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 임시감독 체제의 첫 경기는 7대0이라는 대승이라는 좋은 성과를 남겼다. 고무적인 점은 결과 뿐만 아니라 경기 내용까지 챙기는 승리였다는 점이다. 정말 오랜만에 한국 축구 팬들을 만족시킨 경기였다. 물론 싱가포르와 우리의 전력 차이는 압도적임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벤투호 이후로 2년여간 대표팀이 꾸준히 경기력에서 의문을 보였다는걸 생각하면 이번 경기는 기쁜 감정을 숨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싱가포르전에서 김도훈 임시감독 체제 대표팀은 어떤 경기를 했는지 간단하게 짚어보자.


1. 선발 라인업

공격진은 3월 월드컵 예선 주전라인업이었던 손흥민-주민규-이강인이 선발로 나섰다.

중원에는 전문 홀딩 미드필더 정우영이 대표팀에 복귀하면서 벤투시절 중원 조합이었던 이재성-황인범-정우영이 선발로 나섰다.

수비진은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특히 우측 풀백 황재원은 첫 A대표팀 소집 첫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게 됐다.



2. 후방점유

중원 조합과 마찬가지로 후방점유 시스템도 벤투호 시절로 다시 돌아왔다. 양쪽 풀백이 폭을 넓게 벌려주고 황인범이 정우영 옆으로 한 칸 내려오면서 4-2 대형을 만들어줬다. 주민규와 이재성은 전방에서 간격을 유지했다. 만약 전진패스가 들어오면 직접, 혹은 월패스로 바디포지션을 오픈할 수 있는 포지셔닝이었다.


손흥민과 이강인은 후방점유 상황에서는 중앙으로 들어오지 않고 전방에서 넓게 폭을 벌려줬다. 이 포지셔닝이 중요한 이유는 상대의 측면수비를 끌어들이면 중앙에 이재성과 주민규에게 조금 더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측면수비가 끌려나오지 않더라도 손해볼 일은 없다. 이 경우엔 손흥민과 이강인이 직접 편하게 공을 잡고 측면에서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날 싱가포르는 451(또는 442) 미드블록 대형과 간헐적인 전방압박을 전반전에 구사했는데, 우리의 이런 후방점유 상황에서의 윙어 포지셔닝은 상대 백4에게 지속적으로 부담을 줄 수 있는 포지셔닝이었다. 측면수비가 윙어에게 붙으면 싱가포르의 센터백진은 주민규, 이재성과 2대2라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싱가포르의 백4는 넓게 벌린 손흥민과 이강인을 견제하지 않고 백4의 횡간격을 유지하는데 신경썼다. 그 결과 손흥민과 이강인이 측면에서 편하게 전진패스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3. 전진 시퀀스

후방에서 전방으로 전진할 때 크게 두 가지 패턴이 유효했다. 전반전에는 우측에서 이강인-황인범-황재원이 유닛으로 묶어 전진하는 패턴이 자주 나왔다. 그리고 이 패턴에서는 크게 두 가지 장면이 나타났다.


우선 정우영을 활용하는 장면이다. 우측에서 점유하다 상대의 압박이 우측 좁은 공간에 밀집하면 중앙의 정우영이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는 상황이 생긴다. 이때 정우영에게 공을 주고 킥력이 좋은 정우영이 손흥민이 있는 좌측 넓은 공간으로 전환하고 전진한다.


다음은 이강인을 활용하는 장면이다. 우측에서 수적우위 혹은 기술우위를 바탕으로 이강인이 전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이강인이 횡전환을 시도한다. 마찬가지로 좌측의 손흥민이 전환패스를 받고 공간을 활용해 전진한다.


후반전에는 상대의 수비와 중원사이 간격이 벌어지면서 이 공간을 주민규와 이재성이 활용했다. 주민규가 본인의 횡적인 움직임과 연계능력을 활용해 직접 좌측으로 전환하거나 이재성과의 월패스로 전환했다.



4. 공격 시퀀스

전진이 성공해 공격시퀀스로 넘어갔을때 좌우측의 조화가 좋았는데 흔히 말하는 '요즘 433 시스템'을 잘 보여줬다. 기본적으로는 풀백이 반칸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235 대형을 형성했다.


좌측에서는 손흥민이 돌파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이재성, 김진수의 전술적 움직임을 통해 손흥민의 돌파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재성은 하프스페이스로 침투하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주로 김진수와 스위칭하며 공수밸런스 유지와 상대수비를 박스 밖으로 끌어들였다. 김진수는 적극적으로 오버래핑, 언더래핑을 하며 상대측면 수비를 분산 시켜줬는데, 김진수와 손흥민이 크로스되는 순간 손흥민이 패스 혹은 돌파라는 이지선다를 상대에게 걸며 생산적인 장면을 많이 만들 수 있었다.


이 경기에서 손흥민은 포스테글루의 토트넘에서 왼쪽 윙어로 나올 때와 거의 비슷한 역할로 뛸 수 있었고 이는 엄청난 생산력으로 이어졌다. 이런 요소들 또한 '요즘 433 시스템'과 연결 지을 수 있다.


벤투호 시절 대표팀의 공격기조는 퀄리티 좋은 2선자원들을 중앙에 최대한 밀집시키고 2선자원들의 공격력을 극대화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서 대표팀은 측면을 넓게 사용하는 풀백의 공격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우리보다 전력이 약한 팀들은 공격력이 떨어지는 우리의 풀백을 견제하기보단 철저히 중앙에 수비블럭을 유지하는 수비전술을 가져갔다.


결국 2선자원들, 특히 손흥민이 쓸 수 있는 공간은 매우 좁았고 어렵게 2선자원들에게 전진패스가 성공해도 상대의 강한 압박에 생산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벤투호 중반까지 '벤투는 손흥민을 못 쓴다', '손흥민은 아시아 레벨에서도 안먹힌다', '왜 손흥민이 슛을 못때리냐' 등의 비판과 비난이 오갔던 이유가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물론 벤투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황희찬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했다. 그리고 월드컵 최종예선 전후로 좌측에는 황희찬을 넓게 배치하고 손흥민을 중앙에 프리롤에 가깝게 기용하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벤투호의 황희찬 손흥민 공전을 위한 똥꼬쇼는 필자가 예전에 정리한 글이 있으니 시간나면 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링크: https://arca.live/b/rogersfu/97209920


우측에서는 이강인-황인범-황재원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주요했다. 우풀백 황재원은 좌풀백 김진수와 비슷하게 오버래핑, 언더래핑 둘 다 능한 선수이다. 때문에 이강인이 측면에서 안쪽으로 공을 몰고 갈때 황재원이 상대수비를 끌어당기는 역할을 맡았다. 거기에 이강인이 좁은 공간 안에서 고립되지 않게 황인범을 이강인과 유닛으로 묶어주어 좁은 공간에서 패스플레이로 상대 수비를 괴롭혔다.



5. 교체자원과 전체적인 평가

배준호, 박승욱 같은 자원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배준호는 이재성과 교체되며 4231 시스템의 중앙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부여 받았는데, 좋은 오프더볼 능력과 기술을 보여주며 A대표팀 데뷔전 데뷔골을 장식했다. 박승욱은 황재원과 교체되며 황재원보다 조금 더 공수밸런스에 안정감을 실어줬고 어시스트도 기록하는 등 마찬가지로 데뷔전임에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 시즌 잔부상을 겪으며 절정의 폼에서는 약간 내려온 엄원상은 마무리에선 아쉬웠으나 여전히 스피드스타로써 후반전 지친 상대의 수비라인을 끊임없이 위협할 수 있는 자원임을 보여줬다.


이렇듯 싱가포르전 대표팀은 요즘 유행하는 433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핵심자원인 손흥민과 이강인의 생산력을 전, 후방을 가리지 않고 극대화할 수 있었다. 공수밸런스 측면에서는 풀백에게 많은 활동반경이 요구되기에 풀백이 과부화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하지만 전문 홀딩 미드필더 정우영과 권경원, 조유민 센터백 라인의 집중력 덕분에 실점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없었다.


김도훈 임시감독은 확실히 공수밸런스의 중요성을 이번 경기로 잘 보여줬다. 김도훈 감독이 엄청난 전술적 아이디어를 들고 나온것은 아니었지만 밸런스를 깨가면서 공격자원들을 억지로 채워넣지 않으면서 기본적인 공수밸런스만 잡아도 우리보다 약체 팀에게 이정도 파괴력을 보여줄 수 있음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줬다. 또한 핵심선수 손흥민과 이강인을 각자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전술적 지원을 해주며 이들의 생산성을 극대화 했다는 점 또한 좋게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전도 비슷한 시스템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싱가포르전에서 좋았던 모습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며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한다. 무엇보다 많은 대표팀 팬분들이 공수밸런스의 중요성과 우리의 아시안컵 실패가 특정 선수문제가 아니었음을, 코칭 스태프와 행정문제였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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