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주의



반장 : 김유경.

부반장 : 송명훈.

서기 : 남주희.


그리고, 목록 맨 밑의 이름.


도서위원 : 정이연.


몇 번을 읽어 봐도 내 이름이었다. 


운도 참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출석부를 덮었다.





3월 4일 월요일



우리 학교 도서실은 정말 낡아빠졌다. 

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책 상태도 대부분 엉망이다.

리모델링 소식도 한 번 들렸지만, 얼마 가지 않아 흐지부지된 것 같다. 그러고 나서는 말 그대로 방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늘 도서실을 지키던 도서위원이 졸업하여 학교를 떠났다. 새 도서위원을 뽑아야 했다.


도서위원은 점심시간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야 한다.

햇볕도 잘 들지 않는 낡은 곳에서 곰팡이 냄새를 견뎌야 한다.


아무도 그 자리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일종의 폭탄 돌리기가 된 것이다.


학생들뿐 아니라,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운이 없게도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초임이었다. 

발언권이 약한 우리 선생님은 '가장 가까운 반 학생이 맡죠?'라는 말에 별다른 이견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선생님, 불쌍해.


도서실과 가장 가까운 교실은 2학년 9반. 바로 우리 교실이었다.


결국 강행하게 된 제비뽑기에서 내 이름이 적힌 종이가 뽑혔을 때, 선생님이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내가 적극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면 분명 울어버렸을 거야.


뭐, 그나마 친구 없는 내가 뽑힌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발, 제발 하며 기도를 하던 앞자리 여자아이가 뽑혔다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르니까. 얘는 친구가 많으니, 아주아주 귀중한 점심시간을 잃는 것은 값도 못 매길 커다란 손해일 테지.

 

시끄러운 일은 싫어. 그런 호들갑 떠는 꼴도, 보기 싫어.

짜증 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3월 7일 목요일



도서위원 4일차.

의지와 관계없이 떠맡게 된 이 일에도 장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일단, 사람이 안 온다. 4일째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게, 최상층에 있는 데다 같은 층의 교실과도 멀다. 


우리 교실과 가깝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굳이 걸어오고 싶은 거리가 아니다.

공부할 공간도 넉넉지 않다. 책도 그다지 많지 않다.


내 친구들도 찾아오지 않는다. 애초에 친구가 없으니까.


그래서,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는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학교 내 프라이빗한 공간을 가지게 된 거다.

…곰팡이 냄새는 조금 나지만.


두 번째 장점은 도서실 옆에 조그만 화장실이 딸려 있다는 점,

그리고 그 화장실에도 사람이 전혀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서실 문 바로 앞에는 두 칸짜리 낡은 화장실이 있었다.

화변기 한 칸, 좌변기 한 칸에 작은 세면대가 있는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표시도 없어서, 처음에는 그게 창고라고 생각했다.


오래되어 환풍도 잘 안 되는 화장실 따위가 뭐가 장점인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체질이 좀 특이한 나에게는 정말 큰 장점이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부터 나는 점심만 먹으면 꼭 똥을 눠야 했다. 

여자화장실에 그냥 들어가는 것만 봐서는 큰 쪽인지 작은 쪽인지 구별할 수 없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사실 많이 다르다).


난 응가를 할 때 방귀를 많이 뀐다. 방귀 소리도 크다. 

에티켓 벨로도 내가 똥을 누고 있다는 걸 감출 수가 없다.


거기다 냄새도 조금… 심하다. 똥 냄새도, 방귀 냄새도.

 

과식을 한 날, 유제품이나 기름진 걸 먹은 날, 혹은 설사를 하는 날은 나조차도 코를 막을 정도로 구린 냄새가 난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언제부터인가 내가 학교에서 큰 일을 보고 있으면 개인실 밖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대화 내용에는 내 이름이 섞여 있었다. 곧 내가 반에서 겉돌게 된 이유는 분명 내 똥 냄새와 관련이 있었겠지.


유치한 어린애들이란.


나는 거의 학교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똥쟁이 정이연, 혹은 똥녀 정이연이라는 이름으로. 


웃을 일 많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내 응가 얘기는 꽤 재미있는 이슈였나보다. 똥, 방귀는 원초적인 개그 소재이기도 하니까.


…진짜, 유치한 어린애들이란.


나를 슬슬 피하거나 자기네들끼리 수군대는 것 정도는 참을 만 했다. 5학년이 되고 대놓고 놀려대는 아이들이 생기기 전까지는.


학급에서 가장 서열이 높던 무리의 리더가 날 싫어했다. 


좋아하는 6학년 선배에게 내가 러브레터를 받았다는 이유였다. 

그 소문이 퍼지자, 나는 꽤 오랫동안 짜증 나는 괴롭힘을 당했다.


말끝마다 똥쟁이, 똥녀를 붙이는 건 예사에, 내가 화장실에 갔다 오면 토하는 시늉을 하고, 점심시간에 똥 누고 있으면 문을 막 두드리고, 냄새난다고 욕하고. 


혹여나 누군가가 수업시간에 방귀를 뀌어버리면 “또 정이연이 방귀 뀌었어!”라며 내게 있는 대로 꼽을 주기도 했다.(뭐, 진짜로 내가 범인인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하루는 그 아이들이 단체로 화장실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이었고, 나는 늘 그렇듯 큰 볼일을 보고 있었다. 


귓속말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애들의 걸음걸이 소리가 점점 내게 가까워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내가 배에 힘을 잔뜩 주어 빨리 똥을 내보내려 했을 때, 물 한 바가지가 촤악-하며 쏟아졌다. 곧 한 바가지가 더 쏟아졌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입을 막고 웃는 소리와 함께 그 애들이 화장실에서 달려나갔다.


쫄딱 젖은 채로 교실로 돌아온 나는 걸상을 들어 낄낄 웃고 있던 그 애들을 향해 힘껏 던졌다. 한 명당 하나씩 던졌다.


그 애들이 넘어지고 나서도, 던진 걸상을 다시 들어 몇 번이고 내려쳤다. 잘못했다고 빌어도 계속 내려쳤다.


세 명의 이빨이 깨졌다. 한 명은 팔이 부러졌다. 


당연히 난 학교폭력 징계를 받았다.


선생님들의 주관하에 억지 ’미안해‘를 말하며 손을 내밀던 리더의 뺨을 힘껏 후려치고는 추가로 더 징계를 받기도 했다.


입이 찢어져도 '나도 미안해'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지금에 와서도, 난 잘 했다고 생각한다. 속이 참 시원했거든. 

특히 그 마지막 따귀가.


분노 조절 장애, 학폭 가해자로 낙인이 찍혀 지금까지도 친구가 없지만, 친구 없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으니까.


고등학생쯤 되니, 다들 똥 누는 것에 대해 크게 부끄러워하거나 연연하지 않는 것 같다. 그치만 내 남다른 배변은 역시 조금은 부끄럽다. 소리도 그렇고, 냄새도 그렇고.  


아, 무슨 내용 쓰다가 여기까지 길어졌더라. 


맞아. 도서실 옆 화장실.

아무도 쓰지 않는 화장실을 나 혼자 쓸 수 있다는 거. 

정말 마음 놓이는 일이야.


아무리 냄새 나는 똥을 눠도, 아무리 크게 방귀를 뀌어도 괜찮아.


시원하게 응가를 할 생각에 점심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아, 내일도 거기서 맘 편히 응가해야지.




3월 8일 금요일



정말 싫은 일이 생겼다.

누군가 내 개인 공간인(당연히 아니지만) 그곳을 사용했다.


얌전히 볼일만 보고 갔다면 괜찮았겠지만, 그게 아니었어.

화장실에 들어갈 때부터 코를 찌르는 똥 냄새가 났다. 


냄새의 진원지는 안쪽 칸의 좌변기였다.

코를 막고 변기를 열어 봤더니, 세상에나.


하나 있는 좌변기 칸에 그렇게 큰 똥을 누고 물도 안 내리고 가다니, 제정신이야? 말도 안 돼.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깜박할 게 따로 있지. 냄새는 어찌나 지독한지.


심지어 막힌 것도 아니었다. 

내가 레버를 내리자 똥은 간단히 물살을 타고 사라졌다.

변기에 누런 자국을 잔뜩 남기기는 했지만.(으, 더러워.)


이런 곳에 화장실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얼마 안 될 텐데. 

이 사람도 인파 많은 곳에서 똥 누는 게 어지간히 싫었나보다. 


그래도 물 내리는 걸 잊어버린 건 정말 너무했어.


도서위원이 된 뒤 처음으로,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똥 냄새가 나는 화장실에서 응가를 했다. 


하필이면 오늘의 내 똥이 딱딱하지 않았던 탓에, 부드러운 똥 특유의 냄새가 더해져서 더욱 구렸다.


그제나 어제처럼 기분 좋은 응가가 아니었어. 

나 말고 아무도 쓰지 않으면 좋으련만.


제발 내일부터 아무도 오지 않게 해 주세요.

종교는 없지만 아무나 기도를 들어주세요.


오늘 일기는 똥 얘기 뿐이네. 여자애 일기장이 이래도 되는 건가?




3월 11일 월요일



…대체 어떤 년이야.


오늘은 배가 아팠다. 


3교시쯤부터 배가 꾸륵거리며 강렬한 방귀 신호가 왔다.

정말 다행히도 내 자리가 창가 맨 뒷자리여서, 나는 열린 창문 쪽으로 엉덩이를 들고 가스를 내보낼 수 있었다.


푸스슥-푸슥- 


무음 방귀가 수 차례 나왔다. 

냄새가 지독했다. 배탈 난 것이 분명했다.


평소처럼 점심을 다 먹고 화장실에 가려 했지만, 한 입을 떠먹자마자 배가 찢어질 듯 아파 와서 그럴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다 말고 꿀렁거리는 배를 안고 그 화장실로 달렸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팬티를 더럽혔을 만큼.


젖은 방귀를 뿍뿍 내뿜으며 변기에 도착한 나는 팬티를 내림과 동시에 변기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또, 

하아, 진짜 쓰면서도 어이 없어. 정말.


어제보다 더 많은 똥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너무너무 급했던 나는 그만 레버도 건드리지 못하고 그 변기에 앉아 설사를 푸더덕 쏟아내고 말았다.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남이 싸 놓은 똥 위에 또 응가를 하다니, 정말 기분 나빠.


설사가 쉽게 멎지 않아서 방귀랑 잔변이 계속 나왔다. 원래 있던 똥과 내 설사 똥이 섞인 역겨운 냄새에 거의 토할 뻔 했다.


거기다 휴지도 얼마 못 가져왔는데, 물 같은 설사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엉덩이에 똥이 다 튀어서… 


으으, 이제 그만 쓸래. 생각하기도 싫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평소같은 똥을 눴다면 분명 변기가 막혔을 거다. 설사를 해서 다행인 날도 있구나. 


어쨌든, 최악의 날이었어.

진짜 싫어.

한 번만 더 이래 봐. 찾아서 가만 안 놔둘 거야.





3월 14일 목요일



더 이상은 못 참아.

화요일에는 변기가 깨끗해서 이제 끝났나 싶었는데, 어제랑 오늘 또 그 짓을 해 놓았다. 쓸데없이 끈기 있는 년. 


어제는 뭘 잘못 먹었는지 질펀한 설사가 변기 안 거의 전역에 튀어 있었다. 배탈 났을 때 나는 역겹고 독한 똥 냄새가 났다.


심지어 오늘은 내가 들어가기 직전에 눴는지, 변기 커버에 온기가 남아 있어서 정말 기분이 나빴다. 날 놀리는 걸까?


내 즐거운 응가 시간을 망치는 게 너무 싫어.


누가 날 괴롭히는 건가?

아니지, '그 애가 자주 쓰는 화장실에 똥 싸고 물 안 내리기'처럼 바보 같은 방식으로 누굴 괴롭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이쯤 되면 나도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하다.


자기 똥을 자랑하고 싶은가? 

하긴 나도 가끔 엄청 큰 똥을 누면 내 자신에게 감탄하기는 하니까. 사진을 찍을까 했던 적도 있었지.


아니, 그래도 물을 안 내리고 가는 건 너무 비상식적이잖아!


으으. 도대체 누구야, 이런 짓을 하는 건!?


...어쨌든, 참아 줄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해. 

내일 어떻게든 범인의 얼굴을 볼 것이다. 계획도 있다.





3월 15일 금요일



우리 반 아이. 맨날 보던 아이.

왼쪽에서 두 번째 줄 맨 뒷자리. 

다시 말해 내 오른쪽 옆자리에 앉은 여자아이.

반에서 가장 말이 없는 아이.


유리. 유리였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쉬는 시간마다 그 화장실의 화변기 칸에서 대기했다.

범인이 매번 그 짓을 하는 좌변기 칸의 옆 칸이었다.


범인이 거기서 똥을 누고 나오려 하면, 나는 먼저 화장실 밖으로 나가 범인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려 했다.


조례 전 등교 시간과 1교시, 2교시 쉬는 시간에는 허탕이었다.


3교시 쉬는 시간에도 범인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화장실은 거의 완전한 적막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대기하는 걸 눈치 챘나? 여기 들어가는 걸 봤나?

아무도 안 오는 화장실인데, 문이 잠겨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가?


그런 생각이 들던 중, 마침내 화장실 문이 끼익하며 열렸다.


범인이 들어왔다.


범인은 성큼성큼 옆의 칸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더니, 망설임 없이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털썩 앉았다.


"읏... 으응...!"


뿌우우웅-!


뿌지직-뿌직-!

쁘뤼리리릭-


철썩.


"읏, 하아아.."

"흐읍-"


뿌더더덕.

푸지직-


텀벙, 텀벙.


뿌륵. 푸쉭.

뿌우웅-


"후아아아..."


굉장한 배변 소리였다. 한동안 넋을 잃고 들을 정도였다.

배변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지만, 엄청난 양이 나온 것 같았다.


지독한 똥 냄새가 옆 칸에서 넘어와 코를 찔렀다.


"하아, 시원해..."

"오늘도 많이 나왔네... 후후."


범인은 상쾌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이만큼이나 큰 똥을 눴다는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휴지로 엉덩이를 닦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아무것도 없는 화변기의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범인의 얼굴을 보는구나. 꼭 윽박질러 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애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순간 생각이 정지해 버렸다.


그 애는 얼어붙어 버린 나를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한순간에 내 계획이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유리.


성은 유씨, 이름은 외자로 리. 아주 예쁜 이름.


이름에 걸맞게, 유리는 예쁘다. 

반짝반짝하게 닦아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처럼 예쁘다. 


170이 조금 안 되는 큰 키에 마른 체형, 서양 여자들만큼 크진 않지만 어느 정도 볼륨감 있는 가슴에 충분히 봉긋한 엉덩이.


새하얀 피부에 약간 갈색이 도는 롱헤어. 

무쌍이지만 길게 뻗어 매력적인 눈매.


콧대도 높아서, 늘 쓰는 크고 동그란 안경이 잘 어울리는,


감탄이 나올 만큼 청초한 쿨 톤의 미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쉬는 시간마다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지난 과목 복습만 하고.


발표를 시킬 때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웃지도 않는, 찡그리지도 않는, 예쁜 마네킹 같은…


그런 유리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유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나는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좌변기 뚜껑을 열었다. 저 애가 눈 똥이 그대로 있다면, 물을 내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범인은...


그 애가 범인이 아니기를 바랐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하지만,


변기에는 내 손목만큼이나 굵은 진갈색 똥이 세 덩이나 가라앉아 있었다. 가장 큰 덩어리는 어찌나 큰지, 변기 맨 안쪽에서부터 뻗어 수면 위에 머리 끝을 내밀고 있었다.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진한 냄새가 났다.

변기 옆 쓰레기통에는 똥을 닦아낸 휴지가 남아 있었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내 개인 공간을 더럽힌 범인, 몇 번이나 엄청난 똥을 누고 물도 내리지 않은 범인은 바로 유리였다. 


..진짜 저 애가?


예쁘고 늘씬한 그 유리가? 방귀도 안 뀔 것 같은 그 유리가? 

바로 그 유리가 이렇게 크고 냄새 나는 똥을?


그건 그렇다 쳐도, 왜 물을 안 내리는 거야? 

자기 똥을 보여 주고 싶은가? 대체 왜?


점심시간에 도서실에 앉아서도, 야자를 하면서도, 집에 와서도 계속 그 생각만 했다.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그동안 봤던 똥이 유리의 것이라는 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머리가 복잡해. 일기도 더 못 쓰겠어.





3월 16일 토요일



망했다. 유리와 유리의 똥 생각만 나.


바로 옆 자리인데도 한 번도 대화해본 적도 없는 아이.

잘 만들어진 로봇 같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그런 아이가, 그런 똥을…


결국 학원에서 혼나고 말았다. 

딴 생각에 잠겨 집중을 못 한다고 혼났다.


어떻게 그런 걸 보고 다른 생각을 하냐고. 억울해.

으, 사정을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고. 내 속만 어지럽다.


거기다, 더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는 것 같다.


어제 일기를 쓰고 누웠을 때 응가 신호가 와서 화장실에 갔다.

시원하게 방귀를 뀌고 조금 딱딱한 똥을 눴다.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 갔을 때 다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배변을 끝내고 물을 내리려고 하자 또 유리 생각이 났다.


그 애도 이런 똥을, 그 애도 이런 방귀를...

어제 맡았던 지독한 냄새도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생각을 계속 하자, 문득 아래쪽이...


아니, 이 얘기는 쓰지 말자. 안 쓸 거야.

좀 짧지만 내 일기인데 뭐. 





3월 18일 월요일



최근, 무언가에 집중할래야 집중할 수가 없다.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오늘도 유리는 그 화장실에 왔다. 금요일과 똑같았다. 

3교시 쉬는 시간 나는 화변기 칸에 있었고, 유리가 옆 칸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 애가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앉았다.


마치 데자뷰처럼, 유리가 힘 주는 소리와 방귀 소리, 커다란 똥 덩어리가 변깃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솔솔 풍겨오는 구릿한 똥 냄새도 그 때와 같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람. 범인이 유리인 건 이미 확인했는데.

얼굴을 보고도 따지지도 못하고, 이상한 생각만 하고 있고.


그 애가 엉덩이를 닦고 화장실을 나갔다. 

역시 물 내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난 옆 칸으로 가서 변기 뚜껑을 열었다.

역시, 유리가 맞구나. 

유리가 또 이런 큰 똥을 누고 물을 내리지 않았구나.


레버를 누르고 뒤돌아 화장실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묘하게도 내 아랫쪽이 간질거렸다. 숨도 가빠졌다. 

젖꼭지도 이상할 만큼 딱딱해졌다.


이건 마치....


아니아니,


왜 이러지?

나, 설마 유리를 좋아하나?

아니, 걔는 여자잖아!


게다가, 유리는 방금 방귀를 뿡뿡 뀌고, 똥도 뿌직뿌직 눴잖아! 

그것도 엄청 크고, 지저분하고, 냄새 나는 똥을!


나, 이렇게 더러운 걸 보고…

심지어 상대는 여자?


하지만 유리와 키스를 한다면, 그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아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변태 같아.


머리가 너무 복잡해. 

난 어떻게 되는 걸까.





3월 19일 화요일



미쳤어. 미쳤나 봐 정말.


나 이상해지나 봐.

나, 분명 유리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했어.


학교에서. 그 화장실에서.

그것도, 유리가 한껏 싸 놓은 똥 옆에서.


유리만 생각한 것도 아니고, 그 애의 배변도, 방귀도.

....더러운데. 지저분하고 흉한데.


왜 나 이런 거에 흥분하는 걸까.

난 사실 변태였던 걸까? 진짜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몇 시간을 보냈다.

아프다고 말하고 학원에도 가지 않았다.





3월 20일 수요일



그 화장실 화변기 칸에서, 똥 누는 유리 옆에서 자위를 해버렸다.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아. 내가 싫어지려고 해.

....더 쓰고 싶지 않아.





3월 22일 금요일



내 인생은 망했다.


3교시 쉬는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유리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몇 분이 지나고, 나는 뭐에 홀린 듯이 또 그 화장실에 갔다.


역시 좌변기 칸은 잠겨 있었다.

화변기 칸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나는 또 팬티를 내리고 젖어 있는 아랫쪽에 손을 댔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저 그 정체 모를 욕구의 노예였다. 


오늘의 유리는 속이 안 좋은 듯 했다. 


뿌뤼리리릭-

푸드득, 푸드드득-!


습기 찬 방귀 소리에 이어서 설사를 쏟아내는 소리가 났다.


"하아, 하아..."


푸더더덕-

쁘뤼릭, 푸스으-


"흐읏!"

뿌뤄러럭- 


뿌웅-!


마지막의 방귀는 옆 칸의 유리가 뀐 것이 아니었다.

똥 누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자위를 하느라 배에 힘을 줘서 그런지 점심을 먹지 않았는데도 내게 신호가 온 것이다.


마침 팬티를 벗고 화변기에 쪼그려 앉아 있었던 나는, 그대로 자위를 하며 똥을 누기 시작했다. 휴지를 챙겨오지 않아서 닦을 것이 없었지만,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뿌지직-

뿌지지직-


찌꺽- 찌꺽-


뿌득.

뿌우욱-!


눈치 없이 큰 방귀와 함께, 평소보다 굵고 긴 똥이 나왔다.

항문을 긁는 배변의 쾌감과 자위의 흥분이 절정을 향해 가자, 나는 소리가 새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 했다.  


"흐읏..!"

"으으읏...!"


그렇게 나는 소리죽여 자위와 배변에 열중했고, 결국 똥이 전부 나옴과 동시에 절정에 도달하려던 순간,


삐빅.


별안간 내 위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전자음이 들렸다.


난 소스라치게 놀라 위를 쳐다봤다.

유리의 얼굴이 보였다.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유리가 변기를 밟고 올라서서 이쪽을 찍고 있었다.


내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멍하니 그 애를 쳐다보고만 있자, 유리는 씨익 웃으며 녹음기를 들어 내게 보여 주었다.


뿌뤼리리릭-

푸드득, 푸드드득-!


녹음기에서는 설사 똥 누는 소리가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아, 설사 냄새가 나지 않았구나. 

이거, 다 내 똥 냄새였구나.

 

"다 찍었어. 문 열어 줘."

"안 열면 이 영상 뿌릴 거야."


상황과 내용에 어울리지 않는 고운 목소리였다.


혼이 빠진 나는 순순히 잠금장치를 풀었다.

유리는 내가 있는 화변기 칸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문을 잠갔다. 


내가 발로 레버를 내리려 하자, 그 애가 내 발을 막았다.


"아, 물은 내리지 마. 나 가면 내려. 알았지?"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연, 맞지?"


유리가 은은하게 웃었다. 여우같은 눈웃음이 너무나 무서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정학 당한 학교폭력 가해자."

"똥쟁이 정이연, 똥녀 정이연."


"...."


유리는 조심스레 한 걸음씩을 떼어 나에게 가까이 왔다. 


"우후후,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네."

"친구 없고, 조금 사납고."

"그래도 공부는 곧잘 하고."

"은근히 남자 애들한테 인기도 있는 거 알아?"


"...."


"그런데...."

"그런 애가...."

"후후,"

"내 똥으로.. 자위 하는 변태네."


어느샌가 귀 옆까지 와버린 유리가 그렇게 말했다.


유리의 입 속 온기로 귀가 뜨거웠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나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러고는, 몸을 굽혀 방금 내보낸 내 똥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웠다. 죽고 싶었다.


"후후후, 엄청 많이 나왔네."

"어제 많이 먹었어?"


"...."


"후아, 냄새.“ 

”이연이 응가는 진짜 냄새 나네."

"그래도 이만한 응가 했으면 되게 기분 좋았겠다. 그치?"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코 앞에서 손부채질을 했다.

수치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오려고 했다.


터지려는 울음을 막듯, 유리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 점심 먹고 바로. 옥상 문 앞으로 와."

"안 오면.. 알지?"


그 말을 끝으로 그 애는 내 똥 냄새로 가득한 화장실에서 나갔다.


내가 눈 똥을 앞에 두고, 엉덩이를 닦지도 못한 채로 나는 훌쩍훌쩍 울었다. 내 모습이 너무 꼴사나워 더 서럽게 울었다.


...내 인생은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