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21일.

달빛조차 길을 밝혀주지 않던 어두운 밤.

무장공비 31명이 철의 장벽을 넘어 청와대로 향한다.


한 국가의 수뇌부를 암살하는 위대한 과업.

무모한 작전은 수많은 총성과 피를 터트리며 막을 내린다. 이에 남한 또한 보복과 응징을 위해 북파 특수부대를 새롭게 설립하였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청년들.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죄수자,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혹은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사람........





*****




계절은 흘러가기 마련이고 세상은 변하는 법이다. 오늘 아침 푸르렀던 가로수가 어느 순간 갈색으로 바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가 하면 앙상했던 가지에 화려한 눈꽃이 핀다.


세월은 시냇물처럼 흘러 새로운 신년을 맞이했다. 하늘을 시커멓게 물들이던 야음(夜陰)이 가시자, 서해의 수평선 위로 불그스름한 태양이 떠오른다.


시베리아로부터 찬 바람이 불어온 탓인가?

태양빛을 맞아도 피부는 차가운 한기로 시리다.

계절의 탓이 아닌 마음의 공허에서 쓸쓸함이 새어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커먼 양복을 입고 바다에 새하얀 뼛가루를 뿌렸다

파도를 타고 세상으로 퍼져나갈 뼛가루의 주인은 베트남전에서 만났던 전우였다.


그의 마지막 바람이....

겨우 죽은 뒤 뼛가루를 고향 바다에 뿌려달라는 것이던가.


허무하다.

이 친구는 죽어서야 고향에 돌아왔구나....


두 눈을 감고 옛 고향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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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방구석에서 허름한 난방을 입고 쭈그러든 아버지....


주위로는 소주병이 탑처럼 쌓여 있다.

아버지는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 비운다.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골방에서 생명력을 낭비하는 아버지는 볼품없다.

아버지의 등에서는 무력함과 나약함, 허무함과 그리움으로 덕질덕질 칠해져 의지할 구석조차 남지 않았다.


'아버지....'


어린 나는 아버지를 불러본다.

그는 대답없이 술만 주구장창 들이켠다.


'아버지...!'

'무석아, 얼른 내려와 밥 먹어라!'


나를 부르는 주인집 할머니의 목소리.

그래, 아버지가 나를 방치한 탓에 의식주를 챙겨주던 사람은 늘 주인집 할머니였다.


그렇게 할머니가 차린 된장국을 싹 비운다.

나는 그대로 기분 좋게 들어눕고 할머니는 TV를 켠다.

TV를 보다가 슬슬 밖으로 나간다.


오늘은 서은하랑 놀기로 했었다.

집을 나가 정겨운 향기가 나던 골목을 지나고,

감나무가 열린 주택들을 지나게 되면,

은행 나무가 일렬로 서 있는 거리에 들어선다.


그대로 나아가면 곧 부잣집 동네가 나타난다.

서은하의 집은 그곳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하다.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고 가정부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준다.


서은하는 정원에 물을 주고 있다.

남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같은 색의 리본을 단 채.

웃으며 꽃에 물을 주는 그녀는 아름답고 귀여웠다.


'은하야!'


내가 그녀를 부르면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안 그래도 빛나던 미소가 더욱 화사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외친다.


'오빠~ 나랑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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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냐?"


김 대장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손에 들려있던 유골함은 전부 비워져 있었다.


김 대장님은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지폐가 불타며 형체는 사라지고 검은 연기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저승에서 노잣돈으로 해라."

"저승이 있을 까요....?"

"너는 이곳이 저승이지. 이미 죽은 놈이니까."


김 대장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저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랬을 뿐인데.

아버지가 목마도 태어주고 학교 운동회 때도 찾아오고,


서은하에게 품었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선택한 것이 내가 아니라 윤지환일지라도,

그저 그녀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했을 텐데.


그런데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이제 나는 호적도 없는 죽은 사람일 뿐이고,

죽어서 돌아갈 고향조차 없는 망령이 되고 말았다.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자. 배 놓치겠다."


김 대장이 말했다.

파도치는 바다를 뒤로하고 김 대장을 따라 부둣가로 걸어갔다.


승봉도는 서해의 섬이었던가.

새해가 되니 사람들은 동쪽으로 전부 떠났는지 승봉도의 부둣가는 사람이 적었다.


저 멀리 육지를 떠날 배가 정차해 있다.

저 배에 오르면 나는 다시 그 지옥으로 향하겠지....


사람을 향해 총을 쏘고,

대검으로 찌르고,

주먹으로 떄려 죽이고,

그런 삶 속에서 허우적대겠지....


"오빠!!!"


배에 올라텨던 순간.

누군가 내 팔을 낚아채 가슴으로 껴안았다.

뒤를 돌아보자 얼굴을 푹 숙인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여인이 보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내려와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아...! 하아...!"


어찌나 급하게 달려온 것일까?

여인의 호흡은 당장 숨이 넘어갈 듯 가팔랐다. 얇게 잘 빠진 두 다리는 쓰러질 듯이 후들거린다.


당황스러웠다.


여인은 반대쪽 팔을 뻗어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어올려 내 얼굴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은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곧장 울상이 되는 것이다.


"흑.....! 으윽.....!"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꽃사슴처럼 맑은 눈동장에서 눈믈이 흘러 내린다.

그리고는 기습적으로 내 목을 끌어 안았다.

얼핏 목을 졸라 죽이려는 것처럼 강한 힘으로....


내 몸과 정체불명의 여인의 몸이 밀착된다.

그렇게 난데없이 나를 끌어안은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흐윽...! 으아아아아아아아앙!!!!"


그녀의 울음소리는 왜인지 낯설지 않았다.

품 안에서 풍기는 달콤하면서도 아련한 향기.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잊혀지지 않은.....


"서은하...?"


돌연 그 이름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흐윽...! 그렇게 갑자기 떠나흐윽...! 나 버리고...! 내가 얼마나 찾은 줄 알아?!"


그녀.... 서은하가 가슴 아픈 원망을 토해낸다.


정말 이 여자가 서은하란 말인가?

못본 새에 또 못 알아볼 정도로 성숙해졌구나.

그랬기에 내가 못 알아봤구나.


그런데 너는 어떻게 나를 알아봤을까?

내 얼굴도 보지 못했을텐데.

봤더라도 흉터로 얼룩진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텐데.


"은하야!"

"서은하! 너 갑자기 왜 달려가서는...!"


그녀의 가족들이 뒤이어 나타났다. 그녀의 부모님부터 오빠들까지.


아저씨는 나를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녀의 오빠들 또한 상당히 놀란 듯했다.  아줌마는 당장에라도 울 듯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채 경악한 얼굴이다.


"너 설마 무... 무석이니?"


아저씨가 묻는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하나?

내가 정말 그 시절의 강무석일까?


베트남전에서 수많은 베트콩들의 가슴에 총알과 대검을 쑤셔박았다. 그렇게 내 손과 영혼은 그 시절의 순수한 강무석의 모습을 가려버릴만큼 더러워졌다,




-곡 배가 떠납니다! 타실 승객 분들은 서두르십쇼!




내가 대답을 못한 채 어버버대는 사이. 떠날 준비를 마친 배는 사람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서은하라도 떨어트리려 했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더 강하게 붙어온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는 헤어지지 못한다는 듯이.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며 정리하던 아저씨가 내게 다가와 말한다.


"무석아.... 딸래미 좀 잘 부탁하마..."


아줌마는 내 어깨를 상냥하게 두드렸다.


"나중에 은하랑 같이 우리 집에 와. 그때 얘기하자."


서은하의 오빠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얌마, 동생 잘 부탁한다."

"천천히 와. 대신 안 오면 안 된다!"


그렇게 서은하의 가족은 하나둘씩 우리를 내버려둔 채 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혼란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어떡하냐는 감정을 담아 김 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분명 잘 정리하고 오랬잖아. 정리는 개뿔. 이번에야말로 잘 정리하고 찾아와. 할 말이 있으니까."


그렇게 김 대장 또한 나를 버리고 배에 올라탄다.

곧 배는 떠나가고 인적 없는 부둣가에 나와 서은하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다.


"무석 오빠......."


훌쩍이던 서은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나랑 놀자....."




'오빠~ 오늘 나랑 놀자~~!'



과거의 기억이 내 머리를 스친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그 시절의 기억이,

그 시절의 목소리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 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거절해야한다.

거절해야하는데....


"그럴까...."


지금만큼은 나 또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나도 모르게 그녀의 제안을 승낙하고 말았다.





*****






"악! 물 차갑다!"


나는 서은하와 함께 해변을 찾았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닷물에 들어간 서은하가 얕은 비명을 지른다. 겨울의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멍청한 짓이지만, 바닷물을 차며 물장구를 치는 그녀와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게 되었다.


"오빠도 들어와 봐!"


서은하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외친다. 그녀의 티끌 없는 미소에 양말을 벗고 바다로 들어간다.


"아!"


그녀가 아픈 듯이 소리를 낸다.

새하얀 발바닥에 붉은 상처가 보였다.

아마 뾰족한 어패류의 껍질을 밟은 듯하다.


"아, 오빠...!"


나는 말없이 그녀를 업어줬다.

은하는 나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귀를 붉히고는 얌전히 내게 몸을 맡겼다.


나는 그녀를 업고 천천히 해안가를 걸었다.

물장구를 치기도 하고.

모래성을 쌓기도 하였으며.

예쁜 조개 껍질을 찾기도 했다.


해변을 떠나 길을 걷다가 그네를 발견했다.

서은하는 그곳에 앉아 내게 밀어달라 한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밀어준다.

그네가 크게 흔들리며, 서은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칼구수로 점심을 때우고 다시 놀았다.

어느덧 태양이 바다 너머로 기울 때까지.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자 우리는 숙소를 잡았다.


방 3개에 흑백 테레비까지 있는 집.

우리 모두 어린 시절처럼 놀았기에 옷과 몸은 소금기와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방에서 흑백 테레비를 시청했다. 테레비 속에서 코미디언이 시답잖은 개그를 펼치며 본능적인 웃음을 끌어낸다.


그럼에도 우리 둘 다 웃지 않았다.

나는 그렇다쳐도 서은하는 왜 웃지 않는가.

본능적으로 그녀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빠."


아니나 다를까 서은하가 나를 부른다.


"있잖아.... 왜 그날.... 나 버리고 떠났어......?"


그 날.

우리가 함께 아버지 고향 마을로 내려간 날.

아버지의 재를 뿌린 곳에 술잔과 절을 올린 날.

나는 전부 잊고 살아가라는 쪽지 하나만 남겨두고서 서은하의 곁을 떠났다.


"내가.... 많이 미웠어......?"


서은하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잠겼다.


"미안해....안 미울 리가 없지...? 나는 오빠 말 믿지 않았으니까.... 미안해요... 정말 죄송해요... 또 오빠 말 듣지 못했어요.... 전부 잊으라고 했는데.... 잊을 수 없었어요....."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윽! 오빠아.... 죄송해요... 제가 흐윽! 제가 부둣가에서... 흐윽! 아는 척해서... 또 화났죠...? 맨날 어린애처럼 떼만 쓰고....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은하가 두 손으로 얼굴의 눈물을 닦아내며 운다.


"너는 너의 삶이, 나는 나의 삶이 있어. 그 둘은 절대 섞일 수가 없기 때문이야."


그녀가 내게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녀는 귀하게 자란 온실 속 화초이고,

나는 이제 이름 없는 북파 공작원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 아버지의 말로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은 여자와 만나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보냈는가....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서은하가 어머니와 같이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훗날 태어날 아이에게도 나와 같은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오빠는.... 아버지를 사랑했어요....?"


갑자기 서은하가 의미 모를 질문을 했다.


아버지를 사랑했냐고?

당연하다.


"왜요? 이런 말해서 죄송하지만... 무석 오빠 아버지는 늘 술만 마시고.... 오빠를 방치했는데?"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나를 방치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는 충격에 미친 거다.


그런데도 왜 아버지를 사랑하냐고?

답은 간단하다.


"나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보다... 알코올 중독자라도... 나를 방치하더라도 내 곁에 있는 아버지가 좋았어."


"저도 마찬가지에요!"


은하가 소리쳤다.


"오빠, 저는 오빠가 누군들 상관없어요. 저를 마구 때려도 괜찮아요! 욕하고 그래도 되니까.... 그저 제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 오빠면 충분한데...."





나는 그제서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나를 방치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했던 이유를.


유치장에 갇혔던 날.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던 나를 찾아나서다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차라리 날 찾지 말지...

늘 그래왔듯이 방에서 술이나 퍼마시지...


그랬다면, 이리 슬퍼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를 찾아다녔다는 사실이....

어쩌면 우리가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의 가슴 한 켠에 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미친듯이 괴롭게 한 것이다.


서은하도 그때의 나와 같은 마음인가?

그런 건가?

내가 간절히 바래왔던, 기회.

행복해질 수도 있는 기회를...

그녀에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은하야..."

"응...?"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연탄이 방을 뜨겁게 뎁혔다. 형광등은 꺼졌지만,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방을 환하게 밝힌다.


뜨겁게 휘몰아치는 감정에 못 이겼는지, 서은하는 대뜸 내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의 부딪힘은 곧 혀를 섞는 것으로 이어졌고 서은하는 간지러운 숨소리를 냈다.


서로를 탐하듯이 뒤섞이던 입을 떼자 서로의 혀에서 은색 실이 기다랗게 늘어졌다. 이 지경까지 오니 나 또한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서은하를 조심스레 이불에 눕힌다. 은하도 아무런 저항없이 내 손길을 따랐다.....









*****








달빛은 저물고 다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아침 햇살의 뿌연 빛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스며들며 이불 위에 나체로 누워 있는 남녀를 비추었다.


잠에서 깬 서은하는 부스스 일어나며 비몽사몽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갑자기 부끄러워져 이불을 끌어안았다.


강무석은.... 그녀의 옆자리에 잠들어 있다.

순진무구하게 느껴지는 그의 잠든 얼굴에 서은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의 미소가 피었다.


서은하는 손을 뻗어 강무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안 그래도 사랑스러웠던 그의 모습이 첫날밤을 마치고나자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다.


그녀의 손길에 강무석도 잠에서 깨어났다.


"오빠...."

"응?"


강무석이 자신의 말에 대답해주자 서은하는 왈칵 눈물이 터져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원망하고 욕설을 내뱉고 더 심한 짓을 해도 괜찮았다.

그저 자신의 옆에 남아준 강무석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미안해요...."

"그래."

"그리고 사랑해요...."

"....그래."


서은하는 앞으로 이 남자에게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이 남자만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 남자에게 오로지 복종하고,

그리고 강무석이 그토록 원했던 따뜻한 가족을 만들어주겠다고 결심했다.


서은하는 강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강무석은 잠시 망설이더니 똑같이 손을 뻗어 서은하의 손을 맞잡았다.


깍지를 낀 두 손에 서은하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서 무석의 흔적을 느꼈다.

그 씨앗이 자신의 안에서 자리를 잡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기도했다.






*****





"잘 정리하고 왔냐?"


수도권의 어느 낡은 아파트.

강무석은 책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김 대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김 대장은 책상 위에 몇몇 서류를 정리하며 입에 물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예, 김 대장님, 혹시 은퇴해도 되겠습니까?"


강무석이 그리 말하자 김 대장의 눈빛이 변했다.


"호적도 없는 놈이 사회에서 뭘 하려고?"

"모릅니다. 마누라는 기둥서방도 괜찮답니다."


둘은 동시에 작게 웃었다.

김 대장은 강무석에게 서류를 하나 던진다.


아버지父라고 적힌 부분에 김 대장의 이름이,

자녀子女라고 적힌 부분에 강무석의 이름이 있었다.


"호적 하나 만들었다. 널 내 아들로 넣었어. 네 실력이 너무 아깝네. 은퇴는 무르고 간부 해볼 생각은 없나?"


김 대장은 그렇게 웃으며 담배를 건넸다.





*****




"잘 끝났어?"


김 대장의 거처를 나서자 서은하가 보였다.

강무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은하가 그를 껴안았다.


"오빠,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강무석은 차에 올라타 그녀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어릴 적 자주 찾아왔던 익숙한 골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등교할 때마다 항상 그녀와 함께 걸었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자 급하게 달렸었던,

달콤함과 씁쓸함이 함께 녹아든 거리가 자동차 차창 너머에서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빠, 엄마 나 왔어!"


서은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물론, 그 순간까지 강무석의 손을 놓지 않았기에 졸지에 강무석도 촐삭거리며 뛰는 꼴이 되었다.


"어머! 드디어 왔구나!"

"무석아, 잘 왔다!"


서은하의 부모님은 그의 방문에 크게 반가워 하며,

갈비찜이며, 굴비 구이, 불고기, 장어, 삼계탕 등 온갖 산해진미를 대접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커피와 후식을 먹던 도중.

서은하는 결연한 얼굴로 살짝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오빠한테 시집가려고요."


두 사람은 딸의 말에 놀라지 않은 듯했다.

이미 그말을 예상했다는 듯 침착한 반응이었다.

두 부부는 대답 대신 갑자기 강무석을 따라 무릎을 꿇고 그를 끌어앉았다.


"옛날에 너를 믿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내 딸을 구해줬던 너였는데... 막상 중요한 순간에 너를 믿지 못했어.... 미안하다... 정말.... 부족한 딸 잘 부탁하마...."


아저씨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석아, 아줌마가 미안해.... 믿지 못해서 미안해... 너를 그렇게 내쫓으면 안 됐는데.... 너를 아들처럼 생각하기로 했는데... 행복하게 살아...."


아줌마도 강무석을 끌어안고 한참 울음을 터트렸다.

과거의 상처가 봉합되는 기분이다.


상처가 낫는다고 고통이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며, 흉터가 생기고 장애가 남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대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언젠가 흉터를 보고도,

그래, 이렇게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지하며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세월이 흐르기를.








*****








강무석은 아버지와 같이 살던 집으로 향했다.

주인 할머니는 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대문을 열고 들어온 강무석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바로 놀란 내색을 감춘 채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려, 가출은 끝났냐?"

"네."


강무석은 흐릿한 미소로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때 강무석 뒤에 있던 서은하가 고개를 삐죽 내밀며 인사했다. 주인 할머니는 강무석이 찾아온 것보다 그가 아름다운 여자를 데려왔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 처자는 전에 봤던 그년이네? 왜 또 왔어?"

"저희 결혼했어요!"


서은하가 자랑스럽다는 듯 뿌듯하게 외쳤다. 주인 할머니는 피식 웃고는 흑돌을 내려놓고 평상에서 일어났다.


"방 아직 비어 있나요?"


어릴 적 아버지와 살던 방.

주인 할머니가 강무석의 아버지를 딱하게 여겨 값싸게 내어준 방이었다.

주인 할머니는 강무석이 떠나간 이후로 그 누구도 자신의 집에 세를 들이지 않았다.


"애들 키우기에는 좁아. 더 넓은 방 써."





생각보다 넓은 방을 받게 되었다.

강무석은 거실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런데 핏줄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부잣집 아가씨랑 분수에 맞지 않는 결혼을 하고 그렇게 아이도 낳고 살아가는 것인가?


그래도 아버지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사랑의 도피를 한 것도 아니라 부모님 허락도 받았고.

군대 간부 월급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니까.


어머니는... 이대로 연을 끊는게 낫겠지.

어머니가 자신을 그리워한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곁에는 남편과 윤지환이 있으니까.


아버지는 자신 밖에 없었다.

자신이라도 아버지의 편을 들어줘야지 어쩌겠는가.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르겠다.


그냥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겠는가....


그저 지금은 간신히 돌아온 고향에 머물고 싶다.


더 이상 철의 장벽을 넘나들며 남북의 정세를 염탐하는 것도,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잠시 잊고....


이 따뜻함에 취하고 싶다.


"....은하야."

"응? 왜 오빠?"


방을 구경하던 서은하는 강무석의 부름에 곧바로 달려왔다. 거실에 앉아있던 강무석이 손짓을 하자 그녀는 정중하게 무릎을 꿇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강무석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자 서은하도 당연하다는 듯이 강무석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우리 행복하자..."

"...응, 그러자."





서툴렀던 그 시절....


순수했던 그 시절....


잃어버린 그 시절....


소중했던 그 시절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돌고 돌아서 두 사람은 하나로 이어졌다.


사랑을 사랑으로 돌려받지 못했기에 고통스러운 법이고,


사랑을 사랑으로 돌려주지 못했기에 뒤늦게 후회했다.


그랬기에 기적처럼 사랑이 돌아온 이 순간,

더 이상 후회없이 받는 것 이상의 사랑을 쏟기로 서은하는 결심했다.



그 시절,

어느 이름 없는 북파공작원은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추억이 가득한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의 아내가 된 여인의 품 속에서...






...다시 강무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시절, CODE:HID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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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 겹치면서 너무 늦었다잉

집안에 사고가 크게 터져서 수습하고 다시 원상복귀하느라 많이 늦었음


그래도 이래저래 완결은 내는데 성공

아무튼 너무 늦어서 너무 많이들 죄송



쓴 글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써보자면,


처음에는 그냥

시대에 휩쓸린 주인공 후회물 보고 싶다~

후회물에서 주인공이 너무 약한데, 좀 강하게 나와도 괜찮을듯?


싶은 생각에 자급자족용으로 쓰게 되었음

처음 쓰는 소설(솔직히 소설이라 부르기도 좀 그런)이다보니 이래저래 좀 부족한 점이 많았는듯



작품 구상할 때

같은 세계관, 다른 주인공으로 2작품정도 구상하기는 했는데 쓸지 안 쓸지는 모름 쓰고는 싶음


아무튼 부족한 소설 읽어줘서 감사하므니다

이만 줄이겠스므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