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시대 지도.

그런데 가야가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라 한다.

왜 가야가 존재하던 시절에도 여전히 삼국시대란 말이 쓰이던 걸까?


그걸 알기 위해선 그 시절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에서의 왕의 의미의 차이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넷 다 왕이 있었는데 그럼 다 똑같이 왕국 아님?"이라 할 수도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의 왕의 위치와 가야에서의 왕의 위치는 완전히 달랐다. 가야는 멸망 직전까지 연맹왕국의 형태였는데 이러한 연맹왕국에서의 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 권력을 가진 존재라기보단 각 부족들의 족장들 중에서 1명을 대표로 정한 것에 더 가깝다. 당연히 이런 상태에서 왕은 그저 부족 회의 의장의 역할 그 이상의 존재도 아니었고 그 자리를 자신의 자식이나 형제 친척 등에게 물려주기도 힘들었다.


반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지속적인 정복 전쟁을 통해서 주변 소국들을 자신의 휘하에 완전히 넣고 그렇게 해서 군주에게 집중된 권력을 군주 자신의 적장자(없다면 측실의 장자나 조카 형제 등)에게 지속적으로 세습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진정한 왕국으로 불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야도 정복전쟁을 해서 중앙집권화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점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 역시 의미가 없는 것이 고구려는 태조왕 때부터 백제는 고이왕 때부터 신라는 내물왕(아직 이 때까진 내물 마립간이라 불렸지만) 귀족 회의에 있었던 권력을 왕권으로 편입하고 이렇게 얻은 권력을 통해 제식화된 군대를 양성하여 그런 군대로 정복 전쟁을 벌임으로써 착실히 중앙집권화의 발판을 쌓아올린 반면 가야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금관가야가 가야 연맹의 맹주로서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부족 연합의 맹주였을 뿐 권력이 금관가야에 완전히 집중된 게 아니었다. 따라서 아무리 금관가야에서 "○○국을 정복하자!"라고 해도 주변 부족들이 "굳이?" "정복전쟁 알빠노?" "관심없음"이라 하는 등 각기 다른 의견을 냈기 때문에 이러한 정복 전쟁을 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금관가야가 고구려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은 뒤 대가야가 권력을 얻고 중앙집권화를 시도하고자 했지만... 하필 그 때 가야는 이미 백제와 신라의 세력권 다툼의 장으로 변한 지 오래였고 결국 가야는 중앙집권은 꿈으로만 남게 되면서 끝내는 신라에 통합되고 말았다. 그래서 가야는 멸망 전까지 제대로 된 국가로 남지 못했고 그로 인해 삼국시대로 쭉 불리게 된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옥저 동예 등 한반도 내의 여러 국가들도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역사에서 제대로 된 중앙집권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요약: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가야는 시대적 체계적 한계 등으로 인해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삼국시대가 사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로 불리게 됐으며, 한반도 내에 있던 여러 나라들도 비슷한 이유로 제대로 된 국가로 칭해지지 않은 것이다.