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X년 X월 X일.


'그 일'이 있은 후 20여년이나 지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날이 아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날 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저녁 8시 30분.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TV 앞에 가족이 다같이 모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가물 하지만, 그 날은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같이 거실의 TV앞에 모여 앉았다.

어떤 한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여성 단거리 스프린터 제시카 모닝의 제 XX회 올림픽 100m 결승.

이미 4년전 여자선수 최초로 9초대의 벽을 돌파한 그녀는 작년 세계선수권에서

세계기록, 그러니까 '남자' 100m 세계기록을 불과 0.05초 차이로 바짝 좇는 기록을 달성했다. 

그랬기에 우리집 뿐 만 아니라 세계의 사람들이 이 순간을 숨 죽여 지켜보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쩌면 이 대회, 이 순간이 역사가 될 지도 모른다.'


드레드 펌을 길게 늘어뜨린 제시카 모닝이 꿈틀거리는 허벅지 근육을 가볍게 풀며 트랙에 들어섰다.

남자선수의 신기록을 넘 볼만 하다는 것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탄탄하고 우아하게 단련된 근육. 

스타팅 블록에 스파이크를 박아 넣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당시 나는 문득 아폴로 11호의 발사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었다.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릴 정도의 고요.


원초적인 불안이었을까, 새로운 기록에 대한 기대였을까, 지켜보는 모든 이의 신경세포를 한껏 팽팽히 당겨놓은

그 질주는 그러나 '쾅'하는 총 소리가 들리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눈 한 번 깜박일 여유도 허락하지 않고

금새 끝나고 말았다.


제시카 모닝  9.34       = WORLD RECORD = 


그 순간. 그 장면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 적어도 XY염색체를 가진 전 세계인의 절반쯤 되는 이들은

이 시합을 기다리며 느꼈던 어렴풋한 불안감의 원인이 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인류의 탄생부터 수백만년 간 단 한순간도 XX염색체에게 빼앗겨 본 적 없는 압도적 '육체적 강함'이라는 게 

사실은 충분히 길지 않은 인류수명과 과학기술 미비로 인한 허상일 뿐이었다면?


이후 제시카 모닝 선수의 인터뷰에 따르면 단지 감기시럽 한스푼 분량의 '발현제' 만으로도

진정한 여성의 신체적 잠재력을 발휘해 이런 기록을 세웠다는데, 정말 그 말대로 

애초에 여성의 신체적 능력이 남성의 그것을 한참 상회하게끔 설계 돼 있었다면?


다시 말하자면 이제부터는 성적인 매력을 미끼로 이성에게 아양을 떨고 자비를 구하고 끊임없이

그녀들을 흡족한 상태로 만들어 드려야할 임무는 '우리'의 몫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205x년 이화남자대학교 남성학자 김 호준 교수의 '그 날을 기억하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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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먹은 김에 삘받아서 써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