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절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든 아니든, 초창기 감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건 지금의 변화는 장르의 한계상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건 대체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SCP 재단의 초창기는 괴담, 도시전설, 호러였다."


그런데 나는 이 의견에 딱히 동의하진 않고, 이건 내가 SCP 재단을 처음 접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물론 최초의 SCP라 할 수 있는 SCP-173의 경우에는 보고 있지 않을 경우 순식간에 다가와 사람을 죽이는 조각상이란 점에서 호러라 할 만 하고, 그 밖에도 SCP-096, SCP-106, SCP-701 등의 작품들도 호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SCP-038, SCP-458, SCP-999 같은 경우를 보자. 038이 으스스한가? 458이 오싹한가? 이러한 글들은 그 자체로는 호러나 으스스한 괴담으로 분류할만한 구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그냥 성경에 기반한 친절한 인간 남성인 073, 인간에게 폭력성을 띄긴 해도 주된 서사에선 사실상 영웅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주는 076 등 호러 장르에 기반하지 않은 작품들은 초창기에도 많았다.


이번에는 개별적인 작품에서 세계관 전반의 분위기로 시선을 돌려보자. 이렇게 보면 호러하고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데, O5 평의회는 틈만 나면 주석으로 등장해 딴지를 걸고, 클레프는 447 실험에서 잔소리하다가 연구원들한테 습격당해 447-1 욕조에 던져지질 않나, 비인륜적인 실험을 한 박사를 절차 없이 그냥 682 먹이로 던져버리고, 이야기 '사건 239-B'나 '새벽까지의 공작', 초창기 감성을 내포한 한위키 연작 'Odd in Almighty'를 보면 겉보기에는 거대 조직을 표방하지만 정작 작중에선 소수의 주연들이 몸소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연구소 느낌이란 점에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잡(은밀한 회사원)' 감성의 코미디물에 가까워 보인다.


결론적으로, 내가 보기엔 재단은 초창기부터 호러가 베이스라고 하기에는 호러가 아닌 작품들도 많았고, 세계관 전반의 분위기도 으스스한 괴담이나 도시전설의 분위기를 유지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세계관의 확장 내지는 창작 기조의 변화 같은 경우도, "호러가 한계가 명확하기에 다른 장르로 뻗어나갔다." 보다는 "신기한 도구나 괴물 백과만으로는 더 이상 재미를 추구하기가 힘들어서 서사를 입히기 시작했다"라고 보는게 더 정확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