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 한가운데서 멈춘 여인은 손을 내밀어 눈을 받아내었다.


차가운 손은 위에 얹어진 눈 알갱이를 녹이지 못했다.



눈이 거세졌다.


여인은 후드를 더욱 눌러썼다.


“........”


설원 모퉁이에 이름모를 꽃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마치, 너 같구나.”


여인은 꽃을 보며 말했다.


눈보라에 여린 꽃이 뽑혀나가 이내 부서지고 말았다.



“이것조차, 너 같구나.”


여인의 눈에 이슬이 맺히었다.


“바보같이 바스라지는 것 조차, 너를…….”



여인은 울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딱 한번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



“또 그더냐?”


“예…황녀 저하…”



시녀 하나가 다가와 편지를 건네었다.


황녀는 투박한 편지지를 받아들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황녀는 활자 몇 마디를 읽어내려갔다.



“황녀 저하, 어제 또 정치학 수업에 결석하셨더군요. 자고로 정치학은 국정을 다스리는 군주가 지당히 배워야할…..구구절절하군.”


“........”


“항상 하던 소리, 당연한 소리, 지겨운 소리……”



황녀는 약 두 페이지 가량의 편지를 반절도 채 읽지 않고선 접어버렸다.



“태우시지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성이 황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그래도 그려러고 했다.”



휘이–



황녀는 손짓을 해 편지를 튕겨내었다.


편지지는 맥없이 팔랑거리다 시녀의 손 끝에 닿았다.



“태우거라.”


“허나 약혼자 분께서 직접 쓰신……”


“내일부터.”



황녀는 시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내 약혼자가 아니다.”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는 시녀에게, 황녀는 무심히 답했다.


“고개를 들어 네 앞의 사내를 바라보거라. 이제부터 황녀의 새로운 약혼남이 될 분이시다.”


“..............아,”


“기억해 두었다가, 널리 알리거라.”




해가 뜬 제도에는 황녀의 새로운 약혼자를 환영하는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유독 눈시울이 붉은 남자 하나가 인파에 섞여 박수를 치고 있었다.


“황녀저하, 그래도 저는 제국을 위해 몸을 바치겠나이다.”


그는 그렇게 속삭이곤, 왼손의 반지를 빼어내 주머니에 넣었다.





—-------




늙은 황제의 시대가 가고, 여제의 시대가 열린지 오래–


제국의 국서는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제국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다.


풍요롭던 제국의 곳간이 비고, 성은 부서졌으며, 밀밭은 황폐해졌다.



“오늘은 정말로, 폐하를 뵈어야겠네.”


“그대의 알현은 거부되었소, 재상을 통해 전달하시오!”


“재상? 국서의 사촌을 말하는 것이오?”


“더 이상 발언하면 나도 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소!”



에릭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그래도 나는…..뵈어야겠네.”



“더 이상….이 참혹함을 견뎌낼 수 없어.”



그는 기합을 내지르며 경비병을 따돌렸다.


“잠깐, 멈추시오!”



그는 순식간에 경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발빠르게 도망친 에릭은 황제에게로 향했다.


비록 내쳐진 몸이지만, 자신은 황제와 제국을 버리지 않았다.



“에릭? 저자가 어찌 여기에?”


“폐하! 간곡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황제 뒤의 천막에는, 국서의 음영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에릭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그것이 눈에 들어오는 일을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



“백성들의 원성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젠 정말로 국정을 돌보셔야 하옵니다.”


“정치는 재상이 국서와 상의하여 잘 이끌어나가고 있으니, 그대가 알 바가 아니오.”


“폐하! 국서를 내치소서! 국정을 맡길 인물이 아니옵니다!”


“그에게 밀려서 그리 말하는 건가? 참으로 한심하군…..”



하–


에릭은 그녀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그리도 총명하시던 분이 어찌……”


“뭐라?’


에릭의 말을 들은 천막 뒤의 국서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경, 실수하셨소.’



감히 폐하의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꺼내다니.




“......추방이다, 추방. 오늘부로 데릭, 그대는 제도에서 추방이다.”


“폐하–!”


“옛 약혼자였다고 그리 함부로 말해도 될 줄 알았느냐? 주제를 모르고…..”


“약혼자일 뿐입니까? 젖을 떼기도 전부터 폐하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황제는 분노를 참아내며 말했다.



“떠벌거리는 것만 잘하는 주제에, 네가 국정을 이끌어 보길 했느냐? 아니면 칼을 잘 다루기라도 하느냐? 그 좋아하는 훈계, 변경에서 많이 하거라.”


“......폐하.”



“잠깐 기다리시지요.”


국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이 재물을 탐해 백성들을 착취하였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어찌 된 영문입니까?”


“.....뭐요?”


황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말한 작금의 피폐함이, 혹 경의 탐욕이 초래한 결과는 아닙니까? 그것을 폐하께 돌리는 것은 아닙니까?”


“허…..”



기가 차는군.


에릭은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이자의 자산 중 부당하게 착복한 것이 있다면 모두 압류토록 하시오.”


“예!”



폐하,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에릭은 끌려나가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시선을 피하며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폐하, 그래도!”


“....?”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저는 여전히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쿵-



문이 닫혔다.


황제는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왜인지 모를 불안감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자, 남부의 포도입니다. 맛 좀 보시지요.”



그러면서도 황제는 국서의 손길을 따라, 그가 던져주는 먹이에 취해 그녀의 예감을 스스로 흐트려놓을 수 밖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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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을 처단하라. 황제를 포박해 데려오라.”



북방을 지키던 황제의 숙부가 야만인들에게 향하던 칼 끝을 제도로 돌려 진군해왔다.



“국정을 내팽겨친 황제의 목을 베어라!”


피에 홀린 북방의 병사들이 제도를 불태우며 황제를 찾기 시작했다.



“국서는 어디에 있느냐…..”


“국서께서는……재산을 급히 처분하시곤 어젯밤 국외로 달아나셨습니다.”


황제는 머리 위에 씌워진 금관을 벗어서 손에 쥐었다.


황녀는 그것을 제위 한 가운데에 올려두고는, 말을 타고 궁을 빠져나갔다.


자신을 찾는 억센 북방 사투리를 피해가며, 황녀는 온 힘을 다해 달아났다.



“국서에게 현혹당해 제국을 혼탁히 만든 황제를 찾아라!”


농병기를 든 농민들이 횃불을 들고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녀가 간신히 제도를 벗어나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남부의 영지는 믿을 수 없다.


북부는 더욱이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국경의 작은 집 하나가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려냈다.



“아, 아……..”


그제서야 그녀는, 모든걸 잃고 나서야 그녀는 깨닫고야 만 것이었다.



그녀는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자 말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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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은 따뜻한 홍차를 데워와 창문가에 앉아 홀짝였다.


눈은 사정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창문 너머의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밭, 겨울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계곡물, 눈에 뛰어드는 오목눈이,



그리고,



처량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말 한 필과 여인.



그녀가 외딴 집의 가까이에 다가설 떄 즈음에야


에릭은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폐하……”


“.........”


에릭은 문을 박차고 나가 여인의 앞에 섰다.



“폐하……!”


황녀는 탁한 눈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초점이 다시 되돌아오더니, 이내 뿌얘졌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던 나머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흐으, 흑……..”


최대한 울음을 참고있던 그녀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이 얼마나 큰 대죄란 말인가.


그녀는 자신이 너무도 못났다고 생각했다.



그의 앞에 서서 울기만 하고 있으니, 너무도 못났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말이 머릿속에서 얽혀 나오질 않았다.



“폐하, 울지 마소서.”


“나는, 흐윽, 나는 이제 더이상 황제가 아니다………”


“폐하.”


“아아, 에릭………”



“폐하, 슬퍼하지 마십시오.”


“아………..”


“영원할 것 같은 눈도,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는 녹기 마련입니다.”


“..............”


“당연한 자연의 섭리입니다.”



황녀는 고개를 떨군 채 울먹였다.


에릭은 그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서 기병 몇 기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폐하, 울음을 그치시고 달아나십시오.”


“.......이미 늦었다. 따라잡히지 않았느냐.”



에릭은 단도를 꺼내들며 말했다.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 틈에 달아나십시오.”


“....!”



황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는 싸움하는 법을 모르지 않느냐…!”


“가십시오, 얼른!”



에릭은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황녀는 조금씩, 말 고삐를 흔들었다.



푸릉-



말이 다리를 움직였다.


“왜…….왜 나에게…..”


황녀는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나는 그대를 내쳤건만, 왜 그대는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폐하,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폐하의 심복입니다.”



아아,


아–



이런 사람을–


이런 사람을 내가—



황녀는 그를 뒤로하고 도망쳤다.


등 뒤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악문 이 사이로 눈물이 배어들어갔다.



엉망이 된 얼굴을 팔로 훔치며, 황녀는 달아났다.


저 먼 설원으로, 그녀는 도망쳤다.


마치 그녀의 죄, 그녀의 과거로부터 도망치듯


필사적으로,  그녀는 국경을 향해 도망쳤다.



‘나는, 이 순간까지도 비겁하구나.’



세찬 눈이 얼굴을 때려댔다.


뺨보다도, 가슴이 아려왔다.


—------




황녀는 눈구덩이 사이에서 보주 하나를 찾았다.


더도 없는 보물이라는 양, 그녀는 보주를 아기 다루듯 소중히 쓰다듬었다.



“십여년 전으로, 돌려다오. 그와 내가 아카데미를 다닐 시절로, 돌려다오.”


보주는 보랏빛을 내며 반짝였다.



자신을 휘감는 빛에 몸을 내어준 황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스으-



황녀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작은 방 안, 익숙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쳐다보았다.


젊음과 총기, 황녀의 얼굴은 옛 처녀의 앳된 모습을 담고 있었다.



“아, 아아….!”


황녀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탄성을 뱉어냈다.



“정말로, 정말로 돌아왔구나….!”


황녀는 급히 옷을 찾아입었다.



“이럴때가, 이럴때가 아니다. 어서 그를 보고싶구나. 할 말이 너무도 많다.”


“황녀저하!”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의 시녀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공작가에서 답장이 왔습니다. 파혼이 성사되었습니다!”


“..............뭐라?”



황녀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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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갑자기 꼴려서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