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말해두는데, 별로 꼴리지는 않음.

약간 로멘틱한 망상을 하고 싶어서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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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시 야고코로 선생의 약을 구하기 위해 저잣거리에 토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필요한 것을 선점하기 위해 벼르는 중이었던 나는 새벽녘 샛별이 지는 하늘 아래 하염없이 서있었다.

당장 급했던 것은 당주님의 지병이 악화될 기미를 보였던 까닭이었다.



야고코로 선생은 마을에 모습을 비추는 일이 잘 없었다.
영원정 또한 미혹의 죽림에 감추어져 있어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으며

격주로 토끼를 내려보내 마을에 약을 팔았을 뿐이었는데, 
귀한 보약이나 특수하게 쓰이는 약들은 조금씩만 딸려보냈다.

수요가 있어 개수가 모자란 경우엔 영원정에 제약을 의뢰하는 절차가 있어야만 추가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선생에게 의뢰하는 것은 차후의 일이었고, 일단은 장에 내려오는 토끼를 붙들고 알맞은 약이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했다.









장터 근방의 구릉에 오르면 그곳으로 오는 
평지의 길이 한눈에 보인다.

나는 그곳에 서서 죽림에서 오는 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때는 초여름.

대나무숲에서 뻗어나오는 길은 푸른 잎사귀들이 양옆을 감싸고 있었으나
아직 씨를 뿌리기 전인 전답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며 푸른 빛은 점차 옅어지고 누런 토지의 색이 스미는 듯 했다.

그 길 옆으로 펼쳐진 논들을 차오르는 새벽노을이 조금씩 붉게 물들이는 것을 나는 한동안 지켜보아야 했다.


"너무 일찍 나온 모양이군."


하품을 한 번 하고 담뱃대를 꺼내 물었다.
담뱃잎의 향이 아침공기에 섞여들었다.


노곤함이 밀려왔다.
무언가 씹을 것을 가져오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시간은 아직 한참인 성싶었다.



하나 다행히도, 그 후로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토끼가 나타나는 것은 진시가 되어갈 때쯤이 보통이었는데,
그것은 개인차가 있어 조금 더 일찍 나오는 날도 있었다.

날이 조금 길어진 까닭이었는지 모르지만, 
당일이 그러한 날이었다.


산새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장이 모습을 갖출 채비를 하기 시작할 적에
길 저편에서 높이 솟아오른 보퉁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곧 달토끼 아가씨가 털레털레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오늘은 레이센인가......."


거리는 꽤 있었지만 적잖이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상당한 부피의 등짐을 진 상체와 그를 지탱하고 있는,
사이로 배경이 드러날 정도의 길고 날씬한 다리.

그리고 그 다리가 귀찮다는 듯이 건들건들 움직이고 있는 꼴은, 말하자면 무언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외경심을 일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연약해보이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힘...
그녀는 뭇 남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일색이었음에도 사내들이 함부로 집적거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레이센이 어디서 오는 지 확인하고 장터를 빠져나와 멀찍이 걸어오고 있는 그녀에게 달려나갔다.

기왕이면 사람이 없는 쪽으로 가는 것이 나았다.





~~~





달토끼는 청력과 시력이 상당히 좋다.

레이센은 키가 멀대같은 장정이 자신을 향해 질주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무심하게 양 다리를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낱 지상의 인간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아가씨이이~~약 파슈~~"

한 모퉁이 돌아 만날 거리에서 사내는 외쳤다.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걸음을 맞추기 전까지 레이센은 예의 허술한 고고함을 유지한 채 걷고만 있었다.

고개를 폭 숙이고 걷다가 사내가 자신을 부르자 놀랐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답하는 것이었다. 


"이크, ... 이분 오늘 어쩐 일이신지...."


목소리는 나른해, 약간 애교가 섞인 듯 하면서도 무심한 말투였다.
그녀는 시큰둥한 눈으로 땀에 적셔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히에다 가의 남자였다.


"약 파슈, 값은 더 쳐드릴 테니까 짐 좀 끌르고 나한테 먼저 파시요오~!"


사내는 미처 숨을 고르지 못한 상태인 듯 했다. 
재빨리 용건을 말하고 미처 다 쉬지 못한 숨을 몰아쉬는 것이다.


애당초 왜 이렇게 숨가쁘게 뛰어온 것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미모로 인한 알 수 없는 이끌림일까?


"흠...."



표를 내지 않았으나,
레이센은 사내의 말에 솔깃했다. 
정해진 값보다 더 많은 돈을 받게 된다면 용돈으로 삼아 가볍게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영원정의 일꾼들은 늘 돈에 쪼들렸다.

그들은 잡일을 하는 대가로 급여를 받지 않았다.
숙식을 제공받을 뿐이었다.

보름에 한 번, 소량의 용돈이 주어지기는 했으나 그들은 대개 하룻밤 기분을 내는 것으로 탕진해버렸던 것이다. 


언젠가 약값을 빼돌리는 토끼가 있었다.
나름 교묘하게 수를 쓴 모양이나
달의 두뇌는 깐깐했고, 결국 꼬리를 잡힌 그 다음부터는 
약이 사라진 만큼에 해당하는 돈을 받지 못하면 그것을 토끼들의 용돈에서 가감해 버린다는 지시가 내려졌다.

한몫의 돈을 원하는 토끼들은 저희들끼리 화투판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약값으로 받은 돈을 마을의 노름판에서 배로 불려 이윤을 챙기는 호방한 토끼도 있었나 보다.

하지만 레이센은 그런 모험을 할 정도의 담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글쎄, 얼마나 더 쳐줄 생각이신지...."


레이센은 최대한 귀찮은 척을 하며
눈을 반쯤 감은 채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그녀의 발놀림은 점점 곧아졌다.



"이 할 어떤가?"


사내가 제안했다.


"이 할?..."


레이센은 짐짓 못마땅한 투로 말했으나 기분 좋은 흥분감이 드러나는 것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이 남자가 평소에 사던 약 중에선 값비싼 보약도 많았기 때문에 이 할 정도면 상당한 이윤이 될 것이다.

수고비로 기껏해야 몇 푼 더 얹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씀씀이가 애 딸린 아낙의 가슴팍처럼 넉넉한 것이 역시 권세가의 식솔이다.




쫑긋하게 세워지는 토끼귀, 그러나 등짐에 가려 눈에 띄지는 않았다.


"왜 그런가? 내키지 않나?"


"아니아니! 팔아요 팔아,원하는 게 무엇인지요?"


나긋나긋하던 목소리는 살짝 날카롭게 깨어졌다.레이센은 조금 멋쩍었는지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그녀가 약간 더 튕겼더라도 값을 더 지불할 의항이 사내에게는 있었으나 
그녀는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이 왜 이렇게 비싸게 굴었나 싶은 후회가 밀려왔다.




"짐부터 풀고 보지, 내가 좀 거들어도 되겠나?
자네 눈 앞에서 슬쩍할 정도의 손재주가 내게는 없네"


"고맙지만 괜찮아요~"


"......"


확실히 도움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것 처럼 보였다.
레이센은 커다란 상자와 꾸러미가 지워진 지게를 가볍게 내려놓고 편편한 판자를 하나 놓더니, 그 위에 작은 통들이 든 꾸러미를 솜씨좋게 끌러 놓았다.


"자, 필요한게 뭔지 얘기해보세요."


사내는 병의 증상을 설명했다.
그리고 원하던 대로 알맞은 약을 받아냈다.


그 외에도 평소 사던 약들을 몇 개 요청했다.


남자가 약을 하나씩 고를 때마다 그 약의 효과와 복용법을 입에 달은 듯 설명하는 그녀.

수차례 들어 사내는 이미 알고 있지만 나쁠 건 없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종알종알 지껄이는 것이 썩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양측은 사내가 산 약들을 세어 보고 주판으로 셈을 해 보았다.

값은 맞아떨어졌다.


사내는 레이센에게 돈을 건네고 작별을 고하려던 차였다.
같은 방향으로 갔지만 그녀의 걸음이 더 빨랐기에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아 그리고 아저씨."


그녀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하다.


"신약이 나왔는데 한 번 구경해보지 않을래요?"


"미용으로 쓰이는 약인데 효과가 아주 좋아요.
혈색 개선, 체취 개선 그리고 일시적으로 눈망울이 또랑또랑하게 보이고 평소보다 요염하게 보이도록 하는 약이라나~"


"......"


사내는 잠시 레이센을 쏘아보았다.


"이봐, 자네 너무 약팔이짓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런게 있었으면 당장 내 마누라한테 먹였겠지~"



농담삼아 말했으나 야고코로 선생이 대단히 기이한 물건들을 감추고 있음은 많은 이들이 알았기에 믿지 못할 것만도 아니었다.
소문에 의하면, 불로불사의 능력을 얻게 해 준다는 봉래의 약,
그 전설 속의 것을 선생이 만들 수 있다는 괴담도 있었다.

다만, 지금 미모를 대폭 끌어올려준다는 의문의 약을 왜 이 토끼가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아녜요 아냐~ 약간 장난스레 얘기하긴 했지만 효과는 진짜라구요~"

"영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한번 먹어볼까요?
즉효성이 대단한 약이라 먹으면 십분도 안되어서  효과가 난다구요.

이건 사부님껜 비밀이에요."

그러고는 허리춤에 딸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환 세 알을 꺼내더니 공중에 던져 삼켜버렸다.





사내는 얼떨떨했다.

약의 효능이야 뭐 그렇다 쳐도 자기가 직접 시범을 보여 주겠다는 레이센의 말....


사실 더 예뻐질 구석이 있나 싶었다. 

앙증맞은 코와 입, 날씬한 몸매와
뽀얗고 연연한 피부까지....

특히 그 눈동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이 나오게 하는 그윽하고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사람을 홀리는 눈동자였다.

그녀를 보러 약을 사러 오는 것도 남자들 사이에선 하나의 낙이었다.
그 정도로, 레이센은 예뻤다.



"그래, 자네가 어떻게 되나 한 번 보자구"

사내는 대강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다소간은 궁금하기도 하였다.

"잘 보라구요 이런 건 처음일걸요."


레이센은 눈짓을 살짝 하고선
끌른 보따리들을 여미어 지게에 싣고 다시 길을 나섰다.

때는 묘시 6각,
장까지 2리 남짓한 거리를 사내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





레이센은 한껏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발랄한 걸음걸이와 목소리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길을 걸으며 더 이상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와 그녀는 다소 어색한 중에 나아갔다.


대략 1리 정도를 걸었을 때이다.

그녀는 머릿결을 만져 보고, 볼살을 더듬어보는 따위의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꼴을 보고 얘기했다.



"이보게, 슬슬 시간이 되어가지 않는가?
내가 보기엔 달라진 게 전혀 없어 보이는구만."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그나저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구요?"

"그래, 당초에 자네가 더 이뻐질 구석이 어딨겠나?"

"괜한 소리 하지 마세욧-!"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는 레이센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그녀가 너무 당황하는 것 같아 눈을 떼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수작질쯤 한두번 들어본 것이 아닐 텐데...


돌연 배가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네 배가 고픈가? 이 이른 시간에 벌써..."

뒤돌아보니 레이센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내 앞으로 기어와서 내 팔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저...저기...여기 짐 좀 맡아주실 수 있... 흐앗?!"


"뿌아아아앙!?"


그녀는 발발 떨면서 지게를 내 앞에 내려놓더니 놀랄만큼 빠르게 폴짝폴짝 뛰어가버렸다.


가는 도중 잠시 멈춰서 몸을 움추리는 모습이 보였다.

"삐이이잉~!" 

펄럭 들리는 치맛자락, 그리고 바르르 떨리는 골반이 살짝 비치었다.


그리고 몇 방을 더 내보냈다.


"뿌우우우우웅!!... 뿌욱! 뿍! 뽀오옹..."


그녀는 잠시 부동자세로 바들거리다가 이내 옷매무새를 황망히 다듬고선 일어나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아니, 종적을 감추었다기엔 그녀의 흔적이 너무나 진하게 남아있었다.
내가 멍하니 서있던 자리에서는 완전히 썩지 않아 설익은 퇴비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토끼라 그런가, 잎채소가 썩는 냄새 같기도 했다.



레이센이 뒤를 향해 질주하기 전,
그녀의 얼굴을 흘깃 볼 틈이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라 했지만, 사실 처음에는 당황했다기 보다는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흠칫 놀랐을 뿐, 당황할 시간도 없었던 표정에 가까웠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고 그녀의 얼굴은 점점 이지러졌던 것 같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띄워 보려던 안타까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왜 갑자기 변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

난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몇 분 전에 그녀가 삼킨 환이 원인이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아마 평소 레이센이 나에게 팔던 약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지상의 모든 더러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강력한 효능의 변비약.
효과가 너무 파격적이어서 복용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변의를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꼭 시간과 장소를 가려서 복용하라고 당부하던 약이었는데

그것을 대신 삼켜버린 것이다.

괜한 쇼맨십으로 약통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을 것이다.
통의 개수를 햇갈렸는지 약통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그녀답지 못한 실수였음에는 틀림없다.




공기 중에 잔향은 여태까지 떠돌고 있었다.
향기를 다시 한 번 느껴보니
레이센은 확실히 변비약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

난 그녀의 육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녹진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난 이상하게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 몸을 떨던 모습.

그 모습이, 나는 마치 수줍은 많은 새색시가 첫날 밤 이불 위에서 몸을 떠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특히 연신 방귀를 내뿜어대는 상스러운 뒷꽁무니가, 어째서 그렇게 야하게 보이던 것일까.




나는 시를 한 수 지었다.




"바람이 실어다주는 초목의 정기도

 요괴의 생명력에는 미치지 못하네.

 나의 마음을 달뜨게 하는 미물은

 저 산 중에 섞이어 있도다."




불어오는 바람은 잔잔하였다.

공간을 물들여버릴 것처럼,

강렬하던 향기도 점점 흐려졌다.






레이센은 돌아왔다.
어수선한 옷매무새를 하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가리려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돈 몇 전을 살그머니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이번 일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자존심은 제법 묵직했다.



"알겠네, 하지만 필요없네."

나는 돈을 돌려주었다.

반찬값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꺼낸 신약에 대한 얘기는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한동안 그녀를 다시 볼 일은 없었다.

뜨거운 여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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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써보고 싶었지만 단편이라도 제대로 써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 처음 완성해본다.

소설 쓰는 게 이렇게 진빠지게 어려운지는 몰랐음.

난 그저 레이센장이 방귀를 뀌는 망상을 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아무튼 허접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

소설 좀 많이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