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녹화 사업 념글보고 생각나서 씀


한반도의 나무들과 녹화 사업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1932년 발표된 김동인의 유명한 소설, "붉은 산"의 말미에는 


애물딴지 건달이었던 삵이라는 인물이 조선인 동포들을 위해 중국인 지주에게 


항의하다 린치당해 죽어가며 주인공 앞에서 독백을 되뇌는 장면이 나온다


"보구 싶어요 붉은 산이 그리고 흰 옷이! 저기, 붉은 산이...그리고 흰 옷이.... 선생님 저게 뭐예요!"


만주의 천덕꾸러기 조선인 건달이 죽어가며 떠올린 고향의 모습은 붉은 산이었다.




도대체 왜 한반도의 산들은 붉은 산, 즉 민둥산이 되었을까?





우선 17세기부터 전세계를 덮친 이른바 "소빙하기" 라는 기후 변화가 그 근원이었다.


1600년대부터 급격하게 낮아진 기온으로 식물의 생장이 크게 영향을 받아 경신대기근 같은 대기근이 발생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날씨가 추워져서 산의 나무가 모두 고사했다 라는 뜻은 아니다.


나무는 당장 시베리아나 알레스카 같은 혹한 환경에서도 자라니까 




범인은 바로 온돌이었다.


우리는 온돌이 조상의 지혜라고 찬양하는 경향이 있다.


맞다. 분명 한반도의 냉혹한 겨울에서 살아남으려면 온돌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온돌은 대량의 에너지... 즉 엄청난 양의 뗄감을 필요로 한다.




영조는 즉위하고 3년 후 33세가 되던 해


"내 어릴 적에는 그래도 백악산이 참 푸르러서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벌거숭이 민둥산이다"


라고 탄식 했다. 


단 2~30년전만해도 푸르렀던 조선의 산이 민둥산이 된 것이다.




그랬다. 


그 전까지만해도 한반도 북부 평안도나 함경도 지방에서나 쓰던 온돌이 


소빙하기로 인한 급격한 기온 저하로 조선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온돌의 뗄감으로 쓰기 위해 전국적인 벌채가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이런 무분별한 벌채로 전국의 산림이 황폐화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온 토사가 한양의 하수 역할을 하던 


청계천을 틀어막아 한양의 위생을 극적으로 악화시켰다.




영조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천 준설 사업을 벌여 


청계천에 쌓인 토사를 걷어냈고 그 흙과 모래로 언덕을 쌓았는데


사람들은 이를 방산이라 불렀다.




오늘날 외국인들의 관광 명소로서 이름을 날리는 청계천 옆 방산 시장이


바로 이 언덕 위에 세워진 시장인 것이다.




영조 다음으로 즉위한 정조 또한 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뒤주에 갇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무덤


'현륭원' 주위에 나무 한 그루 없이 휑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식목 사업을 벌여 현륭원과 그 주위에 


무려 1200만 그루에 가까운 엄청난 양의 나무를 심었다.




????


그 많은 나무는 다 어디 갔는데?



현대의 조림 기술자들에 의하면 서울 정도 면적의 지역을 녹화하는데 필요한 


나무의 수는 약 90만 그루 정도라고 한다.


정조가 심은 나무의 수는 그에 10배를 훌쩍 뛰어 넘는 숫자인데


도대체 정조의 노력은 어디로 갔길래 일제 시대까지도 조선은 민둥산이었단말인가?




우선 조선엔 '조림'이란 기술이 없었다.


나무는 가져다 심는다고 장땡이 아니다.


나무를 심고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는데 이를 '착근률(着根率)'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재임기간 내내 심은 나무의 착근률은 15%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무식하게 나무를 가져다 심은 게 아닌 '박은' 것일 뿐이었다.




???


1200만 그루의 15%면 180만 그루인데 


아니 그래도 90만 그루의 2배 많이 심은 거 아님?



문제는 그것이 처음부터 조림을 위해 기른 나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재임 기간 내내 심은 대부분의 나무는 


씨앗부터 기른 나무가 아니라 각 고을로부터 어린 나무를 징발해 가져온 나무였다.


결국 저쪽에서 자라던 나무를 가져와 이쪽에다 심었을 뿐 새로운 나무를 심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왕릉 근처의 산은 나름 풍성해졌으나 그 외의 다른 지역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


이것이 근래 '식목왕 정조'라며 찬양되던 정조의 식목 정책의 실체였다.




조선 총독부가 만든 조선임야분포도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이런 식으로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 왕조의 산림 관리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아니 산림 관리 정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왕실은 "산림과 천택은 백성과 공유한다"라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왕실 소유의 산림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적 소유권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백성들은 추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주공산의 산림에 들어가 먼저 베는놈이 임자라는 식으로


마구잡이로 뗄감을 채취했고 그로 인해 한반도 산림 전체가 황폐화 되었다.


그렇다. 아주 교과서적인 공유지의 비극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같은 시련에 부딪혔으나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산림 자원을 지켜냈다.




영국 같은 경우 왕실에서 전국토에 걸친 전면적인 산림 벌채 금지령을 내린 뒤로는 


석탄을 통한 산업 혁명으로 뗄감의 필요성에서 벗어났고





일본은 1657년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로 대량의 목재가 필요해진 이후


각 지역 다이묘들을 통해 체계적으로 산림 자원을 채취하는 법령을 도입해


산림 자원을 관리했다.





참고로 그 군밤 새끼는 그나마 산림 자원이 남아있던 지역의 벌목권을 


일본과 러시아에 팔아먹기 급급했고 그나마 숲을 만들어야겠다는 


정조에 비하면 나무를 심는다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던 인간이었다.


한반도의 식목,조림을 위한 노력은 20세기가 되어서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종의 시대를 지나 조선 아니 대한제국의 명운이 거의 끝나가던 1909년, 


일본 도쿄대 임학과를 졸업한 사이토 오토사쿠(斉藤音作)라는 


일본인이 대한제국 농공상부 임정과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다음 해 1910년 5월 5일 풍년과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친경식'을 행할 때 제사와 더불어 식수식도 포함시키자고 통감부에 제안했다.


황제가 제국 신민들 앞에서 나무를 심으면 그 선전 효과가 좋을거 라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 해 8월 한일합병 이후, 총독부의 식산국 산림과장이 된 사이토는 


다시 한번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기념 식수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 인간은 정말로 식수식에 미쳐있는 인간이었다.




이에 데라우치는 이렇게 답했다.


"조선을 살찌우려면 나처럼 대머리인 곳에 조림해야지 대머리가 되는 것은 안좋은 일이지 암"


물론 그의 의도는 식민지 조선에서 뽑아먹으려면 어떻든 살을 찌워야 한다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1911년 4월 3일 제1회 기념 식수식이 거행됐다.


이 행사는 해방이 될 때까지 연례 행사가 되었고 바로 이 행사가 우리가 아는 식목일의 모태가 된다.




???


식목일은 4월 5일인데?



사이토 오토사쿠는 한일 합병을 기념할 목적으로 제안한 이 사업을


진무 덴노의 기일인 4월 3월로 정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들어선 미군정과 그를 이은 대한민국 정부는 


이 식목기념일을 계승해 4월 3일에서 4월 5일로 옮겼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아마 식수의 필요성은 절감했으나 합병 기념을 위한 날짜를 그대로 쓰기에는 영 껄쩍찌근했으리라



그래서 일제의 식수 사업은 성공적이었나?


그러면 박통 시대의 식수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도 않았겠지


물론 일제의 식수 사업은 어느 정도의 진전은 있어 한반도의 녹화를 진행시키긴 했다.





공식 통계가 도입된 1927년부터 조선의 산림률은 꾸준히 늘어나는 걸 볼 수 있다.


27년부터 총독부가 심은 나무의 산림 면적은 대략 195만 헥타르에 가깝고


나무 수는 82억 그루에 달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은 일제가 벌인 식수 사업을 무위로 돌렸다.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으로 전시 체제로 들어간 뒤 일본 본토와 한반도 전역에 걸친 


강제 공출 명령이 떨어졌고 한반도에선 총독부가 심은 나무 이상의 벌목이 행해졌다.


일본 본토의 산림 자원도 전쟁 자원 확보를 위한 벌채와 폭격으로 인해 크게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 6.25에 의해 일본보다 더 직접적으로 전쟁의 화마에 휘말린 한반도의 산림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결국 한반도의 산림이 복구된 건 원문의 내용대로


전쟁과 제국의 시대로부터 한참을 지난 1980년대에 와서야 


군사 정부의 대대적인 녹화 사업의 결과로서 복원될 수 있었다.



다만 그 글에 약간의 오류가 있어 정정하자면


산림 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 한국이라는 제목은 오류이다.


전후 산림 복구에 성공한 나라로는 독일과 뉴질랜드 그리고 한국 세 나라이다.


정확히는 개발도상국 중에서 산림 복구에 성공한 나라는 아직까지 한국이 유일하다.


그러니 제목을 개도국 중 유일하게 산림 복구에 성공한 나라 라고하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기초를 갖고 있던 두 선진국들보다 폐허에서 시작해 성공한 대한민국의 케이스가 훨씬 대단하다 할 수 있을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강물이 맑을 수 없다 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 살아가는 한 환경은 결코 경제 성장 없이는 개선될 수 없다.


매연을 내뿜는 공장은 일견 환경을 오염시키는 주범 같아 보이지만


화학 비료와 전기의 생산은 벌목의 필요성을 극적으로 경감시킨다.



또한 정조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 조림을 위해선 기술이 뒷받침 되어야하고


두 차례의 전쟁이 말해주 듯 정책을 안정적으로 실행할 정세 또한 중요하다.


한반도...정확히는 남한의 산들이 녹화된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런 일련의 과정을 모두 스킵하고 당장 환경을 개선하고 싶다면




 

이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휴먼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