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대공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마력도, 정보도, 마탑의 재력도……

 

심지어 미래의 남편에게 바치고자 지켜 왔던 순결까지도. 

 

다른 마탑주들이 자신의 마법을 수련하고 자신이 맡은 마탑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안, 나는 대공이 시키는 일을 했다. 

 

사교계의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귀족의 명예도 모르는 창녀’라며 수군거렸고,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은 ‘역시 망국 출신’이라며 나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유일한 가족의 행복이었으니까.

 

그리고 대공은 그 아이의 귀족 지위를 보전해줄 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허나 대공은 내가 들인 정성을, 그를 위한 헌신을 무시했다. 

 

감옥에 잠시만 갇혀 있다 내 품으로 돌아올 줄 알았던 룬웨이가 처형장으로 끌려 나온 것이었다. 

 

그 아이가 잡히기 전에 했던 말.

 

[네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루지 못할 목표를 위해 손을 뻗다가, 평생 후회하고 후회했으면 좋겠구나]

 

과연 그 아이는 그렇게 되었다. 

 

아스트라이오스 왕국을 재건하는 것은 구름 위에 지어진 성에 들어가는 일과 다름없었다.

 

룬웨이는 그 아름다운 성에, 닿지 못할 성에 손을 뻗다 딱딱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지금쯤 그 아이는 후회하고 있을까.

 

아이의 몸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버티기 힘든 고문을 당하고, 멀쩡했던 팔다리가 잘리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며 수없이 떠올렸겠지. 

 

진작 누이의 말을 들을 걸, 하고. 

 

[……]

 

허나 내 예상과 달리 그 아이는 멀리 있는 나를 찾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한 일에 후회는 없었다는 듯한 눈빛.

 

그 눈빛을 목도한 나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사랑하는 아우를 저주한 사악한 계집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그 아이를 바라볼 자격은 없었다. 

 

아스트라이오스의 반역자들이 연관된 모든 일이 끝난 후.

 

마탑주로서의 일을 마친 나는 대공성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대공의 서재에 처들어갔다. 

 

노크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새 제국의 대공을 향한 예의는 집어치운 건가, 사마엘리스 마탑주.]

 

[그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노력했어. 황제 폐하께서 놈의 목을 잘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빨 빠진 호랑이 대공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약속은 지키셔야 했습니다! 저는 대공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들 제공해 드렸어요! 마력도, 명예도, 순결까지도요!]

 

너무 답답해서, 화가 나서 라파엘로 대공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짜악-

 

대공이 그 말을 듣고 조금이라도 미안해하는 마음을 갖길 바랐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경멸과 무시가 섞인 손찌검뿐이었다. 

 

[누가 네년에게 그것들을 주라고 부탁이라도 했더냐? 먼저 접근한 것은 너다! 그리고 어른이 된 동생이 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겠느냐? 

 

룬웨이 오즈마는 반역자지만 제대로 된 사내였구나. 암, 일국의 기사단장이었던 놈이 누이 치마폭에 들어가 있는 게 더 한심하지. 그래서 왜 계집 주제에 어디서 군자를 구속하려 들어? 

 

여자답게 아우가 대 메타트론 제국에 반역하지 않도록 살살 구슬렸어야지! 

 

이리 오거라. 오늘은 본 대공이 벌을 내려야겠구나.]

 

[……싫어요! 그런 더러운 수청 따위 들고 싶지 않아요!]

 

[따라와!]

 

강렬히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은 내 머리채를 잡고 내실로 끌고 갔다. 

 

[꺄아아악!]

 

그날 밤은 길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다. 

 

후회스러웠다. 

 

나는 뭘 위해서 동생을 배신하고, 대공 같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다 바친 것이었을까.

 

멍청하게……

 

+++

 

두 달 후.

 

대공의 호출로 대공성을 찾아간 날. 

 

그날도 어김없이 수청을 들어야 했고, 

 

대공은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그는 코르티잔이 입을 법한 드레스를 입히고 하루 동안 계속 나를 범했다.

 

모든 행위가 끝나고, 불빛 아래에서 내 몸을 훑어보니 가슴과 복부에 멍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레스로 가릴 수 있는 부위만 구석구석 잘 때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몇 번이고 범해지는 동안 바닥을 긁어, 손톱이 죄다 깨져 있었다.

 

[하필이면……]

 

그동안 임신을 막기 위해 피임 포션을 마셔 왔다.

 

내 행동이 못마땅했던 마탑의 간부들은 포션 반출을 제한해 버렸고, 대공이 나를 상대로 피임을 해줄 리도 없었다. 

 

그 결과 새로운 마기가, 새로운 생명이 내 뱃속에 깃들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원하지 않았어.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은 룬웨이 하나로 충분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사마엘리스 마탑주.]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아스트라이오스 전 왕세녀 카트라 라파엘로 대공비.

 

그리고, 그 아이의 약혼녀였던 여인.

 

그녀의 아랫배 또한 부풀어 있었다.

 

카트라 대공비는 대공성에 해체된 후 대공성에 감금당하다시피 은둔하고 있는지라, 아이의 아버지는 명확했다. 

 

[쯧.]

 

나는 대놓고 혀를 찼다.

 

역겨운 인간.

 

나 말고 저 공주까지 건드렸을 줄이야.

 

[마탑주께서는 제가 그리도 미우신가 봅니다.]

 

공주는 평온한 얼굴로 나에게 대응했다. 

 

저 부드러운 표정이 더 기분 나쁘게 다가왔다.

 

내 동생을 부추겨 죽음을 향해 몰아넣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 앞에 나타나?

 

카트라 공주에게 왜 그렇게 평안하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허나 부끄러워하며 치부를 감춰야 할 이는 나였다. 

 

나에게는 그녀에게 소리를 지를 자격이 없었다.

 

죄인 취급을 받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라파엘로 대공비 작위를 가지고 있었고, 대공의 적처였으니까. 

 

공주가 아우를 죽인 원수나 마찬가지였음에도.

 

혹시라도 대공의 내실에서 했던 짓거리를 들킬까 두려워, 재빨리 마탑의 로브로 몸을 가렸다.

 

나는 로브에 달린 후드로 얼굴을 감추며 목소리를 깔았다. 

 

여기서 목소리를 높이면 나 자신이 어떤 짓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밉지요. 대공비 전하께서 제 아우를 부추겨 처형대에 올리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는 구천을 떠돌고 있을 텐데, 전하께서는 따뜻한 성에서 호의호식하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그 아이와 영원을 맹세했으면서도 대공 따위의 아이를 가져? 하. 뻔뻔하기 짝이 없군요.]

 

대놓고 도발했지만, 공주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이는 사마엘리스 마탑주겠죠.]

 

마탑주는 진실을 한 손바닥으로 가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룬웨이를 배신한 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이는 당신이라는 진실을.”

 

[닥쳐. 그 더러운 입 한 번만 더 열면 죽여 버릴 거야. 역겨운 반역자 주제에.]

 

[그리고 당신은 역겨운 반역자 수장의 누이지. 

 

사마엘리스 마탑주, 언제까지고 이 호사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나요.

 

라리에트 황제가 반역자의 피가 흐르는 데다, 한 번 자신이 몸담은 곳을 배신한 박쥐 같은 자를 곁에 둘 것 같습니까? 

 

천만에. 대공도 곧 당신을 버릴 거예요.]

 

그녀는 고운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으며 나를 비웃었다. 

 

대공이 나를 버린다고?

 

그럴 리 없다.

 

나는 그의 충신이고, 그의 아이도……

 

아.

 

아이.

 

나만 대공의 아이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내 눈앞에 있는 반역자 계집도 대공의 아이를 얻었다. 

 

원해서 가진 건 아니겠지만, 금빛과 자색 마기가 섞인 생명의 기운은 또렷했다.

 

아무리 죄인의 아이라 한들 그녀의 아이는 라파엘로 대공이 작위를 얻은 후 수십 년 동안 얻지 못했던 귀한 적자다.

 

그럼 내가 밴 아이는?

 

답은 하나.

 

창녀처럼 몸을 굴리는 암캐 밑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고위 귀족의 핏줄이 귀한 메타트론에서 대공의 아이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룬웨이가 태어난 후 내가 겪은 일들과, 복중의 아이가 겪을 상황이 겹쳐졌다. 

 

나는 다섯 살 생일 전까지 후계자 취급을 받기라도 했지,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대공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박탈당할 것이었다. 

 

이 아이는 사생아니까.

 

카트라 공주의 아이가 내 아이보다 빨리 태어날 터였으니까.

 

[하하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 아이의 이복형제를 가진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 여자의 새끼가 적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게다가 그 여자가 내 소중한 아우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계집이라는 사실이 더해졌을 때,

 

마지막으로 그년이 내 앞에 있고, 내가 방금 마탑주의 스태프를 쥐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뭘까.

 

[8클래스 저주 발동. 저주를 받을 대상은 내 앞의 저 더러운 계집이다.]

 

[사마엘리스 마탑주, 도대체 무슨 짓을……!]

 

8클래스의 저주는 ‘흔적이 남지 않는’ 즉사 저주다.

 

룬웨이에게 걸었던 저주.

 

미약한 고통을 부여하고, 약간의 정신착란을 주는 2클래스 저주와 차원이 달랐다. 

 

내가 그녀를 저주한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이는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털썩-

 

저주를 받아 모든 생기(生氣)를 빼앗긴 카트라 공주가 쓰러졌다. 

 

[후후후후.]

 

나는 비틀거리며 작게 웃었다. 

 

룬웨이를 배신한 것을 후회한다.

 

그 아이를 반역자로 만든 것을 후회한다.

 

그러니까 복수해 줘야 했다. 

 

저 계집을 죽인다고 룬웨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아이의 원수를 해치웠지 않는가?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이가 널 위해 만악의 근원을 제거해 주었단다. 고맙지, 룬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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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조절 실패로 후순상 후회파트는 다음화에도 계속되는 데스.


착한 후붕상들은 성인이 된 동생을 구속하지 마는 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