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군."


턱을 괴고 앉아 따분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던 마왕이 말했다.


"드넓은 북부 평원을 모조리 빼앗긴 것은 북쪽의 제국 놈들 때문이렷다?"

"힉, 네, 네...! 제, 제가 직접 출정하면 주력군은 금방 분쇄되기에 더 들어오진 못했습니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하는 여성은 제1군단장.

본래는, 2대 마왕으로 군림하며 공포 통치로 마왕 영지를 다스렸던 강력한 마족이다.


"네년의 무력으로 인간 하나 상대하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 가만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힉...!"


마왕의 눈이 빛나자, 제1군단장이 겁을 먹고 뒤로 주춤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너를 단순히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야. 네 낮은 전략과 지략을 비웃으며 정면 충돌을 피해 우회공격한 거다. 그리고 넌 그걸 파악하지 못해서 계속 영토를 빼앗겼다. 네가 직접 출정하는 순간 인간들은 이미 방어를 다져놓고 압도적인 숫적 우위를 살려 널 포위했겠지. 내 말이 틀렸나?"


제1군단장을 상대로 1:1로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인간 군대도 그녀의 무력을 잘 알기에 그녀를 상대해야 할 때는 온 힘을 다해 함정을 파고 힘을 집중한 것이다.


마왕이 가장 분노한 것이 그 점으로, 마왕을 참칭하며 군림한 그녀가 인간 군대에게 땅을 빼앗기고 전투에서도 패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더는 마왕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는 증거다.


대규모 회전에서 그녀는 직접 지휘하던 군대와 함께 인간 연합군에게 포위당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금방 뚫고 전진했다 생각하던 그녀는 사실 인간 군대에게 유인당해 포위당한 상태였고 집중 공격을 받은 그녀는 겨우겨우 일부 병력만 데리고 빠져나와야했다.

그로 인해 얻은 부상과 병력 손실은 마왕 영지 북부의 광활한 영역을 인간들에게 빼앗기는 원인이 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곳을 개척한 제국은 국경을 따라 요새를 세우고 떵떵거리며 마왕을 비웃고 있다.


"그래놓고 항상 인간을 비웃으며 자기만족에 빠져서 남아있는 군대와 영지마저 제대로 돌보지 않았지."


마왕이 조용히 분노하자 제1군단장은 몸이 굳었다.

다만 이번에는 따로 물소리가 들리진 않았는데, 힘을 숨기지 않고 있을 때의 마왕은 마주하는 것만으로 힘이 풀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기저귀가 부풀어버린 상태로 제1군단장은 몸을 떨었다.

마왕의 귀환 이후 벌을 받고 있는 그녀는 그 무력과 2대 마왕으로서 통치해온 점을 살려 제1군단장 자리를 얻긴 했으나 매일 이렇게 마왕에 대한 공포로 기저귀와 이부자리를 적시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경외받지 못하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적신 이불 앞에서 엉덩이 매를 맞는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마왕성의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거다."


마왕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아직 제대로 퍼지지 않았겠지만 최전방의 요새는 경계를 강화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 군대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곧 모든 이들이 왜 감히 내게 대적하지 못했는지 떠올릴 것이다. 출정명령이다. 제1,2,3군단 모두."

"모, 모두....말입니까? 알겠습니다....그러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겠..."

"아니. 나도 간다."

"예?"


마왕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어린 아이의 몸으론 너무 큰 옥좌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피식 하고 웃겠지만, 상대는 마왕이다.

제1군단장의 눈에는 어린아이의 그릇에 담긴 거대한 기운이 보이고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다리가 후들거리는 그 모습에 그녀는 다시 침을 삼켰다.


"내가 직접 지휘할 것이다. 온 세상이 마왕 영지의 탈환을 알아챌 수 있도록. 그러니..."


다만 갑자기 그 기운이 사라졌다.

마왕이 다시 자신의 힘을 감춘 것이다. 다른 이들이 그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번엔 어린아이의 모습에 맞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랑 같이 놀러 갈 거지? '누나'?"


제1군단장은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고간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출정 준비를 하겠다 둘러대며 황급히 도망쳤다.

너무 무거워져 알아서 벗겨질 것만 같은 기저귀를 손으로 잡아 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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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제국은 마왕과의 정면대결 끝에 멸망한 구 제국을 계승하는 거대한 나라로, 새로 해방된 마왕 영지 중 과반을 갖고 있는 거대한 나라였다.

신 개척지의 끝자락에는 영토를 방위하는 요새들이 세워져있었다.

그 중 가장 위험한 격전지는 당연히 마왕성을 향해 정면으로 뻗어있는 회랑에 자리잡은 마이어 요새로, 다른 요새보다도 더 깊숙하게 마왕 영지 안으로 파고들어가있어 포위당하기도 쉽고 평상시 충돌도 잦았다.

당연히 이곳은 제국이 자랑하는 정예들만이 배치되지만 요새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한 인물에 대해선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를렌.

정통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마이어 요새의 최연소 사령관으로 배치되어 많은 기록을 쌓고 있는 인물로, 그 능력은 굉장하지만 매일 혹독한 환경에서 전투를 치르는 요새의 병사들은 아직도 그녀를 못미더워하고 있었다.

특히 요새의 방어를 위해 병사들에게 가혹한 복무를 강요하는 독단적인 모습은 많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후우."


그렇지만 오늘은 아를렌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여러 서류를 복잡하게 바라보던 그녀에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말하라."

"남쪽 13번대의 정찰 보고를 하러 왔습니다!"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가 제국식 경례를 하고 말한다.


"마왕군 병력은 남동쪽에 집결 후 서쪽으로 진군중! 병력 규모 약 2천!"

"산맥을 우회해올 지도 모르겠군. 초소에 경계명령을 전하라."

"예! 그리고 보고에 추가로 말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마왕군 병력에 못 보던 것들이 섞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뭐?"

"저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병사가 건네준 문서에는 마왕군 병력에게서 발견한 기이한 물체들에 대한 서술이 적혀있었다.


"쇳바퀴로 굴러가는 커다란 기계장치에, 불을 뿜는 말에....이게 다 무슨 소리야? 직접 건네받은 것이 확실한가?"
"예!"

"....알았다, 가도 좋다."


병사는 경례 후 방을 나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확실치 못하기는."


이마를 짓누르며 아를렌이 짜증을 느꼈다.

갑자기 주변 지역에서 마왕군 활동이 급격히 활발해졌고 그로인해 경계태세를 강화한 뒤 주변에 집결하는 마왕군 병력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있기를 벌써 2주일째.

2주일동안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왕군 병력은 그저 대군이 집결했다 어디론가 움직여 흩어지기를 반복했고 그러는 동안 마이어 요새의 병사들은 거듭되는 경계 활동으로 힘만 빼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령관을 욕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를렌 입장에서는 거대한 군세가 언제 요새를 공격해올지 모르기에 수상한 움직임을 예의주시할 뿐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마왕군은 지금까지 단순한 정면공격만 감행했다. 이런 짓은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 정말로 이상하단 생각이 안 드는 거냐!'


아를렌도 병사들에게 짜증을 냈다.

병사들의 멍청함에 짜증을 느낄수록 아를렌의 명령 강도는 더 강해졌고 병사들도 더 거칠게 내몰았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기에 아를렌 본인도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정말 별 일 없이 끝나면 괜히 병사들을 자신의 과민반응 탓에 거칠게 다뤘단 소리를 듣게 될 테고 그것은 자신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일이었다.

아니, 정확힌 아랫사람들이 자신을 욕하는 건 아무 신경도 안 쓰지만 마왕군에게 과민반응하며 놀아난다는 것이 가장 치욕이었다.

그렇기에 차라리 지금은 마왕군이 요새를 공격해주기를 더 바랄 지경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낫군."


중얼거리면서 아를렌이 병을 하나 열었다.

그녀의 무공을 치하하며 제국 측에서 보내준 선물은 제국의 특산품 열매를 졸여 우유에 섞어 먹는 제국 밀크티였다.

전 요새에 보급되어 오늘은 다같이 제국의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특유의 풍미로 두통을 가라앉히며 아를렌이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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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뒤로 짜증을 느낄 일은 갑자기 급증했다.


"보고드립니다! 전서구가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마왕군 대략 5백이 요새를 향해 접근중!"

"전령이 급히 보고해왔습니다! 북쪽에서 제국군 전서구로 위장한 마왕군의 흑마술을 관측!"


갑자기 이상한 보고들이 들어오고 그 속에서 마왕군의 술책에 대한 이야기까지 섞여 헛걸음과 헛보고가 반복되기 시작했다.

짜증을 참지 못한 아를렌은 소리쳤다.


"사소한 거 일일이 알리지 말고 먼저 산 위 초소에서 관측 확인 후 검증을 마친 뒤에 보고를 올려!"


이러면 작업이 번거로워지고 최종 전달도 늦어질 수밖에 없지만, 별다른 묘책이 없었다.

2주일동안 조용하던 마왕군이 아무 전조 없이 갑자기 요새를 공격해올 수도 없으니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기습공격이 온다고 해도 그 규모는 관측당할 수준을 넘지 못할 테니, 요새는 여유롭게 버텨낼 수 있었다.


"망할....이놈이고 저놈이고, 능력이 모자르군."


투덜거리며 아를렌이 몸을 일으켰다.

밀크티는 이미 한참 전에 바닥을 비운지 오래다.

그 뒤로 줄곧 앉아서 업무를 봤다.


"후우."


한숨을 쉬며 몸을 풀어준 아를렌은 잠시 휴식을 취하러 걸어갔다.

집무실을 나서면 복도 가까이에 화장실 있으니까.

제국의 기술력으로 만든 최신식 화장실이다. 마법은 타국에 비해 떨어지는 분야가 좀 있지만 연금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국이 만든 자랑스러운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여기 있는 화장실은 아를렌 전용으로, 요새가 오래된 탓에 집무실과 붙여 만들 순 없었지만 요새의 다른 화장실보다 더 깨끗하게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다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찬 공기가 다소 추울 뿐이었다.


"오늘은 조금 쌀쌀하군....어제만 해도 따뜻했는데."


차갑고 건조한 공기에 몸을 떨면 아까 마신 밀크티가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그리고 밀크티를 전부 마셔버린 탓인지 생리현상도 앞당겨지던 것이다.


'........음?'


그런데 문득 창 밖으로 병사들 일부가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급하게 누군가 뛰어왔다.


"아를렌 님!"


아를렌이 가장 총애하는 백기사 칼렌.

수많은 무공을 쌓아올려 고속진급을 반복해온 아름다운 여기사였다.


"무슨 일인가요 칼렌?"

"긴급 보고 드립니다, 아를렌 님."


자신보다 나이 어린 아를렌에게도 예우를 표하면서도,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다급함이 느껴지는 칼렌이 말했다.


"남동쪽을 감시하던 부대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병사 한 명이 말을 타고 다급히 와서 전했는데, 갑자기 이동하던 마왕군 뒤로 다른 병력이 나타나 공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더 있다는 관측은 없었는데...."

"혼자 겨우 빠져나와서 감시부대의 행방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가 소식을 전하러 오는 길에도 숲을 통과하는 다른 군세를 보았다고 했어요."

"사실입니까?"


제국군의 우수한 감시망 속에 갑자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병력이 곳곳으로 침투해오는 데 하나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제국의 수치였다.

그리고 이 경계 실패의 책임은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아를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공격받은 감시 병력의 병사들보다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콰앙!!!



하고, 느닷없이 폭발이 일어났다.

종소리가 다급하게 울리고 아를렌과 칼렌은 급히 바깥으로 나갔다.


뿌우우우우우우우!!


나팔 소리와 함께 산을 넘어 돌격해오는 수많은 마왕군 병력이 보였다.


"이게 대체....?"


마이어 요새는 혼자 덩그러니 놓인 건물이 아니다.

요새까지 가는 길목을 감시하는 초소들과 작은 군사거점들이 세 겹의 선을 만들어 요새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전조 없이, 아무 소식도 없이 마왕군의 대 병력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제야 아를렌은 산 너머로 얼핏 보이는 희미한 연기 기둥을 보았다.

찬 겨울 바람이 계속 불고 있다. 그래서 희미한 연기가 계속 퍼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저 방향의 거점들은 진즉에 함락됐을 테고, 무언가의 수책으로 불길을 억제하여 많은 연기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마이어 요새는 여태껏 알아채지 못했다.


콰앙!


연이은 폭발 소리.

요새의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은 마왕군의 모습이었다.


살가죽이 말라붙은 해골 병사부터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던 트롤까지, 다양한 흑마술 군대가 지금까지 수 없이도 돌격해왔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이번의 마왕군은 그 하나하나가 말끔하고 육중한 갑옷을 입은 채 질서정연하게 진군해오고 있었다.

특히 그 속에는 정체모를 힘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쇳덩이들이 있었다.

거대한 금속 상자는 철판을 둘러 화살을 튕겨대면서 우렁찬 굉음을 울리며 전진해왔고, 대포에서 불을 뿜자 성벽이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나타난 공성탑은 거대한 트롤들이 밀어준 덕에 빠르게 성벽에 도달했고 기괴하게 움직이는 기계가 해자 위로 다리를 놓았다.

순식간에 외성이 함락되었다.


"창고에 있는 화약통을 전부 끌어올려!"


분주히 움직이는 병사들에게 아를렌도 바쁘게 명령을 내렸다.

다만 아를렌의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고 아까부터 계속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아까 마신 밀크티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빠르게 부풀어오른 아랫배는 이미 팽팽해졌다.

병사들이 급박한 덕에 아직 식은땀을 흘리며 계속 발을 구르는 아를렌의 모습을 눈치채진 못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 계속 지휘하는 건 무리였다. 아니, 사실 진즉에 서둘러 일을 마치고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바쁜 순간에 화장실이나 가려고 자리를 비우는 건, 절대 안돼...!'


이게 이유였다.

자존심이 허락하질 못하는 것이다. 요새가 공격당하고 모두가 당황했을 때 지휘관은 아를렌 자신만은 가장 침착해야만 했다.

그래야 나중에 제국에 좋은 모범사례로 알려지게 될 테니까.


"성문의 봉쇄는 끝났나!"

"예!"

"그럼 뒤에 통나무만 대고 나머지는 성벽 위로 올라가서 지원하라고 전해!"


겨우 혼란을 수습하고 요새의 방비작업이 진행됐다.

적어도 당분간은 곧바로 내성을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틈에 서둘러서...!'


주변 눈치를 살피며 아무도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 틈을 타 아를렌이 급히 달려갔다.


'이상하다, 이 정도로 심할 리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심하게 차오르는 요의를 원망하며 아를렌이 달려갔다.

이제는 가만히 서서 태연한 척 하기도 힘들 것이다. 호흡은 거칠어졌고 무거워진 아랫배 속에서는 계속 출렁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너무 격하게 달릴 수도 없다. 너무 흔들면 터져버릴 것만 같기에.

진즉에 끝마쳐뒀다면 좋았겠지만 요새가 안정되기 전까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서둘러 마치고 나와서 바로 지휘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괜히 자존심 탓에 고민하던 사이 시기를 놓쳐버렸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지휘하던 장소에서 자신의 평소 집무실을 지나쳐, 거기서 더 안쪽으로 향해야만 겨우 도달할 수 있는 화장실.

오늘은 이 거리가 평소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다.


쿵!!


"으앗...!"


갑자기 굉음과 함께 요새가 흔들리자 발이 꼬였다.


"큭....!"


주저앉을 때의 충격으로 조금 새버렸는지도 모른다.

다급하게 앞을 손으로 꾸욱 누르면서 아를렌이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켰다.


'벽이 좀 뚫렸나...? 아직, 아직은.....버틸 수 있어....아직은 괜찮아....'


요새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속으로 읊으며 아를렌이 벽을 짚고 앞으로 걸어갔다.


'큭.....손을 뗄 수가 없어.....'


누군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지금 손을 뗐다간 바로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제발 아무도 오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빌면서 아를렌이 앞으로 거의 기어가다시피 나아갔다.


'조금만....앞으로 조금만 더....!'


"이봐, 저게 대체 뭐야! 저거 좀 봐!"


누군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에 놀란 아를렌이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다른쪽 복도에서 창문 너머로 들린 소리였다. 이쪽을 신경쓰는 건 아니다.

병사들은 대신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를렌이 슬쩍 내다보니....


'어.....?'


눈을 의심했다.


마왕군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끌고왔다.

아니, 한 무리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왕군의 위협을 받으며 족쇄를 차고 끌려왔다.

그들은 모두 마왕군의 동향을 감시하고 요새를 지키기 위해 바깥에 보내진 제국군이었다.

아를렌이 거칠게 내몰아 등떠밀어 보낸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만이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있다.


마왕군 영지를 침투하거나 공세를 방어하는 사람들이 이 요새에만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요새에 배치되어 마왕군 영지를 공격해 미리 마왕군 병력을 분쇄하고 돌아오는 원정대도 많다.

저기 잡혀있는 자들도 그런 부류다.


제국군의 자랑 중 하나인 푸른장미 기사단도 그렇다.

아름다운 여기사들은 특유의 푸른 장미로 만든 푸른 물감을 뺨에 발라 소속을 강조하곤 했다.

아를렌은 그녀들이 배치되어있을 요새가 함락됐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여기에 이만한 병력이 있으니,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다른 병력으로 다른 요새를 함락시키는게 그렇게 쉬울 리 없다.

그렇다면 푸른 장미 기사단은 분명 원정에 나섰다가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수많은 원정을 성공시키고 마왕군을 수없이 무찔러온 저 베테랑들이 저렇게 가볍게.


죽이는 것보다 사로잡는 것이 어렵다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 붙잡힌 포로의 수가 너무나 많다.

푸른장미 기사단도, 아를렌의 병사들도, 모두 몸이 온전하게 그저 족쇄만 차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아를렌의 병사들만 말끔했다.


'대체 뭐야....?'


현실 같지 않은 기괴함에 아를렌이 무심코 뒤로 주춤했다.


푸른 장미 기사단은 아름다운 유선형 갑옷을 빛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반신뿐.

3명씩 양손을 뒤로 하고 서로 등을 맞댄 채 묶여서 천천히 끌려오는 푸른 장미 기사단의 여기사들은, 모두 상체에만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래엔 누렇게 변색된 하얀 천을 두른 속옷뿐이고, 속에 받쳐입는 내의는 무릎까지 내려가있다.

내의도 속옷도 모두 흠뻑 젖어 색이 노랗게 물들어있었다.

그 꼴사나운 모습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다.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아마 흑마술로 만들어진 인형들일 것이다.

그 덩치로 가볍게 들어올린 가마는 칸막이 하나 없이 개방돼있으며, 그 위에 기사단장이 쪼그르고 앉아있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탓에 그녀가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새하얀 도자기통 위에 앉아, 온통 새빨개진 엉덩이를 뒤로 내보이고 있다.


통 안에서 무언가 출렁거리는게 보인다.

그리고 지금도 푸른 장미 기사단의 단장은 그 통으로 액체를 계속해서 흘리고 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아를렌은 제국의 위상과 빛을 믿는다.

마왕 따위에게 굴복하던 어두운 과거를 벗어던진 인간의 미래를 믿는다.

그렇기에 이런 마왕의 현혹을 부정하며 아를렌이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자신은, 적어도 자신만은 저런 모습이 되고싶지 않다고 무의식 중에 빌면서.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아를렌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내부를 확인하는 걸 먼저 했어야 했다.


"뭣?!"


그 속은 공허였다.

분명 전용 변기가 있어야 할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공간으로 몸을 날려버린 아를렌이 앞을 꾸욱 억누른 모습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무한히 떨어지는 아를렌이 공포로 인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보았던 풍경이 머릿속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강력한 제국군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한심하게 사로잡힌 모습을 보며 이길 수 없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그동안 아를렌이 거칠게 대했던 병사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패배의 책임을 자신에게 물을 것을 생각하자 아를렌은 다시 몸이 떨려왔다.


'나는......지금까지, 무엇과 싸워온 거지....?'


완전히 겁에 질린 아를렌이 터질것만 같은 몸속의 욕망에 처절하게 저항하면서, 서서히 마음이 꺾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감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제동으로 인해 몸속의 액체가 한쪽으로 쏠렸다. 아래를 향해.


"쿠, 오으...읏....?!"


이상한 감각에 아를렌이 다리를 모아 몸을 웅크린 채 필사적으로 그녀의 수문을 꽉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거대한 붉은 눈을.


'아.....아.....?'


예전에 누군가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마왕을 겁내거나 무서워하던 옛날 얘기는 다 애들 말 잘 듣게 하려고 과장한 거죠. 전 자랑스러운 제국을 믿기에 어려서부터 마왕따위 하나도 겁낸 적 없습니다. 만약 제가 어린 꼬마처럼 마왕군을 겁내거나 벌벌 떠는 일은, 세상이 두쪽나도 절대 없을 겁니다.]


그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아를렌의 의식에서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힘이 빠져 스스로 열어버린 자신의 수문이 기운차게 한계까지 모아뒀던 물을 방출하기 시작하자, 아를렌은 밀려오는 해방감과 따뜻함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귀족만이 입는 비싼 옷감의 속옷도, 멋드러진 제국 군인의 제복도, 모두 따뜻한 액체로 흠뻑 젖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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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말하길 아를렌은 화장실 변기 앞에서 바지에 실례를 해버린 채 다리를 벌리고 기절해있었다고 한다.

제국 밀크티를 너무 마셔버린 부작용일까, 오줌에 흠뻑 젖은 그녀의 옷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시큼한 냄새가 찌린내와 섞여 진동했다고 한다.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됐고 아를렌은 함락으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어났다.


그녀에겐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할까.

요새 함락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똑같이 바지에 실례를 해버린 요새의 모든 여성 군인과 기사들이 빨랫줄에 자신들의 하의와 속옷을 걸고 그 앞에 수갑을 찬 채 엉덩이를 내놓고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요새가 함락되던 순간 대체 그녀들이 무엇을 본 건지, 아를렌은 감히 물어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한편 그녀들을 놔두고 혼비백산하게 달아나거나, 필사적으로 저항하거나, 모든 걸 포기하고 투항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던 다른 병사들도 전부 크고작은 부상을 입은 채 사로잡혔다.

그들은 능력 뛰어난 제국의 여기사들이 힘없이 무너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들이 마신 제국 밀크티를 배송해주는 마차가 도착하기 20분 전 이미 정체불명의 습격을 받았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