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레 그렇듯, 제법 평온한 날이었다.


소년은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서 독서실로 향한다.


당연히 피곤하고 짜증났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요 며칠 하늘 색깔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도 소년에겐 알 바 아니었다. 아니, 알 수 없었다.


소년에게 하늘을 쳐다볼 여유따윈 없으니까.


다리가 빠지도록 걸어 도착한 독서실 문에는 달랑 종이쪼가리 하나만 붙어 있었다.


평소라면 공부하려고 온 수험생들로 꽉 차 있을 독서실이었는데도 말이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세계가 멸망했다."


소년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독서실도 문 닫았겠다, 집에서 좀 쉴 생각이었다.


거리에는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다. 


그러나 소년은 그런 것 따윈 눈치채치 못했다.


평소에도 그런 것 따위 살필 여유는 없었기에.


집에 도착하여 소년은 아까 못다 잔 잠을 마저 자려고 하였다.


잠깐이었을까. 눈을 떠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소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곤 독서실로 다시 향했다.


혹시 지금은 누구라도 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까의 종이쪼가리가 좀 더 너덜너덜하게 되서는 굴러다닐 뿐.


소년은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소년은 집에 도착해서는 가방을 벗어던지고는 TV를 켰다.


얼마만이더라, 마지막으로 TV를 본지 일주일은 넘었을 터이다.


그런데 TV가 좀 이상해졌다. 모든 채널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거기에 유일한 채널에서는 이상한 문구만 내보내고 있었다.


[세계멸망 D+3]

생존자는 @$%@(&로 모여 주십시오.


소년은 코웃음치곤 TV를 꺼 버리려다가 잠깐 멈추고 생각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거리에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었고, 요즈음 부모님도 집에 안 들어 오셨다.


아니, 그랬던가? 원래 말도 안하는 가족이니 있건 없건 구별이 가질 않았다.


소년은 안방에서 빼앗긴 휴대폰을 꺼내어 켜 보았다.


웬일인지, 평소라면 비어 있을 문자란이 999+가 되어 있었다.


한 번 확인해 보니 대부분이 안전재난문자였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7-16]

전 세계는 현재 멸망을 앞두고 있으며, 이는 불가피합니다.

멸망의 날은 한국 시간 기준 7월 19일, 현재 날짜 기준으로 3일 뒤에 도래합니다.

국민 여러분은 침착히 남은 기간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7-17]

전 세계는 현재 멸망을 앞두고 있으며, 이는 불가피합니다.

멸망의 날은 한국 시간 기준 7월 19일, 현재 날짜 기준으로 2일 뒤에 도래합니다.

국민 여러분은 침착히 남은 기간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7-18]

전 세계는 현재 멸망을 앞두고 있으며, 이는 불가피합니다.

멸망의 날은 한국 시간 기준 7월 19일, 현재 날짜 기준으로 1일 뒤에 도래합니다.

국민 여러분은 침착히 남은 기간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7-19]

전 세계는 현재 멸망이 진행 중이며, 이는 불가피합니다.

멸망의 날은 한국 시간 기준 7월 19일, 현재 날짜 기준으로 0일 뒤에 도래합니다.

국민 여러분은 침착히 남은 기간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7-20]

전 세계는 현재 멸망이 한 차례 지나갔으며, 이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멸망의 날은 한국 시간 기준 7월 19일, 현재 날짜 기준으로 이미 도래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침착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지정 대피소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7-21]

전 세계는 현재 멸망이 한 차례 지나갔으며, 이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멸망의 날은 한국 시간 기준 7월 19일, 현재 날짜 기준으로 이미 도래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침착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7-22]

전 세계는 현재 @@^@^이 한 차례 지나갔으며, 이는 @@^^&@!@한 일이었습니다.

멸망의 날은 &*%&*()( 기준 7월 19일, 현재 날짜 기준으로 이미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과 함께 #*(%^로 @($(주시기 바랍니다.


소년은 당황했다. 정말로 국가 발신 문자였던 것이다.


멸망이 이렇게 평온하게 찾아왔다고?


소년은 당혹감과 불안함, 그리고 묘한 쾌감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것은 소년이 평소에도 가끔 바랐던 일이었다.


거기에 운 좋게 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지 않았는가?


부모야 평소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지냈기에, 별다른 애정은 없다.


오히려 내가 아니라 성적표에만 관심을 주는 부모라면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


이는 나에게 찾아온 인생 최대의 행운이다. 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년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 누워 달콤한 휴식을 즐겼다.


으레 그렇듯, 제법 평온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