이다. 

겪어본 적도, 겪으리라 생각한 적도 없었던 전쟁을 향한 불안감에 지배된 학생들은 이젠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다.

살아는 있지만,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하는 그 허무한 모습은 아리우스 분교에선 흔히 볼 수 있었던 인간군상 중 하나였다.

‘..사오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래서였을까? 아즈사는 활력을 잃은 트리니티의 소녀들을 보며 옛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오리, 미사키, 히요리, 아츠코.

선생에게서 그녀들이 마담의 저주에서 벗어나 자신이 걸어갈 길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나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그녀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선생의 처형 방송을 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품었을까.

만나고 싶다. 돌연히 평소에는 잊고 있던 스쿼드의 멤버와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즐거웠던 기억 따위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들은 아즈사와 함께 그 고통을 버텨냈던 가족.. 이라 불러 손색이 없는 존재였다.

비록 불편하고 어색한 존재라고는 하나 그간 함께 보내온 시간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아무리 그리워도 그녀들과는 만나선 안 된다. 스쿼드의 멤버만이 아니라 보충수업부의 모두와도 이제 만나서는 안 됐다.

아즈사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 그 감옥에 보낸 여드레라는 시간은 시라스 아즈사라는 인간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선생의 가르침이 아닌 마담, 베아트리체의 가르침을 따르는 증오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아즈사는 지금부터 선생이 원하지 않았던 일을 행할 것이다. 그토록 거부하고 혐오했던 증오에 몸을 맡긴 복수귀가 될 것이다.

하나 아즈사가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모두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선생의 가르침을 배신하는 배신자는 한 명이면 족하다.

다시 결심을 다진 아즈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 결심을 더욱 확고한 것으로 하기 위해, 그리고 아직 죽지 않고 가슴 속에 남은 시라스 아즈사라는 인간을 확실히 죽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 트리니티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기피되고 있는 그 골목.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임에도 이젠 집처럼 익숙한 골목을 향해 아즈사는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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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며칠 만에 몰라보게 변한 트리니티의 거리처럼 선생이 처형된 골목도 아즈사가 기억하는 것과는 달랐다.

쓰레기가 나뒹굴던 골목에는 필시 아름다운 순백의 꽃을 피웠을 시든 백합이 빛을 잃은 채로 쓰레기처럼 도처에 널려 있다.

뒤늦게라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골목을 방문한 학생들은 당사자의 마음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애도를 바쳤다.

그러나 그녀들의 애도는 그녀들의 얄팍한 마음처럼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도 되지 않아 시든 꽃들은 악취를 풍기지는 않았으나 연갈색으로 변질되어 죽음을 연상케 하는 흉흉한 모습으로 변하였다.

어떤 의미로는 이 장소에 걸맞은 모습으로 변했다고도 볼 수 있었으나 아즈사는 저 꽃들이, 그녀들의 마음이 역겨워서 참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일방적이었다. 선생은 변명조차 하지 못한 채 약식이란 말도 아까운 엉터리 재판 끝에 사형당했다.

아니, 선생에게 가해진 행위를 사형이라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적법한 절차에 따른 형의 집행이 아닌 사적인 감정만이 담긴 린치에 지나지 않았다.

선생은 모든 의지를 짓밟히고 변명의 말조차 남기지 못한 채 이곳에서 재로 변했는데 그녀들은 감히 애도의 말을 남긴단 말인가?

“…….”

아즈사는 애도의 헌화를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꽃을 밟는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역겨웠다.

마치 꽃이 아니라 구토나 흐물흐물해진 시체를 짓밟는 것 같은 거부감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와 머릿속에 가득 찼다.

꽃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간 끝에 선생의 몸이 타오른 그 자리에 도착한 아즈사는 무릎을 꿇어 ‘그것’을 가린 시든 꽃들을 치웠다.

그러자 바닥에 깊게 새겨진 트리니티의, 키보토스의 죄악이 두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남은 죄악, 선생의 몸이 불타 그을린 자국은 마치 자신을 봐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라기에는 너무나 작고 결여된 형태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일방적인 애도에 가려진 키보토스의 죄악을 손으로 어루만진 아즈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내리는 소리와 함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헛되다.”

베아트리체는 모든 인간은 살해 의지라는 원죄를 품고 있기에 살인자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여겨서 한 말은 아니었다. 베아트리체에게 있어서 증오도 사상도 학생들을 조종하기 위한 도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도구에 지나지 않은 헛소리를 학생들은 자신의 손으로 증명해버렸다.

살인자가 돼버린 그녀들은 죄악감에서 도망치기 위해, 아니면 멈추는 법을 잊은 증오를 해소하기 위해 서로를 미워하다 자멸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전에 게마트리아가 오망성이라 부르는 괴물의 손에 자멸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된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그 금언처럼 이 또한 헛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즈사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헛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이 증오를 쏟아낼 수 있다면 헛되고 의미 없는 일이라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즈사는 그 첫걸음으로 아직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던 과거의 아즈사를 죽였다.

다음은 누구를 죽여야 할까, 키리후지 나기사?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는 티파티와 정의실현부의 철통같은 경비를 뚫어야만 한다.

보급도 확실치 못한 지금 그녀를 노리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미소노 미카, 시라누이 카야, 켄자키 츠루기, 하네카와 하스미, 우타즈미 사쿠라코….

많은 후보의 이름이 떠오르고 하나하나 작전의 성공률을 계산하던 도중, 돌연히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의 사고가 멈추었다.

“아즈사 쨩.”

“하나코….”

평소처럼 명랑하지만, 어딘가 어둠이 느껴지는 목소리,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하나코와 아즈사의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여기 있는지 알았냐든가, 어째서 여기 있냐는 등에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눈은 때때로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하였다. 한번 눈빛이 오간 후, 두 사람 사이에서 말 대신 오간 것은 제법 묵직한 종이 가방이었다.

그것을 받아든 아즈사가 고개를 갸웃하자, 하나코가 말했다.

“지금 아즈사 쨩한테 필요해 보여서 준비해왔어요.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플랜 중 하나로서 고려해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하나코는 떠났다. 이 이상 대화는 필요는 없었다. 하나코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 아즈사는 가방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한 인물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어둠이 드리운 골목 깊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조노 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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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눈 사서 많이 늦음 ㅈㅅ


세이아는 엄밀히 따지면 아무 잘못도 안 했지만, 뭐 잘못한 사람만 죽는 건 또 아니니까


원작 스토리 생각하면 수미상관도 될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